Social Innovation/Co-operatives

[협동조합⑤] 로버트 오웬과 윌리엄 킹

열린 공동체 사회 2013. 12. 18. 21:44

로버트 오웬(1771-1858)과 윌리엄 킹(1786-1865)은


비슷한 시대에 비슷한 가치관을 추구했지만,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해나갔습니다.


무엇보다 이 두 사람의 가장 큰 공통점은

로치데일 공정선구자조합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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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오웬은 협동조합운동분야에서는

뭐~~ 거의 절대적인 선구자로 통하는 사람입니다.


로버트 오웬이 유명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비록 그의 실험이 실패하기는 했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제대로 한 번 판을 벌려 본 실천가이기 때문입니다.


오웬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매우 다양한데,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를 Utopian Socialist라고 보았고,

협동조합운동가들은 '시대를 거스른 위대한 자본가'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로버트 오웬의 삶은

실패한 것이라고도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어찌보면 나름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부와 명성도 얻어봤고~ 나름 하고 싶은 것은 다 시도해봤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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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일즈의 가난한 마구 제작 장인의 7번째 아들로 태어난 오웬은

7살 때 다른 집에 심부름꾼으로 보내져서 남의 집에서 일하면서 크게 됩니다.


하지만, 자수성가한 오웬은

27살의 나이에 500명의 직공을 둔 면직물 제조 공장의 경영자가 됩니다.


그의 경영 수완은 굉장히 놀라웠는데,

이는 철저히 사람중심의 사고에서 출발한 것이였습니다.


당시 다른 공장들에서는 중고 방적기를 헐값에 구입해서

저임금의 아동 노동력을 동원해서 저품질 제품을 싼값에 공급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웬은 이러한 관행에서 벗어나

비싼 값을 주고 새로운 기계를 도입해서 적은 노동력을 투입하면서도

고품질의 제품을 생산해냄으로써, 노동쟁이도 없이 생산성을 높일 수 있었고,

고품질의 제품을 비싼 값에 판매함으로써 수익률도 높게 가져갈 수 있었다.


스코클랜드의 대자본가이면서 장로교 백작가문의 딸과 결혼하였고,

맨체스터 지식인 사회에서 제레미 밴덤과 같은 공리주의자와 교류를 나누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잘나가는 자본가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오웬은 이를 기반으로 사업을 더 키울 수도 있었고,

정계에 진출하여 정치가로써 새로운 삶을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노동자들의 문제에 주목했고 이를 사회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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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웬은 자신의 성공을 기반으로 뉴라나크라는 공장을 건립하고,

협동조합공동체(cooperative Community)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뉴라나크는 획기적인 성공을 이루게 된다.



아동노동 금지, 10시간 45분 노동, 고임금, 

유치원&학교 운영, 주택 보급, 직원들에 대한 교육 실시 등


개선된 노동자의 복지는

고품질의 높은 생산성을 유지하게 만들었고,


수익성과 사회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으며,

그의 명성은 점차 퍼져 나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게 된다.


하지만, 그에 대한 비난도 만만치 않았으니,

이는 영세한 중소 자본가들의 공격이였다.


대규모 자본을 바탕으로 밀어붙이니 가능한 성공이였고,

영세한 중소 자본가들은 싼 기계에 악순환이 계속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였다.


암튼, 오웬은 25년간 멋지게 공동체를 이끌었으며,

2500명의 노동자의 삶은 다른 여타 공장의 노동자와는 너무나 달랐다.


그리고, 1819년에는 5년간의 끈질긴 노력 끝에

공장에서 여성과 아동의 노동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킨다.


그의 명성은 전 유럽에 퍼졌고,

그는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위대한 자본가의 표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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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웬은 새로운 인생에 도전하게 된다.


2500명의 노동자가 만들어낸 엄청난 부가

결국은 자본을 투자한 공장의 소유주들에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때부터 오웬은 박애주의자가 아닌

사회주의자로써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1823년부터 시작한 사회주의운동은 이후 30년간 계속된다.


하지만, 위대한 자본가에서

사회주의자로 돌아서자 사람들의 태도는 180도 돌변한다.


그는 경계의 대상이 되었고,

다양한 실험이 연이어 실패하자,

사람들은 오웬을 그냥 이상주의자로 보게 된다.


오웬의 실패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있다.


오웬 개인의 성격이 너무 참을성이 없었고,

욕심이 과해 너무 무리한 투자와 너무 무리한 실천이 반복되었다고 한다.

(사업에 크게 성공한 경험이 오히려 독이 된 듯하다.)


내부 운영에서 주도권 다툼이 많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후계자를 키워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리더십에 대한 지적이 있다.


물론 이러한 견해 역시 실패했기 때문에,

결과론적으로 나온 접근일 수도 있기에 모두 믿을 수는 없다.

(더군다나 사회주의자 오웬은 모든 자본가들에게 경계의 대상이였다.)


윌리암 킹이 정반대로 접근한 것을 보면,

오웬이 다소 무리해서 사업을 벌인 것은 맞는 듯하다.


하지만, 오웬주의자들이 노동자 교육을 위해

노동자활동가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전통은

로치데일 공정선구자 협동조합 운동의 기반을 조성하는 역할을 했다.


<1840년대 운영된 로치데일 사회연구소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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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암 킹은 매우 현실적으로 협동조합운동에 접근했다.


소비조합매장(union shop)으로 시작해서

점차적으로 제조업으로 진출하자고 주장했고,


현금 거래의 원칙을 고수해서

안정적인 자금 운영과 부기를 강조했다.


잉여를 공동자본으로 적립하고,

비분할자본으로 평가하도록 유도했다.


전임자(agent)를 두고, 

수탁(trustee)가 이를 감독하도록 조직을 구성했다.


로버트 오웬이 거대한 비전을 제시했다면,

윌리엄 킹은 실질적인 운영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거대 자본을 가지고 있던 오웬은 이런 고민이 필요없었지만,


밑에서부터 자발적인 운동을 추구한 윌리암 킹은

실질적으로 노동자들이 발벗고 나설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 것이다.


또한, 윌리엄 킹은 자발적인 운동을 추구했기 때문에,

대중적인 노동자들의 교육에 신경을 많이 쓸수 밖에 없었다.


물론, 오웬이 교육에 신경을 안썼다는 것은 아니다.

오웬은 교육학자로써 명성을 남길정도로 교육분야에도 탁월했다.


윌리엄 킹이 로버트 오웬과 다른 점은

월간지 <협동조합인>을 통해 사상을 대중들에게 전파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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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킹의 이러한 세부적인 원칙들은

로치데일 공정선구자조합에서 그대로 반영되어 빛을 보게 된다.


로버트 오웬이 거대한 실천적 도전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본적인 뿌리를 제공했다고 한다면,


윌리엄 킹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고민들을 통해서

자생력을 갖춘 조직을 만들기 위한 세부적인 원칙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 두 사람의 고민들은

로치데일이라는 협동조합 역사상 최고의 업적을 위한 토양이 된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