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다상담 11 - '종교와 죽음' 편

2014.09.26 22:43


사랑하면 무조건 아프다. 


부재의 고통이 없으면 사랑이 사라진 것이다.
아프다는 것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다. 

고통을 받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먼저 떠나는 건 죄악이다. 
고통으로 느껴지지않는 죽음은 아무런 의미없는 것이다. 

종교는 미래의 공포를 먹고 산다

여하한 자유라도 사랑이 있다면 방종일 수 없다 - 김수영 


+


개인적으로 다상담이 끝나서 다행이다...

계속 더 했으면 그냥 안 들었을 것 같다...


점점 지루해지고 패턴이 반복되면서...

좀 더 자극적인 사연을 기대하게 되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름답게 마무리해서 다행이다.


열린 공동체 사회 Pot cast/[Bunker1] 강신주 강신주, 다상담, 종교와 죽음

강신주의 다상담 10 - '꿈' 편

2014.09.26 22:24


꿈을 가지면 안된다.


우리는 꿈없이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꿈은 현재를 살지 못하고 미래를 살게 만든다.


꿈을 생각할수록 현재를 살기 어려워진다.

내일을 생각하면, 우리는 즐겁게 놀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하러 산에 가고 여행가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으려고 산을 가는게 좋은 것이다.

여행은 그냥 가는 것이다...
항상 가는 여행지는 확인 하러가는 것이다.

소유한다는 것은
목적없이 돌아다니고~ 그냥 편히 있는 것을 이야기한다.

인생을 여행이라 하는 것은 
목적지를 정하고 틀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목적을 정한 순간 과정은 무시될 수도 있다.
삶은 과정이지만, 결과만 생각하게 만들어버린다.

꿈은 2종류로 나뉜다. 

1) 현실을 못보게 만드는 꿈
- 개꿈, 그저 바라는 허상, 꿈에서 허덕이며 불행하게 만듬
- 현실을 은폐하는 꿈

2) 현실을 보여주는 꿈
- 꿈을 알고 현실을 바꾸려고 노력하게 만듬
- 건강하지만, 현실은 아직 불행한 상황


꿈 자체가 없는 사람이 있다.
대부분은 꿈을 포기해버린다.

풍경과 현실은 다르다
산을 구경하는 사람과 올라가는 사람의 감정은 다르다.

꿈이 강할수록 현실은 더 고통스러워진다.

민주주의에 대한 꿈이 강하면... 
삶은 고난의 연속일 수 밖에 없다.

일제시대 독립이 불가능하다고 여긴 사람들이 있다.
1940년대 독립에 대한 꿈을 접은 사람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서정주이다.

우리 시대의 꿈과 당나라 시대의 꿈은 다르다.
우리 시대의 꿈은 사회에 의해서 만들어진 꿈일 확률이 높다. 

막상 해보지 않으면 내것인지 아닌지 잘 알지 못한다. 
해보고 신나면 내것이고, 했는데 욕이 나오면 내 꿈이 아니다. 

내 꿈인지 남의 꿈인지 알려면 이루어봐야 알 수 있다. 
꿈의 수준에서는 무엇인지 알수가 없다.

여행갈 때 땅끝마을에서 달마산은 가봐야한다.
산에 올라가봐야지, 산을 갈지 말지 버릴 수 있다. 

꿈을 얻는 순간, 앞이 보인다. 

죽을 때 우는 건 현재가 좋은거다
천국간다고 생각하면 죽는 것은 기쁜거다

연애를 하면 좋은것이 현재가 즐거워진다.
예술도 좋은것은 현재를 즐겁게 해준다.

여행이 매력적인 것은 매너리즘을 벗어나게 해준다.


열린 공동체 사회 Pot cast/[Bunker1] 강신주 강신주, , 다상담, 벙커1

돈의 인문학 - 김찬호 (2011)

2014.07.23 14:20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자본주의와 금융 시스템에 대해서 다룬 책이 많이 나왔는데,

'돈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파고들었던 책은 그리 많지 않다.


강신주 박사가 <다상담-소비편>에서 

자본주의와 소비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는 하지만,

아주 깊이 들어갔다고 이야기하기에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 있다.


그 와중에, 성공회대 김찬호 교수가 쓴 이 책은

돈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굉장히 다양한 측면에서 접근하여 아주 재미있게 읽어 볼 수 있었다.

(세바시에도 몇 차례 출연하셨고, '모멸감'이라는 책으로 더 유명하신 분이다)


돈의 인문학
국내도서
저자 : 김찬호
출판 : 문학과지성사 2011.01.31
상세보기


수 많은 통찰과 인용들은 돈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고,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우리가 무엇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지 이야기해주지만,


아쉽게도 결론 부분으로 갈수록 메세지의 힘빨이 다소 딸리는 느낌이 든다.

역시 무엇이든 대안을 제시한다는 부분이 가장 어려운 문제인 듯하다.


+


'돈은 물질이 아니다'


굉장히 단순한 명제이지만, 아주 명확한 메세지이다.

특히 지폐의 경우에는 금화나 은화와는 다르게 교환하지 않으면 휴지조각이나 다름없다.


돈은 삶 속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이지만,

돈에 대해서 자꾸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속물취급을 한다.


그러면서도 아무리 진수성찬이여도 배부르면 안땡기기 마련이지만,

돈에 대해서는 아무리 많이 가져도 계속해서 욕망하게 되는 굉장히 요물같은 존재이다.


인간이 처음 존재할 때만 해도 돈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서로 부족한 것이 있으면 물물교환을 통해서 나눠서 사용했고 교환의 범위가 커지고 넓어지면서 돈이라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조개껍질을 돈으로 쓰기고 하였지만,

소금이나, 비단, 쌀 등의 실물들이 주로 교환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조개껍질같은 것은 자체로는 활용가치가 없기에 아무래도 당장 쓸 수 있는 것을 더 좋아했던 것 같다)


금이나 은같은 귀금속이 화폐라는 형태로 등장하게 되었고,

교환 단위가 점차 통일되고 규칙이 마련되기 시작하면서 휴대성이 편한 지폐까지 등장하게 된다.


최초의 지폐는 약속 어음의 형태로 도장이 찍혀있었고, 

이게 점점 보편화되고 규격화되고 통제 가능해지면서 오늘날의 지폐처럼 유통될 수 있었다.


이렇게 화폐의 발전 역사만 봐도 돈의 근본적인 기능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돈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못하며, 교환이 이루어질 때 비로써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지갑 속에 두고 썩고 있는 상태에서 지폐는 사실상 아무런 가치가 없는 휴지 조각이다)


종이 쪼가리가 힘을 밝휘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종이 쪼가리에는 교환 가치에 대한 사람들 간의 약속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근데, 최근에는 이 종이 쪼가리도 잘 돌아다니지 않는다.

카드라는 형태로 들고 다니고, 계좌이체라는 방법으로 숫자만 오고갈 뿐이다.

(직장인의 월급 통장에는 사이버 머니가 월급날에만 스쳐지나간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이 것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

숫자만 돌아다니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규칙과 약속이 깨지지 않고 지켜지기 때문이다.


돈이 물질의 영역을 넘어서서 숫자로만 존재하더라도,

돈이 가지는 교환가치와 그 숫자에 대한 사람들의 약속과 신뢰가 존재하는 한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이다.


+


김찬호 교수의 책에서

가장 인사이트가 있다고 느낀 부분은

현대사회에 특히 대한민국의 사람들이 왜 돈이라는 것에 매달리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돈은 단순한 물건이나 수단이 아니라 고도의 의미가 농축된 상징이다" (토인비)

"돈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환상적 불멸을 제공한다" (프로이트)

"돈에 대한 욕망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두 가지 축이다" (케인즈)


돈에 대한 인간의 집착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은 두려움과 불안에 대한 안정감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현대사회를

변화가 심한 '액체 근대'라고 설명한 지그문트 바우만의 발상은

왜 현대사회에서 더욱더 돈에 대한 집착이 강해졌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불안정성이 커지고, 사회가 급격히 변화하면서

사람들의 불안감과 공포는 더욱더 커지게 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해진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로 인해 공동체는 파괴되어가고,

사회적 신뢰는 점차적으로 무너져가기 시작하면서 주변에 믿을 놈이 없으니

당연히 내가 가지고 있는 돈에 집착하게 되고 모든 가치를 표현해주는 대상으로 인식하게 된다.


정치도 법도 언론도 심지어는 가족들도 못믿게 되면서

당장 숫자로라도 명확하게 보여주는 돈말고 정직한 것이 무엇이 있으랴...


돈은 노력한 만큼 정직하게 보상해주는 것같고,

운이 좋으면 일확천금도 노릴 수 있고, 어디에 가나 통하는 것같다.

심지어 최근에 들어서는 돈이 돈을 벌게 만드는 자기증식까지 가능하다.


돈은 어느새 기쁨의 원천이자 고통의 뿌리가 되었고,

인간사의 희로애락을 모두 담아내고 빚어내는 블랙박스가 된 것이다.


이러니 사람들이 돈돈돈 하는 것이 당연하며,

교환가치만 가지고 있던 돈이 어느새 삶의 중심이 되어버린 것이다.


+


저자는 돈이 가지는 근본 가치인 신뢰에 주목해야한다고 이야기한다.


사람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서 

물질에 대한 신뢰가 돈에 대한 신뢰로 나타나고 있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사람 사이의 신뢰가 바탕이 된다면,

여러 관계나 공동체 안에서 다양한 형태의 돈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돈이라는 것이 정확하고 정직하는 환상에 빠져있지만,

사실 돈이라는 것도 매우 주관적으로 책정되는 것이며 액면가 이외에 언제나 숨겨진 비용이 존재한다.


언제나 합리적인 소비와 효율적인 자금 운영을 하려고 하지만,

어느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충동적 구매를 하고 있고 투기자본에 휘둘려서 홀딱 날려먹기 십상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는

이러한 숫자에 대한 약속과 신뢰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준 거대한 사건이였다.


전쟁이나 재해 상황에 닥치게 되면 사실 숫자는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

통장에 아무리 돈이 많아도 당장 먹을 것을 구할 수 없고, 오늘 밤에 잘 곳이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은 인플레이션 현상으로 지폐가 휴지조각이 되어버렸고,

빵 한조각을 사기 위해서 수레로 지폐를 나르는 현상이 발생했는데 웃기는 것은 돈보다 수레가 더 비싸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 금융 전산 시스템이 오류가 생기거나 전쟁으로 날라가버린다면 어쩔 것인가?

저축 은행 사태 때 평생 모은 돈이 순십간에 날아가버리는 경험을 한 사람들은 이제 은행도 못 믿게 되었다.


평생 직장도 날라가고, 마을 공동체도 파괴되어서 믿는 것은 돈 밖에 없었는데,

부동산 불패 신화도 이제는 옛날 이야기이고, 인플레이션을 고려하면 현금을 가지고 있으면 손해보기 마련이다.

금융 상품(주식, 펀드)도 날려먹을 수 있어서, 그냥 은행에 넣어두면 안전할 줄 알았는데 거기도 마냥 안전하지는 않다.


+


결국은 다시 돌고 돌아서 믿을 것은 다시 사람이다.


내가 위기에 닥쳤을 때, 나를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숫자가 아니였다.

숫자와 상관없이 움직여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돈에 대한 직찹을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사회적 관계 위에서 만들어진 경제 활동들은

지속적인 만남 속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인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믿을 수 있다.


바로 이러한 관계가 단골이며,

단지 돈을 버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간의 거래 관계였다.

(조금 더 가격이 비싸더라도 동네에 있는 구멍가게와 슈퍼가 생존해야하는 이유인 것이다)


사회적 기반이 깨져나가면서 장삿속만 챙기는 것이 가능해졌기에

뜨내기들이 많아지고 눈앞에 사리사욕만 채우는 상행위가 만연할 수 있다.


오히려, 사회적 신뢰가 무너지면 이러한 부분들을 감시 감독해야만 하고,

막대한 공공 재정을 투입해서 문제를 해결하다보면 사회적 비용은 오히려 더 들어가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신뢰, 감정, 의미 등의 사회 문화적 바탕이 기본이 되야만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더 효율적이고 안정적으로 원활하게 운영될 수 있는 것이다.


+


이러한 이야기 외에도 대안 경제의 영역으로 부각되는

마이크로크레딧, 지역화폐, 얼굴이 있는 금융 등의 이야기도 언급하는데...


지역 화폐에 대한 이야기말고는 논의의 수준이 다소 아쉬움이 많아 보인다.

저자가 아무래도 인문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좀 더 깊이 있는 접근이 필요해보인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강조하는 이야기는 돈의 주인이 되는 방법이다.


자녀 교육의 문제와 남녀간의 문제 등 실질적인 부분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이에 대한 극복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현상 분석에 비해서 대안 제시는 많이 약하다...


결국은 "사랑은 가질 수 없는 것을 주는 것" 이라는 자크 라캉의 이야기나

"스스로 품위를 갖추고 안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위세는 돈으로 부리는 허세와는 다르다" 같은

조금은 원론적인 이야기로 마무리할 수 밖에 없었다.


"경제의 본질은 돈이 아니라 가치이며, 부의 원천은 자연과 사람이다."

"화폐는 나의 필요와 타인의 능력을 이어주는 가교가 되어야 한다."


결국 저자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이것이다.


돈이 아니라 가치를 중요시 여겨야 하며, 가치의 근원인 사람을 소중히 여기자.

돈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미디어이며, 개인과 세계를 묶어주는 사회 시스템이다.


맹신하던 시스템을 의심하고 불신하던 사람을 신뢰하기 시작할 때, 

돈으로 매개되지 않고도 이어지는 관계가 열리게 된다.


참 뻔한 결론이다.


하지만, 이렇게 돌고돌아서 고민의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너무나 상식적인 내용이라는 것이 한 편으로는 너무나 반가운 것도 사실이다.


내가 본질을 놓치고 있지는 않았구나...

나의 고민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였고 이미 정답은 내 마음 속에 있었구나...


공부하면 할수록 더 많이 느끼는 것 중에 하나는

우리가 답을 몰라서 계속해서 고민하고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언제나 진리는 뻔한 것이고 가까운데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을 맹신하지 않고 끝없이 고민하고 노력해야만,

그것이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계속해서 믿고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기는 듯하다.


실질적인 현황과 정보 전달 위주의 책만 읽다가,

가끔씩 읽는 이런 책들은 한 여름에 소나기를 만난 듯 신선한 자극을 줘서 너무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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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다상담 08 - '소비' 편

2014.02.02 22:17


내가 강신주의 강의를 좋아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공감하기보다는 그는 나와 다른 관점에서 사물을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슷한 맥락으로 흘러가면서

강신주의 다상담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쯤...

'소비'편에서는 다소 색다르게 자본주의를 이야기했다


이번 강의에서는 초반부터 남달랐다.


진짜 돈을 불로 태우는 퍼포먼스를 통해서

강신주는 돈이 가지고 있는 허상에 대해서 인식의 전환을 시도한다.


예상치 못한 강펀치를 맞은 느낌이라고 할까?

강의 스킬이 늘은 것인가? 아니면 특별한 임펙트가 필요했나?


어쩌면, 그만큼 자본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깨는 것이 어렵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


이 번 강의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 성격을 명확하게 지적한 부분이다.


사람들은 종이 뭉치에 불과한 돈에

단순히 종이가 아니라 그 이상의 가치를 부여한다. (벤야민, 짐멜)


종교에서는 흔히 천국이라는 백지수표를 약속하면서

현세에서 착하고 성실하게 살 것을 요구하지만,


자본주의에서는 돈만 있으면 현세에서 바로 천국을 경험하게 해준다.


이 점이 바로 자본주의가

그 어떤 종교보다 강력하게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원동력인 것이다.


자본주의에서의 소비는 메트릭스의 메카니즘을 가지고 있다.


돈을 계속해서 벌어서 쓰지 않으면 돈이 순환되지 않아서,

시스템 자체가 무너져버리기 때문에 끝없이 소비를 부추길 수밖에 없다.


월급은 돈을 쓰라고주는 것이며,

사람들이 쓴 돈으로 기업은 다시 제품을 만들어 낸다.


만약 사람들이 돈을 안쓰고 가지고만 있으면 

물가가 더 오르게 되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뭐 괜찮다.

그게 자본주의 시스템이 만들어진 원리이까~


근데 문제는 사람들이 돈을 어떻게 쓰냐,

바로 소비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의 문제에 달려있다.


+


돈이 많은 사람들은 사실 소비에 대해서 고민을 덜한다.

일단, 돈이 있으니까 그냥 사보고 아니면 말고가 가능하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은 제한된 자원에서 돈을 소모해야만 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가난한 사람들이 더 과소비를 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첫 번째 이유는

수입이 불안하게 되면 있을 때 써버려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건설작업장에서 일하시는 일용직 근로자들이다.

사업을 직접하는 사람들이나 프리랜서들에서도 비슷한 경향이 나타나는데,

돈을 벌 때는 바싹 벌게 되지만 어떤 때는 일이 없어서 수입이 계속 없을 때도 있다.

(나도 처음에는 이런 소비패턴이 이해가 잘 안갔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경향이 자주 나타난다.)


이들에게 돈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기 때문에

있을 때 확~ 써버리지 않으면 어짜피 그냥 사라져버리는 돈이 된다.

그렇게 때문에 수입이 좋을 때 필요 이상으로 물건을 사게 되는 과소비가 나타난다.



두 번째 이유는

돈을 쓰는 것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다.


30일 죽도록 일을 하고나서

하루만에 다 쓰고 이를 만족해하는 경우가 많다.


월급은 다시 열심히 일을 하도록 몰핀주사를 놓는 것이며,

카드 청구서는 내가 일을 해야만 하는 이유를 인식시켜 준다.


월급은 분명히 받기는 하지만, 

통장에 스쳐지나가는 사이버 머니일 뿐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시 열심히 카드를 긁어대기 시작한다.


허무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소비를 함으로써 어렵게 돈을 벌게된 굴욕을 해소하게 된다.


돈을 쓸 때는 자유를 느끼게 되면서

이는 사실은 노동자의 삶을 은폐하려는 회피의 수단이다.


스트레스를 소비로 해소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결여된 행복(사랑, 성취감)들을 보상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여릴수록 먹는거로 스트레스를 푸는 여자와 유사한다.

드라마에 흔히 등장하는 실연당하고 열무비빔밥을 먹는 여자가 이런 맥락이다.


+


이러한 과소비들을 제어하는 방법은

자신의 노동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자신의 노동의 가치를 소중히 여긴다면 함부로 돈을 못쓰게 된다.


노동의 가치를 생각하지 않고 쉽게 번 돈은 쉽게 쓸 수 있다.

(복권 당첨, 부모님의 용돈, 남편의 월급)


하지만, 부모나 남편이 어떻게 돈을 벌어왔는지 생각하고,

돈을 쓸 때 스스로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고민하면 돈을 함부로 쓰지 못한다.

(사실 왠만한 주부들은 남편의 월급을 쉽게 쓰지 못한다.)


막상 써 놓고 나서 손에 들고 있는 쇼핑백들에 허무감은 밀려오게 된다.

과연 내가 그렇게 고생해놓고 진정 필요한 것을 산 것인가?


소비를 하는 순간

나는 주인이며 왕이된 기분이겠지만,

사실은 백화점 직원들에게는 손님이 아니라 돈이 왕이다.


점원들은 손님을 존중해주는 것이 아니라

돈을 쓸 것같아 보이는 손님들을 존중하기 마련이다.


소비를 통해서 자유를 만끽하려 하지만,

사실은 돈이 있어야만 그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돈은 물건과 다르게 다양한 제품을 구입할 수 있기에

다양한 가능성을 제공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동일가여도

물건보다 돈이 더 효용이 높기 때문에 사람들은 돈에 더 목을 메게 된다.


이에 온갖 마케팅과 광고는

사람의 심리를 교묘하게 자극해서 불필요한 소비를 유발한다.


자본주의의 생존 매카니즘은

우리는 끝없는 소비의 연속으로 유인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무서운 것은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과연 우리는 사람보다 자본이 우선시 되는 이 메카니즘을 깰 수 있을까?



+


마지막으로 정리할 내용은

주제와는 다소 동떨어지지만 그래도 인상깊었던 부분이다.


바로 여성(Gender)의 문제이다.


강신주의 강의에는 여성들로 가득차기 마련이다.

그만큼 사회에서 여성들이 억눌리고 스스로에게 갇혀있다는 이야기다.


가장 인상 깊은 비유는 정실부인과 첩의 비유였다.


정실부인은 첩이 되고 싶어하고
첩은 정실부인이 되고 싶어한다.


정실부인은 온갖 사회적 역할을 부여받지만 남편의 사랑은 못받는다.

첩은 남편의 사랑은 독차지 하지만 사회적 역할은 부여받지 못한다.


첩은 사랑만으로 먹고 살았지만,
정실부인은 사랑빼고 모든 권력을 가지게된다.

그래서 이혼하면 아내는 모든 권력을 박탈당하기에 사회적으로 이혼을 금지시켰다.


과감히 떠날 수 있는데도 머물고 있다면,

언제 떠날지 모르기 때문에 그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한다.

반대로 욕해도 하라는 대로 하고 있으면, 그 때부터는 무시를 당하게 된다.


정실부인은 떠나지 못하는 존재였고,

사회는 이러한 메카니즘을 정당화 시켜주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이혼도 가능해졌고, 첩을 두지도 못한다.


아내는 정실부인이면서 사랑도 받아야 하는 존재가 되었고,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위자료를 받고 과감히 이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이혼을 하지 못하는 여성들이 많이 존재한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바뀌면서 반대의 현상도 나타날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도 여성은 사회에서 소수자이고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여성들은 아직도 너무 착하고, 좀 더 모질어질 필요가 있는 것 같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은 능력에 비해서 아직도 목소리가 너무 작은 것같다.


강신주의 비유가 다소 눈쌀을 찌푸리게 만들면서도

충분히 공감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직까지는 대한민국의 현실인 것 같다.

열린 공동체 사회 Pot cast/[Bunker1] 강신주 강신주, 노동의 가치, 다상담, , 소비, 여성, 자본주의

강신주의 다상담 05 - '가면' 편

2014.02.01 20:25


강신주의 다상담 강의를 몇 번 듣다보니,

다소 비슷한 맥락이 반복되는 느낌을 받게 된다.


고정 관념이라는 알을 깨고 나와서

자아를 찾아가고, 스스로에게 솔직해져야 한다...


과연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나는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과 시선을 생각하는가?

착함이라는 허상이 어떻게 나를 속이고 있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신주 강의는 끌리는 맛이 있다.

그건 바로, 아직도 내가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


페르소나(persona)는 

그리스의 고대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일컫으며,

타인에게 비치는 외적 성격을 나타내는 심리학적인 용어이다.


강신주가 이야기하는 가면은

단지 페르소나만을 의미하지는 않고 있다.

오히려 내면에 억지로 눌려있는 욕망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가면을 쓴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약한 사람이 생존을 위해서 사용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가끔 강자임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약한 척하면서 가면을 쓰는 경우도 존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구나 가면을 쓴다.

이는 솔직하지 못해서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심지어 어린 아이들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일부러 우는 법을 배운다.

아이들도 생존을 위해서는 가면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가면을 쓰는 것을 사람들은 대체로 싫어하지만,

무언가를 얻기위해서는 때론 자신의 감정을 속여야만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나마, 무언가를 위해서 일부러 가면을 쓰는 경우는 덜 불행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가면을 써야하는 경우에는 스스로 불행을 느끼게 된다.


근데, 상당수의 사람들은 원하지 않는 가면을 쓴 체 살아가고 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우리들은 나보다 강한 사람을 항상 대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가면을 쓸 수 밖에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가면을 쓰는 훈련을 하게 되고,

자아가 강해지는 시기(5~7살 때와 사춘기 시절)에 멋모르고 가면을 벗어던졌다가

아무런 능력이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호되게 당한 후에 다시금 가면을 집어들게 된다. 


강신주는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아직 경제적으로 독립할 자신이 없으면,

그냥 부모님한테 빌 붙어서 가면을 쓴 체 착실히 살라고~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냥 주는 월급받으면서 안정되게 살고싶으면 가면 쓴 체 살면된다고...

남의 회사에서 일해주는 대가로 받는 돈받으면 비유도 맞춰줘야하는 거라고~


가면을 벗어던진다는 것은 그만큼

용기도 필요하지만 희생을 각오해야하는 행위인 것이다.

가면을 누군가 앞에서 한 번 벗게 되면 그 사람 앞에서는 다시는 쓸 수 없다.


이는 가면을 쓴 사람을 대하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상대가 가면을 쓰고 대하는 것이 오히려 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상대가 가면을 쓰고 있을 경우에는 속으로는 싫어해도 절대 나를 해치지 않는다.

하지만, 갑자기 상대가 가면을 벗어버리면 그 맨얼굴을 감당해내기가 솔직히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가 가면을 벗지 못하도록

절대적 힘의 우위를 유지하는 것 필수적이며 점점 더 차이를 벌리게 된다.


절대 권력자인 박근혜와 이건희,

이런 사람들 주위에는 가면 쓴 사람들이 철의 장막을 이루게 되고,

그들은 이제 가면을 벗은 사람을 대하는 것이 오히려 더 부담스럽게 된다.


+


근데 이와는 다르게 가면을 써야하는 경우가 또 한 번 있다.


상대방과 더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고, 상황을 빨리 탈출하고 싶을 때

이건 아니다 싶으면 빨리 웃으면서 비유맞춰주고 대화를 끝내고 나와버려야 한다.


오히려 마음이 안드는 상대를 대할 때

상대에 대한 아무런 감정도 투영하지 않고 오히려 더 친절하게 대하게 된다.


피상적인 관계로 남고 싶고, 다시는 보고싶지 않다면

쓸데 없이 시간낭비 감정 낭비하지 않고 가면을 쓰고 그냥 흘려보내는 것도 방법이다.


하지만, 내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나의 가면을 벗어던질 줄 알아야 한다.


가면을 쓰고 있는 한 우리는 솔직한 감정을 주고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가면을 벗어야만 한다.


하지만, 흠모하는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오히려 더 두꺼운 가면을 쓰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그것도 과연 사랑일까? 


난 그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을 계속해서 유지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 같다.


+


나의 20대는 밝고 명랑한 교회 오빠였다.

집에서는 착실한 아들이였고, 학교에서는 성실한 학생이였다.

그러면서도 나름 주관도 있어보였기에 꽤 괜찮은 녀석이라 평가받았다.

(자뻑일수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그런 이미지였던 것 같다.)


하지만,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닌 정글 속의 야생마가 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한 번도 가면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나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면서 기존의 삶이 가면처럼 느껴지게 된 것이다.


독실한 기독교인

성실한 신입사원

착실한 막내아들

다정다감한 교회오빠

뭐든지 할 줄 아는 슈퍼맨


남들이 이렇게 봐주는 것이

사실은 나도 원하는 삶이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고 난 좀 더 자유로운 영혼이였다.


남들이 만들어놓은 기준에 나를 맞추고 있었고,

그렇게 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내가 그걸 원한다고 생각했었다.


일탈과 욕망, 저항, 거만, 잉여 같은 단어들이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새 나는 그것들을 원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그것들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계속해서 내 속에서 억눌러오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난 스스로 잘 만들어놓은 새장을 벗어나고 싶어졌고,

그 것을 깨고 나오는 순간 그 동안 쌓아둔 것이 무너질 것을 직감하게 됐다.


내가 가면을 일부러 쓴 것은 아니지만, 

어린 시절부터 너무나 오랫동안 가면을 쓰고 있었던 것 같았다.


만약, 그게 가면이 아니였고, 

순간적인 일탈이였다면 어느새 자연스럽게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었겠지만,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제대로된 나를

찾기 시작했다고 느낀다는 것은 그 것이 순간적인 감정만은 아니였던 것 같다.


가장 먼저 새로운(?) 맨 얼굴을 보여주게 된 것은 여자친구였다.

은밀히 조금씩 내비치는 내 맨 얼굴에 그녀는 내가 변했다고 느꼈던 것 같다.


평생 가려면 내 맨 얼굴도 사랑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예전 새장 속에 있던 나의 모습을 사랑하는 그녀에게 난 솔직해지려고 했다.


결국 아름답게 헤어지길 선택했고,

그녀는 너무나 순순히 그 선택에 공감해주었다.


그런 후 너무나 편함을 느꼈지만, 아직도 그녀가 많이 생각난다.

이 것이 내 선택에 후회는 없지만 아쉬움이 아직도 남는 이유일 것이다.

(헤어질 때까지도 긴가민가했는데, 난 진짜로 그녀를 사랑했던 것 같다.)


+


이별은 나에게 변화의 시작이였고,

이제 본격적으로 다른 삶을 살아보고자 했었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 자신을 찾고 싶었고,

내가 있던 모든 것을 떠나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졌다.


현재의 자리가 스스로에게 불편했고,

뭔가 다른 나의 모습에 다른 사람들이 실망하는 것도 싫었다.


그런 후 이것도 아닌 저것도 아닌 애매한 삶을 살다가,

예전의 그 삶이 그리워서 다시 교회로 돌아가게 되고 직장도 옮기게 된다.


예전과는 다른 삶을 살고 싶어도

별로 변하지 않는 나를 보면서 솔직히 뭐가 본질인지 헸갈렸다.

(남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일탈이나 욕망이 솔직히 나에게는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난 다시 예전의 나름 괜찮았던 삶을 유지하면서도,

약간은 다른 방식으로 적당히 솔직한 삶을 살고 싶었고,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반쯤만 가린 가면을 쓰면서 타협점을 찾고 싶었다.


솔직히 이야기한다면,

어떤 것이 가면이고 어떤 것이 맨 얼굴인지 확신이 안섰던 것같다.


역시나 다시 돌아간 온실은 따뜻했지만, 

역시나 온실은 나에게는 너무나 답답한 곳이었다.


+


그렇게 시작한 30대의 삶은 많은 것은 생각하게 만들었다.

어찌보면 그제서야 진짜 내가 누구인지 제대로 찾아가기 시작한 것같다.


20대 후반에 충동적이고 감정적으로 왔다갔다했다면,

본격적으로 무엇이 가면이고, 무엇이 본질인지 찾기 시작한 것이다.


교회와 새로운 직장이라는 온실 속에서

제대로된 나를 찾을 때까지 철저히 고민하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내가 상상했던 양 극단에는 나는 없었다.

난 처음부터 그 중간 어디쯤, 남들이 보기에는 애매모호한 어딘가에 있던 것이다.


남들 기준으로 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그 지점에

나는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고 나만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난 크리스챤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기성 교회에서 원하는 그런 크리스챤은 확실히 아니였다.


난 기업가 마인드가 강하지만,

그렇다고 자본주의 논리에서 이야기하는 자본가도 노동자도 아니였다.


난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사회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그런 혁명을 원하지는 않는다.


난 솔직하고 욕망에 충실한 삶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주체할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힌 삶을 원하지도 않는다.


도저히 알 수 없는 지점에 위치한 나의 삶을 찾기 위해서

새로운 방향성이 보이자마자 과감하게 난 다시 떠나기로 했다.


강신주는 어느 곳을 떠난다는 것은

그 곳이 최악이라고 느낄때만 떠날 수 있다고 했지만,


난 지금있는 곳이 어쩌면 최선일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음에도,

내게 어울리지 않는 옷이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그곳을 떠날 수 있었다.


난 내가 이미 충분히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하고 싶었고 계속해서 변하고 있다.


+


지금의 나는 가면을 쓰고 있는가?


직장을 그만두고 학생이 된 이후로

나는 완전 새로운 영역에서 새로운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강신주의 말처럼 새로운 것을 시작했을 때,


'이제는 끝이다.'라는 느낌이 들면 남들이 원하는 선택을 한 것이고,

'이제 시작이다.'라는 느낌이 들면 스스로 원하는 선택을 한 것이라는데,


난 확실히 제대로 된 선택을 했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워낙 긍정적이라 첫 사랑, 첫 입사, 첫 이직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너무나 아프고 외로워서, 

누군가를 만나보기로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아직도 그 때 잠시 만났던 여자분께는 죄송한 마음이 많이 든다.)


심지어, 예전부터 알던 사람들과 다시 만났을 때도

그들 역시 나의 선택이 의외이지만 아주 잘 어울린다고 이야기한다.


어찌보면 나만 나 스스로를 잘 몰랐던 것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들은 어쩌면 이미 내가 그들과는 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난 가면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은 이미 나의 맨얼굴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 때도 강자들 앞에서 하고 싶은 말은 했고,

약자들에게도 절대 내 힘을 과시하고자 했던 적은 없었던 것같다.


강한 사람들이 기분 나빠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도 진심은 전달했고,

약한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지 않도록 그들 앞에서도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지혜와 가면은 엄연히 다른 것인데,

난 그 부분을 잘 구분하지 못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나의 고민은 완벽히 해결했는가?

다시는 강신주의 강의 따위는 듣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하지만, 이번에도 여전히

이 문제에서 완벽하게 자유롭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아직도 가슴 한편에는 찝찝함이 남아있고,

나는 가면을 완벽하게 벗어버리지도 또한 계속 쓰고 있지도 않다.


이는 한 극단에 치웃치지 않는 내 성향탓일 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가면이라는 것의 존재 자체가 나의 특성을 설명하기에는 부적합할 수도 있다.


다만 내가 맨얼굴이라고 생각한 것이 가면이였거나,

내가 가면이라고 생각한 것이 나의 맨얼굴이 아니였으면 한다.


사람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진실을 은폐하거나 인정하지 않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인 가면이든 맨얼굴이든

그 모습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다.



열린 공동체 사회 Pot cast/[Bunker1] 강신주 가면, 강신주, 다상담

[참여관찰사례] 서울역 거리노숙인 - 경희대 지리학과 김준호

2014.01.25 14:25


며칠 전, 철학자 강신주가

'노숙자들은 자존심이 없다'라고 언급했던 내용이 SNS에서 몰매를 맞았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진짜 노숙자들은 자존심이 없을까?


이 때 강신주의 발언에 광분했던 지인으로부터

굉장히 흥미로운 기사 하나를 공유받게 되었다.


경희대 지리학과 석사과정 학생이 석사논문을 쓰기 위해서

3개월간 서울역에서 노숙인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노숙인을 보았다. (한겨례21 2010년 9월 10일)



기사내용은 흥미로웠고, 바로 원문인 석사논문을 찾아볼 수 밖에 없었다.


거리노숙인이 생산하는 '차이의 공간'에 대한 연구 < 석사 논문 원문 보기


사회복지학과가 아닌 지리학도의 눈으로 노숙인을 봤다는 점도 흥미로웠지만,

국내에서 이렇게 참여관찰을 통해서 스스로 노숙인이 되어 석사 논문을 쓴 사례는 처음 봤기 때문이다.


나름 감명깊게 읽었던 노숙자에 대한 해외의 참여관찰 논문도

스스로 노숙자의 생활을 경험하지는 않았기에 본 논문만큼 생생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는 못했다.


Helping Friends and the Homeless Milieu (T Stablein 2011) < 해외 참여 관찰 논문 보기


(해외의 홈리스도 사실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 사진은 구글링으로 퍼왔음)


암튼 이 논문은 노숙자를 바라보는 시선도 참 신선했다.


지리학도이기에 공간을 중심으로 보면서도,

공공성, 지배, 차이, 차별 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현상을 분석했다는 점도 참 독특한 점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공간(space)는

단순히 물리적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 공간과 인식론적 공간을 통합한 의미인 '사회적 공간'을 의미한다.


연구자는 우선 주류 사회의 노숙인에 대한 시각,

'노숙인이라는 존재는 부정의 대상이자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는 기본 전제가

거리노숙인의 일상생활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기 보다는 이들을 관리의 대상으로 연구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렇기 때문에 연구자는 기존의 편견을 배제한 상태에서

거리 노숙인과 노숙문화 그 자체에 깊이 천착해서 연구해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집이 있는 시민들에게 공공공간은 단순히 '휴식과 소비의 공간일 뿐이지만,

거리 노숙인들에게는 먹고 살기 위해 버텨야 하는 '생존의 공간'으로 다가온다.


공공공간에 대한 인식이 주거인으로서의 시민을 중심으로 

배타적으로 개념되어 있다는 사실은 노숙인을 공공공간에 있으면 안 될 존재로 만든다.


결국 거리노숙인에게 공공공간은 주류 사회가 생산한

그래서 그들을 배제하고 포섭하며 또한 행동규율을 요구함으로써 그들을 통제하는 '지배의 공간'이다.


그러나 지배 공간에는 항상 저항이 존재하며, 

저항은 거리 노숙인의 일상속에서 공간적 실천을 통해 표출됨으로써 '차이의 공간'을 생산한다.


지리학도지만 사회학을 전공한 듯 한 느낌이 드는 이런 표현들은

다소 어려운 개념들로 들릴 수 있는데 일반인의 언어로 쉽게 설명하자면,

 

서울역이라는 공공의 공간에 대해서

주류사회에서는 노숙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때문에 그들을 배제, 포섭, 통제하려고 하지만,

거리노숙인들은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스스로 이 곳을 '차이의 공간'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매카니즘에 대해서 연구자는 설명하고 있는데,

다소 철학적이고 사회학적 개념들이 많이 들어있어 솔직히 읽기 쉬운 글은 아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여기 나온 내용을 기반으로

흥미로웠던 부분들이 발췌해서 내 생각들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


우선, 노숙인들에 대한 이슈는

다른 사회복지 분야의 문제에 비해서 '가시성'이 높다는 특징이 있다.


공공 공간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일반 시민들에 눈에 잘 뛴다는 점이다.

게다가 시민들에게 부정적으로 느껴지는 노숙인들 일수록 훨씬 더 눈에 잘 띄게 마련이다.


일상적인 평범한 노숙인들의 모습에 사람들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언론이나 미디어를 통해서 이미 형성된 이미지대로 보이지 않으면 노숙인이여도 노숙인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여기에는 언론에서 노숙인을 경제적 박탈자, 잠재적 진환자,

잠재적 범죄자, 혐오감 유발자, 나태 및 무기력자, 동정의 대상으로 노출시킨 것이 크게 작용한다.

노숙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와 담론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정부가 거리노숙인을 대하는 태도는 크게 두가지 방향으로 나타난다.


1) 국가 주요 행사나, 일반 시민의 편의를 위해서 물청소나 단속을 통해서 공공공간에서 추방하는 방법

2) 실내급식소 설치나 쉼터 등의 인도적인 방법을 통해서 공공공간에서 격리시키거나 수용하려는 방법


첫 번째 방법은 진짜 비인간적인 방법이지만,

두 번째 방법 역시 국가에서 정한 프로세스에 따라서 자활의 경로를 걸어야만 한다는 폭력성이 존재한다.

(상당수의 거리노숙인들이 이러한 억압과 답답함 때문에 자유로운 거리노숙을 선택한다고 한다.)


노숙인들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이는 사회적 문제이기 때문에 국가 정책을 모조건 따라야 한다는 인식이 존재하는 것이다.


첫 번째 관점보다는 진일보했다고는 하지만,

노숙인을 부정적으로만 본다는 한계는 벗어나지 못한다.



+


과연 그렇다면 노숙인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설문조사 결과(남기철 2009)에 따르면

철학자 강신주 역시 눈에 띄는 소수의 일탈적인 행위를 하는 노숙인들만 생각했던 것같다.


노숙인들은 스스로의 삶을 상당히 부끄러워하고 있다.(74.6%)

사람들이 자신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도 잘 인식하고 있다.(83.6%)


하지만, 스스로 노력하면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74.2%),

아직까지는 자신이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비율이 더 높다 (54.5% vs 12.5%)


전수조사도 아니고, 설문조사라는 방식의 한계가 분명히 있겠지만,

일단, 스스로 개선할 의지나 능력이 없다는 정부의 시각 자체에는 큰 문제가 있어 보인다.


또한,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면서 그래도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을 지키고 있다니 참 다행이였다.


더욱더 놀라운 점은 상당수의 노숙인들은

시민들의 불편을 생각해서 자신들만의 규칙을 정하고 시민들에게 피해주지 않으려 노력한다는 점이다.


정부의 규제 때문이 아니라, 공공의 공간이기 때문에

그들은 최대한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장소에서 방해가 되지 않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도 봉사랍시고 대학생 시절부터 서울역에 몇 번 가봤는데,

과연 우리들이 그들의 목소리의 생각을 얼머나 들어주었는지 궁금해졌다.



+


그들의 생활에 대한 내용은 더욱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연구자는 노숙자의 생활을 분석하면서 그들의 생활에 따라서 수면, 취식, 구걸, 부유의 공간을 연구하였다.


의외로 노숙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는 '수면 공간'의 확보였다.

의식주 중에서 옷과 음식은 어떻게든 정부나 시민들을 통해서 공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면을 하기 위해서는 공공으로 사용되는 공간이 비는 시간을 잘 활용해야만 한다.

특히 가장 좋은 공간인 대합실은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기에 주로 낮에 다른 공간에서 부족한 수면을 보충한다.


날씨가 풀리면 대합실과 지하도 외에도

서울역 광장, 구역사 앞거리, 서부역 앞거리 등의 공간도 활용할 수 있지만, 여전히 밤에는 춥다고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수면 공간은

노숙인들 간의 감성적 유대가 형성되는 장소이며,

노숙인들 간에서도 서로 간의 끊없는 사회화 과정을 통해서

인정받는 사람과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간의 계급차도 들어나서 잠자는 공간도 분리된다는 것이다. 


흔히 명당이라고 불릴 수 있는 공간에 대해서는 이미 사유화가 이루어져서

갑자기 뜨내기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내 자리니까 비켜라'라는 요구를 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요구가 제기됐을 때는

순순히 비켜주는 것이 서울역 거리노숙인 세계의 암묵적인 룰(rule)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낮에도 주류 그룹이 주로 서울역 앞마당쪽에서 활동하는 것에 비해서

타자화된 그룹의 경우에는 서울역 뒷쪽 서부역 앞거리를 중심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에 비해서 취식 공간은 많은 종교 및 봉사 단체들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자원이 풍부한 편이다.

심지어 점심같은 경우에는 자신의 입맛에 따라서 급식소를 고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훌륭한 음식이 나온다는 것은 아니다)


수면의 공간이 감성적 유대가 형성된다면,

취식의 공간은 사회적 유대가 형성되며, 정보 교환의 장소로 활용된다.


+


구걸의 공간에 대한 분석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상당수의 노숙인들은 구걸을 아예하지도 않으며,

구걸을 하는 노숙인들은 생존보다는 '삶 그 이상의 무엇을 위한 선택적 행동'이라는 것이다.


주로 담배를 살 돈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며,

여성에게는 돈을, 남성에게는 담배를 구걸한다. 


낮에는 굉장히 불쌍한 자세로, 밤에는 다소 위협적인 자세로 구걸을 하며,

주말에는 인근 교회와 웨딩홀을 돌면서 활동을 하는 등 경험에 근거해 다소 전략적으로 접근한다.


근데 구걸을 하는 이유에는 단지 돈이 필요해서만도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자존감과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라도 구걸이라는 활동을 한다.


연구자는 사회 계층적인 부분에서 이것을 설명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살기위해서, 자신이 아직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무기력하게 그냥 노숙인으로 사람들 시선을 피하면서 주는 것만 얻어먹기 보다는

무엇이라도 능동적으로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스스로의 존재감을 확인하고자 하는 욕구는 아닐까?


+


마지막으로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이 삶에 대한 자세이다.


부유의 공간은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소비하는 공간을 의미한다.

막상 해야만 하는 일은 없고, 시간은 너무 많고 대부분 처음 노숙 생활을 시작하면 이 시간에 적응을 못한다고 한다.


노숙인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과 비전을 갖고 하루하루를 버티다가,

점차 그것이 충족되기 힘들다는 것으로 깨닫거나 아니면 정말 노숙 생활 자체에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뚜렷한 목표의식을 갖거나 흘러간 과거에 대한 미련이 없이

그냥 당장 눈 앞에 닥친 '현재'에만 충실하면서 이 여유시간에는 서로간의 그룹을 형성해간다.


이 때 형성된 그룹은 같이 취식을 하거나 수면을 하는 그룹의 기반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명절같은 나름 대목(?)에 타지에서 몰려온 그룹들과 보급품을 확보하기 위한 연대를 형성하기도 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허송세월을 하고 있는 듯하지만,

노숙인들도 그 안에서 수많은 사회화 과정을 통해서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


해당 논문을 보면서 가장 크게 느낀점은

내가 보던 시각과 노숙인의 시각은 굉장히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왜 탈노숙을 못하는지, 왜 쉼터나 시설를 거부하는지 공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규칙이나 생활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불과 70여일동안의 노숙생활이였지만, 연구자는 많은 시사점을 제시해주었다.

(참여관찰을 진행하고 있는 학생으로써 참으로 배울점이 많은 연구이다.)


노숙인들은 과연 무능력하고 의지가 결연된 사람인가?

노숙인들은 관심과 동정이 필요한 불쌍한 사람들일뿐인가?

과연 그들은 자신의 삶을 불행하다고만 느끼고 있는가?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노숙인은 이상한 사람이 아닌데,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만 노숙인으로 사람들은 인식한다는 점이다.


과연 노숙인들이 이상한 사람들인가? 불쌍한 사람들인가?

그들을 고난의 구렁텅이에서 우리가 원하는 방식과 모습으로 구해준다는 것이 과연 옳은 생각인가?


그동안 노숙인들을 보는 시각은 잘못되었지만,

그들이 언론이나 봉사활동을 위해서 찾아오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은 아닐지라도,

그런 식으로라도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끝임없는 소통과 교류를 원하고는 있지만,

그들을 불쌍한 사람 취급하면서 강압적으로 다가오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다.


과연 그들과 어떤 관계를 형성해나가는 것이 필요할까?


연구자가 논문에 언급한대로,

본 연구는 사실상 실천적인 방안을 제시해주고 있지 못하다.


그 점이 가장 아쉽지만, 그래도 노숙인에 대해서

그들의 관점에서 한 번 살펴보았다는 점에서 나에게는 참 귀중한 시간이였다.

열린 공동체 사회 Study Room/Qualitative Research 강신주, 거리 노숙인, 경희대 지리학과 김준호, 공공 공간, 구걸, 노숙생활, 노숙자, 사회적 공간, 서울역, 차이의 공간, 참여관찰

강신주의 다상담 03 - '일' 편

2013.12.29 09:08


직장 생활 3년차에 접어들 때,


갑자기 불연듯 떠오른 생각은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였다.


물론 그 때 나는

나름 괜찮다고 소문난 광고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업무 강도는 높지만, 그래도 즐겁게 일하지 않냐며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그렇다면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야할텐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지못해 일했고, 돈만 있으면 당장 때려치고 싶어했다.


매일 점심시간마다 하는 이야기는

나중에 돈벌어서 뭐하고 싶다는 이야기였고,

직장을 취미처럼 다니는 부자집 자녀들을 부러워했다.

(광고회사는 일이 재미있어 보여서 그런지 그런 분들이 꽤 존재하신다.)


월급의 노예...


이는 다른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도 마찬가지였다.


처자식 먹여살리려고,

카드값이 나를 일하게 부른다.

때려칠까 싶다가도 월급이 들어오면 에너지 충전이 된다.


솔직히 나는 당시

Life Balance는 맞지 않았지만,

일하는 것이 즐거웠고 나름 재미있게 일했던 것 같다. 

(물론 일도 일이지만, 너무 좋은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뭔가 이상했다.

즐겁게 살기도 부족한 인생인데

다들 월급의 노예처럼 일만 하는게 안타까웠다.


먹고 살려면 일은 해야되기는 하는 것 같은데,

이왕 일하는 거면 즐겁고 행복하게 하면 좋지 않을까?


나의 고민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


성경의 데살로니가 후서 3장 10절에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If a man will not work, he shall not eat)


불교의 백장 스님(738-817)도

노년까지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일일불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종교의 문제를 떠나서,

선인들의 사상을 통해서 보면


일을 한다는 것은

단순 취미생활과는 차원이 다른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의무인 것이다.


하지만, 일하지 않았는데,

먹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철학박사 강신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일하지 않았는데 먹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것을 빼앗는 것이다.

부모님, 남편, 아내, 동료, 친구가 아니면 심지어 모르는 사람이 한 일의 대가를 빼앗는 것이다.


일을 한다는 것은 먹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고,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의자 하나 못 옮기는 사람은 살아 있을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누군가는 일을 하고, 누군가는 일을 하지 않는데,

모두가 먹고 살게 된다면 여기에 권력 관계가 형성되게 된다.


일하지 않는 사람이 일하는 사람의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일하지 않는 사람이 일하는 사람에게 밀붙어 살고 있거나,


전자든 후자든 누가 권력을 가지는지만 다를 뿐,

어찌하든 평등한 관계는 형성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권력 관계의 내면에는 돈(자본)의 논리가 숨겨져 있다.


+


성경과 불교에서

신성시 했던 거룩한 의무가

부정적인 모습이 되어버린 것은 자본의 권력 관계가 크게 작용한다.


돈을 많이 주는 직장을 좋은 직장이라 보고,

돈벌이만 되는 것을 일이라 생각하는 자본주의적 사고

어느 새 돈 없이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자본주의가 팽배하기 전에는
그냥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했지
일을 해서 돈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근데, 누군가는 돈을 가지고,
일을 하지 않아도 즐겁게 먹고 살수 있게 되었고
일을 하는 것이 오히려 능력없는 사람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직장인들은
돈만 있으면 당장 일을 때려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좋아하고, 돈이 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

나는 직장인들이 월급의 노예가 되는게 안타까웠다.
하지만, 왜 그런지 철학적인 사고는 존재하지 못했다.

이런 나의 생각을
철학박사 강신주는 명확하게 정리해주었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해야지 주인이고,
타인이 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노예라 부른다.

일하는 것 싫어하는 것이 노예의 근성이다.
주인이 감시를 소홀히 하면 쉬고 싶은 것이 사람이다.

노예가 가장 바라는 것은 일은 안하지만 먹을 것은 얻는 것
늦게 출근해서 일찍 퇴근하고, 근무시간에 딴 짓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직장인은 최고급 노예이다.
최고급 노예가 되어서 일하다보면, 돈은 들어왔는데 찝찝한 거다.
이 것이 직장인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고민이다."


대다수의 직장인들은

고급 교육을 받은 사회의 엘리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최고급 노예의 길을 선택한다.


이러한 최고급 노예들은

우수한 능력을 바탕으로 돈많은 사람들이 일을 안하게 도와준다.

(아니면 일한 것에 비해서 훨씬 많은 댓가를 얻을 수 있도록)


이런 어이 없는 상황이 발생하는 이유는 패러다임의 부재이다.


일에 대한 어떠한 철학적 사고없이

돈벌이와 일을 동일시하는 물질만능적 사고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부모님들은 어렸을 때부터 세뇌교육을 한다.


"그거한다고, 돈이 나오냐, 쌀이 나오냐?"


책을 읽을 때, 음악 들을 때, 놀 때 마다

내가 즐겁게 했던 일들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원하지 않는 것들을 잘하게 만드는 훈련을 받게 된다.


철학박사 강신주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대놓고 비판한다.


"명문대에 간 애들은 독한 놈들이다.

원하지 않는 것들을 가장 잘하는 애들이 명문대에 몰려있다.


돈을 냈으면 즐겁게 수업을 들어야하는데,

비싼 등록금을 내고서 자본이 원하는 것만 배우고 있다.


오늘날의 대학은 노예 훈련소로 전락하고 있다."


+


과연 그렇다면 월급의 노예가 되지 않는 방법은 무엇인가?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직장 생활을 하지 않거나,

직장 생활을 하더라도 노예처럼 하지 않으면 된다.


철학박사 강신주는

직장인들에 어이없는 솔루션을 제시한다.


"월급은 버티면 나온다.

회사에서 부지런하면 부지런할수록 손해이다.


직장에서 모든 에너지를 쓰면, 정작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쓸 에너지가 없다.

직장에서 모든 에너지를 쓰면, 정작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에너지가 없다.


퇴근 후 가족이나 친구들과 놀고 싶어도 놀 수가 없고,

개인적인 취미생활이나 여가활동을 할 여력이 전혀 없어진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보면 내가 왜 사는지 의문이 생기기 마련이다.

노예로 살 때 에너지를 세이브 해놔야지 정작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


직장인들에게 태업을 종용하다니...

사장이 들으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울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왜 사는지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 정확한 답이다.


그리고 더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경영자들이 사내 복지나 인센티브 등을 만드는 이유는

사실은 동기부여를 통해서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다.


경영자들이 진심으로 종업원들을 위하는 마음에서,

그들을 노예가 아닌 동료로 보는 관점에서 실시하는 경우는 드물다.

(물론 함께 나누자는 훌륭한 철학을 가진 경영자도 가끔 있다.)


하지만, 강신주의 말처럼 태업을 하는 사람이 많이 있을까?


논리적으로만 보면 강신주의 말이 맞기는 하다.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받은 만큼만 일하라는 것이다.


적당한 타협점을 찾아서 삶의 균형을 맞추고,

내가 진정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준비하고 때가 되면 떠나라는 것이다.


+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 미안해 한다.


회사 일을 내 일처럼 생각하고,

맡겨진 일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근데, 그렇게 할수록 일은 더 밀려오고,

점점 내 시간과 에너지는 회사에 몰입하게 된다.


악순환의 고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그 일이 진정으로 재미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근데, 진짜 월급 때문에 일하고 있다면,

이는 진정 노예의 삶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노예처럼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보면 사람들은 진짜 너무 착하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보면 난 매정한 부분이 존재한다.


내가 선택한 길은

회사에 미안하지 않을 정도로만 일하는 것이었다.


강신주의 강의는

내가 직장생활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한 이후

다시 공부를 시작할 때까지의 4년간의 삶을 말하고 있었다.


+


4년차가 되면서

나는 새로운 직장을 찾기 시작했다.


일도 재미있고, 사람들도 좋았지만,

뭔가 평생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삶의 밸런스가 맞지 못했으며,

기업의 광고와 마케팅이라는 일이

사회에 가치있는 삶이냐는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당장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은 마케팅이고,

마케팅 업무가 재미도 있었기 때문에 마케팅부서로 옮기기로 했다.


외부 환경으로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일도 재미없어지고, 사람들도 나가버렸다.

그리고, 업무 강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아졌다.


첫 직장을 다니던 나에게는 충격이였다.

그렇게 좋았던 나의 직장이 이렇게 망가지는구나...

그러면서 행복한 일터를 만들어보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창업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창업을 위한 도움일 될 수 있으면서도,

자기 개발을 위한 삶의 여유가 있으면서도,

경제적으로도 안정된 새로운 회사가 필요했다.


이러한 모든 조건에

벤쳐로 성공해 상승세를 타고 있던 네오위즈는 최선의 선택이였다.


난 강신주박사가 말한대로,

적당히 일했으며 절대로 일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능력에 비해서 욕심을 내지 않는 나에 대해서

팀장님은 대놓고 나에게 서운해 하셨지만 어쩔 수 없었다.


회사에서 모든 에너지를 쏟아붙는다면,

내 미래를 준비할 여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딱, 나에게 주어진 일까지만 최선을 다했고 절대 욕심 내지 않았다.

(물론, 주어진 일에 대해서는 남들보다 전혀 떨어지지 않는 충분히 좋은 성과를 냈다.)


당연히, 팀장님과 회사에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나의 인생에 중요한 타이밍을 회사에 올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았을 때,

그리고 그 것을 위한 방향과 방법을 알았을 때

난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다.


사람들은 내 도전에 무모하다, 용기있다 말하지만,

난 4년을 망설이며, 준비했고, 기회가 왔을 때 움직였을 뿐이다.


+


남이 시키지 않는 내가 즐거운 일을 하면서

돈벌이가 되어 먹고 사는 걱정 안해도 되는 사람


어떻게 보면, 가장 행복한 사람일 수 있다.

근데, 문제는 현실에서 이런 사람은 드물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 현실을 떠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막상 나도 내가 원해서 공부를 시작했지만,

돈벌이가 되어 먹고 사는 걱정을 안해도 되는 상황은 아니다.


계속 더 공부를 해보기로 결심했지만,

공부를 더 하면서 돈벌이가 해결될지는 아직도 미지수이다.


내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것은

경제적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협동조합 형태의 행복한 일터이다.


나 혼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모두 같이 주인이 될 수 있는

주인이기 때문에 힘든 일도 함께 이겨낼 수 있는 그런 곳


그리고 각자의 즐거운 삶도 알아서 잘 향유할 수 있는 그런 곳


자본의 관점에서 보면 크게 성공한 것이 아닐 수 있지만,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는 그런 행복한 일터의 모델을 만들어보고 싶다.


성공을 보장할 수 없기에 아주 무모해 보일 수 있지만,

꿈을 꾸고 차분히 준비해나가는 이 과정이 너무 즐겁기에 실패가 두렵지 않다.


어찌보면, 이 고민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무슨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지금 현재, 

즐겁고 행복하다고 느끼느냐가

일에 대한 고민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인 것 같다.




열린 공동체 사회 Working Innovation/Work & Life Work, 강신주, 노예, 다상담, 동기부여, 백장 스님, 월급의 노예, , 일터, 자본주의, 주인, 즐거움, 철학박사, 최고급 노예, 행복, 행복한 일터, 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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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댓글입니다

  2. 굉장히 공감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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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댓글입니다

  4. 저는 성공회대에서
    협동조합경영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선택하셔도
    아마 후회와 미련이 남으실 텐데,
    어쩔 수 없죠~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으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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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댓글입니다

죄와 벌 - 김수영 (1963)

2013.12.13 20:50

罪와 罰


남에게 犧牲을 당할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殺人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놈이 울었고

비오는 거리에는

四十명가량의 醉客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犯行의 現場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現場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돌아온 김수영이

일자리를 찾아 다시 대구로 떠났을 때,


김수영의 아내 김현경은 선린상고 2년 선배인

이종구와 잠시 살았던 일이 있다.


김수영이 돌아와 아내에게 돌아가자고 했지만,

아내 김현경은 이종구 곁에 남았다가 이종구가 죽자 김수영에게 돌아갔다.


김수영은 아내를 받아주지만, 이 때부터 학대가 시작됐다.

하지만 자신을 떠났던 배신자에 대한 학대는 이 시를 쓴 후 끝나게 된다.


학대가 끝난 후 이 두 사람은 행복해졌을까?


+


철학자 강신주는 두 사람의 진정한 불행은

이 시를 쓰고 난 후 학대가 끝난 다음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한다.


두 사람이 폭력이 사라진 체 살기 시작하지만,

더 이상 사랑이란 감정도 미움이라는 감정도 남아있지 않게 된 것이다.


김수영이 아내를 죽도록 미워한 것은

그 만큼 아내를 사랑하기에 가능했었다.


아내에 폭행을 할 때만 해도,

김수영은 주변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다.


오직 아내와 자신만이 중요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주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가 보이기 시작했고,

주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지나가던 행인이 보이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때리던 우산이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아내와 자신의 관계에서

아내보다 다른 것들이 중요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더니, 이제 미움마져 끝나버렸다.


진짜 미워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

이기적이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을 미워할 수도 없게 된다.

미움과 상극의 감정인 사랑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진짜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


+


철학자 강신주는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말을 인용한다.



'사랑은 둘의 경험이다.'


사랑은 두 사람이 서로를 인생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과정이다.


하지만,

그 둘의 관계에 엉뚱한 것들이 주연으로 등장하면,

상대방은 조연으로 전락하고 사랑은 끝나기 시작한다.


그 대표적인 과정이 바로 결혼이다.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분명 행복한 과정이지만,

결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조연들이 주연으로 등장한다.

(가족, 재산, 명예, 직업 등)


그래서,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


그래서 강신주 박사는 이야기 한다.


사랑과 결혼을 할 때는

이혼하는 것처럼 하라고~~


이게 뭔 소리인가 싶었다~~

하지만, 김어준 총수의 말을 들으면 공감이 간다.


'이혼은 내가 하는 것이다.'


이혼은 잔인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결혼한다고 할 때는 모든 사람들이 축복해주지만,

이혼한다고 할 때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한다는 것은

굉장히 잔인한 행동이면서도 굉장히 용기있는 행동이다.


우리는 사랑도 이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환경이나 조건들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철저히 잔인하게 행동할지라도,


내 감정에 충실한

내가 주인공이 되는 사랑을 해야만 한다.


+


사랑을 하는 이유도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이유도


상대방을 인생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주고 싶고,

나도 인생의 주인공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사랑은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시작한다.

사랑을 열망하는 것은 행복하기 위해서이다.


지금 내가 행복하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필요가 없다.

지금 내가 사랑을 갈망한다는 것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에 목을 매는 이유도

사랑이 떠나면 내가 더 이상 주인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이기적인 감정이면서 동시에 이타적인 감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기적인 사람은 사랑을 할 수가 없다.


< 벙커 1 특강 - 이 죽일놈의 사랑 中 에서 >


+


내가 과연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을 배우는 것은

자전거를 배우는 것과 같다고 한다.


처음에는 무섭지만,

막상 타보면 금방 배울 수 있는...


넘어졌던 아픈 기억 때문에 겁을 먹지만,

막상 과감하게 도전하면 생각보다 쉬울 수 있다는...


나는 생각이 너무 많다.


맘에 드는 사람이 생겨도

차 한잔 하자고 먼저 이야기해보지 않는다.


일단 저질러보고

내 감정을 수습해보면

내 생각도 많이 정리될 수 있는데... 난 그게 안 된다.


강신주 박사의 말처럼

주변의 너무 많은 것들이 너무 많이 보인다.


아직 진정한 사랑을 못 만나서 그런가?

아님 시작조차 안해봐서 진정한 사랑을 못 만나는 것인가?


또 다시 생각이 많아진다.




열린 공동체 사회 Books/소설/시/문학 강신주, 결혼, 김수영, 벙커1, 불행, 사랑, 아내, 알랭 바디 우, 이 죽일놈의 사랑, 이혼, 죄와 벌, 철학박사, 행복

  1. 저도 김수영시인을 좋아하고 강신주박사님의 책과 강연을 즐겨듣는 사람입니다.
    그때의 감동을 다시 느끼고.. 내용을 다시 보고 싶어서 검색하던 도중에 들어오게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갈하게 정리된글과 솔직한 리뷰..
    저도 어릴때는 소심(좋게말하면 섬세)하고 안정지향의 한량스타일이었는데
    20대 중후반부터 갑갑해서 못살겠더라구요.. 기억이 남지않는 삶이랄까..
    주변사람(특히가족)과 많이 부딪히고 싸우고 화해하고 하면서 제 맘대로 살게되네요
    애인에게도 모든걸 솔직하게 말하고 주인공으로 서로 만들어주고..
    특히 반대하는 결혼을 줄기차게 밀고 나가고 승낙까지 받은 상황입니다.

    전투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의 가치관과 감정을 제외한 부차적인것들은 가볍게 무시할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좋은 하루 되셔요 ^^

  2. 공감어린 댓글~ 감사합니다~ ^^

  3. Blog Icon
    제이슨

    해당 시에 대한 다른 관점...(퍼온 글)
    -------------------------------------------------
    김수영은 왜 아내를 팼을까? 그 때는 세계적으로 흔했다.
    '오 헨리'의 단편집에도 마누라 패는 할렘가 남자 이야기가 나온다.

    필자도 어렸을 때 동생을 때린 일이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안 때렸다.
    때리지 않기로 마음을 먹으면 안 때리게 된다.

    때리는 이유는 때리기로 해서 때리는 것이다. 타고난 본능이다.
    굳이 말하자면.. 찌질한 거다. 지식인은 이러한 찌질본능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김수영이 아내를 때린 이유는 충분한 지식인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승이 있어서 '그만둬!' 하고 가르치면 바로 그만두게 된다.

    김수영에게는 그런 스승이 없었던 거다.
    만약 꾸짖는 스승이 있었는데도 그랬다면 인간이하 호로자슥이다.

    지식인은 그런 점에서 통제가 된다는 사실이 봉건인과 다르다.
    지식인은 언제라도 팀플레이를 한다. 팀 안에서의 행동이 훈련되어 있다.

    아내가 미워서 때리는게 아니다.
    맨 처음 때렸을 때 아내가 별다른 대응을 안했기 때문에

    두 번 때리게 되고, 두 번 때렸으므로 세 번 때리게 된다.
    문득 부아가 치밀고, 살이 떨리고, 호흡이 가빠지고, 열이 뻗치면 주먹은 이미 나와 있다.

    그러므로 첫 번째 폭력을 당했을 때 강력하게 제압해야 한다.
    하지 말라고 똑부러지게 말하면 안 하는게 지식인이다.

    분명하게 말했는데도 폭력을 반복한다면 강용석 부류다.
    지식인의 탈을 썼지만 거죽이 그러할 뿐 속살은 지식인이 아닌 것이다.

    하여간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했다는 신파조 곤란하다.
    이게 글자 배운 사람의 입에서 나와도 되는 소리가 아니다.

    누구 이야긴지 모르겠으나 강신주 말이라면 이 양반도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한다.
    분명히 말한다. 훈련된 사람은 다르다. 바로 그래서 지식인이다.

    김수영이 이런 시를 쓴 진짜 이유?
    세상의 모든 아내를 때리는 쓰레기 남편들을 향해

    '그만둬!' 하고 외치는 사람이 되고자 작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김수영은 깨달은 것이다. 지켜본 40여 명의 인파 속에

    자신의 범죄를 말려줄 의인 하나가 없었다는 치명적인 사실을.
    그 의인이 이 하늘 아래, 이 땅 위에 단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아무도 가지 않는 좁은 길이 있다는 사실을.
    길을 발견한 사람은 그 길을 간다. 길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 길로 간다.

    '내가 우연히 아내 패는 남자를 봤으면 말렸을 텐데.'
    이 생각을 하는 순간에 사람은 변한다.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어느날 동생을 때리지 않기로 작정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동생을 때리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다.

    열일곱살 때다. 동생을 때리면 동생을 때리지 말라고 말할 수 없다.
    김수영이 아내를 패고, 아내를 때린 부끄러운 사실을 시로 쓴 이유는

    반성하고 다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내를 패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다. 그것이 지식인의 길이다.

    그렇게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길에서 우연히 여자를 패는 남자를 목격했다면 단번에 그 자의 팔을 꺾어야 한다.

    하여간 강신주의 똥같은 소리는 되도록 멀리해야 한다.
    사랑하려면? 본인이 사랑할 마음을 먹어야 한다.

    '최고의 사랑은 이런 것이라는걸 세상에 보여주겠어.'
    이런 마음이 당신으로 하여금 진짜 사랑을 하게 하는 것이다.

    당신이 황금을 탐하는 이유는 금반지를 손가락에 끼어보려는 것이다.
    당신이 사랑을 탐하는 이유는 사랑이라는 반지를 가슴에 품어보려는 것이다.

    사랑할 분명한 의도가 없으면 진짜 사랑은 없다.
    들판의 짐승들이 진짜 사랑을 한다는 착각을 버려라.

    진짜 사랑은 글 배운 지식인이 하는 것이다.
    영화에나 나오는 칠뜩이와 갑순이의 순수한 사랑은 없다. 착각하지 말라.

    원래 부족민은 여자그룹, 남자그룹이 따로 있어서 성별그룹에 소속하는 것이며
    부부 둘 만의 깨가 쏟아지는 사랑은 해괴한 것이다. 그거 징그럽다. 부족민 입장에서.

    결혼하려면 최고의 결혼은 이런 것이라는걸 세상에 보여주겠어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이혼하려면 자신에게 충실한 삶이란 어떤 것인지 겪어보겠어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젊은이여. 사랑에 도전하라. 이왕 하려면 그 사랑의 승리자가 되라.
    최고의 사랑을 하고 모두를 부럽게 하라. 마음껏 뽐내라. 세상에 알려라.

    젊은이여. 이혼에 도전하라. 이왕 이혼하려면 그 이혼의 승리자가 되라.
    즐거운 이혼을 하고 이혼해도 잘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과시하라.

    분명히 말한다. 때리려고 때리는 거다.
    사랑하려고 사랑하는 거다. 이혼하려고 이혼하는 거다.

    지식인은 할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남자가 남자도 사랑할 수 있고
    심지어 통나무도 사랑할 수 있다. 당연히 강아지도 사랑할 수 있다.

    그것이 자연스럽고 그것이 떳떳하고 그것을 세상이 필요로 한다는 판단이 서면
    지식인은 할 수 있다. 그 길을 갈 수 있다. 못생긴 여자도 사랑할 수 있다.

    제갈량의 아내가 추하다고 해서.. 저 자슥 정치적인 판단을 했군.. 아니다.
    지식인은 아내의 지성에 반할 수 있고 용모와 상관없이 사랑할 수 있다.

    지식인은 아내의 배반까지도 사랑할 수 있다.
    자신을 배반한 아내를 사랑해 버리는 모험을 지식인은 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아. 나는 나를 배신한 여인을 끝까지 사랑했노라고 말하려면 말이다.
    의도가 있는 사랑이 진짜 사랑이며 아름다운 사랑이다.

    부족민의 순수한 사랑? 미쳤구만. 그런거 없다.
    사랑을 탐하는 자가 사랑하는 것이며

    사랑을 탐하는 자라면 배반한 아내를 사랑하는 모험도 탐해야 한다.
    하여간 강신주인지 블로거인지 똥같은 글을 읽고 나의 판단은

    김수영의 부인 김현경은 좋은 사람이었으며 그의 본심을 알고 있었다는 거.
    아내를 때린 김수영은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내의 지성이 나보다 높구나. 아내가 나의 스승이야. 마침내 찾던 스승을 발견했어.'
    이건 필자의 확신이다. 인간은 자신보다 지성이 높은 사람을 만났을 때 변한다.

    김현경의 지성에 반한 김수영이 인생의 새로운 목표를 발견하고
    눈이 번쩍 떠져서 이후 변한 것이다. 그것은 깨달음과 통한다.

    두 사람의 진짜 사랑은
    그 시를 쓴 후에 일어났다고 봐야 한다.

    하여간 담배를 끊지 못하겠다거나
    뭐를 못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 스승을 만난 적이 없는 거다.

    ###

    부족민 사회의 관습이 남아있는 봉건사회는
    남녀가 애정행각을 벌이는 것을 혐오하고 경멸합니다.

    그러다 남자그룹, 여자그룹 안에서 왕따되는 수 있다는 거지요.
    여자는 길쌈패거리에 안끼워주고, 남자는 사냥패거리에 안 끼워줍니다.

    그 때문에 결혼을 해도 남녀간에 심리적 거리가 있어서
    그것이 폭력으로 나타나는 비문명의 관습이 있는 것입니다.

    결혼제도는 매우 발달된 문명인의 관습입니다.
    훈련된 사람만이 소화할 수 있는 고도의 기술이라는 거지요.

강신주의 다상담 02 - '고독' 편

2013.12.11 17:44


강신주 박사는 고독을 

강한 자의식의 상태라 이야기한다.


나에게 집중하고, 계속해서 긴장하고, 

나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에 몰입하지 못하는...


고독이라는 상태는 불안정한 상태이기,

이 상황을 벗어나려고 하게 되고, 이럴 경우 2가지 선택을 하게 된다.


고독을 벗고 나오느냐 

아니면 더 깊은 고독으로 들어가느냐...


고독을 즐기는 방법도 불안정 상태를 탈출할 수 있다.

더 깊은 고독으로 들어가는 것은 일종의 방어기제이며,

스스로를 고독에 갇두면서 보호받을 수 있지만 세상과는 점차적으로 멀어지게 만든다.


평생 혼자 살 자신이 있으면, 고독을 즐겨도 된다.

하지만, 고독을 즐기는 것도 잠시뿐 언제가는 돌아오기 마련이다.


모든 자기 의식은 타인에 의해서 매게되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쁜 것인가?

무엇이 좋은 것인가?


내가 좋은 것이, 내가 이쁜 것이 정답이지만,

이런 주관적인 감정에서 조차 다른 사람과 교감을 할 때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잠시동안은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할 수 없어지고, 결국은 사람을 찾게 된다.


+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고독하지 않은 존재를 보면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다.


어린 아이들은 고독이 없다.

하지만 어른이 될수록 점차적으로 고독을 느낀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에는 꽃잎을 봐도 몰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몰입을 하게 되면,

세계에 대한 관심이 없어지고,

세계가 나를 밀어낼 때 고독은 없어진다.


멀리서 여자친구가 걸어오는데, 나머지는 모두 배경일 뿐 여자친구만 보인다.

반대로, 여자친구와 있는데, 자꾸 시계를 보고 스마트폰만 만지게 되면 몰입이 끝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사랑이라는 감정과 고독이라는 감정은

몰입할 대상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로 구분되어질 수 있다.


+


몰입이라는 감정은 어떤 것일까?


부모님이 막~~ 야단칠 때~~

그 내용에 집중하고 있으면 맘이 어렵다.

하지만, 딴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별로 마음이 어렵지 않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극장에서 영화가 더 재미있는 것은 몰입하기 좋은 환경 때문이다.


무언가에 몰입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순간적으로 놓아버릴 수 있다는 것이고,

모든 억압에서 자유로와지면서 다른 모든 세계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진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냥 나와는 구분된 풍경으로만 보이면 고독을 느끼지만,

만지고 싶고, 관심이 가는 대상이 있다면 고독은 사라지게 된다.


결론적으로 고독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어떻게하면 무언가에 몰일 할 수 있을까 고민해보면 된다.


강신주 박사는 이를 모든 금기된 것을 벗어나는 것으로 설명한다.


스피노자의 평행론을 이야기하면서

기독교의 금욕 생활은 정신과 고통이 반비례한다고 보지만,


스피노자는 몸이 건강해야 정신도 건강하기에, 

정신이 건강하려면 금욕생활을 하면 안된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업악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무언가에 몰입해볼 때 고민이 해결된다는 것이다.


강신주 박사의 이야기는 '사랑'편과 크게 다르지 않다.

(http://socialplanner.tistory.com/entry/죄와-벌-김수영-1963)


'앞뒤 제지말고 스스로 감정에 솔직하고 지금 이순간을 즐기라.'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서,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시선이 두려워서

솔직하지 못한 것이 스스로의 불행을 만들고 있다고...


쓸데없이 남을 배려한다고

스스로를 옥죄이지 말고 당당하게 감정을 표현해라~

(단, 남에게 피해나 상처를 주지 않는 선에서...)


다소 추상적인 결론이지만,

그 본래의 의미에 대해서는 상당히 공감하는 바이다.


+


그렇다면, 과연 실천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몰입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어려가지가 있을 수 있다.

운동, 취미활동, 술, 마약 등 모든 것이 고독을 줄여줄 수 있는 수단이 되지만,

모두 일시적인 관점이며, 근본적으로는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것들이 효과가 크다.


그래서, 사랑을 하거나 종교, 특정한 신념을 가지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을 못해서 종교를 도피처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교회에 수 많은 여성분들이 사랑에 실패해 종교에 더 몰입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순수한 신앙적인 판단에서 그러는 것은 뭐라할 것은 아니지만,

사랑의 아픔을 피하기 위해서 신앙에 매달리는 분들을 보면 한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많이든다.


상처를 신앙으로 승화시켜서 극복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게 과도하게 흐를 경우 신앙이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종 보인다.

(여기에 상처는 사랑 이외에 수 많은 다양한 상처가 포함된다.)


사랑과 신앙이라는 부분...

둘 다 균형을 맞춰줄 필요는 분명히 있어 보인다.


+


나에게 현재 몰입할 대상이 존재한다.

그렇게 때문에 나는 고독하지 않을 수 있는 것 같다.


대학원에 입학해 공부를 하기 시작한 이후로 

혼자 있는 시간이 부쩍 늘어났지만, 오히려 회사를 다닐 때보다 고독함을 덜 느낀다.


이유는 사랑도 신앙도 아닌 신념이라는 부분이 생겼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는 목표가 너무나 명확하고, 아직은 수풀을 헤메고 있기는 하지만,


이 숲을 헤쳐나왔을 때 

세상을 향해 무엇인가를 던질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을 하지 않지만,

종교에 대한 열정도 예전만 하지 않지만,

갈급함이나 답답함을 느끼지 않는 평안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다시 사랑하고 싶은 욕심은 많이 있지만,

신념이라는 부분이 아직은 상대적으로 굉장히 크기에

신념을 같이 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무리해서 사랑에 목메고 싶지는 않다.


어느 새 남들이 말하는

3포세대(연애, 결혼, 출산)에 자연스레 합류해버렸지만,

남들이 날 3포세대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이런 남들 시선에는 자유로운 듯하다.


다만, 이 신념이라는 몰입의 힘빨이 떨어지기 전에,

다시 고독을 느끼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사랑이 다시 시작됐으면 좋겠다.




열린 공동체 사회 Pot cast/[Bunker1] 강신주 3포세대, 강신주, 고독, 몰입, 벙커1, 사랑, 스피노자, 신념, 신앙, 자의식, 종교, 평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