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사의 이해 ⑦] 민주당과 제2공화국

2014.04.07 13:07
이승만의 정치이데올로기
국내도서
저자 : 서중석
출판 : 역사비평사 2005.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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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승만 시대에 대한 서중석 교수의 여러 논문을 묶어 놓은 것인데,

그 중에서 이승만 시대의 한국 야당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운 시사점을 전달해준다.


한국 정치에서 본격적으로 야당이 등장한 것은

1955년 창당된 민주당이지만 민주당은 그 이전부터 역사를 가지고 있다.


민주당의 뿌리는 해방 후 등장한 한국민주당(한민당)이다.


한민당은 해방 직후 좌익 세력이 결집되어 있던 건준에 대항하기 위해서

우익세력들이 결집한 정당이였으며 사실상 친일이라고 불릴 사람들까지는 아니였다.


송진우, 김성수, 장덕수 등이 주요 인물이였고,

김성수나 장덕수들은 친일행위를 하기는 했지만 

건준의 여운형도 이들의 행위를 문제삼지는 않았고, 처벌까지 받을 정도의 나쁜 짓을 하지는 않았던 것같다.


미군정의 비호 아래 실질적으로 여당행세를 한 이들은

대부분 지주 출신의 부르주아들이였고,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였기에 

일제시대에도 창씨개명도 하지 않고도 버틸 수 있을 정도로 사회적인 영향력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친일 논란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기에

이승만을 전면에 내세우려고 했지만 이승만이 독자행보를 벌이면서 적당한 유대관계를 유지한다.


오히려 이 시절 진짜 악질 친일파들은 

독립운동가이면서 엘리트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이승만에게 붙었고

그렇기 때문에 반민특위 사건 등에서 이승만이 철저히 친일파를 도와주게 된다.


+


1948년 첫 번째 선거에서 한민당은 29석을 차지하지만

한민당 출신의 무소속과 독촉 일부 인원을 포함하면 70석정도를 차지한 것으로

이승만 지지세력과 무소속구락부 소속과는 거의 비슷하게 삼등분 하게 된다.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을 밀어주었고, 

부통령 선거에서는 이시영을 당선시키지만,


국무총리에 김성수를 밀었음에도 이승만은 이범석(무소속 구락부)을 지명하고,

국무위원에는 대부분 자신의 세력을 임명하였으며, 농림장관에 조봉암을 기용하는 등

내각구성에서 철저히 한민당을 견제하는 형태를 보여주면서 이승만과 갈라서게 된다.


* 사실상 당시 이시영 선생은 나이가 너무 많았고, 부통령은 아무런 실권이 없는 명예직이였다.


1949년에는 위축되는 당세를 만회하기 위해서

대한국민당과 합당을 추진하여 민주국민당(민국당)으로 조직되었고,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소장파(무소속구락부)가 궤멸하자 사실상 여당의 지위를 다시 확보하게 된다.


하지만, 1950년 5.30선거에서 완패를 한 민국당은 24석밖에 차지하지 못했고,

조병옥, 윤치영 등 대표 주자들이 모두 낙선하면서 그 기반이 완전히 흔들리게 된다.


1951년 이승만이 자유당을, 조봉암이 신당, 

그리고 내각책임제를 추진하던 공화민정회의가 신당을 추진했으나,

조봉암 신당은 대남간첩단사건으로 막을 내렸고, 1952년 보궐선거에서는 자유당이 압승을 거두게 된다.


1954년 총선에서 온갖 부정선거가 남무하며, 

자유당이 114석으로 압승을 거두고 사사오입개헌까지 진행되 자유당 왕국이 건설된다.

(민국당은 이 때 15석밖에 차지하지 못하며, 1952년 대선에 이은 연이은 참패로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다.)


친일파의 세상이 되어버린 자유당 정권에 대한 위기의식은

1955년 야권통합의 움직임으로 나타나지만, 결국 조봉암은 제외된다.


한민당-민국당계열, 원내 자유당계열, 

흥사단계열, 조선민주당계열이 통합된 민주당이 탄생하게 된다.


사실상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제1야당이 탄생하게 된 것이며,

현재 새정치민주연합도 그 뿌리를 이 민주당이라고 이야기한다.


신익희, 조병옥, 장면, 김보연, 윤보선 등 다양한 출신들이 모였지만,

사실상 극우반공주의라는 측면에서는 자유당과 기본 성향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민주당 내의 세력은 구파와 신파로 구분될 수 있었고, 

4.19 이후 총선을 계기로 구파가 신민당으로 분당하게 되면서,

이후 김영삼(구파)와 김대중(신파)계열로까지 이어지는 긴 역사를 가지게 된다.



민주당의 구파와 신파는 

초기부터 조병옥과 장면으로 편이 갈려 끝없이 분파성을 보이게 되고,


정책적으로 내각책임제를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구파는 자유당과의 적당한 타협을, 신파는 순수 내각제를 주장하면서 대립하게 된다.


민주당의 구파는 한민당에서 시작된 호남 출신의 지주 부르주아들이였으며,

일제시기에 관료같은 직위를 가지지 않았고, 장덕수를 제외하고는 들어내놓고 친일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깨끗하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으며, 독립투사들보다는 인기가 확실히 떨어졌다.)


미군정 시기에는 한민당 소속으로 실질적으로 여당행세를 했고,

한민당 시절 이승만 정권과 사이가 나빴으나, 민국당으로 넘어오면서 다시 실질적인 여당 행세를 했다.

(핵심 맴버인 조병옥, 윤보선, 김도연 등은 모두 이승만 정권 초기에 고위직에 있었음)


반면, 민주당의 신파는 이에 비해서 일제시기에 관료 출신들이 대부분이였기에,

친일파가 다수를 이루고 있었고, 미군정시절 하급관료에서 고속 승진을 한 원내자유당계가 많았다.

신파의 핵심에는 장면이 있었는데, 천주교의 경제적 지원과 경향신문의 정치적 지원을 받았다.


조병옥과 장면은 미국정부에 의해서

이승만의 후계자로 거론될 정도로 미국과의 사이가 매우 좋았으나,

조병옥은 미군정 시절 친일 경찰을 독려하면서 좌익을 탄압한 경력으로 인기가 매우 없었고,

장면은 4.19 국면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전투적인 정치가보다는 온화한 관료적 스타일이였다.



당시 민주당은 1956년 대선과 1958년 총선에서 상당한 선전을 펼치게 되는데,

이는 민주당이 자유당과의 대립 구도에서 제대로된 공약을 내놓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차별화를 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능동적 적극적으로 유권자를 자기편으로 끌어당긴 정당이 아니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 도시 사람들은 이승만 정부에 비판적이었고, 반자유당 정서가 팽배해갔다.
이승만의 독재와 억지, 자유당정권의 실정과 횡포, 부패 때문이었다.

(중략)

민주당 지지표에는 반자유당표, 소극적인 동정표, 투쟁해주기를 바라는 표 등이 다수 섞여 있었다.
민주당이 깨어지지 않은 이유는 민주당이라는 간판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도 이러한 민주당 지지표의 속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디시 말해서 도시민들이 민주당에 표를 주는 이유를 민주당 간부들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주당은 자유당과 싸우는 야당이라는 입장 때문에, 또 표를 몰아주는 것을 의식해서 때로는 강경하게 여당과 싸우고, 매판재벌을 비판하고 중소자본을 옹호하며 극우반공체제의 이완과 해체를 불러올 자유민주주의 지향성도 보이게 됨을 앞에서 기술하였지만, 그러한 이미지들이 복합되어 있는 민주당이란 간판만 가지고 있으면 대도시에서 몰표가 나오기 때문에 민주당을 깰 수가 없었다.


<이승만의 정치이데올로기 p. 248 - 249 (서중석 2005)>


+


1960년 정부통령 선거가 시작되기 전까지

사실상 민주당은 선거를 포기한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1956년 부통령선거에서 승리했던 장면은 저격사건을 경험했고,

1959년 혁신세력의 조봉암은 사형을 당했고, 민주당 신파의 지지세력인 <경향신문>은 폐간되었다.

결정적으로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조병옥은 선거를 앞둔 1960년 2월 사망하게 된다.


대통령은 이승만의 단독 출마이기에 당선이 확실했고,

부통령은 장면이 현직이기는 했지만 부정선거가 너무나 예상되던 상황이였다.


하지만, 역사는 중고등학생들이 바꾼다.



선거가 시작되기 전인 2월 28일부터 시작된 시위는

4월 11일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면서 본격화되었고,

4월 19일 마침내 전국으로 완전히 확산되게 된다.


1950년대 나름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좌우의 이념논쟁에 의해서 전쟁에서 모두 사망했었다.


하지만, 일본 국군주의 교육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았던 

1940년대 태어난 중고등학생들은 불의한 현실에 대해서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4.19일 피의 화요일,

유일하게 유서를 남겼던 한성여중 2년생 진영숙 학생은 

데모버스를 타고 구호를 외치다 총알에 맞아 숨기고 말았다.


"어머니,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온 겨례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주세요.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4.19이후 미국이 태도를 바뀌면서 군과 경찰도 더 이상 안움직이게 되었고,

4월 25일 대학교수들마져 나서기 시작하면서, 4월 26일 이승만은 사임 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사람들은 4.19 하루만 기억하고 있지만,

거의 2개월에 걸친 긴투쟁이였고, 이승만 정권의 안일한 태도가 큰 화를 만든 것이다.


학생들은 처음부터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지 않았고,

단지 공정선거와 재투표를 요구한 것이였지만 4.19로 확대되면서 사태를 걷잡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결국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이라는 단서를 붙이고,

대통령을 사임하였고, 이기붕은 4월 28일을 자족들과 함께 자살하게 된다.


+


4월 혁명 때 장면은 사실상 부통령을 사임하고 사태를 방관했다.

이미 임기가 거의 끝난 상황이기에 사임이라는 것은 상징성밖에 없었고,

오히려 사임을 함으로써 바로 대통령을 인계받지 못하고 허정의 과도정권이 출범하게 된다.

(장면이 오히려 자유당의 수명을 더욱더 연장해준 셈이 된 것이다.)


학생들의 주도로 혁명은 일어났으나,

미숙한고 비조직적인 혁명세력이 집권할 수는 없었고,

본질적으로는 반혁명세력과 별반 다르지 않은 민주당이 자유당과 손잡고 과도정권을 유지하게 된 것이다.


내각책임제를 비롯한 민주적인 개헌이 일어났지만, 반공적인 성향은 강화된 국가보안법이 개정되었고,

대신에 기본적인 자유를 보장해주는 법률이 통과되었다.


총선에서 민주당은 압승을 거두지만, 조병옥이 사라진 구파는 신민당으로 분당했고,

대통령은 윤보선, 국무총리는 장면이 선출되게 된다.



4월혁명의 영향과 집권 정권의 약함으로 인해서

야당시절의 선심성으로 남발한 공약들이 온화하고 성실한 국무총리 장면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언론의 자유 보장과 경찰 조직 개편이 단행되었으나,

민족주의자나 진보세력을 억압하는 행태는 계속해서 이어졌고, 자유당의 처벌도 지지부진했다.


자유를 얻은 언론은 정권의 실정과 무능을 쉬지 않고 과장해서 보도했고,

강력한 경찰과 군대에 대한 장악력 부재는 후에 5.16쿠테타의 빌미를 제공해준다.


이런 면에 있어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임기 중 언론에 당한 것과 퇴임 후 후임에게 당한 것을 연상시킨다.

(원론적으로는 잘 한 것인데, 결과가 나쁘면 이런 부정적 평가를 받을 수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장면은 3.15부정선거의 원흉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의지 강약을 다시 한 번 드러내면서 사실상 인기를 잃게 된다.

(장준하 같은 사람이 왜 박정희의 쿠테타를 환영했는지 이해할만한 부분이다.)


집권 2년차에 접어들어서 내부적인 혼란을 수습이 되었으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결정적으로 장면의 권력의지가 너무나 허약해서 쿠테타의 빌미를 제공해주고 만다.


사실 기본 정책상 극우반공주의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자유와 민주주의 신장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었고 나름 장기적인 경제정책도 수립했었다.

그리고 통일 정책에 있어서도 다소 유보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그래도 한 발 발전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혁명의 전면에 나서지도 않았고,

공짜로 주어진 정권이기에 큰 틀에서 혁명을 할 능력도 없었다.

경제정책도 기본적으로 특권재벌과 대기업에 의존하는 경제정책을 벗어나지 못했고

당장 주어진 일 수습하기에 바빴고, 군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통제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뭔가 보여주기에는 집권기가 너무 짧았다.


제2공화국과 장면 정부에 대해서는 역사에서 별로 거론이 안된다.


잠깐 스쳐지나간 정권으로 비춰지기 쉽고,

사실 내용을 봐도 그런 성격이 강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4.19의 주체인 민중의 힘에 의해서 압박이 가해지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변화의 기미가 보이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다만, 지도자가 너문 온순하고 변화를 하지 못해서

지지부진했다는 점이 있기는 하지만 민주화가 좀 더 일찍 올 수 있는 기회였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박정희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산업화가 좀 더 늦게 진행될 수 있었다는 점도 인정하는 바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2공화국은 

4.19의 바람이 잠시 머물다가 스쳐지나간 정부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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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기업] 문턱없는 밥집 -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거듭나다

2013.12.11 17:33

2007년  7월  9일

사회적 관심을 받으며 문을 열었던 문턱없는 밥집은...


한겨레 신문 관련 기사 <- 보러 가기 클릭



2012년 10월 31일

이사회를 통해서 폐점 통보를 받았다...


경향 신문 관련 기사 <- 보러 가기 클릭




나름 사회적 기업 분야에서의 대표 주자였던

문턱없는 밥집의 폐점은


사회적 기업 분야에서는 굉장히 충격적인 뉴스였다...


사회적 기업 무용론이 더욱 거세지면서,

과연 대한민국에서 사회적 기업이 가능한가?

협동조합도 사회적 기업의 전처를 밝는 것은 아닌가?


여러가기 이야기가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문턱없는 밥집의 실패 원인을 살펴보면, 


가장 큰 원인은 지배구조에 있었다.


문턱없는 밥집은 2007년 '변산공동체'를 만든 윤구병 대표가

독일의 '경계없는 식당' 을 모델로 만들었다.


윤구병 대표가 발의하고, 보리출판사에서

그 동안 모아온 공익기금으로 마련한 건물의 일부 공간을 제공해 탄생했다.


2008년 5월 보건복지부 산하 학술 장학재단인

민족의학연구원의 한 부서로 소속되었다.


하지만, 연구원 이사회의 행정 착오로

사업승인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 정관에 없는 이윤사업을 한 것이 되었고,

취득세와 등록세 1억 6000만원을 부과받게 된 것이다.


후원기관의 도움으로 세금은 처리했지만,

보건복지부는 연구원의 사업으로 부적합하다는 의견을 냈고,

결국 누적된 적자 문제까지 겹치면서 2012년 10월 31일까지 폐점하기로 한다.



+


이 소식을 들은 밥집 직원들은

노조를 만들어 구청으로 부터 인가를 받았고,

마을대책위원회를 구성해 밥집을 마을 식당으로 만들었다.


일단 서울시의 마을공동체 사업에 참여하게 돼 운영비용으로 1억원을 지급받았고,

서울시가 제공하는 마을 멘토와 경영 멘토에게 운영에 관한 조언을 받게 되었다.


여기에 '문턱없는 밥집 살리기 시민대책위원회'가 구성되어

마을 주민으로 구성된 10명의 이사와 100여명의 조합원이 함께 운영할 예정이다.


민족의학연구원은 대책위의 뜻을 받아들여

임대료와 보증금을 받으며 계속 밥집을 운영할 수 있도록 운영권을 넘겼다.


이제 사회적협동조합으로 거듭나 새로운 생존을 모색하게 되었다.


경향 신문 관련 기사 <- 보러 가기 클릭


+


아직까지 사회적협동조합은 생소한 개념이다.


'행복 도시락'이 사회적 협동조합의 인증을 받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해 성공한 사례는 없다.


'행복 도시락' 역시 자활공동체로 시작해,

사회적기업을 거쳐, 이제는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모습을 바꾼 것이다.


규모적으로는 성공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사업적으로는 아직도 자생력과 지속가능성을 갖추지 못했다.


사업을 시작한지 10년이 가까이 되어가지만,

대기업의 후원과 정부의 지원이 끝나면 향후 장래가 불투명하다.



이는 문턱없는 밥집도 마찬가지다.


저녁에 버는 돈과 후원금으로 점심식사를 제공하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수익성이 너무 떨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거듭나서,

현재의 비즈니스모델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탈리아의 에밀리아-로마냐처럼 정부와의 협력관계가 중요하다.


다행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서울시에서 매우 적극적이다.


서울시는 반값 밥집, 저축 식당을 추진하려고 고려중이다.

이는 문턱없는 밥집의 모델을 추가적으로 확대한다는 정책이다.


조선 일보 관련 기사 <- 보러 가기 클릭


+


민관협력으로 운영하는 사회적 협동조합은

소외계층을 위한 새로운 대안으로 점차적으로 증가하길 기대한다.


하지만, 정부의 지원을 받는 사회적협동조합은

확장성에 있어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사회적협동조합의 모델로 시작하지 않은

문턱없는 밥집이 사회적협동조합으로 전환했다는 소식이~


달갑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사회적 경제의 모델이 사회 전반에 자리잡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생력을 가지는 협동조합의 사례가 많이 나와야한다.


문턱없는 밥집은 비록 사회적 기업의 모델로 시작했지만,

자생력과 상업성을 가져야하는 협동조합에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회적 미션을 수행하면서도,

상업적으로도 성공하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이러한 모델들이 많이 나오지 않으면,


한낮 꿈에 불과하다고... 어쩔 수 없다고...

사람들은 사회적 경제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사회적 경제의 활성화를 위해서라도...

성공하는 비즈니스 모델이 하루 빨리 나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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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공동체 사회 Social Innovation/Social Enterprise 경향신문, 마을공동체, 문턱없는 밥집, 민족의학연구원, 변산공동체, 보리출판사, 사회적 경제, 사회적 기업, 사회적 협동조합, 서울시, 한겨레, 협동조합

  1. 우리나라에서는 사회적경제를 경제적인 관점이 아니라 윤리적인 관점에서 정말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많습니다. 일례로 제가 아는 분은 공유경제 분야 사업을 하는 사람인데도 사회적기업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더군요. 세금 포탈 목적으로 사회적기업 제도를 악용하는걸 너무 많이 봤다면서... -_-; 또한 제 블로그가 지금은 사회적경제 블로그지만 이전에는 사회적기업 블로그였는데 제 블로그에 대놓고 항의를 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경제구조로는 사회적기업이 오히려 동네상점 등에 피해를 주어 사회에 피해를 주는 기업이라고 주장하더군요.

  2. 문턱없는밥집에 대해서는 실제로 방문해서 소비자의 입장에서 음식을 먹어본 적이 몇번 있는데, 잘 안될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일단 맛의 경쟁력이 부족하고, 더 심각한 문제는 여기 방문한 소비자들에게 밥을 남기지 말 것을 강요하더군요. 아무리 밥을 남기지 않는 것이 윤리적이라지만 소비자들에게 밥을 남기지 말 것을 강요하는 태도가 윤리적일까요? 마인드부터가 글렀다는...

  3. 맛이없다니... 치명적이군요... 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