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nker 1] 강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 시즌2 Episode 01 - 해방 후 민족음악

2015.01.31 23:49


오랫만에 들어보는 강헌선생의 강연!!


역시나 명불허전이였지만,

이번 강의는 서론이 좀 너무 길고, 

결론이 조금은 아쉽게 급 마무리된 느낌이 들기는 했다.


1860년대 러시아 5인조와

1945년 해방 직후 한국의 민족음악


다른 듯하지만, 매우 닮은 이 2가지 이야기는

'김순남'이라는 한국이 낳은 천재가 역사의 회용돌이 속에서 사라져버린 안타까운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강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 시즌2 Episode 01 - 누가 우리를 주변이라고 부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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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5인조는 분명 중학교 음악교과서에 나왔던 것 같은데, 강헌선생의 강연을 듣기 전까지는 완전히 씨커먼케 잊고 살았던 그냥 암기의 대상이였다. 민족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민요를 중심으로 음악활동을 펼친 흐름이 있었다.


(사진 출처: 알라딘 블로그 http://blog.aladin.co.kr/763908185/6702903)


하지만, 그들이 가진 의미는 대단했다.

(진짜 우리나라의 암기식 교육의 폐해가 심각하다...)


밀리 발라키레프
세자르 큐이

  이 중에서 음악을 제대로 공부해본 사람은 리더겪인 밀리 발라키레프 뿐이며, 나머지는 각자 다른 직업을 가진 체 틈이 나는대로 음악활동을 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들이 지은 모든 곡을 합쳐도 당대 라이벌이였던 차이코프스키 혼자 지은 곡에 숫자에서도 안되고, 음악적인 완성도에서도 완전히 밀린다고 한다. (물론 차이코프스키는 이들을 개무시했다.)

  당시 러시아 왕실과 귀족들은 일부러 프랑스어를 사용했고, 당대 러시아에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독일어로 작곡을 했다고 한다. (강헌 선생은 이들을 마치 지금 대한민국에서 영어로 잘난척하는 것에 비유한다.) 하지만, 1860년대 러시아에서도 근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슬라브주의라는 우리만의 독창성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당시 전세계적으로도 민죽주의 열풍이 일어나고 있었고, 덴마크나 체코에서도 비슷한 민족주의 음악가가 나왔다고 한다. 당시 러시아의 음악계는 안톤 루빈스타인과 니콜라이루빈스타인을 중심으로 전형적인 서유럽의 음악이 대세를 이루었고 상트페트로부르크 음악원이나 모스크바음악원을 만들어 적극적으로 서유럽의 음악을 도입하고 있었다. 이들 세력의 최고 에이스는 차이코프스키였고, 이들은 민족주의 흐름을 철저히 무시하면 '5인조'라는 별명을 붙였는데, 역으로 5인조는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내는데 활용한다. 5인조는 상테페트로부르크에 무료음악원을 개설하는 등 철저히 민중에 다가서는 행보를 보였고, '음악은 기교가 아니라 시대와 민중의 삶이 전달되는 도구'여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음표가 직접 말하게 한다는 주장을 하며 러시아의 민요들을 재해석한다. 이는 역으로 차이코프스키에게 영향을 주었고, 차이코프스키라는 뛰어난 테크니션을 이를 통해서 세계적인 음악으로 거듭나게 되었다고 한다. 라이벌이 선의의 경쟁을 펼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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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해방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이런 선의의 라이벌이 형성될 수 없었다.

1945년 해방이 이루어지자, 일본인들이 빠져나간 빈공간을 정리하기 위해서 음악계에서도 자생적인 움직임이 시작된다.
<조선음악건설본부>라는 이름으로 재빨리 만들어지지만, 급하게 만들어지면서 친일파와 민족주의자가 모두 모이게 된다. 당연히 판은 깨지고 친일파는 현재명을 중심으로 <고려교양학 학회>를 만들게 되고, 비주류의 젊은 음악가들은 <조선프로레타리아 음악연맹>을 만들게 된다. 음악이 아니라 영어가 전공이였던 현재명은 일본인들의 도움으로 미군정과 손쉽게 연을 닿게 되었고, 경성음악학교라는 교육기관과 한국최초오케스트라를 보유하면서 완벽하게 음악계를 장악하게 된다. 1945년 10월, <고려교양학 학회>가 미군정 환영 음악회를 열 때<조선프로레타리아 음악연맹>은 경성방직 파업음악회를 개최하는 완전 상반된 움직임을 보였지만, 세력은 급격히 현재명파로 기울게 되면서 1945년 12월 <조선프로레타리아 음악동맹>은 <조선음악가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1946년 <고려교양학 학회> 역시 <대한음악가협회>로 이름을 바꾸게 되고, 이제 음악계는 크게 3가지 흐름으로 나뉜다.

현재명을 비롯한 주류 세력은 서양음악을 중시하는 서양음악진영
조선시대의 전통 음악을 다시 살려야한다는 전통음악진영
일제시대 대중들이 즐겨부르게 된 트로트와 엔카를 이어가자는 대중음악진영

하지만, 이들과는 또 다른 제4의 길을 걸은 세력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민족음악진영이였다.
민족음악진영은 일제시대때부터 활약했던 안기영을 제외하면 모두 2세대의 젊은 음악가들이였다.

안기영은 미국 유학파이며, 작곡가이면서도 테너였다.
홍난파가 서양음악듣고 한국것을 버렸다면, 안기영은 서양음악의 틀을 활용해 우리의 음악을 만들어보려고 했다.

한국에 돌아온 안기영은 이화여전에 교수로 재직하며, 학생들과 지방을 다니면서 민요를 악보에 옮기는 일을 한다.
서양음악진영은 그의 작업을 무시했고, 전통음악진영은 자신들의 밥그릇을 건드린다고 경계했다고 한다.

안기영은 한국의 밀리 발라키레프였고, 그의 창작곡들은 대중에 큰 호응을 얻게 된다. 
1929년 발표된 <그리운 강남>의 경우에는 안기영이 월북해서 현재는 교과서에서 사라져버렸지만, 당대에는 최고의 히트곡이였다고 한다. 서양음악의 기본 화성을 썼지만, 서양음악의 틀안에서 한국적 요소를 녺이는 성과를 낸 것이다.

(유튜브에 검색해보니, 월북했다고 이북 노래라고도 나오는데, KBS 무대에서도 추억의 노래로 소개도 되기도 했다.)


안기영은 1936년, 라미라 가극단을 만들어서 한국최초 뮤지컬 <견우 직녀>를 만들고 향토가극을 무대에 올렸다.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반도가극단으로 이름을 바꾼 두 번째 작품 <은하수>에서는 대박을 치며 정점에 오르게 된다.
팀을 3개로 나눠서 만주와 일본으로까지 순회공연을 다닐 정도였고, 이후 이 극단의 출신들이 대중문화를 장악하게 된다.

한국최초의 개그맨 윤복일(윤항기/윤복희의 아버지)을 비롯하여,
황해 / 백설희 / 백성희 / 김희갑 / 장동희 등 이들이 끼친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음악가동맹>에서 그의 활약은 미비했으며,
월북한 이후에도 큰 활약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1980년까지 살아서 노래를 만든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의 작품 중에 현재 남한에는 이화여대 교가만 남아서 알려져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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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17년 태어난 윤이상과 동갑내기 김순남은
이 정도 수준으로 만족할 수 없었고 그가 이끈 민족음악진영은 완전히 새로운 음악을 추구했다.

안기영의 음악은
화성의 문제 때문에 한국의 음악에 대한 현대적 해석을 하지 못했다.
또한, 우리 전통 음악이 가지고 있던 장단과 서양음악의 박자의 차이를 극복하지도 못했다.

이에 김순남과 그의 2년 후배 이건우는 아예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버린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왕성한 작곡활동을 통해서 
한국최초의 교향곡, 한국 최초의 피아노 협주곡을 만들어냈고,
아름다운 우리말로 쓰여진 시를 가지고 수많은 가곡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나중에 월북해서는 한국 최초의 오페라를 작곡하기도 했다.)

(조수미가 부른 버전도 있는데, 노래는 조수미가 더 잘하기는 하는데, 반주가 너무 기교가 많이 들어가서 이걸로 대체)

그의 연주는 전통적인 장단도 아니고, 서양음악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연주였다.
화성은 더욱더 기가막혀서 연주자 입장에서는 마치 악보에 장난을 쳐놓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민족적 정서를 담고 있기에 듣는 이에게는 너무나 쉬고 친숙한 음악이였고,
그가 작곡한 <인민항쟁가>의 경우에는 북한의 국가로 알려질만큼 좌익을 대표하는 노래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그가 이끌던 <조선음악가동맹>은 현재명의 견제로 고전을 면치 못했고,
좌익 세력이 완전 궁지에 몰리면서 결국 월북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미군정 음악담당 공사 헤이몰츠 대위는
줄이어드 음대에 입학허가까지 받아주었지만 김순남은 이를 거절하고 월북해 러시아로 떠나게 된다.

러시아에서도 천재성을 인정받은 김순남이였지만, 김일성의 남로당계 숙청과정에서 깡촌으로 유배되어 악보를 배껴그리는 일을 하다가 언제 죽었는지도 모른 체 역사에서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행적이 사라진 1954년 동갑내기 윤이상이 세계적인 음악가의 반열에 오르기 시작한 해이다.
역사적인 비극만 없었다면, 윤이상보다도 더 뛰어난 세계적인 음악가 탄생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은 세계적인 음악가가 된 윤이상의 '광주여 영원히!'


개인적으로는 역사의 한 점이 될 수 밖에 없었던, 당시 희생된 수 많은 천재들이 너무나 안타깝다.

 한 역사학자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외세의 힘에 독재자의 폭력 때문에 남한과 북한 모두 용기가 없거나, 비겁하거나, 능력이 없거나, 눈치가 빠른사람들만 살아남을 수 있던 시대가 그 때가 아니였나 싶다.

 그런 비극의 시대가 다시는 오지 않도록, 정신 바짝 차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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