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통] 사회를 보는 시선 ⑤ - 사람들은 왜 불평등을 받아들이는가 (조형근 한림대 연구교수)

2014.10.14 21:05


[2014.03.25] 사람들은 왜 불평등을 받아들이는가 - [시사통] 방송듣기


간만에 굉장히 흥미로운 강의였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지금의 의미로 형성되었으며,

헤게모니이론과 현대 사회의 냉소주의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는 강의이다.


마르크스, 그람시, 알튀세르, 지젝이라는 등장인물도 훌륭했지만,

지난 강의가 약간 짜집기적인 느낌이 들고 현실과의 이질성이 좀 느껴졌다면,

이번 강의에서는 대한민국의 정치 현실을 포괄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강의였다.


+


강의는 일단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부터 시작된다.


이데아(Idea)라고 불리던 관념적인 것들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것을 이데올로기(Ideology)라고 불렀고,

이데올로기를 연구하는 사람들을 이데올로그(Ideolog)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분명히 학부시절 비판 커뮤니케이션 시간에

굉장히 어렵다고 생각한 개념같은데, 조형근교수가 설명하면 신기할 정도로 굉장히 쉽게 이해된다.


이데올로기를 연구하는 이데올로그들은 초기 나폴레옹 지지자들였으나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자 나폴레옹에 대한 적극적 비판자가 되면서 나폴레옹은 그들을 부정적으로 조롱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데올로기의 개념을 구체적으로 정착시킨 것은
칼 마르크스의 <독일 이데올로기(1833)>에서 부터라고 한다.

칼 마르크스는 의식은 물질적 세계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인데,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묘사하기는 하지만 현실을 거짓으로 반영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이라고 표현했고,
사물에 권력이나 신성을 부여하면서 사람은 권력이나 신성이 앖어져버리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상품들이 동일한 노동가치를 가지고 있기에 교환이 가능한데(노동가치설),
실제세계에서는 돈이 가장 중요하고 상품이 다음으로 중요하고 노동은 소외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여기에서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왜곡해서 보게 만들고
지배계층이 피지배계층을 지배하는 개념을 형성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마르크스 이후로 이데올로기는 부정적 의미로 고착되어 버렸고,
과학적 사회주의를 통해서 의식화되어 주체로서 투쟁에 나서고 해방을 쟁취해야할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80년대 학번들은
대학에 입학하면 이러한 의식화 교육을 누구나 받았는데,
그들이 현재 50대가 되어서 기득권이 되고 보수화되었다는 점이다.

이데올로기가 뭔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
보수화되어서 사회적 불평등을 그대로 받아드리는 것은 대한민국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

두 번째 등장 인물은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이다.



전통 마르크스 주의자들이 자본주의가 곧 무너질 것이라 기대한 것과 달리
안토니오 그람시는 경쟁적 자본주의가 독점적 자본주의로 변화되면서 안정화 단계에 들어섰다고 보았다.

마르크스가 물질을 강조하며 하부구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면,
그람시는 하부구조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토대로 형성된 상부구조에 주목했다.

물적 토대를 기반으로 형성된 자율성을 인정하고,
상대적으로 형성된 자율성을 강조했기에 마크르스주의를 보완 확장했으며,

지배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고,
사람들이 이데올로기의 진실을 안다고 해서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고 보았다.

지배계급이 단순히 수탈과 강압에 의해서만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라는 것은 강제와 동의라는 두 가지 요소를 포괄하면서 사람들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피지배계층은 지배계층의 불합리성에 동의를 했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지배계급의 강제라는 부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순응하게 되는 것이다.

대공황이라는 위기 속에서도 자본주의가 힘을 발휘하는 것은
지배계급의 도덕적 지적인 헤게모니가 사회의 모든 곳곳에 퍼져서 작용하기 때문인 것이다.

국가의 기능은 자본주의 발달과 함께 정차 성장해나가고 있으며,
이러한 논리로 보면 복지 국가의 접근도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수단일 뿐인 것이다.

국가는 이러한 접근을 통해서 시민사회 영역에도 침투해
사회의 모든 영역의 활동과 의식을 지배하며 헤게모니를 확장해나갈 수 있는 것이다.

다양한 사회 집단과 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표출하고 조직화하는 시민사회 영역은
자체로써 자생적인 힘을 가지며, 공적 영역과 함께 연대하고 협력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어야한다.

사회적 경제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람시가 이야기한 국가의 헤게모니가 시민사회 영역을 침투하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하는 것이다.

+

세번째 등장인물은
프랑스의 루이 알튀세르(Louis Pierre Althusser)이다.



프랑스 공산당의 대표주자이자, 
파리고등사범학교의 석학으로 이름을 날린 알튀세르는 이데올리기의 재생산에 주목한다.

마르크스가 이데올로기 생산에 주목했다면
알튀세르는 어떻게 계급이 재생산되는지에 주목하였다.

이데올로기를 사람들에게
자발적 동의를 받아내는 지도력이라는 기존 견해에 대해,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는 무의식이기 때문에 의식화 모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데올로기에 무의식적으로 포섭되어 있기에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본다.

여기서 그 유명한 호명의 개념이 나오는데,
우리가 이데올로기라고 부르고 반응하는 순간 이미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것이기에,
이데올로기라고 불러서 반응한다는 것은 이미 우리는 순응해야하는 수동적 주체가 된 것이다.

결론은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이데올로기를 벗어나거나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

마지막 네번째 주자는 
최근에 핫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이다.



대중문화 분석과 라캉 분석가로 대중의 호응을 얻으면서,
패션 업체의 협찬을 받기도 한 걸로 더 유명해졌고 한국에 2013년 방문하기도 했다.

지젝은 <냉소적 이성 비판(1983)>을 저술한
독일의 철학자 페테 슬러터다이크(Peter Sloterdijk)에 영향을 받아
사람들은 이데올로기에 속고 있는지 다 알고 있는데도 그냥 그렇게 산다고 주장을 한다.

진실에 대해서 냉소하기 때문에
우리 시대는 냉소적 주체로 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데카르트가 이성적 주체를 설정한 이후 굉장히 반항적인 사고였는데,
타자로부터 배신당할까봐 미리 냉소하는 것이 생존 방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미, 수많은 약속에 속았기 때문에
트라우마의 영향으로 그놈이 그놈이라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 모두는 상품 경제 속에서 살게 되었기 때문에
유일한 진리가 가격이고 시장논리에 순응하면서 그냥 살 수 밖에 없다는 냉소가 
오히려 사람들에게는 덜 불안하고 안정감을 준다는 것이다.

화폐가 종이 쪼가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화폐물신숭배의 논리에 속고 사는 것이 편하며,
진실을 알게 되면 싸울 줄 알았는데 스스로 오늘날 속물이라고 불리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지젝은 이를 통해서 이데올로기는 의식이 아니라 행위라고 보았고,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다 아는데, 그래서 어쩌라고?' 라는 반응과 일맥 상통한다.

+

그렇다면 한국 사회가 안바뀌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놀랍게도, 4명의 설명이 
모두 가능한 것이 바로 대한민국이다.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세대 분열과 미디어의 변화,
민주정권 10년과 보수정권의 재집권, 경제 환경의 급격한 변화 등

너무나 역동적인 대한민국의 현실이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을 만들어냈고,
몰라서 속는 사람도 있지고, 무의식적으로 당하는 사람도 있고, 동의된 사람도 있고, 냉소적인 사람도 있다.

확실한 것은 아직까지 보수적으로 불평등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불안정해 보이는 사회 변혁을 바라는 사람보다는 더 많다는 것이 2012년 선거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사회 변혁을 원하는 사람들이 지지를 못받는 이유는
보수 집권층에 대해서 몰라서, 무의식적으로, 그들에 동의해서 그런 것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들은 대부분 60대 이상의 노년층일 확률이 높다.

50대가 아직도 보수층을 지지하는 결정적 이유는
사회 변혁을 주장하는 사람이 못 믿어워서가 클 것이며 이는 냉소주의와 가장 가까운 듯하다.

결국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새로운 희망과 이를 실철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신뢰이다.

과연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것을 얼마나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아직까지 대한민국에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세력은 별로 없어 보인다.


열린 공동체 사회 Pot cast/[담론통] 조형근 나폴레옹, 냉소적 이성 비판, 냉소주의, 노동가치설, 독일 이데올로기, 루이 알튀세르, 무의식, 불평등, 상부구조, 슬라보에 지젝, 시사통, 안토니오 그람시, 엥겔스, 이데아, 이데올로그, 이데올로기, 조형근, 칼 마르크스, 피테 슬러터다이크, 하부구조, 허위의식, 헤게모니, 호명이론

[시사통] 사회를 보는 시선 ④ - 엘리트의 사회지배는 불변인가 (조형근 한림대 연구교수)

2014.10.14 18:38


[2014.03.18] 엘리트의 사회 지배는 불변인가 - [시사통] 방송듣기


다윈의 진화론은 생명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꾸어버렸다.
하지만 생물학에서 시작된 다윈의 진화론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해석한 사람들이 있다.

'적자생존'이라는 논리로 <사회진화론>을 주장한 허버트 스펜서와
'만물은 서로 돕는다'는 <상부상조론>을 주장한 표트르 크로프트킨이 그 주인공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환경의 변화에 따라 
그에 적합한 생물체가 살아남는다고 설명했으나 그 생존의 방법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영국의 사회학자였던 허버트 스펜서는
생물들이 생존 경쟁을 통해서 더욱더 환경에 적합한 자만 살아남는자고 주장한 반면,

러시아의 지리학자이자 사상가인 표트르 크로프트킨의 경우에는
시베리아 여행을 통해 관찰할 결과 만물은 서로 연대하고 돕는 과정을 통해 살남는다고 보았다.

생명의 진화과정에 대한 전혀 전반대의 설명인 것이다.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우파들의 사상적 기반으로 오랜 기간 활용되었고,
표트르 크로프트킨의 <상부상조론>은 협동조합과 아나키즘의 사상적 뿌리가 되고 있다.

+

하지만, 자연 선택의 원리를 사회학에 적용시켜
적자생존의 원리로 설명한 허버트 스펜서의 주장은 당대의 지배적 사고가 되었고,

유럽을 넘어 아시아까지 넘어와서 
일본은 물론 안중근과 같은 수많은 민족주의 좌파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스펜서는 사회구조의 복합성도 증대하면서 
사회는 단순사회에서 점차 복합사회로 진화되어가는데,

상호 의존성이 높아지고 통합도 증가하면서 
점점 관리와 규제의 기능이 커지게 되며 엘리트가 이를 담당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이탈리아출신의 
경제학자이면서도 사회학자인 블브레도 파레토와도 상통한다.

파레토는 엘리트를 사자형과 여우형으로 구분하며,
인간에는 격차가 존재하기 때문에 두 엘리트 유형이 순환 지배할 수 밖에 없다고 보았다.

하지만, 폐쇄된 사회에서는
실제 능력있는 사람과 현재 엘리트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으며,
사회 격차가 커져서 피지배 엘리트가 지배 엘리트가 될 수 없을 때 불만이 켜저 폭력적 변혁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스펜서와 파레토는 사람의 능력의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고,
능력이 뛰어난 엘리트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해야한다는 점에서는 우파적인 주장같지만,

그 역할이 사회적으로 규정되었다는 구조기능주의적 견해와 비교한다면,
기회의 불평등에 대해서는 오히려 반대하고 능력에 따른 역할을 주장했다는 점에서는 진보적인 사고였다.

+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을 건드린 사람이 바로 로베르트 미헬스이다.

독일 사회민주당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미헬스는
사회민주당에서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당사회학(1911)>라는 책을 쓴다.

1900년대 유럽 사회주의의 간판격이였던 사민당이
1차 세계대전에 동의하는 등 왜 개량주의, 수정주의적 노선을 갔는지 그 원인을 자세히 분석했는데,

당시 외부에는 당의 창설자인 페르디난트 라샬의 이념적 후유증으로 알려져있었으나,
미헬스는 막스베버의 제자답게 조직적 차원에서 관료제가 어떻게 변질되는지를 분석해서 설명해주었다.

'과두제의 철칙(Iron law of Oligarchy)'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이 연구는 관료제라는 조직에서 과두제가 나타나고, 
과두제에서 보수적인 신엘리트를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과정을 사민당의 성공과 격변이라는 과정을 통해 설명한다.

특이한 점은 미헬스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서 굉장히 이중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조직의 규모가 커져서 관료제가 되면 과두제가 나타나고 
소수의 엘리트가 지배하게 될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하면서도 과두제가 무너질 수 있다는 희망을 놓치 않았다.

민주주의 통치는 거짓말이지만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기에 과두제는 무너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아버지가 숨겨놨다고 이야기했던 보물을 찾는 것처럼 허황된 것이지만,
그 허황된 꿈을 찾기 위해서 땅을 뒤엎어버리는 과정에서 땅은 비옥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투쟁은 배반당하고 결국 새로운 과두제만 나타나지만,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사회는 계속해서 발전해나갈 수 있다는 새로운 희망을 동시에 제시한다.

이후의 미헬스의 행보는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사회주의 경력 때문에 수임용에 탈락해서 이탈리아로 넘어가게 되었으며,
이탈리아 국적을 획득(1914)하고 파쇼당에 입당(1923)한 후 무솔리니의 지지를 받으며 우파로 돌아서게 된다.

미헬스는 대중에게 지도자를 추정하고자 하는 복종 심리가 있고,
대중은 전통지향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는 했지만 민주주의 희망을 놓치 않았었다.

결국 미헬스가 우파로 돌아서게 된 것은
냉혹한 사회 현실로 인한 대중에 대한 실망이 그를 냉소주의에 빠지게 만든 것은 아닐까?

+

사회진화론의 논리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크로프트킨의 주장처럼 환경에 적합한 자가 남는다는 개념을 경쟁을 통핸 남는 것처럼 과대해석했다는 비난을 받는다.

진화론 자체가 변화의 방향성을 이야기한 것은 아닌데,
스펜서는 사회가 성장한다는 목적론적 관점을 투영해버린 것이다.

다윈이 이야기한 진화라는 것은 
목적과 방향도 없고 환경의 변화에 따라서 대응한다는 것이며, 이는 상황이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상황이론도 
조직 내부에서의 자생적 움직임을 무시했다는 한계를 가지면서
외부 환경의 변화와 내부적인 자생력의 조화로 자기조직화를 이룬다는 새로운 개념으로 발전하게 된다.

세 사람의 견해를 정리해보면 
엘리트가 사회를 지배할 수 밖에 없다는 논리는 다음과 같다.

1) 스펜서 - 사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능력있는 엘리트가 필요하다
2) 파레토 - 인간에게는 능력의 격차가 있기 때문에 능력있는 사람이 지배적 엘리트가 되야한다.
3) 미헬스 - 조직이 커지면 엘리트는 출현하게 되고, 대중은 지도자에 대한 복종 심리가 있다.

결국 엘리트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고,
사회와 구조의 특성상 엘리트라는 존재는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엘리트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근데, 근본적으로 엘리트가 사회를 지배하는 것이 맞다는 논리에 어떠한 지배라는 구체적인 방식이 빠진 느낌이다.

분명히 리더와 지배자는 다르다.
근데, 이들의 논리에서는 이 것에 대한 명확한 구분이 부족하며,
엘리트가 지배자가 아닌 리더가 될 수도 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간과한 측면이 있어보인다.

이는 이들이 생존했던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이라는 시대적 환경 상
오늘날의 리더십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지배자와 피지배자만 존재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을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불평등의 문제를 강하게 인식했던 파레토나
현대적인 네트워크나 홀리그래피적 조직 구조를 경험해본 적이 없는 미헬스에게
오늘날의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의 모습을 상상해달라는 것은 너무나 무리이기 때문이다.

고전을 공부한 것에 대해서는 아주 만족스러운 강의였지만,
오늘날 조직학자들이 엘리트를 보는 견해에 대한 설명이 추가됐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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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통] 사회를 보는 시선 ③ - 좌파가 바라보는 불평등 (조형근 한림대 연구교수)

2014.10.05 23:36

[2014.03.11] 좌파가 바라보는 불평등 - [시사통] 방송듣기


우파가 불평등을 어쩔 수 없는 사회현상으로 봤다면,

좌파는 불평등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그 근원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장 자크 루소, 칼 마르크스, 막스 베버, 피에르 부르디외이다.



장 자크 루소는 그의 명저 <인간 불평등 기원론(1754)>에서

인간은 자연상태에서는 평등했는데 사회 상태로 들어오면서 갈등이 생겼다고 보았다.


거주지에 정착해 가족을 만들면서 사유재산이라는 것이 생겼고,

이를 지키기 위해서 국가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본격적으로 불평등은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를 해체하고 사유재산을 폐지해서

인민들이 평등하게 살수 있게 만들어야한다고 루소는 주장하게 된다.


이러한 견해를 그대로 이어받은 사람이 바로 칼 마르크스이다.


마르크스 역시 원시 공산주의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은 평등했다고 주장하며,

생산력이 올라가 잉영생산물이 발생하기 시작하면서 계급 투쟁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1848)>에서

인류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였고 계급적 불평등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고 주장하면서,

생산수단의 소유에서 시작되는 경제적 불평등이 모든 불평등의 근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마르크스의 견해에 대해서

막스 베버는 경제적 불평등도 중요한 원인이지만 

사회적 명예와 지위, 정치적 권력에 의한 불평등도 존재하기에 다양한 관점에서 봐야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굉장히 설득력이 있어보이지만,

막스 베버의 주특기에 걸맞게 명확한 결론을 제시하지 않으면서 그의 주장은 화두만 던지고 마무리를 한다.


이러한 마르크스와 베버의 견해를 통합시키는 것이 바로 부르디에이다.


부르디에는 경제적 자본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경제적 자본을 재생산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자본만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계급 재생산을 위해서는 정치적 자본, 경제적 자본뿐만 아니라

문화적 자본과 사회적 자본이 추가적으로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사회적 자본이라함은 흔히 이야기하는 인맥을 의미하며,

문화적 자본이라고 함은 끼리끼리의 문화를 통해서 계급적 차이를 극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예가 대중이 축구와 권투, 대중 공연을 즐길 때,

상위 계층들은 몸을 직접적으로 붙이치지 않는 테니스와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흔히 이야기하는 상류사회의 귀족문화를 유지해나가는 것을 의미하며,

고가의 미술품을 수집하고, 최고급 명품과 레스토랑을 이용하는 양태가 대표적인 것이다.


경제적 자본뿐만 아니라 문화적 자본과 사회적 자본이 뒤따라와야지

그들만의 리그가 만들어지고 계급적인 차이는 점차적으로 커지게 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일제시대를 통한 문화적 단절과 근대화 과정에서의 계층 이동이 심했기에,

부르디에가 연구했던 프랑스만큼 문화적 차이가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를 흉내내려는 움직임은 존재하고 있다.


+


흥미로운 점은 루소나 마르크스, 베버, 부르디에 모두

불평등의 기원에 대해서는 사유재산이라는 부분에 동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유재산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한 불평등은 계속될 수 밖에 없는데,

과연 이 사유재산이라는 것을 없애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마르크스는 없애고 싶어했고 없애길 주장했지만 

사실상 인간의 욕망이 존재하는 한 이를 실현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고 자아를 찾기 원하는 인간에게

사유재산은 남과 나를 구별짓는 매우 중요한 원천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과도하게 드러나는 것이 계층이고 고착화되는 것이 불평등이지만,

남과 나를 구별지음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욕망이 있는 한 사유재산은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과도해지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계급화되는 것을 막고,

한 번 형성된 계층이 고착화되어 이동이 불가능해지는 불평등을 방지하는 수 밖에 없어 보인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남과 다르게 구별지어지길 원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눈에 보이는 신분은 사라지고 평등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도 기득권 세력들은 자신들을 사회의 대중과 구별짓고 싶어하는 욕망이 나타나고 있다.


조형근 교수를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계급 정치은 약화되었지만,

계급 역관계만 바뀌어서 아직도 계급 투쟁은 지속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름 아래 

글로벌 자본가 계급은 의도적으로 새로운 방식의 계급투쟁을 시작하면서

세계화의 추세에 맞춰 시장을 개방하고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라고 이야기한다.


이는 노동자 계층의 단결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자영업자와 중간 계급을 몰락시켜서 임금 노동자에 합류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20대 80의 사회에서 80의 불만을 줄이기 위해서는

엔터테인먼트를 강화해야 한다는 티티테인먼트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하고 있다.


좌파에서 이제 계급이라는 개념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할 때,

우파에서는 새로운 계급 관계를 형성하고 이를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


분명 과거 사회와 비교하면 삶에 있어서 많이 평등해졌고,

특권층만의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도 상당부분 개방되어지고 있는 추세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오히려 경제적 자본에 있어서는 부의 집중현상이 강화되고,

불황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그 부작용은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오히려 역사가 되돌가는 듯한 양상을 보이며,

경제적 불평등에 다시 집중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모든 불평등의 근본적인 요인이라고 불리는

경제적 불평등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가장 근본을 건드리는 것이기에

어떻게 보면 사회와 많이 평등화되면서 오히려 가장 근원의 부분까지 찾아오게 된 것일 수도 있다.


과연 이 모든 불평등의 기반이 된다는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21세기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결해나갈 것인가?


자칫하다가는 사회 계층구조의 완전한 파멸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기득권 세력들은 이러한 위기에서 한 번 크게 양보하면서 기득권을 유지하는 전략을 얄밉게 잘 사용해왔다.


복지 정책이 그렇고, 근로조건 개선이 대표적인 방법들이다.

과연 이번에는 이러한 위기를 어떠한 방식으로 극복해낼까? 그들의 대응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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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통] 사회를 보는 시선 ② - 우파 불평등론은 파산했지만... (조형근 한림대 연구교수)

2014.10.05 22:14

[2014.03.04] 우파 불평등론은 파산했지만 - [시사통] 방송듣기


불평등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끝이 없다.


좌파에서는 불평등을 사회악으로 간주하지만,

우파에서는 불평등을 필요악으로 간주한다.


물론 우파의 불평등론은 이제 더 이상 힘을 받지 못하지만,

조형근 교수는 우파 불평등론의 핵심을 구조기능주의에서 찾아보았다.


+


구조기능주의는

전설적인 사회학자 탤컷 파슨스(Talcott Parsons)에 의해서 

주장된 것으로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1970년대 이후로 비판에 직면하게 되면서 현대에 들어와서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이론이다.



하지만, 그의 구조기능주의는

킹슬리 데이비스, 윌버트 무어, 니콜라스 루만 등에 영감을 주었고,

현대 조직 이론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상적 근원으로 인정받고 있다. (물론 비판적으로...)


영국에서 최초로 이주해온 전통적인 교수&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파슨스는

아이비 리그가 아닌 리버럴 아트 스쿨 중에서도 유명한 애머스트 대학교 생물학과 입학한다.

(그의 배경만 봐도 얼마나 전통적인 우파일지 상상이 간다.)


대학교 3학년 때 사회과학으로 전과하게 되면서 사회과학자의 길을 걷게 되지만,

그는 생물학적 유기체론을 기반으로 사회를 유기체와 같이 각자 필수적인 역할이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상호의존적인 존재이기에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면서도 모두가 필요한 존재이지만 중요도는 각기 다르다고 보았다.


파슨스는 왜 사람들이 직업, 기능적인 수평적인 분화뿐만 아니라 

계층적인 수직적 위계질서를 받아들이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뒤르켐의 문제의식을 수용한다.


공화주의 좌파였던 뒤르켐은 혁명시기의 프랑스가

아노미 상태에 빠지면서 갈등이 증폭되면서 오히려 상호의존성이 증가되고,

이로 인해서 분화와 통합이 반복되면서 각자 지위에 맞는 역할을 잘 수행하도록 하는 과정에서 불평등이 용인되었다고 보았다.


파슨스가 보기에 사회의 유기적인 연대를 위해서 불평등은 필요악이였던 것이다.


불평등의 필요성을 주장한 또 다른 견해를 주장한 것은

바로 파슨스의 제자였던 킹슬리 데이비스와 윌버트 무어이다.


이들은 불평등이 사회의 기능적 존속을 위해서

중요한 위치에 적합한 사람을 충원하기 위해서 발달하게 되며,

사람을 차등화시키면서 제도화된 불평등이 나타나기 시작하지만 이 것을 불가피한 현상으로 보았다.


사회적 기능이 작동할 때 어떤 기능들은 더 중요한 기능을 하기 때문에,

뛰어난 능력과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그 일을 수행해야하고, 그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줘야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역할일수록 많은 보상을 해줘야 능력있는 사람들이 모이게 되고,

중요하지 않은 일에는 매우 낮은 보상을 해줘야 사람들은 노력하고 경쟁하게 된다는 것이다.


+


강력했던 이들의 주장이 무너지게 된 이유는 바로

구조적으로 순환논리에 빠져있기 때문이라고 조형근 교수는 설명한다.


'어떤 기능이 다른 기능보다 우월하고 열등한지를 무엇을 기준으로 평가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구조 기능주의는 제대로된 답변을 제시하지 못한다.


청소부보다 의사가 뛰어나다고 말한다면 과연 기준은 무엇인가?

높은 보상을 받으니까 중요한 것인가? 아니면 중요한 역할이기에 높은 보상을 주는가?


청소부가 없다면?

처음에는 별문제 없지만, 장기간 방치되면 사회적 큰 혼란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청소부도 사회에 중요한 역할인 것 아닌가?

그럼 청소부도 높은 보상을 주어야하는 것은 아닌가?


구조기능주의는 이론적으로 치명적 오류가 있어서 폐기되지만,

현실에서는 아직도 막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내가 하류층에 있는 것은 내가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불평등에 대해서 묻지도 않고 그냥 받아들이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


조형근 교수의 강의해서 인상깊었던 것은

어떻게 해서 사람들이 불평등이라는 요소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만든지를 다루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실은 부정확한 사고에 의한 것이지만,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경향이 많이 나타난다.


우파의 불평등론은 이미 논리적 오류를 드러냈지만,

사람들에게는 불평등한 현실을 수용하는 자연스런 인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원래 사회란 그런 것이니까...'


원래 사회는 불평등한 것이라는 생각은 

논리보다는 오히려 믿음의 영향에 가까운 것이지만, 현실에서는 아직도 강력하다.


사회에 만연한 이 지배적 논리를 벗어나서

불평등한 세상에 대한 문제의 근원을 고민하는 좌파의 사상들을 살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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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구하는 경제학 - 조형근(2014)

2014.08.22 10:25

경제가 효율성의 논리일뿐이라는 생각에 

전면으로 맞선 위대한 사상가들의 위대한 생각!!


사회를 구하는 경제학
국내도서
저자 : 김종배,조형근
출판 : 반비 2014.07.21
상세보기


2013년 방송된 팟캐스트에 나왔던 내용을

다시 책으로 엮어서 출간되었기에 굉장히 쉽게 읽힌다.


대부분의 내용이 구어체로 쓰여있고 

단지 위대한 사상가들의 이론만 소개할뿐 아니라

2014년을 살아가는 대한민국 현실에 빗대애서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책에 등장하는 출연진의 라인업은 굉장히 화려하다.


애덤스미스, 마르크스, 케인즈, 슘페터, 막스 베버, 칼 폴라니, 베블린, 마르셀 모스까지...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만한 경제학자들뿐만 아니라

경제학보다는 오히려 사회학에서 굉장한 명성을 얻고 있는 학자들까지...

진짜 이러한 사람들이 나선다면 사회를 구할 수 있을 듯한 쟁쟁한 라인업이다.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주류 경제학에서 필수적으로 나오는

경제학의 기본 가정과 수식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경제학계에서 아직도 이름을 날리고 있는 4명의 학자들은

주류 경제학자나 지지자들에 의해서 자신들이 유리한대로 상당히 왜곡되어있으며,


나머지 4명(막스 베버, 칼 폴라니, 소스타인 베블린, 마르셀 모스)의 경우는

경제학자임에도 불구하고 경제학보다는 사회학분야에서 더 큰 명성을 얻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


누가 뭐라해도 가장 왜곡된 사람은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애덤 스미스이다.


레이건 대통령이 선거운동 과정에서 규제완화를 주장하기 위해

애덤 스미스의 초상화를 넥타이에 집어넣으면서 본격적으로 왜곡이 시작되었으며,

<국부론>에 단 한 차례 등장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표현은 경제학의 절대 진리로 신봉되고 있다.


왜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쓰게 되었고,

애덤 스미스가 주장한 핵심 내용은 어느덧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일단 애덤 스미스가 주로 활동했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해야만 한다.

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양되던 시기 아직도 경제권은 군주들이 확고히 잡고 있었다.


중세 봉건 사회에서만 해도 가난한 사람이 빈곤한 것은 부가 편중되었다는 사고가 강했다.

이러한 사회 구조적 문제나 가진자들의 도덕적 문제를 해결해야만 빈곤이 사라진다는 견해가 강했던 것이다.


하지만, 애덤 스미스는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을 가져왔다.


현재 시장은 절대 왕정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시장을 맘대로 조절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지만,

자유로운 시장 거래와 생산 활동을 통해서 생산량을 증대시킨다면 다같이 부유해지는 국가들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덤 스미스는 분업과 전문성을 강조했고,

이렇게 증대시킨 생산량으로 이윤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게 하길 주장했다.


자유로운 상품 생산과 유통을 허용하되,

이 과정에서 불의가 나타나면 반드시 법으로 응징하고 규제하고자 하는 전형적인 근대적 사고를 제시했다.


윤리학자 출신의 애덤 스미스는 정치경제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고,

절대 왕정에 맞서서 법치주의와 합리주의를 주장하는 전형적인 진보적 사상가였다.


"임금을 많이줘라"

"일주일에 나흘 일하면 사흘은 쉬어야 한다"

"파업이 발생하면 노동자만 처벌하지 말고 자본가도 처벌하라" 등


오늘날 애덤 스미스를 추종하는 신 자유주의자들이 상상하지도 못할 주장을 했을뿐만 아니라,

초등 의무교육, 누진세 추진 등의 굉장히 급진 좌파적 정책도 제안했다고 한다.


+


이에 못지 않게 왜곡되고 있는 학자가 바로 막스 베버이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는

개신교가 자본주의를 지지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논리로 활용되며, 

개신교인들의 이윤 추구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해주는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막스 베버의 연구 내용을 자세히 보면

뭔가 중간에 논리적 왜곡이 작용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막스 베버는 16~17세기의 서유럽 일부 지역(제노바, 플랑드르, 스코틀랜드 등)을 분석했고,

개신교들의 전형적인 특징과 당대 경제 상황의 상관관계를 추적해서 그 의미를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막스 베버는 칼뱅파의 세속적인 금욕주의가 천직에 전념하도록 요구하게 되면서,

소비가 아닌 축적을 향유하는 끊임없는 확대재생산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정신을 만들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막스 베버는 자신의 천직에 전념하라는 칼뱅파의 금욕주의로 인해 

생산은 증가하는데 소비는 발생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자본이 축적되고

이는 끊임없이 자본이 확대재생산되는 자본주의 정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고 보았다.


문제는 여기서 말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에 충실하며, 소비를 절제하는 금욕된 삶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키워드에 주목하면서,

자신의 일에 충실해서 이윤을 획득하는 것이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맞다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해버린다.

(소비를 절제하는 금욕된 삶이라는 부분은 사라지고, 이윤 획득은 어느 새 일의 목적이 되어버린다.)


막스 베버의 문제는 항상 너무 똑똑해서

모순된 현상을 함께 분석했기에 오해의 소지를 항상 남겨두었다.


특히나, 막스 베버는 사회 현상들을 이해하는데 주목했으며 섣부른 일반화를 경계했는데,

'이해의 사회학'이라고도 불리는 이 관점은 막스 베버만의 독특한 학문적 특성이지만, 왜곡된 해석을 낳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막스 베버는 현상을 굉장히 세밀하게 분석했기에,

관료제, 직업 정치인, 카리스마적 리더십, 자본주의 정신 등의 엄청난 키워드를 뽑아내지만,

현실에서는 이러한 용어들이 원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각자 자신들이 사용하기 편한대로 사용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합리적인 관료제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도 

관료제라는 새장 안에 합리성이 갇혀버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경계하였으며,


직업 정치인은 반드시 치열한 경쟁을 통해서 권력을 쟁취해야하지만,

반드시 불변의 진리를 추구할 수 있는 신념 윤리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막스 베버의 이러한 주장들은 왜곡되기 시작했다.


합리적 관료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제도가 가지는 함정에 대한 경계는 무시해버렸고,

정치인들은 자신의 권력 투쟁을 정당화하면서, 신념 윤리에 대한 강조는 뒤전으로 밀어버렸으며,

자신의 이윤 추구 행위를 정당화하면서, 소비를 절제하는 금욕주의에 대한 부분은 살짝 숨겨버렸다.


막스 베버는 항상 현실로 드러나는 부분을 지적한 후 이에 대한 이상적인 요소를 제시하였지만,

사람들은 현실을 설명한 막스 베버의 주장만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


또 한명 대표적으로 왜곡된 학자는 바로 조셉 슘페터이다.


혁신이 사회적인 키워드로 급부상하면서, 창조적 파괴를 주장한 슘페터는

오히려 21세기에 들어와서 경영학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경제학자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슘페터가 주장한 기업가 정신은

경영혁신을 위한 가장 중요한 키워드로 요즘 가장 핫한 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가장 주목하는 것은 혁신적인 사고를 통해서

기존의 틀을 벗어나 완전히 다른 영역을 개척함으로써 막대한 초과 이윤을 얻게 된다는 부분이다. 


혁신 이론이라고도 불리는 이러한 관점은

기존의 균형을 강조하던 정태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역동성을 강조한다는 면에서 경영전략 분야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하지만, 슘페터는 혁신하는 기업가들이 처음에는 막대한 보상을 가지지만

점차 다른 기업들이 모방하게 되면서 혁신의 성과가 골고루 퍼지게 되고 모두에게 혜택이 된다고 보았다.


슘페터에게 혁신하는 기업가는 막대한 이윤을 추구하는 탐욕스러운 자본가가 아니며,

혁신이 좋아서 창조와 성취를 기뻐하는 일종의 엘리트로써 막대한 이윤 획득은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심지어 슘페터는 자본주의가 성장할수록 미디어의 발전과 교육의 확산으로 인해 비판정신이 강해져서,

결국은 자본주의의 성공의 결과가 자본주의를 무너뜨리고 사회주의가 성공할 것이라고 예견하며 마르크스를 칭송하였다.


하지만, 슘페터의 이러한 주장들은 싹~ 무시되고~


혁신 자체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막대한 이윤을 벌기 위해서 혁신을 해야만 하며

이러한 막대한 이윤을 창출한 혁신하는 기업가에게는 막대한 보상을 해줘야만 한다는 주장만 남게 된다.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은 창조를 즐기는 전형적인 혁신하는 기업가였지만,

사람들은 애플의 주가와 스티브 잡스가 받은 연봉에 더욱더 관심을 기울이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


가장 흥미롭게 읽은 3명의 이야기만 정리했지만,

케인즈와 마르크스에 대한 이야기는 책의 내용에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이 밖에도 칼 폴라니, 소스타인 베블린, 마르셀 모스는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매우 흥미로운 새로운 이야기들을 많이했다.


특히 이 중에서도 칼 폴라니와 마르셀 모스는

사회적 경제와 협동조합 영역에서는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인물들이다.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은 이 쪽 바닥에서는 필독서이며,

마르셀 모스는 아직까지 책이 별로 번역이 안된 기대되는 거물이다.


이 번 기회를 통해서 <거대한 전환>을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과연 칼 폴라니가 이야기한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라는 대전제와

그가 제시했던 사회적 경제와 민주주의의 원리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살펴봐야겠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주류 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왜곡된 주장들과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던 주장들을 잘 섞어서 정리해 구성한 느낌이 든다.


아무래도 그렇다보니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칼 폴라니와 마르셀 모스는

새로운 희망을 제시한 인물들로 부각될 수 밖에 없었고 마르셀 모스가 대미를 장식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대안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너무 부족한 것이 많다.

그리고 주류 경제학의 탄탄한 논리를 깨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한 요소들을 고려해야만 한다.


상황을 단순화하고 명확하게 가정했기 때문에 주류 경제학이 급성장 할 수는 있었으나,

사회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기에 주류 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가정은 한계에 붙이치고 있다.


정치경제학으로 시작해서 수리경제학으로 학문의 영역을 좁혀갔던 경제학은

이제 다시 경제학이 자신만의 영역을 벗어나 사회로 돌아와야 할 때가 된 듯하다.


소스타인 베블린으로 시작된 제도주의 경제학이 주목을 받고,

인간의 행동 패턴을 고려한 행동 경제학이 부각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 동안 '사람'이라는 파악하기 어려운 변수를 제외했기에

경제학은 현실을 제대로 설명했다고 이야기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 가상의 공간을 설정해서 논리적 계산을 하는 경제학이 아닌

사람과 함께 숨쉬며 실질적으로 사회를 구할 수 있는 경제학이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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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통] 사회를 보는 시선 ① - 사회를 보는 좌우파의 시각 (조형근 한림대 연구교수)

2014.08.08 01:31

강의 제목은 <사회를 보는 좌우파의 시각>이지만,
사실상 내용은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에 대한 이야기였다.


원래 기획의도는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를 비교하려고 한 듯한데,
사실상 하이에크 이야기만 하다가 시간이 다가버려서 그냥 끝낸 듯한 느낌이다.

암튼 밀턴 프리드먼과 함께 신자유주의의 선구자로 알려진 하이에크는
오늘날 경제 문제의 원흉처럼 취급을 받으며 천하의 못쓸 인간 취급을 받지만,
어찌보면 칼 마르크스와 대적할만한 유일한 우파 경제철학가라고 할만한 거물 중에 거물이다.

조형근 교수는 이러한 하이에크에 대해서
"개인의 근원적 자유와 해방을 위해서 누구보다도 고민했던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진보진영의 학자가 내리는 평가치고는
굉장히 호의적인 평가이지만 하이에크의 주장을 살펴보면 사실 충분히 공감이 가는 평가이다.

+

조형근 교수가 하이에크를 높게 평가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이에크는 다른 신자유주의자들과는 다르게 '자본주의 모순'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시장은 불완전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시장 이외에는 인간의 자유를 보장해줄 수 있는 질서가 없기에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끝없이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추구했고,
그러한 개인적 자유를 보장해줄 수 있는 공간은 자생적 질서를 가진 '시장'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인간이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만든
국가나 기업 같은 존재들은 인위적 질서이기에 개인의 자유를 억압할 수 밖에 없는데,

시장은 스스로 누가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정보 전달의 매커니즘이 가격이라는 것을 통해서 충분히 전달해준다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시장이 불완전한 이유는
완벽한 정보전달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았고,
정보가 제대로만 전달된다면 효율적인 자원 배분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간의 지식은 근본적으로 제한되고 분산되어 있기에
구조적으로 인지적 무지가 발생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이것을 무시한 체 완전한 질서를 만들겠다고 나선 것이 사회주의자들의 치명적 자만이라 비판한다.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자유는 소유의 문제와 연결되는데,
능력으로서 자유를 정의하면 소유가 없는 사람은 자유를 느낄 수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정의를 이야기하면서 소유물을 재분배하려고 개인적인 자유를 침해하게 된다.

하지만 자유는 조건의 문제가 아니기에,
어떤 것으로부터 억압받지 않기 위한 것이 아니다.

자유를 위해서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모순된 상황일 뿐이며,
개인의 자유와 사유재산권을 지켜주기 위해서 강한 국가와 법의 지배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

마르크스 역시 인간을 보편적이고 자유로운 존재라고 보았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인간의 본질을 개개인에 내재하는 추상물이 아니라
이성, 의지, 감정을 공유하는 유적 존재로 보았고 현실에 있어서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 보았다.

그래서는 마르크스가 보기에 인간은 관계에 의해서만 규정되며,
개인적인 자유가 인간의 본질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이에크는 시장이 자생적 질서라고 보았지만,
마르크스는 시장을 인위적 질서라고 보았고, 국가와 자본가의 수탈이 일어나는 곳이라 보았다.

마르크스는 전통적인 시장은 자생적 질서를 가지고 있었지만,
자본주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시장은 인위적 질서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마르크스 역시 시장의 자생적 질서를 중요시 여겼고,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 공산주의 사회를 이야기한 것이다.)

이러한 시장에 대한 관점과 자유에 대한 관점이 차이가 나면서
마르크스와 하이에크는 같은 의도이지만 그 과정 자체가 전혀 다른 반대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개인적 자유가 없으면 노예가 될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노예로 살지 않기 위해서 자유를 추구해야하고 국가가 이를 보장해줘야한다는 것이다.

우파들은 사회주의자들은 이상주의자라고 부르지만,
이런 주장을 보면 하이에크는 이상주의자 중에서도 최고봉에 도달한 듯하다.

+

완벽한 자유를 추구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현실을 인정한 하이에크
그는 시장이 정보가 완벽하게 전달되지 않기에 불완전하다고는 하지만,
정작 정보가 완벽하게 전달될 수 있는 현실에 대해서는 그저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한 듯하다.

뭔가 좀 아쉽다...
완벽한 정보를 전달할 수 없기에 시장이 자생적으로 움직이게 두어야한다?
그러면서도 시장의 자유를 위해서 강력한 국가의 통제가 있어야 한다?

만약 강의실에 있었다면 교수님한테 추가질문을 하고 싶었을 듯하다...
나만 이해를 못하는 것인가? 뭔가 좀 정리가 안되는 느낌이다...

하이에크의 주장이 공감이 가고 이해가 되려는 순간...
뭔가 빠진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내가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무래도 하이에크의 대표저서인
<노예의 길>을 직접 한 번 읽어보는 수 밖에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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