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t cast/[Bunker1] 강헌

[Bunker1특강] 강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 Episode 03 - 클래식 속의 안티 클래식

열린 공동체 사회 2014. 4. 25. 11:39

어느 새 강헌 교수의 광팬이 되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면서 미국에서 일어났던

댄스음악에 기반을 두고 시작되었던 Jazz와 Rock'n'Roll


[Bunker1특강] 강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 Episode 01 - Jazz


[Bunker1특강] 강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 Episode 01 - Rock'n'Roll


1960년대~ 1970년대 한국에서 일어났던

청년문화의 중심에 있었던 모던 포크와 그룹사운드의 이야기


[Bunker1특강] 강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 Episode 02 - 청년문화의 바람이 불어오다


너무나 맛깔나는 강의는 같은 강의를 꼭 두 번씩 듣게 만들었으며,

다시 내용을 정리해서 기록해두게 만들었다.


진짜 나중에 하나로 묶어서 책으로 내도 좋을 듯하다.



강헌 교수가 이번에 건드려준 부분은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오면서 유럽에서 일어났던

클래식음악의 고전주의 시대에 일어났던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이야기이다.

 강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 EP.03-1 <클래식 속의 안티 클래식 : 모차르트의 투정과 베토벤의 투쟁> < 방송듣기


하지만, 전체 역사적 흐름을 알기 위해서


바흐 - 하이든 - 살리에리 - 모차르트 - 베토벤 으로 이어지는

클래식 음악의 대가들의 이야기가 차레로 이어진다.


(조연으로 비발디, 헨델, 슈베르트, 멘델스존 등의 교과서에서 한 번쯤 들어봤던 사람들이 등장한다)


음악사 수업시간에 딱딱하게

바로크 - 고전주의 - 낭만주의로 흐름이 이어진다고 외웠던 내용이~

이렇게 흥미진지하게 이어진다니~~ 너무나 재미지고 흥미진지했다~~


관심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원문 강의를 들어보시면 좋을 듯하고, (완전 강추!!)

개인적으로 기억하기 위해서 강의 내용을 재편집해서 다시 정리해두기로 했다.


+



일단, 개인적으로 알고 있던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이야기

아마 대중에게 잘 알려진 이야기도 내가 알고 있던 이야기랑 큰 차이는 없을 듯하다.

(본 단락의 내용은 강헌 선생의 강의에 없는 내용임을 사전에 말씀드립니다.)



타고난 천재이자 신동이였던 모차르트

불굴의 의지로 장애를 극복한 베토벤


약간의 시간차이를 두고 등장했고,

둘 다 당대 최고의 음악시장이였던 비엔나에서 활동했지만,


조금은 다른 색깔의 음악을 추구했기에,

같은 고전주의로 분류되지만 베토벤은 낭만주의의 출발점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모차르트의 곡은 가볍고 선율 중심이라는 평가를 받는다면,

베토벤의 곡은 무겁고 장중해서 모티브 중심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래서 베토벤의 곡들은 각각의 악기들이 따로 연주하면 별로지만,

모든 악기가 함께 조화롭게 연주될 때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특징은 그들의 작곡형태 차이에서 발생했다고 볼 수도 있는데,


모차르트는 타고난 천재성을 바탕으로 순십간에 곡을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하다.

하루 밤 사이에 오페라를 만들어내기고 했고, 그의 대표적인 교향곡인 39-40-41번은 단 6주만에 만들었다.


'나는 머릿속에 완성된 스코어(악보)를 그저 오선지에 옮기고 있을 뿐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길정도였기에, 그냥 악보를 찍어내는 기계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다.

젊은 나이에 요절했음에도 불구하고 600여곡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천재성에 기반한 결과인 것이다.

(너무 쉽게 써서, 당대에도 수많은 표절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고 노력도 안한 다는 오해도 받았으나, 실제로는 공부로 열심히했다고 한다.)


반면, 베토벤은 수없이 악보를 고치면서 정교하게 곡을 완성해나간다.

너무 진지하기에 좀 어둡고 무겁다는 의견도 많이 받고 있지만, 그 많큼 대작으로 평가받는 곡들이 많다.


이 둘의 삶에 대해서 나와 같은 일반인들은

영화를 보고 나서 이들에 대한 인상을 가지게 된 것이 사실이다.


모차르트의 삶을 그린 <아마데우스> (1984)

베토벤의 삶을 그린 <불멸의 연인> (1994)


그런데, 영화라는 것이~~ 주인공을 영웅으로 만들기도 하고

역사적 사실을 재미를 위해서 다소 왜곡하는 경향이 있는데, 


어찌보면 이 둘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보다는 극화된 재미에 우리는 더 큰 감동을 받기 마련이다.

특히나, 재미난 이야기를 좋아하는 한국인들은 그들의 삶에 대해서 다소 왜곡된 편견을 가지게 되어 버렸다.


나도 당연히 그랬고, 이들에 대한 나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살리에리라는 경쟁자의 질투를 받은 불행한 천재 모차르트

한 여인을 영원히 사랑하고 장애를 극복해낸 악성 베토벤


그렇다면, 실제 이들의 삶은 어땠을까?


강헌 선생은 이들의 삶을 역사적 배경과 흐름 속에서 다시 한 번 설명해주고 있다.


+


역시나 역사적 흐름속에서 이들의 삶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시대적 배경과 이들이 태어나기 전에 상황에 대해서부터 이해가 필요하다.


일단 당시 유럽에서 음악가들의 사회적 지위는

굉장히 애매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시기적으로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기 시작했기에

이들은 신분제에 종속될 수 밖에 없었지만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살던 시기는 급격한 격동기였다.


1760년대부터 산업혁명이 본격화되기 시작했고,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은 전후로 계속해서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이전의 바로크 음악 세대였던

바흐와 헨델의 시기까지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고,


이후의 낭만주의 음악 세대였던

멘델스존, 바그너, 비제, 베르디 같은 음악가들이 비교적 근대사회에 살았던 것에 비해서


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슈베르트 까지는

역사적 격동기의 한복판에서 음악 활동을 했고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주로 활동했던 불과 16년의 차이는

숫자로는 얼마 차이 나지 않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결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당시 유럽에서 음악가의 신분은 철저히 중간 계급이였다고 한다.

르네상스 시대에 게스왈드라는 귀족출신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이는 전무후무한 기록일 뿐이며,

하층사회 출신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귀족들은 자녀들에게 음악 교육을 반드시 시켰지만,
이는 교양 수준으로 이어진 것이며, 절대 직업적으로 활동한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천민 출신들이 음악을 했던 고려-조선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특징이며, 
이러한 특징 때문에 우리 역사상 위대한 작곡가라 불릴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반면, 인도에서는 주로 최고 권력층인 브라만 출신들이 음악을 했는데,
이는 문화적 전통성과 우월성으로 이어지면서 영국의 식민지배를 200년이나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양음악보다 더 발달한 문화적 자산을 가지고 있었기에 문화적 전통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유럽의 음악가는 어중간한 위치에 있었기에,
유명해지면 귀족과 겸상을 하면서 상류사회의 삶을 살 수 있고
반면에 뜨지못하면 생계를 걱정해야만 하는 완전 하층 계급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이들에게 음악은 생존이 걸린 문제였기에 치열할 수밖에 없었고,
철저히 경쟁을 통해서, 반드시 성공해야만 했기에 경쟁력이 높아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하기 보다는 귀족들의 인정을 받아야만 했고,
하이든 - 살리에리가 대표적으로 귀족의 인정을 받은 케이스라면,
모차르트 - 슈베르트가 대표적으로 인정을 못받은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슈베르트는 31살까지 결혼도 못하고, 비참하게 살다가 매독걸려서 죽은 것으로 유명하다.)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면,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음악가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전 세대인 바로크 음악을 좀 알아야만 한다.


중세 음악까지는 너무나 단순한 음악의 형태였기에,

음악사에서 별로 안다루고 바로크 시대부터 주로 이야기를 한다.


바로크 시대에 음악가들 중에 대중에게 잘 알려진 사람은 3명 정도이다.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비발디 (1678 ~ 1741)

독일의 요한 세바스챤 바흐 (1685 ~ 1750)

영국의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1685 ~ 1759) / 태어나기는 독일에서 태어났음


이 중에서도 바흐와 헨델은

음악의 아버지와 음악의 어머니라는 별칭을 받을 정도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한다.


하지만, 동갑내기 이 두 작곡가의 삶은 너무나 차이가 난다.



독일 튀링겐 지방의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난 바흐는

죽을 때까지 독일 안에서만 살았고 당대에는 헨델과 같은 명성을 얻지도 못했다.


10명의 형제의 막내로 태어나서 10살이 되기 전에 부모가 다 죽었고,

제대로 된 정규학교를 다닐 수도 없었기에 형 몰래 스스로 음악을 공부하면서 재능을 키웠다.


나름 명문 음악 집안이기에 바흐라는 작곡가만 60명이 넘는데,
이렇다보니 오히려 집안 내에서도 경쟁이 심했고, 큰형은 막내 요한 세바스챤 바흐의 재능을 경계했다고 한다.

하지만, 바이마르 궁전의 음악가 시절에는 성문 문지기와 동급의 대우를 받았고,
쾨텐 궁전에서도 처음 6년은 평화의 시대를 지내지만, 성주가 결혼 한 이후에는 찬밥 취급을 받게 되었고,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 악장 시험에서는 3위가 되지만, 1등과 2등의 기타 요구하는 잡무가 너무 많다고 그만두면서
과도한 업무를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안정된 직장에서 성실하게 꾸준히 수많은 곡들을 작곡해낸다.

하지만, 바흐는 무려 1300여곡을 썼냈지만,
당대 사회의 주류를 이루였던 오페라는 단 한편도 쓰지 못한 체 사회의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누구나 나처럼 열심히 공부하면 나처럼 쓸 수 있다.” 

라는 표현이 말해주듯이 그는 너무나 근면 성실한 개신교 신자였고, 

이러한 그의 삶은 죽은 후 75년 뒤에 그를 화려하게 부활시키게 만드는 단초가 되어준다.



반면, 헨델은 당시 유럽을 휩쓴 슈퍼스타였다.


독일에서 태어나서 독일과 피렌체 등에서 활동하다가

1712년이후에는 런던에 정착해 귀화했으며, 죽을 때까지 영국에서 살면서 인생의 전성기를 보낸다.


그는 70개의 오페라를 만들었고, 그 중 40개 이상을 흥행에서 성공시켰다.

당대에는 오페라를 얼마나 성공시켰는가가 그 음악가를 평가하는 주요 기준이였고

오페라를 2~3편만 성공시켜서 자리를 잡는데 성공하기만 한다면 먹고살 수 있었던 시기였기에,


헨델은 전무후무한 존재였고 성악과 기악까지 모두 섭렵했던 당대 최고의 음악가지만,

이후 역사가들에게서는 오히려 바흐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저평가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래서 헨델이 죽은 것은 1759년이지만,

역사가들은 바로크 음악의 종료를 바흐가 죽고 살리에리가 태어난 1750년으로 여기고 있다.


+



살리에리는 당대 최고의 음악가였지만,

대중에게는 모차르트를 시기한 2인자로만 기억되고 있다.


피터 쉐퍼(Peter Shaffer)가 쓴 <아마데우스>라는 희극 때문인데,

이후 영화로도 만들어지면서 심지어는 살리에리 컴플렉스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하지만, 살리에리(1750-1825)는

시기적으로 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과 함께 활동했던 사람이였고,


이탈리아 출신으로 이미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당시 모든 음악가의 꿈의 직장이라고 불리였던 빈의 궁정악장의 자리를

무려 36년간이 차지하면서 죽기 1년전에야 그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게 된다.


강헌 선생은 살리에리가 너무 저평가되었다고 이야기하면서,

모차르트를 시기했다는 풍문에 대해서도 신뢰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살리에리는 43편의 오페라를 작곡했고,

베토벤, 슈베르트, 리스트라는 제자를 가르쳤으며,

너무나 잘 나갔기에 모차르트를 시기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모차르트가 살리에리의 욕을 항상하고 다녔기에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싫어한다는 풍문은 당시에도 있었다고 한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은

노골적으로 궁정악장 자리를 탐했으나 하급 관료도 되지도 못한 사람들였던 반면에,


살리에리는 귀족들 사이에서도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었기에 

모차르트나 베토벤을 시기할 이유가 별로 없었던 사람이였기 때문이라고 강헌 선생은 설명한다.

하지만, 당대 또다른 최고 명성의 하이든이 모차르트를 극찬했고,
주류에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음악을 찍어내듯이 만들어내는 모차르트에게 전혀 신경쓰이지 않았다면,
그것은 권력의 속성을 너무 모르는 순수한 강헌 선생의 생각이 아닌가 싶다.

권력자는 아무리 권력을 가져도,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나와 다른 성격의 놈, 특히나 자기를 대놓고 욕하는 놈이 신경 안쓰일 수는 없다.

여하튼, 살리에리는 당대에는 최고의 인기를 누렸지만
역사에서는 그냥 시기심 많은 2인자로 사람들에게는 기억되고 있는 안타까운 인물이 되고야 말았다.

반면, 영국에서는 헨델의 뒤를 이어서 하이든이 활동하고 있었다.


하이든(1732 ~ 1809)은 
오스트라이 동쪽 로라우에서 마차바퀴 수리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역시나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낸 하이든은
성당 소년합창대에 들어가 성가대원이 되지만 변성기 이후 쫒겨나게 되고,
이후 10년간 본의 아니게 길거리를 떠돌며 예술적 자유기를 경험하게 된다.

1759년 보헤미아의 칼 폰 모르친 백작의 궁정악장에 취임했지만 그가 파산하면서 실업자가 됐다가,
1761년 헝가리의 에스트라하지 후작 집안의 하인으로 들어가 완전 출세한 이후에도 평생 그 신분을 유지하게 된다.

하이든은 '파파'라는 별칭을 받을 정도로 부지런하고 충실하면서도
사람들과의 관계도 매우 원만했고 그의 음악에서도 그의 낙천적인 성격이 잘 들어난다.

1790년 명예악장이라는 직위를 받으며 현직에서 물러나 자유의 몸이 되었고,
1791년 런던으로 건너가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노년까지 최고의 명예를 누리게 된다.

하이든은 헨델처럼 영국국왕으로부터 귀화를 권고받았지만,
끝까지 오스트리아 국적을 버리지 않았기에 오스트리아 국민들로부터는 큰 사람을 받았다.
(하이든 두개골 도난 사건이 발생할 정도로 그의 명성은 죽은 후에도 계속되었다고 한다)

살리에리와 하이든은 모두 모차르트와 베토벤과
동 시대에 활동하였는데 그들의 관계도 참 기묘하기 그지 없다.

일단 모차르트는 살리에리와 천적이였지만,
하이든과는 나이 차이가 크게 나면서도 서로 존경하는 우정을 나눈 사이였다.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음악을 굉장히 높게 평가했고,
이 둘은 서로서로의 음악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잘 알려졌다.

반면, 베토벤은 살리에리와 하이든을 모두 스승으로 모셨지만,
자신의 스승들과의 사이는 너무나 최악이였다.

베토벤은 공식적으로 스승이 4명이였는데,
첫 번째 스승인 네페를 제외하고는 다들 사이가 나빴다고 한다.

1972년 런던에서 활동하던 하이든이 빈에 잠시 머무르던 시절
베토벤은 하이든을 찾아가 배웠으나 그렇게 만족스럽지는 않았던 것같다.

천성적으로 낙천적이고 느긋한 하이든의 교습법이
불같은 열정으로 불타는 베토벤에게는 성에 안찾던 것같고,

베토벤은 자신의 작품에 스승의 이름을 빼버리고 말았다.
이에, 하이든은 베토벤을 방자한 무어인이라고 욕하면서 베토벤을 맹 비난한다.
(성격좋기로 유명했던 하이든이 외모를 가지고 욕했다는 것을 보면 진짜 화가 많이 났던 것같다.)

베토벤이 이후 살리에리에게도 찾아가서 음악 수업을 배웠는데,
살리에리는 오페라 작가라서 성악음악을 중시했고, 이탈리아 음악의 선율 감각은 최고의 인기를 구사한다.

하지만, 베토벤의 첫 번째 오페라 작품에 대해서
살리에리가 선율적 감각이 부족하다고 씹었고, 이후로 베토벤은 완전히 삐져서 쳐다도 안봤다고 한다.

생각보다 포스팅이 너무 길어져서,
이후의 모차르트와 베토벤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포스팅으로 넘기도록 하겠다.

[Bunker1특강] 강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 Episode 03 - 모차르트의 투정과 베토벤의 투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