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t cast/[Bunker1] 강신주

강신주의 다상담 05 - '가면' 편

열린 공동체 사회 2014. 2. 1. 20:25


강신주의 다상담 강의를 몇 번 듣다보니,

다소 비슷한 맥락이 반복되는 느낌을 받게 된다.


고정 관념이라는 알을 깨고 나와서

자아를 찾아가고, 스스로에게 솔직해져야 한다...


과연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나는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과 시선을 생각하는가?

착함이라는 허상이 어떻게 나를 속이고 있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신주 강의는 끌리는 맛이 있다.

그건 바로, 아직도 내가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


페르소나(persona)는 

그리스의 고대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일컫으며,

타인에게 비치는 외적 성격을 나타내는 심리학적인 용어이다.


강신주가 이야기하는 가면은

단지 페르소나만을 의미하지는 않고 있다.

오히려 내면에 억지로 눌려있는 욕망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가면을 쓴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약한 사람이 생존을 위해서 사용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가끔 강자임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약한 척하면서 가면을 쓰는 경우도 존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구나 가면을 쓴다.

이는 솔직하지 못해서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심지어 어린 아이들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일부러 우는 법을 배운다.

아이들도 생존을 위해서는 가면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가면을 쓰는 것을 사람들은 대체로 싫어하지만,

무언가를 얻기위해서는 때론 자신의 감정을 속여야만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나마, 무언가를 위해서 일부러 가면을 쓰는 경우는 덜 불행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가면을 써야하는 경우에는 스스로 불행을 느끼게 된다.


근데, 상당수의 사람들은 원하지 않는 가면을 쓴 체 살아가고 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우리들은 나보다 강한 사람을 항상 대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가면을 쓸 수 밖에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가면을 쓰는 훈련을 하게 되고,

자아가 강해지는 시기(5~7살 때와 사춘기 시절)에 멋모르고 가면을 벗어던졌다가

아무런 능력이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호되게 당한 후에 다시금 가면을 집어들게 된다. 


강신주는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아직 경제적으로 독립할 자신이 없으면,

그냥 부모님한테 빌 붙어서 가면을 쓴 체 착실히 살라고~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냥 주는 월급받으면서 안정되게 살고싶으면 가면 쓴 체 살면된다고...

남의 회사에서 일해주는 대가로 받는 돈받으면 비유도 맞춰줘야하는 거라고~


가면을 벗어던진다는 것은 그만큼

용기도 필요하지만 희생을 각오해야하는 행위인 것이다.

가면을 누군가 앞에서 한 번 벗게 되면 그 사람 앞에서는 다시는 쓸 수 없다.


이는 가면을 쓴 사람을 대하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상대가 가면을 쓰고 대하는 것이 오히려 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상대가 가면을 쓰고 있을 경우에는 속으로는 싫어해도 절대 나를 해치지 않는다.

하지만, 갑자기 상대가 가면을 벗어버리면 그 맨얼굴을 감당해내기가 솔직히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가 가면을 벗지 못하도록

절대적 힘의 우위를 유지하는 것 필수적이며 점점 더 차이를 벌리게 된다.


절대 권력자인 박근혜와 이건희,

이런 사람들 주위에는 가면 쓴 사람들이 철의 장막을 이루게 되고,

그들은 이제 가면을 벗은 사람을 대하는 것이 오히려 더 부담스럽게 된다.


+


근데 이와는 다르게 가면을 써야하는 경우가 또 한 번 있다.


상대방과 더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고, 상황을 빨리 탈출하고 싶을 때

이건 아니다 싶으면 빨리 웃으면서 비유맞춰주고 대화를 끝내고 나와버려야 한다.


오히려 마음이 안드는 상대를 대할 때

상대에 대한 아무런 감정도 투영하지 않고 오히려 더 친절하게 대하게 된다.


피상적인 관계로 남고 싶고, 다시는 보고싶지 않다면

쓸데 없이 시간낭비 감정 낭비하지 않고 가면을 쓰고 그냥 흘려보내는 것도 방법이다.


하지만, 내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나의 가면을 벗어던질 줄 알아야 한다.


가면을 쓰고 있는 한 우리는 솔직한 감정을 주고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가면을 벗어야만 한다.


하지만, 흠모하는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오히려 더 두꺼운 가면을 쓰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그것도 과연 사랑일까? 


난 그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을 계속해서 유지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 같다.


+


나의 20대는 밝고 명랑한 교회 오빠였다.

집에서는 착실한 아들이였고, 학교에서는 성실한 학생이였다.

그러면서도 나름 주관도 있어보였기에 꽤 괜찮은 녀석이라 평가받았다.

(자뻑일수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그런 이미지였던 것 같다.)


하지만,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닌 정글 속의 야생마가 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한 번도 가면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나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면서 기존의 삶이 가면처럼 느껴지게 된 것이다.


독실한 기독교인

성실한 신입사원

착실한 막내아들

다정다감한 교회오빠

뭐든지 할 줄 아는 슈퍼맨


남들이 이렇게 봐주는 것이

사실은 나도 원하는 삶이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고 난 좀 더 자유로운 영혼이였다.


남들이 만들어놓은 기준에 나를 맞추고 있었고,

그렇게 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내가 그걸 원한다고 생각했었다.


일탈과 욕망, 저항, 거만, 잉여 같은 단어들이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새 나는 그것들을 원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그것들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계속해서 내 속에서 억눌러오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난 스스로 잘 만들어놓은 새장을 벗어나고 싶어졌고,

그 것을 깨고 나오는 순간 그 동안 쌓아둔 것이 무너질 것을 직감하게 됐다.


내가 가면을 일부러 쓴 것은 아니지만, 

어린 시절부터 너무나 오랫동안 가면을 쓰고 있었던 것 같았다.


만약, 그게 가면이 아니였고, 

순간적인 일탈이였다면 어느새 자연스럽게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었겠지만,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제대로된 나를

찾기 시작했다고 느낀다는 것은 그 것이 순간적인 감정만은 아니였던 것 같다.


가장 먼저 새로운(?) 맨 얼굴을 보여주게 된 것은 여자친구였다.

은밀히 조금씩 내비치는 내 맨 얼굴에 그녀는 내가 변했다고 느꼈던 것 같다.


평생 가려면 내 맨 얼굴도 사랑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예전 새장 속에 있던 나의 모습을 사랑하는 그녀에게 난 솔직해지려고 했다.


결국 아름답게 헤어지길 선택했고,

그녀는 너무나 순순히 그 선택에 공감해주었다.


그런 후 너무나 편함을 느꼈지만, 아직도 그녀가 많이 생각난다.

이 것이 내 선택에 후회는 없지만 아쉬움이 아직도 남는 이유일 것이다.

(헤어질 때까지도 긴가민가했는데, 난 진짜로 그녀를 사랑했던 것 같다.)


+


이별은 나에게 변화의 시작이였고,

이제 본격적으로 다른 삶을 살아보고자 했었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 자신을 찾고 싶었고,

내가 있던 모든 것을 떠나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졌다.


현재의 자리가 스스로에게 불편했고,

뭔가 다른 나의 모습에 다른 사람들이 실망하는 것도 싫었다.


그런 후 이것도 아닌 저것도 아닌 애매한 삶을 살다가,

예전의 그 삶이 그리워서 다시 교회로 돌아가게 되고 직장도 옮기게 된다.


예전과는 다른 삶을 살고 싶어도

별로 변하지 않는 나를 보면서 솔직히 뭐가 본질인지 헸갈렸다.

(남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일탈이나 욕망이 솔직히 나에게는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난 다시 예전의 나름 괜찮았던 삶을 유지하면서도,

약간은 다른 방식으로 적당히 솔직한 삶을 살고 싶었고,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반쯤만 가린 가면을 쓰면서 타협점을 찾고 싶었다.


솔직히 이야기한다면,

어떤 것이 가면이고 어떤 것이 맨 얼굴인지 확신이 안섰던 것같다.


역시나 다시 돌아간 온실은 따뜻했지만, 

역시나 온실은 나에게는 너무나 답답한 곳이었다.


+


그렇게 시작한 30대의 삶은 많은 것은 생각하게 만들었다.

어찌보면 그제서야 진짜 내가 누구인지 제대로 찾아가기 시작한 것같다.


20대 후반에 충동적이고 감정적으로 왔다갔다했다면,

본격적으로 무엇이 가면이고, 무엇이 본질인지 찾기 시작한 것이다.


교회와 새로운 직장이라는 온실 속에서

제대로된 나를 찾을 때까지 철저히 고민하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내가 상상했던 양 극단에는 나는 없었다.

난 처음부터 그 중간 어디쯤, 남들이 보기에는 애매모호한 어딘가에 있던 것이다.


남들 기준으로 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그 지점에

나는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고 나만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난 크리스챤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기성 교회에서 원하는 그런 크리스챤은 확실히 아니였다.


난 기업가 마인드가 강하지만,

그렇다고 자본주의 논리에서 이야기하는 자본가도 노동자도 아니였다.


난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사회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그런 혁명을 원하지는 않는다.


난 솔직하고 욕망에 충실한 삶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주체할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힌 삶을 원하지도 않는다.


도저히 알 수 없는 지점에 위치한 나의 삶을 찾기 위해서

새로운 방향성이 보이자마자 과감하게 난 다시 떠나기로 했다.


강신주는 어느 곳을 떠난다는 것은

그 곳이 최악이라고 느낄때만 떠날 수 있다고 했지만,


난 지금있는 곳이 어쩌면 최선일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음에도,

내게 어울리지 않는 옷이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그곳을 떠날 수 있었다.


난 내가 이미 충분히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하고 싶었고 계속해서 변하고 있다.


+


지금의 나는 가면을 쓰고 있는가?


직장을 그만두고 학생이 된 이후로

나는 완전 새로운 영역에서 새로운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강신주의 말처럼 새로운 것을 시작했을 때,


'이제는 끝이다.'라는 느낌이 들면 남들이 원하는 선택을 한 것이고,

'이제 시작이다.'라는 느낌이 들면 스스로 원하는 선택을 한 것이라는데,


난 확실히 제대로 된 선택을 했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워낙 긍정적이라 첫 사랑, 첫 입사, 첫 이직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너무나 아프고 외로워서, 

누군가를 만나보기로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아직도 그 때 잠시 만났던 여자분께는 죄송한 마음이 많이 든다.)


심지어, 예전부터 알던 사람들과 다시 만났을 때도

그들 역시 나의 선택이 의외이지만 아주 잘 어울린다고 이야기한다.


어찌보면 나만 나 스스로를 잘 몰랐던 것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들은 어쩌면 이미 내가 그들과는 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난 가면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은 이미 나의 맨얼굴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 때도 강자들 앞에서 하고 싶은 말은 했고,

약자들에게도 절대 내 힘을 과시하고자 했던 적은 없었던 것같다.


강한 사람들이 기분 나빠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도 진심은 전달했고,

약한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지 않도록 그들 앞에서도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지혜와 가면은 엄연히 다른 것인데,

난 그 부분을 잘 구분하지 못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나의 고민은 완벽히 해결했는가?

다시는 강신주의 강의 따위는 듣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하지만, 이번에도 여전히

이 문제에서 완벽하게 자유롭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아직도 가슴 한편에는 찝찝함이 남아있고,

나는 가면을 완벽하게 벗어버리지도 또한 계속 쓰고 있지도 않다.


이는 한 극단에 치웃치지 않는 내 성향탓일 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가면이라는 것의 존재 자체가 나의 특성을 설명하기에는 부적합할 수도 있다.


다만 내가 맨얼굴이라고 생각한 것이 가면이였거나,

내가 가면이라고 생각한 것이 나의 맨얼굴이 아니였으면 한다.


사람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진실을 은폐하거나 인정하지 않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인 가면이든 맨얼굴이든

그 모습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