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18] 엘리트의 사회 지배는 불변인가 - [시사통] 방송듣기
다윈의 진화론은 생명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꾸어버렸다.
하지만 생물학에서 시작된 다윈의 진화론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해석한 사람들이 있다.
'적자생존'이라는 논리로 <사회진화론>을 주장한 허버트 스펜서와
'만물은 서로 돕는다'는 <상부상조론>을 주장한 표트르 크로프트킨이 그 주인공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환경의 변화에 따라
그에 적합한 생물체가 살아남는다고 설명했으나 그 생존의 방법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영국의 사회학자였던 허버트 스펜서는
생물들이 생존 경쟁을 통해서 더욱더 환경에 적합한 자만 살아남는자고 주장한 반면,
러시아의 지리학자이자 사상가인 표트르 크로프트킨의 경우에는
시베리아 여행을 통해 관찰할 결과 만물은 서로 연대하고 돕는 과정을 통해 살남는다고 보았다.
생명의 진화과정에 대한 전혀 전반대의 설명인 것이다.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우파들의 사상적 기반으로 오랜 기간 활용되었고,
표트르 크로프트킨의 <상부상조론>은 협동조합과 아나키즘의 사상적 뿌리가 되고 있다.
+
하지만, 자연 선택의 원리를 사회학에 적용시켜
적자생존의 원리로 설명한 허버트 스펜서의 주장은 당대의 지배적 사고가 되었고,
유럽을 넘어 아시아까지 넘어와서
일본은 물론 안중근과 같은 수많은 민족주의 좌파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스펜서는 사회구조의 복합성도 증대하면서
사회는 단순사회에서 점차 복합사회로 진화되어가는데,
상호 의존성이 높아지고 통합도 증가하면서
점점 관리와 규제의 기능이 커지게 되며 엘리트가 이를 담당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이탈리아출신의
경제학자이면서도 사회학자인 블브레도 파레토와도 상통한다.
파레토는 엘리트를 사자형과 여우형으로 구분하며,
인간에는 격차가 존재하기 때문에 두 엘리트 유형이 순환 지배할 수 밖에 없다고 보았다.
하지만, 폐쇄된 사회에서는
실제 능력있는 사람과 현재 엘리트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으며,
사회 격차가 커져서 피지배 엘리트가 지배 엘리트가 될 수 없을 때 불만이 켜저 폭력적 변혁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스펜서와 파레토는 사람의 능력의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고,
능력이 뛰어난 엘리트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해야한다는 점에서는 우파적인 주장같지만,
그 역할이 사회적으로 규정되었다는 구조기능주의적 견해와 비교한다면,
기회의 불평등에 대해서는 오히려 반대하고 능력에 따른 역할을 주장했다는 점에서는 진보적인 사고였다.
+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을 건드린 사람이 바로 로베르트 미헬스이다.
독일 사회민주당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미헬스는
사회민주당에서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당사회학(1911)>라는 책을 쓴다.
1900년대 유럽 사회주의의 간판격이였던 사민당이
1차 세계대전에 동의하는 등 왜 개량주의, 수정주의적 노선을 갔는지 그 원인을 자세히 분석했는데,
당시 외부에는 당의 창설자인 페르디난트 라샬의 이념적 후유증으로 알려져있었으나,
미헬스는 막스베버의 제자답게 조직적 차원에서 관료제가 어떻게 변질되는지를 분석해서 설명해주었다.
'과두제의 철칙(Iron law of Oligarchy)'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이 연구는 관료제라는 조직에서 과두제가 나타나고,
과두제에서 보수적인 신엘리트를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과정을 사민당의 성공과 격변이라는 과정을 통해 설명한다.
특이한 점은 미헬스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서 굉장히 이중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조직의 규모가 커져서 관료제가 되면 과두제가 나타나고
소수의 엘리트가 지배하게 될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하면서도 과두제가 무너질 수 있다는 희망을 놓치 않았다.
민주주의 통치는 거짓말이지만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기에 과두제는 무너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아버지가 숨겨놨다고 이야기했던 보물을 찾는 것처럼 허황된 것이지만,
그 허황된 꿈을 찾기 위해서 땅을 뒤엎어버리는 과정에서 땅은 비옥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투쟁은 배반당하고 결국 새로운 과두제만 나타나지만,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사회는 계속해서 발전해나갈 수 있다는 새로운 희망을 동시에 제시한다.
이후의 미헬스의 행보는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사회주의 경력 때문에 교수임용에 탈락해서 이탈리아로 넘어가게 되었으며,
이탈리아 국적을 획득(1914)하고 파쇼당에 입당(1923)한 후 무솔리니의 지지를 받으며 우파로 돌아서게 된다.
미헬스는 대중에게 지도자를 추정하고자 하는 복종 심리가 있고,
대중은 전통지향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는 했지만 민주주의 희망을 놓치 않았었다.
결국 미헬스가 우파로 돌아서게 된 것은
냉혹한 사회 현실로 인한 대중에 대한 실망이 그를 냉소주의에 빠지게 만든 것은 아닐까?
+
사회진화론의 논리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크로프트킨의 주장처럼 환경에 적합한 자가 남는다는 개념을 경쟁을 통핸 남는 것처럼 과대해석했다는 비난을 받는다.
진화론 자체가 변화의 방향성을 이야기한 것은 아닌데,
스펜서는 사회가 성장한다는 목적론적 관점을 투영해버린 것이다.
다윈이 이야기한 진화라는 것은
목적과 방향도 없고 환경의 변화에 따라서 대응한다는 것이며, 이는 상황이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상황이론도
조직 내부에서의 자생적 움직임을 무시했다는 한계를 가지면서
외부 환경의 변화와 내부적인 자생력의 조화로 자기조직화를 이룬다는 새로운 개념으로 발전하게 된다.
세 사람의 견해를 정리해보면
엘리트가 사회를 지배할 수 밖에 없다는 논리는 다음과 같다.
1) 스펜서 - 사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능력있는 엘리트가 필요하다
2) 파레토 - 인간에게는 능력의 격차가 있기 때문에 능력있는 사람이 지배적 엘리트가 되야한다.
3) 미헬스 - 조직이 커지면 엘리트는 출현하게 되고, 대중은 지도자에 대한 복종 심리가 있다.
결국 엘리트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고,
사회와 구조의 특성상 엘리트라는 존재는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엘리트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근데, 근본적으로 엘리트가 사회를 지배하는 것이 맞다는 논리에 어떠한 지배라는 구체적인 방식이 빠진 느낌이다.
분명히 리더와 지배자는 다르다.
근데, 이들의 논리에서는 이 것에 대한 명확한 구분이 부족하며,
엘리트가 지배자가 아닌 리더가 될 수도 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간과한 측면이 있어보인다.
이는 이들이 생존했던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이라는 시대적 환경 상
오늘날의 리더십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지배자와 피지배자만 존재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을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불평등의 문제를 강하게 인식했던 파레토나
현대적인 네트워크나 홀리그래피적 조직 구조를 경험해본 적이 없는 미헬스에게
오늘날의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의 모습을 상상해달라는 것은 너무나 무리이기 때문이다.
고전을 공부한 것에 대해서는 아주 만족스러운 강의였지만,
오늘날 조직학자들이 엘리트를 보는 견해에 대한 설명이 추가됐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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