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2017 얼음과 불의 노래 - 윤동주와 안중근

열린 공동체 사회 2017. 8. 20. 01:56


2017년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


어렸을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름을 들었던

하지만, 정작 왜 그런 삶을 살았는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두 남자의 삶의 흔적을 살펴보았다.



불꽃같은 삶을 살다가 뤼순감옥에서 생을 마감한

안중근 (1879 - 1910)


삶을 고뇌하다가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한

윤동주 (1917 - 1945)


동일한 시기를 살지는 않았지만,

일본 제국주의에 대하여 불과 같은 심장과 얼음과 같은 정신으로 맞섰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존경받고 사랑받고 있는 인물들이다.



대한민국에서 정규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독립투사 안중근과 저항시인 윤동주의 이름은 다들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는 것과

윤동주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을 냈다는 것도 대충은 알고 있다.


하지만,

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는지와

왜 윤동주가 끝없이 고뇌에 찬 시를 썼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그들의 행적을 따라가며 그들의 삶을 느껴보고

오늘날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생각해보는 것이였다.


+


내 마음에 먼저 들어온 것은 불꽃청년 안중근이였다.


"어렸을 때 이름은 '응칠(應七)'이였으나, '성질이 가볍고 급한 편이여서 중근(重根)'이라는 이름으로 사용하게 됐다" 라고 스스로 자서전인 <안응칠역사>에 남길 정도로 거침없는 상남자 스타일이다.


조선말기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해보겠다고 가족을 떠났고,

그의 어머니는 또한 쿨하게 처자식까지 있는 그를 보내주었다.


잘생긴 외모에 거침없는 언변, 그리고 명필까지...

모두가 꿈꾸는 영웅호걸 다운 독립투사의 이상향같은 존재이다.


하지만, 정작 왜 하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알려지지 않았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은 1909년 10월 26일로

아직까지 국권을 침탈당한 경술국치(1910년 8월 29일)가 일어나기 1년 전이다.

(시기적으로도 독립운동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에 좀 애매한 시점이다.)


또한, 물리적인 측면으로만 봐도

러시아 점령하고 있는 중국 땅에서 한국인이 일본 근대화의 영웅을 저격한 것이다.


러시아, 중국, 조선, 일본이라는 4개국가가 직접 연결되어 있었으며,

영국과 러시아의 변호인이 안중근의 변호를 자청할만큼 국제적인 관심을 받았던 사건이다.


그리고, 안중근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동양평화'를 위한 결단이였다고 주장했다.


일제로써는 근대화의 영웅이 암살을 당한 테러사건이였지만

안중근의 거사는 정치적/외교적으로 굉장히 많은 상징성과 메세지를 담고 있었다.


체포 된 이후 하얼빈 영사관에서부터 뤼순감옥, 관동법원에 보인 언행을 보면,

안중근은 '동양평화'라는 원대한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고도의 정치적 외교적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안중근이 주장한 '동양평화론'은 단순히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였으며,

3국의 중립지대 설치, 평화회의 개최, 공동은행, 공용화폐 등 굉장히 구체적인 구성이 담겨있었다.


사형집행일이 급하게 잡히는 바람에 완성을 못해서,

안중근이 구상했던 전체적인 내용을 현재로써는 알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안중근은 독립투사보다는 평화의 수호자에 가까웠으며,

단순히 민족의 독립만 생각한 것이 아니 동양 전체의 평화를 주장한 사상가라 할 수 있다.


안중근을 대면했던 검사와 헌병, 형무소장의 태도를 보면

안중근이 어떤 인물이였는지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형무소장이였던 구리하라는 안중근에게 특별히 독방을 내주며

다양한 편의를 봐주면서 수시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로 지냈으며,


하얼빈에서부터 안중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던 간수 지바 도시치는 

고향으로 돌아가 매일 안중근의 영정과 위폐를 모시며 기념비까지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지바 도시치의 스토리 보기: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857233)


뤼순감옥에는 수많은 정치인들이 수감되어 있었지만,

안중근은 수감시절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지금도 특별히 하나의 섹션을 구성해 놓을 정도로

중국인들에게도 굉장히 강한 영향력을 준 인물이였다.


한국에서는 그를 독립투사로 자꾸 한정하고 있었지만,

안중근의 시선은 이미 동양평화를 향하고 있었고 당대의 영향력은 엄청났다.


이런 부분들이 사실 제대로 부각되지 못한 체

우리가 너무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안중근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


하얼빈에서 만난 안중근의 행적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겠다는 목적 하나로 하얼빈에 왔고,

저격한 이후에는 체포된지 며칠만에 바로 뤼순 감옥으로 이송되었기에,

실제 안중근이 하얼빈에 머문 것은 11일 밖에 되지 않는다.


안중근의 흔적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은 하얼빈 역 안중근 기념관이다.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이 기념 표지석을 세워달라는 요청에 시진핑 주석이 화끈하게 응답한 결과물이다.


하지만, 지금은 하얼빈 역 자체가 대규모 공사중이라서 아쉽게도 볼 수 없었다.

(2020년까지 공사가 진행된다고 하니 방문을 원하시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대신 임시로 마련된 듯한 안중근열사기념관을 통해서 흔적을 확인해볼 수 있었다.

임시로 마련해서 그런지 사진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허름해서 좀 아쉬움이 많이 느껴졌다.


아쉬움을 달래며, 안중근의 흔적들을 찾아서 하얼빈 시내를 돌아다녔다.


안중근이 거사를 모색했던, 김성배의 집터와 동흥학교, 조린공원은

모두 걸어다닐 수 있는 동선에 있었다.


10월 22일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은 김성백의 집에 체류하면서

3일간 조린공원과 동흥학교 등을 돌아다니며 거사를 준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행히 조린공원에는 안중근의 흔적을 기념할 수 있는 표지석이 만들어져 있지만,

동흥학교와 김성백의 집터는 아는 사람만 찾아갈 수 있는 상황이다.


특히 김성백 집터는 이전 주소를 통해서 위치가 대충 확인될 뿐이며,

현재 주변 지역이 공사중이라서 머지 않아 이 일대가 모두 철거될 예정이라고 한다.

(김성배의 행적과 안중근과의 인연을 생각해보면 너무나 안타까운 상황이다.)



+


첫날, 하얼빈에서의 안중근의 흔적이 안타까움의 연속이였다면,

마지막날, 대련에서의 안중근의 흔적은 그래도 위안이 되는 부분이 많았다.


많은 한국인들이 그곳을 방문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뤼순감옥과 관동법원에서는 안중근과 관련된 많은 것들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주은래나 쑨원 등이 안중근에 대해 남긴 평가 뿐만 아니라,

실제 안중근이 사용했던 감옥이나 관련 자료들이 굉장히 잘 전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뤼순감옥과 관동법원의 음산한 분위기는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이러한 곳에서 안중근은 5개월 가까이 지내며 글을 쓰고 공판에 참여했던 것이다.


당시 안중근의 공판은 큰 화제였으며, 방청을 위해서 전 날부터 줄을 서는 진풍경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가 워낙 일본에서는 거물이였기에

재판을 진행하는 판사와 검사에게도 외부에서 엄청난 압박이 가해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 관선 변호사들은 안중근의 형량을 줄이기 위해서 단순 살인 사건임을 주장했다.

그리고 피고인의 신분상의 애매모호성을 강조하며 처벌이 불가함을 주장했다.


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안중근은 이러한 모든 것을 부정했으며,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써 이토를 죽인 것이고 국제공법에 의해 처벌해줄 것을 요구했다.


마침내 사형을 선고받은 안중근은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는가?'라고 되물었으며,

집핍을 끝마치지도 못한 체 항소도 하지 않고, 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져버렸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안중근의 시신을 아직도 수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효창공원의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묘지 옆에는 안중근의 가묘가 남겨져 있으며,

언제든 안중근의 유해가 수습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형무소장이였던 구리하라는 사형이 집행된 이후 시신을 수습해 장례 미사까지 치뤄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안중근의 유해가 반일 운동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시신을 유족에게 인도하지 않았다.


1945년 패전한 일본은 뤼순 형무소의 모든 기록을 소각해버렸고,

현재로써는 뤼순 형무소 뒤편의 사형수 묘지에 묻혀있을 것이라는 추정만 가능한 상황이다.


더군다나 황해도 해주 출신의 안중근은 북한에서도 굉장한 존경을 받고 있기에,

중국 정부에서도 남한의 유해발굴 작업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국가와 민간 차원의 유해 발굴단이 수차례 뤼순을 방문했고,

일대 주민들과의 끈질긴 탐문 조사를 통해서 어느 정도 위치를 파악하기도 했지만

현재로써는 중국 정부의 협조 없이는 더 이상 일을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안중근은 죽는 순간까지 동양평화를 주장했지만,

안중근이 상상하지도 못했던 북한과 남한이라는 새로운 적대관계는

죽은 안중근이 아직도 구천을 떠돌며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상황이다.


안중근이 서거한지 벌써 100년이 넘었지만 동양평화는 아직도 묘연하다.


+



동(冬)섣달 꽃과 같은,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



윤동주가 가장 존경해마다하지 않았던 시인 '정지용'은

사후 윤동주의 시집이 처음 발간될 때 서문에 그를 이렇게 표현했다.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광복을 경험하지 못하고 죽었던 윤동주에게

대한민국은 언제나 추운 겨울이였고 자신은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잉어 한 마리였다.


윤동주는 흔히 민족시인이자 저항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삶은 독립운동이나 적극적인 저항과는 사실상 거리가 멀었다.


일각에서는 윤동주의 죽음을 시대적 분위기에 억울한 희생량으로 보기도 한다.

그래서 저항시인으로 포장되는 부분이 다소 과장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영화 '동주(2016)'에도 이러한 시각은 살짝 반영되어 있다.


동주 [일반판] (2DISC) - DVD
배급 : 이준익 / 박정민,강하늘역
출시 : 2017.01.12
상세보기


그동안 민족주의적 시각은 윤동주의 시를 너무 과도하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윤동주의 삶과 행적들을 돌아볼 때 좀 더 문학적 감수성을 그의 시를 볼 필요는 있다.


윤동주는 끊임없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고뇌했으며

절망적인 사회적인 상황에서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의 시는 이러한 외부적인 환경과 개인적인 고뇌 가운데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시대의 아픔을 노래했으며 개인의 마음을 담아낸 것이다.


아름다운 한글로 시를 썼다는 점에서는 철저히 일제에 저항했지만,

일제의 탄압에 대해 순응하며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일부 기록을 통해서 저항적인 면모들도 나타나지만

평생의 동지였던 송몽규에 비해 그의 행보는 확실히 차이가 존재한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윤동주의 시는 좀 더 문학적이며 인류애적 시각에서 볼 필요가 있다.


암울한 시기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도 못했던 인텔리의 고민들이 승화되어있는 것이다.


송우혜가 쓴 <윤동주 평전>에 따르면 윤동주는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지만,

사상적으로는 송몽규와 같이 민족주의적인 측면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윤동주 평전
국내도서
저자 : 송우혜
출판 : 서정시학 2014.05.20
상세보기



일본에서 함께 체포됐던 고희옥은 윤동주를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아주 농했던 창백한 인텔리'로 묘사했다고 한다.


송몽규처럼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 이미 윤동주도 사상적으로는 한 배를 타고 있었다.


증거우선주의 원칙에 따라서 고희옥을 풀어준 것을 봐도

윤동주도 자신의 사상에 대해 어느 정도 문서화된 기록을 남긴 것으로 예측이 된다.


일본으로 건너 간 이후에는 강처중에게 편지로 보낸 5편의 시만 전해지기에 확인이 어렵지만

교토에서의 윤동주는 좀 더 송몽규와 친밀하게 움직였던 것으로 예측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희전문대학시절의 시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민족주의적 시각을 들이대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민족주의라는 시각이 오히려 윤동주 시가 가진 인류 보편애적인 가치를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아름다운 한글로 시를 썼으며 이를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특히 연전 4학년 시절(1941) 쓰여진 시들에서는 기독교적 색채도 강하게 녹아져 있다.


저항시인 윤동주보다 인간 윤동주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이 부분에 있다.



아름다운 명동촌에서 수많은 동시를 썼던 윤동주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송몽규를 따라서 문인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 윤동주

기껏 부모님 졸라서 평양에 갔다가 숭실중학교 편입시험에 떨어졌던 윤동주

아버지의 반대에도 무릎쓰고 시인의 꿈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윤동주

한 여인을 남몰래 짝사랑하며 고백한 번 해보지 못한 윤동주

송몽규은 경동제대에 합격했지만, 릿쿄대학에 입학할 수 밖에 없던 윤동주

몰래 도시샤 대학으로 편입하고 차마 고향집에 찾아가지도 못한 윤동주


강력한 카리스마의 민족 저항시인이기 보다는

너무나 인간적이고 하나하나가 마치 내 이야기 같은 윤동주의 이야기이다.


굉장히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캐릭터를 가지고 있었지만,

윤동주를 둘러싼 시대적 상황은 너무나 극단적이고 암울하기만 했다.


그 시대를 살아가야만 했던 윤동주는 이러한 아픔과 고통을

'시'라는 언어를 통해서 고귀하게 승화시켜버렸다.


일제에 순응했던 문학가들이나 독립운동에 투사한 실천가들 사이에서

윤동주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그 시대를 살아갔던 것이다.


윤동주의 삶은 너무나 인간적이기에 매력적이면서

그의 시는 너무나 인간적이기에 시대적 아픔이 더욱 더 강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그 시대에 내가 태어났더라면 난 아마도

이광수나 송몽규가 아닌 윤동주와 같은 삶은 살았을 것을 같다.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에 순응할 수도 없는...

지식인으로써의 양심과 생존의 갈림길에서 선택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윤동주는 이러한 고통을 시로 승화시켜서 시대의 아픔을 대변해주었던 것이다.


일본 유학시절 윤동주는 실천까지 이어지진 않았지만,

지식인으로써 민족을 위해 무엇을 할지 송몽규와 많은 생각을 나눈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기록들이 결국은 윤동주가 2년형을 언도받게 만들었으며,

형무소에서 일본군의 생체실험에 이용되어 옥사에 이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윤동주의 재능을 생각하면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라 할 수 있다.

왜 하필 그 시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어 옥사까지 이르렀을까...


하지만, 반면에 광복 이전에 일본에서 옥사했기 때문에

광복 이후, 시대의 아픔을 노래한 그의 시가 더 주목받을 수 있었다.


윤동주는 죽었지만, 그의 죽음이 그의 시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준 것이다.


다만 민족주의적 해석이 너무 강한 나머지

원래 그의 시가 가진 아름다움이 희석된 측면이 있다는 점이 함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윤동주를 다시 살려내기 위해서는

인간 윤동주가 가지고 있었던 시대적인 아픔과 개인적인 고뇌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얼음같이 차겁고 냉정한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차갑게 불렀던 그의 노래는

안중근의 가졌던 열정보다 더욱더 뜨겁게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매력이 있다.


이것이 안중근처럼 현실에서 직접 실천하지 않더라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문학이 가진 힘이라고 할 수 있다.


+


이번 중국 여행을 통해서 만났다던 2명의 인물은 상반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뜨거운 가슴으로 행동한 안중근

차가운 지성으로 고뇌한 윤동주


하지만, 안중근의 행동은 동양평화에 대한 사고의 확장을 가져왔으며,

윤동주의 문학은 시대의 아픔을 승화시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든다.


불이 얼음을 녹이고, 얼음이 불을 죽이듯

이들의 행적과 이들이 남긴 메세지들은 우리의 가슴을 다시 한 번 뛰게 만든다.


그리고 이들이 추구한 것은 단순히 민족이 아니라 평화와 사랑이라는

인류 보편적인 가치였다는 점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이를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는 철저히 우리의 몫이다.


윤동주가 송몽규, 정병욱, 강처중과 함께 했던 것처럼

안중근이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했던 것처럼


우리가 과연 어떤 사람들과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윤동주처럼 괴로워하거나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것까지 안중근처럼 뛰어들어보거나


선택은 우리에게 달렸다.


그 선택이 무엇이든 우리가 선택한 내일은

분명 오늘과 다른 새로운 날일 것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