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yotr Alekseyevich Kropotkin (1842 – 1921)
굉장히 낮선 이름이였다.
특히 아나키스트라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다.
공산주의 비스므르하게 등장했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구시대적 사상이라고만 생각했다.
아나키스트하면,
무정부주의자와 테러리스트를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common sense)일 것이다.
하지만, 아나키스트 사상을
과학적으로 체계화 시켰다고 평가받는
크로포트킨은 그 누구보다도 폭력을 싫어한 평화주의자였다.
(사실 아나키스트가 테러리스트로 포장된 것은 정치적 공작의 성격이 강하다)
러시아 정치를 전공하신
성공회대 사회과학부의 김창진 교수님은
국내에는 무정부주의라는 부정적인 번역으로 알려져 있지만,
‘자유연합주의’ 또는 ‘자유연대주의’라는
표현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설명하셨다.
(이 이야기를 듣고 궁금해서 책을 읽게 되었다.)
중앙집권적 권력이 아닌,
자율적인 조직들의 연대를 통한 운영
어찌보면, 현대 조직 이론의 흐름과
상당 부분 일치하는 경향을 보이는 시대를 앞서 간 사상이다.
+
아나키즘이라는 사상보다
크로포트킨의 인생은 더욱더 매력적이다.
40년 간의 해외에서 망명생활을 마치고,
부푼 꿈을 품고 노년에 돌아간 조국의 비참한 현실
자신이 꿈꿨던 제정 러시아가 무너졌지만,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현실 앞에서 비참히 짖밝히고 말았다.
풍요로운 어린 시절과
제정 러시아의 우울한 시대 상
2번의 수감과 극적인 탈옥, 그리고 도피 생활
크로포트킨의 인생은 한 편의 장편 영화를 보는 듯했다.
특히나 금서와 사상 검증이 남무하고,
온갖 정치적 공세와 비밀 경찰의 등장은
대한민국의 70년대 유신시절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6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너무나 흥미진지하게 스토리가 전개된다.
아쉽게도 57세의 나이에 기록한 자서전이라서,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 추가적인 자료들을 통해서 알 수 밖에 없다.
+
책의 서문에서도 나오지만,
이 책의 서술 방식은 여타 다른 자서전과는 확연히 다르다.
자서전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객관적인 시각을 취하고 있으며,
상당한 분량을 자신의 이야기보다는
시대상과 역사적 주요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심지어는 자신이 결혼한 이야기도 없으며,
중간에 갑자기 부인이라는 존재가 등장할 뿐이다.
시대의 주요 사상적인 흐름과 변화에 대해서
굉장히 쉽게 명확하게 설명해주고 있는 모습을 나타낸다.
특히, 노동자들을 위한 쉬운 교육을 강조했던 터라
문체나 표현들도 다른 지식인들과 다르게 굉장히 쉽게 쓰여있다.
괜히 세계의 5대 자선전으로
손 뽑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는
사람을 사랑한 그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진다.
이는 여타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던,
사회주의 사상가들과는 엄연히 구분되는 면모이다.
+
이 책에서는
사상가로써, 혁명가로써의
그의 고뇌가 매우 담백하게 드러난다.
이상을 꿈꾸고,
가슴이 먼저 움직였지만,
현실은 계속 암담하기만 했고,
그 속에서 끝없이 실천적 대안을 찾아나갔다.
아나키즘으로 시작해서,
자신만의 철학으로 행동적 아나키즘을 완성했고,
이에 대한 실천적 대안을 선전에서 찾았으나 한계를 느낀다.
그래서, 나중에 노년에는
생디칼리즘에 이어서 협동조합운동을 지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끝없이 고민했고,
그리고 계속해서 실천에 옮겼다.
그는 절망이 아닌 희망을 전하고 싶었지만,
결국에는 그 이상에 도달하는 방법을 설명하는데는 실패한 듯하다.
폭력적인 방법에 대해서
비판하면서 교육을 통한 자발적 혁명을 주장했지만 ,
결국은 레닌과 마르크스의 방식을
맹렬하게 비난하지 못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스스로 자신의 이론의 실천적 한계를 깨달았지만,
이를 성공시키기 위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어떻게 보면,
사상가들의 문제의식은 비슷하고,
그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 이상향을 향해서 가는 방법과
그 이상향의 구체적인 모델에서는 차이점이 나타난다.
(이는 많은 혁명가에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특징이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꿈꾼 사회는
모두가 잘 살고, 모두가 행복한 사회이다.
폭력을 사용하든,
자율적인 연대를 사용하든,
아니면, 아예 완전히 자유를 보장하든...
마르크스도, 크로포트킨도, 애덤 스미스도
방법과 이상향은 달랐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같았다.
과연 모두가 잘 사는 그런 사회는
어떤 모습이며, 그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과연 나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그 답을 협동조합에서 찾고 싶었는데,
과연 협동조합은 그 대안이 될 수 있을까?
+
사상적인 대안으로 취급받지 못하던 협동조합이
최근 들어서는 실천적인 대안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세상을 뒤바꾸고 싶은 사람들에게
협동조합은 너무나 협소한 이야기였고,
그래서 사상적인 대안으로 협동조합은 한 쪽 편에 밀려있었다.
크로포트킨도 아나키즘과 협동조합이
상당한 부분 비슷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의 책에서도 이야기하면서도 딱히 주목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아나키즘도 맑시즘도 무너진 오늘날
자본주의와 기존의 체재안에서 변화를 추구하는
협동조합만의 실현가능성과 지속가능성은 주목받을 수 밖에 없다.
협동조합은 철저히 이상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필요에 의해서, 실천에 의해서 시작되기에
현실과 이상이 따로 놀았던 다른 사회주의 사상과는 확연히 다르다.
초창기 사회주의 사상의 3가지 흐름 중
가장 주목받지 못하고 밀려나있던 협동조합운동이
이제는 어찌보면 사회주의 사상의 새로운 희망이 되는 분위기이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것처럼
세상을 한꺼번에 뒤집지는 못하지만,
작지만 조용한, 그리고 꾸준한 혁명이
협동조합만이 가지는 매력이자 강점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당장의 큰 효과를 거두지는 않지만,
더더욱 협동조합에 기대를 걸고 싶게 만드는 것 같다.
협동조합운동은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오히려 협동조합이 많이 생기게 된다면 세상은 분명히 바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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