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을 가지고 이렇게 감론을박이 많은 소설도 드물 것이다.
원문 자체가 워낙 까다롭게 쓰여져서 이를 번역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 - 위대한 개츠비
- 국내도서
- 저자 :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Francis Scott Key Fitzgerald) / 김욱동역
- 출판 : 민음사 200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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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을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한 김영하(2009)의 번역본이 화두였는데, 시간되면 한 번 읽어봐야할 듯하다.
(많은 분들이 김욱동의 번역본을 읽다가 포기했던 소설을 김영하의 번역본으로 재미있게 읽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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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위대한 개츠비를 처음 만난 것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서 굉장한 소설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떤 소설이길래 소설 속 인물이 그렇게 극찬을 하는 것일까? 이러한 궁금증에 <위대한 개츠비>를 집어들었지만 결국은 조금만 읽다가 말았다. 너무 딱딱한 표현들 때문에 지루함을 금치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잊고 있던 개츠비를 다시 만난 것은 바즈 루어만 감독의 <위대한 개츠비(2013)>가 개봉하면서였다.
<로미오와 줄리엣>, <물랑뮤즈>로 이미 화려한 그래픽의 극치를 보여줬던 바즈 루어만이기에 믿고 봤던 <위대한 개츠비>. 역시나 비주얼과 오디오 측면에서는 훌륭한 영화였다. 특히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캐리 멀리건은 개츠비와 데이지를 완전히 호감으로 바꿔놨다. 소설속에서 그렇게 찌질하게 보이던 개츠비가 이렇게 멋진 훈남이라니... 데이지도 속물로만 생각했는데, 굉장히 매력적인 인물이였다. 오히려 너무 착하게 생긴 토비 맥과이어만 다운그레이드 된 느낌이다. 전문가들의 평가는 별로였다고 하지만, 원작을 빼고 생각해볼 경우 나름 괜찮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물랑뮤즈를 연상시키는 듯한 장면들이 많이 등장하며,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성공시켰던 현대적 해석들이 전작의 성공 요소에서 못 벗어난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화려한 그래픽과 오디오의 조화는 엔터테인적인 요소를 잘 살렸다는 평가를 받을만하다. (너무 과해서 원작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혹평을 받을만할 정도로...)
아마도 전문가들의 혹평을 받은 부분은 이러한 부분보다는 원작이 가진 사회적 메세지들이 들어나지 않아서 일듯하다. 특히나 장례식 장면이 명확하게 묘사되지 않은 측면은 원작이 주었던 강력한 메세지를 너무 사랑이야기로 마무리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같다. 영화라는 짧은 시간에 원작이 준 모든 메세지를 녹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바즈 루어만은 확실하게 선택과 집중을 했고, 위대한 사랑 이야기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위대한 사랑 이야기로만 읽기에는 소설은 너무나 무겁고,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한결같이 미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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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그런 쓰레기 같은 놈들을 전부 모아놓은 것보다 가치있는 사람이야!"
("You're worth the whole damn bunch put together.")
개츠비에게는 데이지가 전부였다. 그렇게 때문에 그녀에게 가는 것이 중요했지, 그 과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불법도 서슴치 않았으며, 1920년대 다른 부호들처럼 보여지고자 노력했다. 그는 사랑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는 위대한(Great)모습을 보여줬지만, 그 안에는 자신에 대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았다. 위대한 미국(Great America)를 외치며 철저히 물질만능만을 추구하던 시대에, 데이지에 대한 사랑으로 자기에 대한 모든 것을 던져버렸다. 매일 밤 화려한 파티에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지만 결국 마지막 그의 장례식을 지켜준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개츠비는 사실 이러한 결과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았다. 데이지에 대한 사랑은 그의 존재의 이유였고, 유일한 목표였다. 하지만, 그 사랑이 이루어졌다는 그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 그 역시 위대한 미국에 생존하는 자신만의 방식을 찾은 것은 아닐까? 1920년대 경제적 부흥기를 맞이하고 있던 미국에서 그런 낭만은 사치에 불과했다.
하지만, 개츠비의 사랑을 순수한 사랑으로만 보기에는 어려운 부분들이 보인다. 데이지를 다시 만난 개츠비는 흥분과 설렘도 있었지만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데이지는 더 이상 5년 전의 데이지가 아니였기 때문이다. 개츠비는 계속해서 과거의 데이지에 집착하는 듯한 모습을 많이 보인다. 사랑한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끝없이 데이지의 사랑을 확인하려고 한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굳이 데이지에게 톰을 사랑한 적이 없다는 말을 하도록 강요한다. 데이지를 순수하게 사랑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다. 데이지가 함께 떠나자고 했을 때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사랑을 확인하고자 한다.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고, 어떻게 성공했는지를 굳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확인받고자 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지난 5년간 개츠비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그가 돈을 벌어야만 하는 이유인 데이지만 존재했을 뿐이다. 그녀를 다시 찾기 위해서 그는 영혼을 팔아 돈을 벌었고, 그녀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매일밤 파티를 열면서 어영심이 가득한 그녀가 자기를 찾아오길 기다린다. 스스로 찾아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찌질하게도 다른 사람들이 먼저 움직여 줄 때까지 기다린다. 그에게는 막상 다가설 용기가 없던 것이다. 가난한 신분을 숨기고, 이제는 졸부가 되었지만 그가 돈을 번 과정은 깨끗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신분상승을 이루고 싶지만, 결국은 태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언제 자신이 가진 것들이 날아갈지 모르는 불안한 나날이 이어지는 것이다. 닉은 그를 가장 희망에 찬 사람이라고 했지만, 그는 가장 불안에 떨며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결국 개츠비가 여기까지 달려오도록 시동을 건 사람도 데이지였지만, 그를 멈출 수 밖에 없도록 만들 것은 데이지였다. 개츠비에게 데이지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가 살인을 저질렀고, 이제는 그녀를 위해서 자신이 사라질 차례가 되었다. 끝없이 인정받고 싶었고, 성취하고 싶었던 개츠비는 자신의 존재의 이유가 사라질 수 밖에 없는 위기 상황에서 결국 자신이 먼저 사라지게 된다. 개츠비에게 존재의 이유는 데이지였고, 사람들 앞에서 데이지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면 그는 모든 것을 다 이룬 것이 되었다. 하지만 개츠비가 그렇게 집착하던 순간에 오히려 개츠비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불안정한 모습을 사람들 앞에서 들키게 된다. 여기서 결국 개츠비는 추악하고 연약한 자기 자신을 다시 만나게 된다. 가장 화려한 삶을 누리는 것 같지만, 그 안에 숨겨두었던 찌질이의 모습이 다시 한 번 드러나는 순간이였다. 그 견길 수 없는 순간 데이지를 따라 나와서 차를 함께 탔고, 결국은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외롭게 떠나게 된다. 개츠비가 자기 자신을 조금만 더 사랑할 수 있는 여유를 가졌다면 어땠을까? 부와 명예라는 수단을 위해서 자신의 영혼까지 팔아야했을까? 데이지와의 아름다웠던 추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시절만 죽도록 그리워한 것은 아닌가? 데이지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하지만 톰 앞에서 꼭 확인받아야 한다고 여긴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할수록 개츠비가 너무나 안스럽고, 슬프다. 그렇게 밖에 살 수 없었기에 개츠비로써는 유일한 선택지가 끝없이 돈을 버는 것이였다. 끝까지 이러한 개츠비의 마음을 지켜본 것은 닉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장례식을 함께 지켜준 사람도 결국은 닉 밖에 없었다. 개츠비에게서 화려함을 빼고 나니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사랑을 추구했다고는 하지만, 그 안에 '나' 자신은 없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개츠비는 가장 불쌍한 인간형이라고 할 수 있다. 100년이 지난 대한민국에서는 또 다른 개츠비들이 새로운 세상을 요구하고 있다. 멋지게 사랑을 쫒는 친구들도 있지만 그냥 부와 명예만 쫒는 청년들이 더 많다. 그들에게 묻고 싶다. "왜 부자가 되려고 하는지" 그냥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돋버는 일에 대한 자신만의 이유가 존재해야한다. 그리고 그것은 데이지같이 외부적인 요소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믿고 이끌어줄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하는 것이다. 그 소리가 바로 고장 난 차에 브레이크를 걸어줄 수 있고, 쉬었다가 새로운 길을 떠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닉은 그럴 이유도 없었고, 그렇게 할 필요도 없었다. 개츠비의 삶은 개츠비의 것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