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홍세화 선생님의 특강을 듣게 됐다.
말로만 듣던 벙커1을 처음 가봤는데, 마침 초청인사가 홍세화 선생님이였다.
대학생시절 홍세화 선생님과의 첫 만남은 신선했다.
'똘레랑스'라는 용어도 그 때 처음 들었고, 나에게는 새로운 사고의 세계였다.
이후, 홍세화 선생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를 보면,
글은 훌륭한데, 언변은 능숙하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보았다.
내가 만난 홍세화선생님은 조용한 카리스마의
멋진 신사같은 풍모였는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할까 싶었다.
근데, 몇 해 전 진보신당 대표로 토론에 나온 홍세화선생님은
정치인들 사이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리숙한 좋은 사람으로만 보였다.
내 가슴에 불을 질렀던 그 신사분은 어디갔는가...
확실히 나이가 많이 드셨구나... 좀 많이 아쉽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10년 만에 다시 듣게 된 홍세화 선생님은
여전히 자신만의 삶의 철학을 가지고 계셨고 아직도 확실한 내공을 발휘하셨다.
중간중간 나름 농담도 섞어서 말씀하시는 내용을 듣고,
현실 정치가 아닌 삶의 철학에 대해서는 아직도 죽지 않았구나 생각하게 됐다.
꽤 많은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하셨는데,
그 중에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주제에 대해서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
"희망은 현재의 삶에 대한 불성실을 합리화하려는 핑계로 사용될 수 있다."
굉장한 통찰이다.
물론 홍세화 선생님이 희망이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희망이라는 핑계로 스스로를 속이는 경우가 존재한다.
희망을 이야기하기 전에
현재의 삶에서 내가 최선을 다했는지를 먼저 물어봐야 한다.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했지만,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때 우리는 그제서야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할 자격을 갖게 된다.
만약 그 미래를 생각했을 때 희망이 없다면,
더 이상 최선을 다할 의지는 꺾기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어나갈지, 아니면 빨리 선회할지 판단을 해야한다.
하지만,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현재에 충실하지 않는다면,
그 희망은 미래에도 나와는 거리가 먼 헛된 기대에 불과하다.
+
"사람은 생각을 가지고 태어나지는 않는다."
"<생각을 어떻게 형성하나?> 라는 질문을 던질 때 생각하는 사람이 되기 시작함"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설명한 이야기이다.
한국에서 아이들에게 생각이 무엇인지 생각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고집하고 있지만,
그 생각이 어디에서 왔는지 고민하지 않는다.
자신이 고집하고 있는 생각이 삶의 푯대로 작용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지금 나의 생각이 어떻게 형성되냐는 매우 중요한 이슈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지금 나의 생각은 내가 선택한 것인가?
아니면, 남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내 생각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
+
홍세화 선생님은
생각의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곳은 바로 학교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프랑스 학교와 한국의 한교를 비교 설명하셨다.
프랑스의 학교는 작고, 운동장도 없고 교단도 없음
프랑스 학생들은 줄을 서본적도 없기 때문에 위계화된 경험도 별로 없다.
프랑스에서 한국과 비슷한 학교는 군사학교밖에 없다.
그렇다면 한국의 학교는 왜 그럴까?
1894년 한국에 근대식 학교가 처음 생겼으나
일제 강점기 시기에 대부분 망하거나 변경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학교 시스템은 일제 강점기 시기의 학교라고 봐야한다.
한국 학교에서는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없게 만든다.
인간과 사회에 대해 끝없이 묻기 위해서는 글쓰기가 필요한데,
암기는 개성과 정체성을 무시한 체 똑같은 지식을 주입하는 방식이다.
한국에서 비판적 사고를 시작한 사람들은
대부분 학교 다닐 때 선배를 잘못 만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객관성은 지배세력의 주관성이다."
대한민국의 학교는 지배층의 지배논리를 재생산하는 곳이다.
'방공, 방첩, 질서' 라는 논리로 지배 논리를 강화시키고 있다.
학교는 민주공화국의 주체를 길러낼 수 있어야한다.
프랑스 학교에는 '자유, 평등, 박애' 핵심 가치를 추구한다.
한국의 학교에서는 민주주의와 공공성의 가치가 사라졌다.
공공성은 공화국이 가지는 가장 큰 가치이지만 사유화되어 있다.
Republic이 가지는 가치를 다시 되살리려고 노력해야한다.
현재의 대한민국의 교육 제도에서도,
결국은 아이들 스스로 삶의 의미를 규정할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해줘야한다.
만약 그럴 자신이 없고, 기존의 방법을 따라간다는 것은
부모가 자신의 삶의 의미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지를 먼저 돌아봐야한다.
내 삶에 대한 자신감이 있다면,
아이의 삶이 어떻게 형성되면 좋을지 자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
자본주의 사회에 살기에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서 배워야한다.
그렇기에 노동의 문제에 대해서도 자세히 배워야하는데 이는 간과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노동자이지만 노동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존재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배반하는 생각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사회운동들은 민족 정서에 대한 감정적 견해에서 출발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봐야하는 시점이다.
삶의 필수 요소는 3L로 설명할 수 있다.
Love / Liberty / Labor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가치는 소외되고 있는 상황이다.
+
"언어에는 놀라운 힘이 있다."
'민영화'와 '사유화'는 구분되야하며,
여기에는 분명히 지배 이데올로기가 들어가 있다.
현재 진행되는 '민영화'라 불리는 작업들은 사실상 국가 자산의 '사유화' 과정이다.
민주화는 민중이 쓰는 표현이지 권세가가 쓰는 표현이 아니다.
하지만, 경제 민주화는 마치 권세가들이 인심쓰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최고 권력자에게 필요한 것은 경청이지 소통이 아니다.
하지만, 정치적 논쟁은 소통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조중동에서도 나눔은 좋아하지만 분배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나눔의 반대는 독차지인데, 분배의 반대는 성장이라는 프레임에 갖혀있기 때문이다.
스웨덴의 국민부담금 47%이지만, 한국은 26%라고 이야기한다.
부르디에는 국가 예산을 집행하는데 오른손(기본 유지) 비용을 다 쓰고 나서 왼손 비용(복지)을 쓰게 된다고 설명한다.
이 기준에서 보면, 기본 유지 비용을 다 쓰고 난 후 복지 비용을 쓰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스웨덴과 한국은 4배이상 차이가 나는 것이 현실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제거하는 것이 복지이다."
인간의 미래에 대한 5가지 불안 요인가 있다.
(주거, 양육/교육, 건강, 노후, 일자리)
불안이 강하면 강할수록 인간성을 잠식시키기 마련이다.
한국의 공적 분배는 사적 나눔에 의해서 대체되는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다.
한국에서는 불안요인들을 가족단위에서 모두 해결하라고 자꾸 이야기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을 돕자고하면 성자라고 부지만,
가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자고하면 빨갱이라고 한다.
(브라질의 사회운동가이자 신부였던 돔 헬더 까마라 주교)
+
사람은 다르게 태어나기에 평등에 대한 욕구가 있기 마련이다.
다르게 태어나기에 존중받고자하는 욕구가 있다.
사람들은 다름을 인정하기보다는 비교해서
나의 우위를 확인해 만족하려는 저급한 속성이 있다.
권세가들은 이런 속성을 이용해서 차별을 부추긴다.
소수자는 소수자이기 때문에 끝없이 자기 성찰을 요구받으며,
소수자는 항상 약한자리에 있을 수 밖에 없는데, 이를 공감해주지 못하고 있다.
똘레랑스라는 표현은
'군자는 화이부동하고 소인은 동이불허하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이성이 성숙되지 않은 사회이기에 이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자기 성숙된 사람은 집단의 의식에 의존하지 않다.
"한국에는 GDP 인종주의가 있다."
출신 국가의 GDP에 따라서
사람을 차별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한국은 합리적 사회가 아니라 합리화한 사회이다."
한국에서는 우열을 가지고 합리화하며,
종교나 사상에 대해서는 선악의 개념으로 합리화하고 있다.
타고난 정서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한국에서는 주입된 정서에 의해서 왜곡되는 경향이 존재한다.
광신자가 열성을 부리는 것도 수치지만,
지식인이 열성을 부리지 않는 것도 수치이다.
(프랑스의 볼테르)
권세가는 사익을 추구하기에 열성적일 수 밖에 없다.
반대는 열성을 의지로 결합해야 그들과 겨룰 수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우리는 잡초를 없앨 수는 없지만, 뽑을 수는 있다. "
+
노예로 사는 것이 편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이는 소유의 귀속 문제로 봐야한다.
인문학의 위기와 인문학의 열풍이 공존하는 것은
소유를 위한 방편으로 인문학이 이용되고 있는 현상이다.
'소박한 자유인'
삶의 의미와 보람을 느끼면서
생존이 보장된 존재가 자유인이다.
나라는 인간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끈을 놓지 말아야한다.
"내 삶에 대한 최종평가자는 나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