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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의 이해 ⑥] 이승만과 제1공화국 - 서중석 (2007)

열린 공동체 사회 2014. 4. 4. 16:47


얼마전에 아끼는 동생이 페이스북에 글을 남겼다.


인도에 자와할렐 네루가 있다면
대한민국에는 건국대통령 이승만이 있다.


이승만의 <독립정신>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독립정신>은 이승만이 고종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한성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중 옥중에서 저술한 외교사 역사서이다.


20대의 어린 나이에 폐기넘치는 외교사 역사서를 저술했다는 점에서

확실히 젊은 시절 이승만은 능력있는 인재였음에는 틀림없으며,

구한말 일본과 청나라에 의해서 흔들흔들하던 나라를 걱정한 애국자였던 것같다.


독립정신
국내도서
저자 : 이승만,김충남,김효선
출판 : 동서문화사 2010.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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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뉴라이트계열에서 1904년에 쓰여진 이 책을 기준으로

이승만을 평가하는 잣대로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 <독립정신>은 한 번쯤 읽어볼만 한 책인 것같다.

물론 이 책에서도 이승만 특유의 독선적인 성격이 드러난다는 평도 있지만, 

뭐 젊은 시절 그 정도 곤조와 폐기는 있어야 독립운동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암튼, 20대의 이승만에 대해서는 별로 평가절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름 독립을 위해서 노력했고, 혼연단신으로 미국에 외교를 위해 뛰어든 점도 훌륭하다.


+


하지만, 30대 이후의 그의 삶에 대해서는

굉장히 논란이 많고, 자세하게 잘 정리된 자료를 찾기 쉽지 않다.


일단,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한 <백년전쟁>에서는 

이승만을 갱스터로 표현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좀 과하다고 느껴지는 부분들이 좀 많다.


그리고 재미를 위해서 그런 것일수도 있기는 하지만,
너무 감정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기에 오히려 스스로 신뢰도를 떨어뜨렸다.

백년전쟁은 다큐라고 보기에는 너무 주관적인 해석이 많이 들어간 영상이라서,
보는 내내 긴가민가하는 의구심을 스스로 자아내게 만드는 면이 너무 강한 것은 사실이다.
(서중석 교수나 이만열 교수같은 석학들 인터뷰를 따놓고 이렇게 애매한 영상을 만들었다는 점은 좀 실망스럽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분들은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에게 반론의 여지를 주었다.



근데, 여기에 등장하는 분들은...

오히려 더 신뢰가 안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전체 맥락은 보지 않고 너무 지협적인 부분을 가지고 전체 주장이 모두 틀렸다는 식으로 몰아가기를 하고 있다.


전형적인 논리적 오류로써 물타기식 주장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런 식의 주장은 정상적인 토론을 불가능하게 만들기에 아예 토론을 하기 싫어지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이들이 지적한 부분이 진짜 맞는지 아닌지 이 역시 별로 신뢰가 안가게 되었다.)


아무튼 의도적이든 아니든 좀 더 체계적으로 <백년전쟁>을 반박하고,

이승만이 잘했다고 이야기하고 싶으면  그 잘한 부분들을 좀 더 명확하게 정리해주었으면 좋겠다.


+


개인적으로는 자료도 충분히 않은 상태에서

이승만이 독립운동에 방해만 되었는지는 명확히 잘모르겠다.


하지만, 

이승만 때문에 독립을 쟁취한 것도 아니고,

이승만 때문에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것도 아니라는 점만은 이야기할 수 있을 듯하다.


그래서 이승만의 독립운동에 대한 재평가도 필요하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해방 이후의 이승만의 행적에 더 주목해야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최근 읽었던 <한국 전쟁의 기원>이나 <전쟁과 사회>에 묘사된

해방 이후 정부 수립과정과 한국전쟁 시기에 보여준 이승만의 행보는

굉장히 실망스럽다 못해 대한민국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과연 이사람은 무슨 일을 한 것인가?

그리고 이 사람을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하는가?



+


이승만의 행적에 대한 연구는

유영익 한동대 석좌교수와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의 의견이 극과극으로 갈린다.


유영익 한동대 석좌교수는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며,

선임과정에서부터 뉴라이트 논란에 휩싸였고 역사교과서 논란에서 편중된 견해를 내놓았던 분이다.


그는 이승만의 '공'과 '과'를 구분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가장 최근 저서인 <건국대통령 이승만>(2013)의 내용을 보면 확실히 편향적인 것은 사실이다.


유영익 교수는 이승만의 업적을 아래와 같이 평가한다.


정치 분야에서는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대통령중심제 정부를 수립한 다음 ‘거의 전제적인’ 권위주의적 통치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의회제도를 존속시키고 양당제도와 지방자치제를 도입하는 한편, 언론의 자유를 비교적 폭넓게 허용하는 등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외교 분야에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유엔과 미국 등 30여 개 국가로부터 승인을 받아내고, 6·25전쟁의 휴전 과정에서 미국 위정자들을 설득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군사 분야에서는 6·25전쟁 중 유엔군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함과 동시에 남한 국민의 충성을 확보함으로써 북한 침략군을 휴전선 이북으로 격퇴하고 나아가 이 전쟁을 계기로 국군의 규모를 ‘63∼70만 대군’으로 육성하는 데 성공했다. 


경제 분야에서는 농지개혁을 단행함으로써 구래의 지주 토지 소유제를 청산하고 그 대신 자작농의 토지 소유제를 확립함으로써 농업의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한국 자본주의를 태동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비록 일반 국민의 경제생활 수준을 크게 향상시키지는 못했지만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을 극복하고 전후 경제 복구에 성공했으며 수입대체산업의 육성으로 공업화의 단초를 열었다. 


교육 분야에서는 의무교육제도를 도입하고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해 이땅에 민주주의가 정착할 수 있는 기초를 닦았다. 나아가 중고등학교를 대폭 증설하고 대학을 확충하며 해외 유학을 장려함으로써 ‘교육 기적’을 이뤄내 산업화와 민주화에 필요한 고급 인재를 양산했다. 


사회 분야에서는 농지개혁으로 전통적인 양반제도를 뿌리 뽑고, 남녀에게 동등한 교육 기회와 취업 기회를 보장하는 정책을 추구해 한국 사회의 평등화에 이바지했다. 


문화·종교 분야에서 이승만은 한글 전용 정책을 철저하게 시행함으로 본격적인 한글 시대를 개막하고 전통문화의 계승과 보존에 필요한 조치를 마련함으로써 민족문화 창달에 이바지했다. 한편으로 기독교를 장려해 유교 국가였던 한국을 아시아 굴지의 기독교 국가로 탈바꿈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뭔가 이승만이 굉장히 잘한 것처럼 보인다.


근데, 책이 너무 대중서라서 그런지 깊이 있는 분석이나 설명은 별로 안보인다.

그리고, 역사학자가 쓴 책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주관적인 해석들이 많이 들어간 표현들이 눈에 띈다.


'거의 전제주의적 통치를 하면서도 민주주의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비록 일반 국미의 경제생활 수준을 크게 향상시키지는 못했지만, 전후 경제 복구에 성공했다'

'해외 유학을 장려함으로써 '교육 기적'을 이뤄내 산업화와 민주화에 필요한 고급 인재를 양산했다.'

'기독교를 장려해 유교 국가였던 한국을 아시아 굴지의 기독교 국가로 탈바꿈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뭔가 앞뒤가 안맞거나 너무나 주관적인 의견들이다.

솔직히 억지로 업적이라고 칭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억지로 맞춘 느낌이 들게 만든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일어났던 온갖 사건 사고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고 있다.


이승만의 공이라고 이야기한 부분에서도 

농지 개혁과 한글 정책에 대해서는 이승만이 원해서 진행된 것이 아닌 정책들이다.


농지 개혁에 대해서는 소장파와 농림부 장관 조봉암이 적극 추진한 것으로

이승만대통령은 실행을 계속해서 미루다가 1950년 5월 전쟁이 나기 바로 직전에 실행하였다.


또한, 한글 정책의 경우에는 오히려 일제시대 이전의 한글로 돌아가자는

마치, 40년만에 한국에 돌아온 이승만을 위한 맞춤화된 한글 간소화 정책을 발표했다가 욕만 잔뜩 먹게된다.

(오늘날의 한글은 1930년대 주시경 선생이 체계화시킨 맞춤법에 기반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승만이 미국에 너무 의존하기는 했지만,

깡다구를 가지고 미국한테서 빼먹을 것은 최대한 빼먹었다는 점과

교육 기회와 여성 인권 향상에 큰 도움을 줬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던 바이지만,


정치, 사회, 경제정책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동의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이승만이 잘못했다고 지적되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너무 언급을 안하고 있다.

(경제의 경우 북한보다 전후 복구가 늦었으며, 1958년 경기 불황이후 침체를 벗어나지 못한 체 2공화국에 넘기게 된다.)


반면에 '대한민국 현대사 1호 박사'였던 성균관대 서중석 교수는

이승만 시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상당히 깊게 파고들고 있다.

(서중석 교수는 얼마전 연세대 석좌교수 선정이 취소되는 헤프닝이 발생하며 좌파역사학자 논란이 있었다.)


이승만과 제1공화국
국내도서
저자 : 서중석
출판 : 역사비평사 2007.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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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승만 정부의 수립시기부터,

4.19로 인해서 이승만 정부가 무너진 시기까지의 역사적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도 필자의 주관적인 해석이 들어가있기는 하지만,

유영익 교수의 책처럼 의도적으로 한 쪽면만 보거나 한쪽으로 억지로 몰아간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이승만 대통령이 나쁘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이승만의 행적이 진짜 파란만장하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미군정 시절, 워낙 미국과 티격티격하면서 사고도 많이 쳤지만,

'반공'이라는 하지 사령관의 궁극적인 목적 달성에는 최상의 카드임에는 틀림없었다.


미군정 하지 사령관도 이승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에

송진우, 김구, 여운형, 김규식 등 꾸준히 고민했지만, 결국은 이승만이였다.


미국 중부 출신 하지 사령관은 전형적인 보수주의자였고,

한국인들을 위한 정책보다는 미국에 이익이 되는 정책이 최선이였기때문에,

'반공'을 할 수 있다면 무슨짓이든 상관없었고, 그 사람이 친일파든 매국노든 상관없었다.


좌익사상을 가진 여운형과 철저한 민족주의자 김구보다는

하지 사령관에게는 지멋대로기는 해도 이승만은 목적 달성만큼은 확실히 할 수 있었다.


여운형이 암살 당한 뒤에는 눈에 띄는 라이벌도 없었고,

김구가 있기는 했으나 그의 정치적 역량으로는 이승만을 뒤집을 수 없었던 것 같다.



민족주의자들이 불참한 5.10 단독정부 선거에서

한민당, 이승만 지지세력, 무소속구락부 세력은 비슷한 비율로 의석을 나눠 가지게 되고,


한민당과 협조체제를 갖춘 이승만은

간선제였던 대통령 선거에서 가볍게 김구를 누를 수 있었고,

부통령에는 한민당의 지지를 받은 이시영이 선출되었으며, 국무총리는 무소속구락부의 이범석이 임명된다.


그림만 보면 사이좋게 나눠가진 것같지만, 

무소속구락부에서는 조소앙을 국무총리로 추천했는데,

이승만은 자신이 추천한 이운영이 부결되자 별다른 힘이 없는 이범석을 지명해버린 것이다.

(내각구성에서도 이승만은 자신의 세력만을 배치함으로써 한민당과 사이가 본격적으로 갈라지게 된다.)


뭐 여기까지는 그래도 잘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당시의 시대상이라든지 특수성을 고려한다면 이 정도의 치열함과 독선은 이해해줄 수는 있다.

(물론, 중간중간 돈 문제와 무장 폭력의 사고들, 주요 정치인의 암살 협의 등의 큰 문제들도 있었다,)


그래도 성숙하지 못한 정치인들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의 권력 다툼이라고 인정해줄 여지는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된 이후의 행보에 대해서는 참으로 암담하기 그지 없다.


+


일단, 반민법과 농지개혁법 등 사회개혁에 앞장섰던

소장파(무소속구락부의 후신) 국회의원들은 이승만에게는 눈에 가시였다.


농지개혁법의 경우에는 오히려 한민당이 더 큰 피해를 봤기에,

이승만으로써는 용서가 됐을지 모르지만, 반민특위로 친일파를 척결하면 이승만에게 타격이 너무 컸다.

(농지개혁은 산업화의 기반을 다지고 봉건적 계급을 타파한 훌륭한 정책이지만, 소장파의 정책이였고 농림부장관은 조봉암이였다.)


반민특위 활동에 위협을 느낀 이승만은

6.6반민특위 습격사건과 국회프락치 사건을 통해서 소장파를 척결해버리고,

김구 암살 사건 발생 이후에는 보도연맹을 만들어서 극우반공주의로 여론전을 펼쳐나간다.


이러한 이승만에 대한 당시의 여론은 최악이였다.

1950년 5.30선거에서 한민당의 후신 민국당과 이승만의 지지세력은 참패를 당했고,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당선되면서 무소속이 200석중에 126석을 차지해버린다.


당시, 제헌 국회의 임기를 2년으로 선정했기에 7월에 대통령 선거가 있어야 정상이였지만,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이승만은 정권을 그대로 유지하게 된다.

(국회 2/3가 반이승만세력이였기에, 사실상 재선이 불가능했는데, 한국전쟁이 이승만을 살려준 것은 사실이다.)


이후 정치적 사건들은 계속 이어지게 된다.

1952년 5월 26일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로 개정을 추진하기 위해서

국회의원들이 탄 버스를 크레인을 동원해서 견인해버리는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켜버리고,

6월 20일에는 국제부락부 사건을 발생시키는 등 갖은 노력 끝에 개헌안을 통과시켜버린다.


당시 전쟁중인 상황이였기에 극우반공주의가 극에 달했고,

이승만은 이를 이용해서 철저히 정적들을 제거하면서 갑작스럽게 진행된 직선제를 통해 당선된 것이다.


자유당을 창당한 이승만은

자유당의 창당 공신인 민족청년단(족청)계도 제거해버리면서 당내 독재체제를 이어가고,

1954년 선거에서는 부정선거를 통해서 자유당이 압승을 거두면서 확고한 지도체제를 구축해나간다.

(이후 진행된 개헌에서 그 유명한 사사오입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하지만, 민주당이라는 제1야당이 출범한 1956년 선거는 이승만에게 위기였고,

신익희의 사망으로 이승만이 대통령에서는 당선되지만, 민주당의 장면이 부통령에 당선된다.


당시 민주당의 신익희-장면 라인과 진보계열의 조봉암-박기출 라인은

후보 단일화를 통해서 이승만에게 대항하려고 했으며 충분히 승산이 있었지만,

신익희가 사망하면서 민주당이 오히려 조봉암이 아닌 이승만을 지지해버렸다고 한다.


공산주의자 출신의 조봉암이 되는 꼴을 못보겠다는 것인데,

온갖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조봉암이 선전을 하면서, 조봉암은 진보당 사건으로 제거당하게 된다.



이후 자유당은 1958년 국회선거에서도 온갖부정선거를 자행하며 126석을 확보하지만,

개헌선을 확보하지 못하면서 영구 집권을 위한 개헌이 어렵게 되었고,

1960년 선거에서 또다시 부정선거를 일으키면서 학생들의 시위가 커지면서 4.19가 일어나게 된다.


+


분명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4번의 대통령 선거와 4번의 국회의원 선거가 진행되었다.


근데, 그 내막을 보면 참으로 암울하다.


1948년 대통령 선거는 간선제로 민족주의자들이 빠진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1952년 대통령 선거는 직선제로 전쟁중에 갑작스럽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유리한 상태에서 당선된다.

1956년 대통령 선거는 민주당 신익희의 사망과 온갖 부정선거로 승리하였으나, 부통령 선거에서는 패배하고 말았다.

            (이때 선거에서 패배한 조봉암은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1960년 대통령 선거는 민주당 조병옥이 사망하면서 단독으로 선출되었으나 부통령 선거에서 부정을 일으켜 4.19가 촉발된다.


1948년 총선에는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빠진 상황에서 한민당, 이승만 지지자, 무소속구락부가 사이좋게 의석을 나눠갖는다.

1950년 총선에는 무소속만 126석이 되면서 반이승만 세력이 2/3를 점령해버렸기에 한국전쟁이 없었으면 정권을 바뀌었다.

1952년 보궐선거(한국전쟁으로 인한)에는 새로 창당한 자유당이 부정선거를 저지르면서 완벽하게 압승을 거둔다.

1954년 총선에는 '곤봉선거'라 불릴정도로 본격적인 부정선거가 시작되었으며, 자유당이 114석을 차지하면 압승을 거둔다.

1958년 총선에도 부정선거는 이어지며 자유당이 126석을 차지하지만, 민주당이 79석을 차지하면서 개헌선을 달성하지 못한다.


1948년에는 단독정부 수립에 의한 반쪽짜리 선거였으며, 

1952년에는 전쟁중에 갑작스럽게 진행된 직선제였고, 1952년 보궐선거부터는 자유당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부정선거가 판을 쳤다.


조봉암은 1952년과 1956년에 연이어 대선에서 2위를 차지하며,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이승만이 이길수 없는 상대가 되면서 제거당하였고,


민주당은 신익희와 조병옥이 연속으로 대통령선거 전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1952년 민국당 시절에 갑작스럽게 고령의 이시영을 내세워 3위를 차지한 것말고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다.

(물론 1956년 부통령선거와 195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굉장한 선전을 펼친다.)


어찌보면 이승만이 계속해서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민주주의가 정착하지 못한 시절 온갖 부정선거와 관권, 금전 선거가 남발했기에 가능했던 것이지만,

당시 문맹률이 80%에 달하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이승만을 견제했다는 것은 대단한 국민들임에 틀림없다.



당시 1948년 여성에게도 동일하게 투표권이 부여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대단한 선진적인 의식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미국이 1920년, 영국이 1928년, 프랑스가 1946년에 이루어졌고,

유럽의 상당수의 나라가 우리나라보다 늦게 여성 참정권이 주어졌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여성에게 동일한 참정권을 줬다는 것은 국민 의식 수준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다만, 1950년대 들어와서 이승만정권이 여성들의 참정권을 이용해서,

온갖 생활용품을 지급하며 금권 선거가 난립하게 만들었다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처음부터 이런 시스템을 도입할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 같다.


+


안타깝게도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만 보면,

이승만은 정치적 야욕에 넘치는 독재자라는 사실밖에 알 수 없다.


그래서 그의 사고를 좀 더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 서중석 교수의 또 다른 책을 읽어보았다.


이승만의 정치이데올로기
국내도서
저자 : 서중석
출판 : 역사비평사 2005.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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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일민주의 - 극우반공주의 - 오륜사상'으로 변해가는지를 설명하고,

이승만의 개인적인 성향에 대해서도 심층적으로 분석한 논문 모음집이다.


뒷쪽에 민주당에 대한 내용과 심산 김창숙 선생에 대한 논문도 굉장히 흥미롭다.

(민주당에 대한 내용을 별도 포스팅으로 정리해보려고 한다.)


서재필이 완전히 서구화된 인물이였다면,

이승만은 미국에 체류기간이 매우 길었지만 완전히 봉건적인 인물이였다.


1875년에 태어나서,

1905년에 미국에 건너갔고, 중간에 한국과 스위스, 중국에 체류한 것외에

1945년 70세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올때까지, 인생의 절반을 미국에서 보냈다.


1953년에 이승만이 대통령 재직시절,

이승만이 1930년대 주시경 선생이 체계화 시킨 맞춤법을 잘 몰라서,

독립신문 시대의 한글로 돌아가자는 '한글 간소화 파동'까지 일어났던 것을 보면

확실히 이승만은 한국보다는 미국식 문화가 더 익숙한 사람이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철저히 봉건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인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유교적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임기 내내 2인자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철저하게 제왕적인 임금이 되려고 했다.


1948년에는 정적들을 견재하기 위해서 이범석을 키워졌다가,

1952년에는 당시 아무런 인지도가 없었던 함태용을 부통령으로 내세우고,

1956년에는 미국 유학시절부터 이승만의 비서였던 이기붕을 내세웠으나 선거에서 지고,

1960년에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이기붕을 다시 당선시키려다가 4.19의 불씨를 만들게 된다.


라이벌로 부상하고 있던 조봉암은 물론이고,

자신에게 충성을 다했어도 자유당이 창당된 이후에는

세력화될 수 있는 족청계(이범석, 양우정, 안호상)도 과감하게 처단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승만 대체할만한 인물로는

미국과 친했던 장면과 조병옥이 있었지만 이 둘은 너무나 나약해서 미국에서도 밀어주지 못한다.


김일성과 같이 우상화 작업을 진행했었기에,

이승만에 대해서는 파시스트적 성향이 있었다는 비난도 있지만,

이승만에 대해서는 강준만의 평가가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공감이 갔다.

'이승만의 시계는 구한말에 멈춰져 있었다. (많은 부정적평가와 긍정적평가를 이루면서도) 이승만은 평생을 복고적 투쟁을 위해 바친 인물이었다. 이 점을 무시한 채, 오늘날의 잣대로 이승만을 평가하는 것은 이승만에 대한 불필요한 악의적 해석만을 낳을 뿐이다'  <한국현대사 산책 (2004)>


실제적으로 이승만은 미국에 건너간 이후로 마치 시간이 멈춘듯하다.

왕족의 후예(양령대군)임을 스스로 자청했던 것이나,
왕손인 영친왕의 귀국을 막았다는 점에서 그는 이씨조선의 왕이 되고 싶었던 것같다.

유교적 분당론에 따르면 정당은 분파의 이익을 대표하는 것이기에 
정치적 위기가 오기 전까지 자유당을 창설하지 않고 일민주의를 주장한 것도 이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이승만의 주위에는 언제나 자신의 말에 충성하는 예스맨들로 가득찼고,
이승만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이승만이 나쁜 것이 아니라 예스맨들이 비리를 저질렀다고 주장한다.

이승만의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사실상 일본 국군주의에 가깝다는 평가도 있지만, 어찌보면 전근대적 군주의식에 더 가까울 수도 있다.

형식은 미국식의 민주주의를 가져오기는 하지만,
내용은 구한말의 군주체제를 유지하고 싶어했던 것같다.

백성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홍익인간을 교육이념으로 정하고,
공자의 왕도정치를 찬양하고, 도의도덕과 예의염치 등을 가종한 것도 어쩌면 이런 맥락일 수도 있다.

겉으로는 철저히 반공과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지만
속으로는 봉건적 사고와 절대군주체제를 유지했던 이중성은

어찌보면 30세라는 나이에 미국에 건너가서 70세에 한국에 돌아왔던
봉건적 가치체계를 가지고 미국식 교육과 생활을 했던 그의 인생이 반영된 결과라 볼 수 있다.
(사실상 이승만이 일제시대에 국내에 거주한 것은 1910년 YMCA선교사로 근무한 3년밖에 없음)

또 하나의 가장 큰 변수는 이승만의 나이였다.

당시의 평균연령이 50세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70이라는 나이는 지금으로 따지면 90~100세 정도는 된다고 생각해야한다.

자유당이 대통령선거는 무투표당선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부통령 선거때문에 3.15 부정선거를 진행한 이유는 80이 넘은 이승만이 언제 죽을지 몰라서라고 한다.
(부통령은 아무 권한이 없지만, 대통령이 죽으면 그 자리를 승계받게 된다.)

워낙 재능이 출증한 사람이라고 해도
70세라는 나이는 그를 보수적으로 만들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솔직히 70세라는 나이는 요즘세대에서도 굉장히 고령이고 완전히 은퇴했을 나이이다.)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왜 그렇게 사람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동상을 세우고 최고의 자리에 집착했는지 한 편으로는 이해가 간다.
(그 덕에 그에게 적당히 충성을 다했던 자유당 일파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될 수 있었다.)

이승만 정권의 횡포는 자유당 정권의 횡포라고 봐야한다는
보수측의 주장에 대해서도 그런 부분에서는 공감이 가기는 하지만,
그런 자유당을 제대로 통제못한 이승만에게 근본적인 책임이 있는 것은 잊지말아야 한다.
(80세가 넘어서까지 정권을 쥐고 있었다는 것은 완전히 이기적인 행동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왕족 출신이지만 과거에는 낙방했고, 대신에 미국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은 사람
청년시절을 조선에서 보냈지만, 대부분의 인생을 미국에서 보낸 사람 
미국을 가장 잘 알고 있고 완전 친미이지만, 자신이 원할 때는 미국에게 땡깡도 부릴 수 있는 사람
기독교를 철저히 신봉하지만 철저히 유교적 사고를 가졌고 유교적 사고를 장려한 사람
극우반공주의의 최선봉에서 민주주의를 부르짓었지만, 2인자를 인정하지 않는 절대 군주였던 사람
조선 왕조를 무너뜨리려고 하다가 감옥까지 갔었지만, 정작 자신은 유일영도자의 꿈을 꾸었던 사람
평생을 미국에서 이방인으로 살다가, 절대 군주에 굶림하여 그 자리를 놓칠 수 없었던 사람

이승만이 보여준 이러한 이중성들은
동일한 전제주의적 독재 정권이였지만,
그 뒤를 이어 나타난 박정희와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줬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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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첨언]


댓글로 어느 분께서,

이승만 시대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지적을 해주셨다.


책의 내용에 기반해서 정치적 사건들만 서술하다보니,

책에서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던 사건들에 대해서는 누락이 되어버렸다.

(사실상, 이승만이 자행한 가장 죄질이 나쁜 사건들이라 할 수 있다.)


제주4.3사건 때 아무 죄없는 민간인 사망자 약 3만명 (추정)

한국전쟁 반발 당시 한강다리 조기폭파 사건으로만 민간인 수 백명 (추정)

한국전쟁 중 보도연맹 사건으로만 수 만명 (추정)

한국전쟁 중 부역자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민간인 학살 수 만명 (추정)

한국전쟁 중 국민방위군으로 징집해놓고 굶어죽인 장병만 약 5만명 (추정)


모두 합치면 수 십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억울하게 사망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들만 언급한 것이고, 실제로는 더 많은 사건들이 발생했었다.)


빨갱이 소탕을 이유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빨갱이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인 사건들도 있지만,


보도연맹 사건처럼 계획적으로 살인이 자행된 죄질이 나쁜 사건도 있고,

심지어 계획도 없이 엄동설한에 징집만 해놓고 거지처럼 굶어죽인 사건도 있다.


하나하나 설명하자면 너무 길고...

더 어이없는 것은 피해자에 대한 제대로된 조사조차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관련된 내용은 

김동춘 교수의 <전쟁과 사회>를 읽어보면 그 처절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전쟁과 사회> 관련 포스팅 확인하기 <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