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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의 이해 ⑤] 전쟁과 사회 - 김동춘 (2000)

열린 공동체 사회 2014. 3. 31. 23:49
전쟁과 사회 -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개정판)
국내도서
저자 : 김동춘
출판 : 돌베개 2006.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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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사회>의 가장 큰 장점은

한국전쟁을 민중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점이다.


1980년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서 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면,

2000년대 김동춘 교수는 한국전쟁 그 자체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전쟁의 정치적 측면, 전쟁과 계급 갈등, 전쟁과 정책을 분리시키는 기존의 인식 태도는
일본 극우파의 공식적인 역사 인식과 유사한 패턴에 불과하며, 한국전쟁에 대한 공식화된 인식은
정치/사회적 과정으로서의 전쟁의 진행 과정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흐리게 하며,  오늘의 정치/사회를 이해하는데 기여하지 못한다."


김동춘 교수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전쟁의 원인과 책임 규명을 하는 것도 필요한 작업이지만,

실제적으로 전쟁 과정에서 발생한 정치사회적 사실들은 거의 정리가 안되었기에,


"전쟁중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그러한 일들이 왜 일어났는가?"

"그러한 일들이 전쟁 후 한국정치에서 어떻게 반복, 재생산 되었는가?"


3가지 질문에 대해서 소홀히 취급해왔던 중요 현상들에 주목해서 한국전쟁을 분석했다.


+


이 책을 읽은 소감은 한국전쟁의 맨살을 본 느낌이다.


정치적 측면에서만 바라본 한국전쟁은 분단이 고착화되는 역사적 사건에 불과했다면,

민중의 관점에서 바라본 한국전쟁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되는 지옥과 같은 비극의 현장이였다.


피난과 점령, 그리고 학살로 이어진 전쟁은

왜 싸우는지도 왜 죽어야하는지도 모르는 민중에게는 고통의 연속일 뿐이였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제작자는 이 책을 10번 이상 읽었다고 한다.


물론 극화되는 과정에서 막판에 약간 억지스러운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보도연맹 사건이나 학도병의 착출, 동족상잔의 비극 같은 민중차원의 고통을 잘 들어낸 영화이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당시 상황에 대한 자료가 제대로 정리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김동춘 교수는 전쟁의 조각난 기억들과 통제된 기억들을 되살려서 이 책을 저술했다고 이야기한다.


"피학살자의 가족을 비롯해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들은 빨갱이로 몰릴까 봐 그 사건을 단 한 번도 공개적으로 발설한 적이 없었다.
그 동네에서는 ‘그날 이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잔인한 망각의 세월이었다."

이념 논쟁의 두려움은 피해자들의 입에 자갈을 물렸고,
그 때의 상처는 마음 속 깊은 속에서 분노로써 자리잡게 되었다.

"한국전쟁을 다시 정리하지 않고서는 오늘의 한국 자본주의 정치, 경제, 사회 질서를
제대로 정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새롭게 갖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 본다면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이 것이 바로 김동춘 교수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이다.


+


이 책이 던진 수많은 화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전쟁에 대한 명칭이였다.


북한에서는 이 전쟁을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르며,

남한에서는 이 전쟁을 6.25사변이라고 부른다.

영어로 이 전쟁의 공식적인 명칭은 Korean War(한국전쟁)이다.


전쟁에 대한 명칭은 굉장히 많은 정치적 목적을 담고 있다.


북한에서는 친일파 척결과 미제국주의 제거를 위한 전쟁이였다는 전쟁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고,

남한에서는 전쟁 개시일인 6.25를 강조함으로써, 남침을 강행한 북한에 대한 책임을 강하게 주장한다.


반면에, 국제적으로는 싸움의 당사자의 이름을 붙이지 않고, 싸움이 일어난 장소에서 이름을 따왔다.

(전쟁의 성격이 내전이라고만도 할수 없고,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연합군이 참여한 복합적인 전쟁임)


한국전쟁에서 시작된 이러한 작명법은 베트남 전쟁, 이라크 전쟁으로 최근에도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어떠한 정치적 목적이나 이념이 담겨있지 않은

'한국전쟁'이라는 명칭이 가장 명확하고 공정한 명칭이라는 생각이 든다.



북한의 주장은 너무나 터무니 없이 자신들의 관점만 우기고 있는 것이고,

6.25사변이라고 하기에는 전쟁이 너무 복합적인 원인으로 시작됐고, 이 또한 정치적 목적이 포함되어 있다.


6.25를 기념하는 덕에 전쟁이 개시된 날짜는 너무나 잘 알아도, 

전쟁이 종료된 날짜는 아무도 알지 못하면서 오히려 전쟁의 분위기를 지속해나가게 된 것이다.


아직도 남한과 북한에서는 누가 전쟁을 먼저 시작했느냐에 대해서 싸우고 있지만,

6월 25일 당일 상황에 대해서는 육본 일직장교였던 김종필이 침묵을 지키면서 명확하지는 않지만,

김일성이 대대적인 남침을 사전에 계획해서 전면전으로 확전시켰다는 것은 소련기밀문서를 통해서 이미 증명되었다.


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누가 진정 전쟁을 원했고, 과연 이 전쟁을 통해서 누가 이익을 봤는지의 문제이다.


김동춘 교수는 한국전쟁의 성격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한국전쟁은 일제 식민지 지배의 극복을 통한 근대국가 수립의 국면에서 미소에 의한 분할점령과
냉전적 세계 질서의 영향으로 인해 국내의 정치적 계급적 갈등이 전쟁으로 폭발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결국 내적 갈등이 냉전적 세계 질서로 인해서 전면전으로 확대됐다는 것이며,

아이러니 하게도 전쟁을 통해 민중은 고통을 당했지만 남북의 정권은 확실히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김일성은 남로당계를 비롯한 자신의 정적을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게 되었고,

이승만도 반공주의를 기반으로 흔들리던 자신의 정권을 확고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일본은 전쟁보급품 수급 기지로써 경제적 부흥의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고,

미국은 2차대전의 조기 종영으로 창고에 쌓아두었던 전쟁물자 제고를 말끔히 해결했으며,

종이 호랑이로 전략했던 중국은 미국와 대등한 전쟁을 치루면서 국제적으로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UN이 참여하게 기회를 열어준 소련은 어설프게 북한을 지원하면서 리더십을 상실하게 된다.)


남한에서 130만명, 북한에서 250만명이 사망했지만,

주변국들은 모두 실리를 챙겼고, 남북한의 정부 지도자도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


전쟁의 전개 양상을 보면, 

소련의 제의로 미군과 소련군이 모두 철수한 상황에서,

실질적으로 전쟁 능력을 갖추지 못한 남한은 초반에 너무나 쉽게 밀렸다.


이승만이 수시로 북진을 외쳤기 때문에,

미군은 남한의 병력을 10만명으로 제한을 했었고, 지원도 최소화해서 전차가 한대도 없었다.


이에 비해서 북한은 병력이 20만명 정도 되었고, 소련에서 전쟁 물자를 지원받았다.

결정적으로 인민군에는 중국 내전에 실전 경험이 풍부한 조선의용군이 6~7만명 정도가 포함되어있었다.


여기에 전쟁이 발발하기 2주전에 전군 중앙 요직의 대규모 인사이동이 단행되었고,

6월 24일에는 각종 작전 명령과 비상경계령이 해제되어서 후방부대의 상당 수의 장병이 휴가나 외출중이였다.


여기에 6월 24일날 밤 수뇌부는 미군들과 밤늦게까지 회식을 진행해서 모두 술에 취해있었다.

미국과 이승만은 이미 북한의 전쟁 준비 내용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별다른 준비를 안한 것이다.


당시 총선에서 이승만이 참패한 상황이여서 정치적으로도 위기였기에,

이 정도로 허술한 상황이라면 남침 유도설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닌 듯하다.

(어찌보면 미군이 이미 철수를 한 상황이여서 정부 입장에서는 손놓고 기다릴 수 밖에 없었을 수도 있다.)


이러니 뭐~ 추풍낙엽처럼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병력도 절반에 전쟁 경험도 전무하고, 거기에 전쟁 장비에서도 완전 밀렸으니...)


전쟁이 터진 후 미군의 참전을 기대하고 상대적으로 여유를 부리던 이승만도,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27일 새벽 국회의원들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주요 문서도 치우지 않은 체 서울을 떠난다.


낙관적으로 전쟁상황을 보고하면서 시민들에게 대비할 기회도 주지않았으며,

27일 대전으로 대피한 이후 미군의 참전이 확정된 이후에서야 공개 석상에서 전화를 통해서 방송을 한다.


그리고 28일 새벽 2시, 4000명 이상이 건너고 있던 한강다리를 조기 폭파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수백명이 폭사하게 되었고 한강 이북에 수많은 병력과 보급품은 고스란히 남겨진 체 북한에게 점령을 당한다.



1차 피난 시기에는 정치적으로 인민군에게 피해가 예상되는 사람들만 피난을 갔다고 한다.

경찰과 공무원, 우익활동가은 피난을 선택했고, 중도파 정치가와 지식인, 자영업자는 그대로 남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때 남은 사람들은 

인민군이 점령했을 때는 해당 지역 출신의 좌익들이 붉은 완장을 차고 동네 주민을 학살하는 것을 경험했고,

국군이 국토를 수복했을 때는 경찰과 군인에 의해서 북한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학살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미군의 무차별적인 폭격과 함께 학살은 수많은 민간인들의 인명피해를 낳았고,

오히려 군인보다 더 많은 민간인들이 사망하면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에 만들었다.


학살은 방식도 잔인했을 뿐만 아니라, 

굉장히 개인적인 원한이나 감정으로 권력을 남용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게 나타났다.

(학살에 의해서 남북한 모두 수십만명씩은 사망한 것으로만 추정되고 있다.)


어느 한 쪽편에 확실히 서지 않으면 쓸데없는 보복의 빌미를 주었고,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모함하는 일도 서슴치 않게 되었다.


특히나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면서 점령을 당한 지역에서는

계속되는 보복이 이어지면서 뭔가 의식있는 사람들은 반대파에 의해서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경험은 1.4후퇴 때 대다수의 사람들이 피난을 선택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괜히 잔류했다가 인민군의 또 다른 보복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한 피난을 한 것이다.


+


국토의 90%를 점령당했던 남한은 국토의 90%까지 점령했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서울을 다시 뺏기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당시 국군은 중공군이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38선을 뚥고 지나간다.

종이 호랑이였던 중공군의 경고따위는 살짝 무시했지만 그래도 좀 맘에 걸렸는지,

UN군은 국군이 38선을 넘은지 1주일 정도 있다가 38선을 뚥고 올라갔다고 한다.


학살은 이북에서도 만만치 않게 진행되었고,

미군의 폭격으로 거의 모든 동네가 쑥대밭으로 변하게 된다.

(당시 평양인구가 40만명인데, 평양에 떨어진 포탄 수가 42만 발이였다고 하니, 미군도 참~ 어지간 하다...)


하지만,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상상을 초월했고,
맥아더는 핵폭탄을 26발이나 떨어뜨리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게 떨어졌으면 그 후유증은 아직도 남아있을 듯하다...)

다행히 이미 소련이 핵을 개발한 상황이였기에,
결국 트루먼 대통령과 계속해서 트러블이 있던 맥아더가 해임되면서 핵전쟁은 면한다.
(당시 미국에서는 맥아더가 대선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인기가 좋았는데, 맥아더가 워낙 전쟁 미치광이라서 대선에는 못나갔다고 한다.)


1951년 7월 이미 전선은 고착화되기 시작했고,

이후 2년 동안은 고지전만 지속되면서 쓸데없는 희생만 이어진다.


"왜 싸우기 시작한지 잊어버렸다"라는 표현이 당시의 상황을 잘 묘사해준다.

(영화 <고지전>은 그 참혹한 상황을 아주 잘 묘사하고 있다.)



정전 협상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진 이유는 바로 포로 문제였는데,

자유송환이나 자동송환이냐의 문제로 논쟁이 이루어진 것이다.


제네바 협정 당시 원칙상으로는 자동송환이 이루어져야하지만,

당시 전쟁의 특수성으로 인해서 미국은 자유소환을 주장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제네바 협정 때 공산주의의 확산을 두려워 자동소환을 주장한 것은 미국이였다.)


이유는 인천상륙작전으로 중간에 고립되었던 인민군의 상당수가 포로로 잡히게 됐는데,

그 중에 상당수는 남한 출신이면서 인민군에 합류한 의용군이였던 것이다.


그들의 고향은 남한인데,

자동송환의 원칙을 적용하면 이북으로 이송되는 애매한 상황이다.


안그래도 중국과 북한과 싸워서 정전을 하게 되서 자존심이 상하게된 미국입장에서는

상당수의 포로에게 자유의사를 물어봤더니 남한행을 선택했다는 것을 통해서 자존심을 세우고 싶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가 이북행을 택했고,

이산가족 찾기 신청자를 보면 이때 월북을 선택한 아들이 남한의 가족을 찾는 경우가 가장 많다고 한다.

(남한행을 선택해봤자 빨갱이로 몰릴 것을 두려워해서 이북행을 택한 사람도 꽤 많았다고 한다.)


더 어이가 없는 사건은

많은 장병들을 그대로 두고 피난을 갔더니

남아있던 장병들일 의용군이 되는 것을 경험한 이승만 정권은

1.4후퇴 때는 의용군이 되지 않도록 참전이 가능한 장병들을 '국민방위군'이란 이름으로 징병을 해버린다.


문제는 그것이 추운 겨울이였고 사전에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는 점이다.

무려 60만명의 장병들을 끌고 남하를 하면서도 아무런 보급품도 없고 식량도 없었다.


한 마디로 거지꼴로 데리고 내려가면서, 북한 인민군에 합류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와중에 군수물자를 관리하던 간부들은 물품을 빼돌리는 일까지 발생한다.


무려 5만명의 장병들이 전쟁에서 싸우다 죽은 것이 아니라,

추운 겨울에 얼어죽거나 굶어죽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이게 그 유명한 '국민방위군'사건이지만

정작 사건의 책임은 말단 책임자의 처벌로 꼬리짜르기를 하고 만다.

(사건 책임자의 꼬리짜르기의 전통은 이때에도 여전했던 것 같다.)


+


참... 가슴 아픈 역사이다...


특히나, 책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는 

북한의 반공분자 처벌이나 남한의 부역자 처벌과 보도연맹사건은

전쟁의 잔혹성뿐만 아니라 왜 한국사회가 오직 자기 살길만 찾는 기회주의자를 양성했는지를 이해하게 만든다.


보도연맹사건의 경우에는

정부에 의해서 계획된 살인이라는 점에서 가장 악랄한 사건이다.


보도연맹이란, 좌익에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전향한 사람의 명단을 작성한 것으로

일제시대에 진행되었던 사상범 보호관찰법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놓은 것이다.


정부에서는 남쪽으로 후퇴하는 과정에서 위험인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들을 대규모로 학살했고, 이 중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냥 이름이 올라간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보도연맹 리스트에 이름이 올려진 사람만 100만명에 달했다고 하니, 도대체 몇 명이 죽었는지 상상이 안간다.


당시 보도연맹 리스트를 관리하고 학살을 자행한 것은 육군본부 정보국이였는데,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에 소속되어 있던 사람들은 이후 대한민국을 주름잡는다.

(백선엽, 장도영, 박정희, 김종필, 박종규)


학살자들에 대한 유골은 수습되지 않았고, 아직도 발굴이 제대로 끝나지 않은 상황이다.

또한,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한국전쟁 때 친일파에게 학살당하거나 월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남한이고 북한이고,

해방 후 새로운 세상을 기대했던 모든 사람들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모두 학살의 대상이 된다.

(그 덕분에 남한과 북한 모두 안정적 정권을 구축하는 계기가 된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해주지 못하며,

정부를 믿을 수 없을뿐만 아니라 항의할 수도 없었다.


권력자가 바뀔 때마다 권력자에 기댈 수 밖에 없게 만들었고,

염치와 도덕이 없으며 나만 생각하는 피난 상황은 전쟁이 끝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전쟁은 전투는 끝났을지 모르지만, 

아직도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전쟁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