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itical Innovation/Human Rights

왜 차별이 인권의 문제인가 - 조효제 교수 (2014.06.23)

열린 공동체 사회 2014. 6. 23. 19:35


2014 브라질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아시아 4개국 중에서

공공장소에서 여성들이 축구를 시청하는 것을 금지한 나라가 있다.


바로, 이슬람 국가인 이란이다. (관련기사 보기)


1979년 이슬람 공확국이 수립된 이후

여성들의 스포츠 경기 관람이 금지되어 있으며,


첫 번째 본선 진출이였던 

1978년 우루과이 월드컵 때는 경기장 관람이 가능했으나,


20년만의 본선 진출이였던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는 여성들의 경기장 관람이 불가능했다.


2006년 이란은 세 번째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고,

대통령까지 나서서 금지를 풀려고 했지만 결국은 실패했고,


네 번째 본선에 진출한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도

여성은 경기장 관람을 할 수 없으며 심지어 공공장소에서도 관람을 못하게 되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본선 진출 당시 해당 이슈를 코믹하게 다루어,

베를린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탔던 이란 영화가 바로 <오프사이드>이다.


오프사이드 - DVD
배급 : 자파르 파나히 / 시마 모바락 샤히,골나즈 파미니,마나즈 자비히,나자닌 세디자데역
출시 : 2010.07.20
상세보기


남의 나라 이야기라고 웃을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에서도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차별적 요소가 존재한다.


2011년 차별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조사를 실시한 결과

1위를 차지한 것은 바로 학력 및 학벌에 대한 차별(29.6%)였다.


인종, 여성, 성적 소수자 등의 차별은 세계적인 이슈이지만,

학력과 학벌에 대한 차별이라는 요소는 전세적으로 유래를 찾기 힘든 이슈이다.


극심한 경쟁사회가 만연해있는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심지어 최고의 명문대에 재학중인 학생들 역시,

자신들이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을까 언제나 노심초사하고 있으며,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 조차도 언제 떨어질지 모른다는 굉장한 압박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2위 동성애자(16%), 3위 외모(11.7%) 역시 굉장히 큰 사회적 문제이지만,

월등한 수치로 1위를 기록한 학벌과 학력의 문제는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라고 볼 수 있다.



+


조효제 교수는 차별과 배제가 중요한 인권 침해인 이유를

차별에 근거한 정책을 시행하는 정치 체제가 인권침해를 양산한다는 역사적 증거가 확실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민족, 사상, 국적, 장애 등 차별에 근거해 사상 최악의 인권 유린을 저질렀다. 

(대중에게는 유대인 학살로만 알려졌지만 장애인, 집시 등 학살의 범위는 더욱더 광범위했다고 한다.)


홀로코스트는 원래 구약성서에 나오는 언어로 

하나님께 거룩한 제물을 바치는 번제물을 의미하지만,

나치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의미를 완전히 바뀌어 버린 것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역시 극단적인 인종차별 정치체제였으며,

미국 남부 지역의 흑백 분리 정책 역시 아직도 후유증이 남아있는 대표적 인종차별 정치체제였다.



인종(race)이라는 표현은 생물학적 용어이지만, 

사실 이는 생물학적으로 인종을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에,

실제로 인종을 이야기할 때는 다른 요소들을 더 고려해야만 하는 사실은 매우 불분명한 용어이다.

(민족, 문화, 전통, 언어, 역사 등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섞여서 판단할 수 밖에 없음)


하지만, 차별의 이슈는 인종의 이슈에 국한되지 않는다.

1945년 유엔 헌장이 만들어졌을 때는 차별 사유가 4가지였다. (인종, 성, 언어, 종교)


1948년 세계인권선언에는 차별 사유가 12가지로 늘어나게 된다.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적 견해, 그밖의 견해, 출신 민족, 사회적 신분, 재산, 출생, 그 밖의 지위)


차별의 이슈가 모든 인권의 문제에

가로질러(cross-cutting) 고려되야하는 보편적인 이슈이기에

인권에 대해서 고민하면 할 수록 차별의 이슈는 점차적으로 늘어나갈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


그렇다면 차별이란 무엇인가?


차별(discrimination)은 라틴어 'discriminatus'에서 유래된 것으로

'나누어서 별도로 취급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기에 처음부터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 것은 아니다.



"차이를 인정하되 차별은 금지한다"라는 대원칙은

정당한 구분을 통한 개별성은 일정하지만, 차별로 이어지면 안된다는 것이다.


정당한 구분에 대해서 조효제 교수는 3가지 기준을 제시하였다.


1) 구분을 하는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차별이 아니다..
2) 구분해야하는 목적과 구분을 하는 방식 사이에 비례관계가 성립되어야 한다

3)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차별받아 온 전력이 있는 집단의 경우엔 특별한 상황과 조건을 고려해야 한다 


구분에 대한 합당한 이유가 있고,

구분의 목적과 그 방식이 합당하다면 정당하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3번째 기준이다.

그 동안 차별을 받아온 경우에는 단순히 형식적(소극적) 기회 균등을 줘서는 해결이 안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기본기를 키울 수 있는 기회도 주지 않고, 

지금 실력차이가 나니까 너에게는 기회조차 줄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이 부분은 존 롤스의 정의론이 연상된다.)


3번째 기준은 공평한(적극적) 기회 균등과 관련된 이슈가 된다.

그 동안 기회를 주지 않아서 능력이 떨어지게 되었기에 그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는 것은 역차별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세부적인 사례들로 들어가면 과도한 적극적 기회 균등이 

역차별을 초래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하며, 오히려 능력이 있는 사람이 특혜를 받았다고 저평가 될 수도 있다.

(그냥 능력으로도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데, 균등 정책에 의해서 채용됐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음)


하지만, 오랫동안 차별이 진행되어오다보면

차별이 구조화되는 경향이 나타나서, 오히려 인력풀이 한정되는 불상사가 생긴다.


여성을 승진시키고 싶어도 여성이 씨가 말라서 

승진 대상 자격을 갖춘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며 그런 구조가 고착화되면서 여성은 아예 제외되어왔다.


당장에는 능력이 부족한데 특혜를 받는 것처럼 느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잘못된 구조를 개선하는 효과가 존재하며 또한 이것이 인력풀을 더 늘릴 수 있는 효과적인 방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장에는 역차별로 보일 수 있는 부분도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관점에서 보면 더 효과적이고 사회 대통합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라는 설명이다.


+


마지막으로 다룬 이야기는

차별을 금지한다는 인권의 원칙을 더욱 근본적인 차원에서 비판하는 시각도 있다는 것이다.


차별을 반대하는 원칙은 

일단 모든 사람이 인간임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그들의 특성과 조건에 따라 차별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하지만, 어떤 부류의 인간들은

주류 사회가 애당초 '같은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차별을 하지 않는 척하면서 실질적으로 무시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아무리 법이나 제도상에서 차별금지 제도를 마련해놓는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반차별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보면,

실질적으로 그들은 우리를 인간으로 쳐주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이 가장 크다는 것이다.


겉으로 들어나는 차별은 쉽게 잡아내고 수정할 수 있지만,

심정적으로 미묘하게 드러내지 않는 차별이 실질적으로는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다.


차별금지법을 통과시켜놓고 뒤에서 '미개인' 같은 표현을 쓰면서

같은 인간으로써 취급도 안해준다면 이는 더 큰 갈등을 야기시키는 잠재요인이 된다.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인식상의 인정과 심리적 포용을 하기 위해서는

사실 법과 제도의 문제해결도 필요하지만 지속적인 교육을 통해서 의식을 개선하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솔직히 이 부분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차별금지법에 대해서 반대하였고,


차별금지법의 필요성에 대해서 인정한 사람들도 조차도

동성애자에 대해서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였다.


그렇다면,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었어도,

마음 속에서는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적 시각은 전혀 개선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동성애를 심적으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차별금지법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모순된 태도를 그대로 반영해주는 지적이다.

(그렇다고 동성애자를 돌로 쳐죽이라는 기독교인들의 태도는 공감할 수 없다.)


나의 태도는 차별금지법을 대놓고 반대했던,

내가 한심하다고 생각했던 기독교 인들과 과연 무엇이 다른 것인가?

(오히려 그들의 입장에서는 나같은 사람들에게 더 서운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인권의 문제는 참 단순한듯하면서도 매우 어려운 이슈인 듯하다.

과연, 이 이슈도 10년이 지난 후에 상식적인 차원의 담론이 될 수도 있을까?



제도 개선과 의식 개선....

항상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논쟁하는 이슈이지만...


언제나 결론은 둘 다 함께 개선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물론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계속해서 더 많은 논의가 있을 듯하다.)



* 본 내용은 서울시민대학의 조효제 교수님 강의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일부 내용 중에는 강의 내용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밝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