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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China / Beijing ④ - 고궁 박물원(故宮博物院) 그리고 톈안먼광장(天安门广场)

열린 공동체 사회 2014. 7. 17. 19:20


오늘의 주제는 천안문과 자금성이라고 우리에게 익숙한

톈안먼 광장(天安门广场)과 고궁 박물원(故宮博物院)에 대한 이야기이다.


중세와 근대, 현대가 교묘하게 어울어져 있는 이 공간은

명청 시대에도 정치의 중심지였지만 오늘날에도 정치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으며,

베이징 관광의 백미이자 핵심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진짜 교묘한 공간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곳은 사신이 들어오던 길인 

첸먼다제(前門大街)에서 부터 시작된다고 이야기해야한다.


염정문을 거쳐 첸먼다제(前門大街)를 따라 올라오기 시작해서,

군사적 방어망인 전루(箭楼), 실질적인 출입구인 정양먼(正阳门)을 지나서,

대청문(大淸門), 톈안먼(天安门), 오문(午门), 태화문(太和門), 건청문(乾淸門), 신무문(神武門)을 거쳐야


고궁 박물원(故宮博物院)은 끝이 나지만

자금성의 진정한 매력을 느끼려면 뒷동산인 경산공원(景山公园)에 올라 자금성을 내려다 봐야지

비롯써 고궁을 제대로 다 봤다고 할 수 있으며, 핵심지역만 줄여서 걸어도 약 4km 정도는 된다.


하지만, 문제는 큰 길만 따라간다고 해도

톈안먼 광장(天安门广场)에는 모주석 기념당과 인민영웅 기념비, 국기게양대가 존재하고 있으며,

고궁 박물원(故宮博物院)에는 금수교,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 건청궁, 교태전, 곤녕궁, 어화원 등이 존재한다.


톈안먼 광장(天安门广场)의 양 옆으로는 인민대회당과 중국국가박물관이 존재하며,

톈안먼(天安门)과 오문(午门) 사이의 공간에는 양 옆으로는 중산공원과 노동인민문화궁이 버티고 있고,


고궁 박물원(故宮博物院)의 주위에는 조금 떨어져서는

북해공원과 국가대극원, 왕푸징다제가 떡하니 버티고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으며,

북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스치하이와 난루오구시앙(南锣鼓巷)으로 이어지는 후통들이 존재한다.


이곳을 하루만에 모두 본다는 것은 솔직히 말도 안되는 일정이며,

천천히 모두 돌아보고 싶다면 적어도 2~3일은 여기에 투자해야만 할 듯하다.

(그림 출처: 돌베게출판사 공식 블로그: http://dolbegae.tistory.com/3)


청나라 말기 지도에서 보면, 

오늘날 고궁 박물원(故宮博物院)이라 불리는 공간은 자금성에 해당하는 곳이며,

경산공원과 북해공원 일대를 모두 합친 공간은 황성이라 불리는 또 하나의 내성이였다.


그리고, 오늘날 지하철 2호선 안쪽에 해당하는 구역이 모두 내성이였고,

정양먼(正阳门)을 지나 첸먼다제(前門大街)을 타고 천단공원으로까지 이어지는 공간이 바로 외성이였다.

(진짜 미친 규모감이다. 성안에 성으로도 모자라 또 한 번의 성을 쌓는 3중 구조로 되어있으니 그 많은 문이 왜 필요한지 이해가 된다)


+



첸먼다제(前門大街)는 충분히 돌아보았기에

전루(箭楼)에서 시작해서 북쪽 출입구인 신무문(神武門)으로 나와서 경산공원(景山公园)까지


옆은 쳐다도 보지 않고 직선코스로 정주행하는 것으로 오전 일정을 마무리하고,

스치하이와 난루오구이상으로 이어지는 후통투어를 하는 것으로 오후 일정을 소화하기로 했다.

(숙소에서부터 후통투어까지 이 날 걸은 거리를 모두 합치면 10km정도는 될 듯하다. 한마디로 죽을 뻔 했다...)



군사적 방어망인 전루(箭楼)를 통과하면,

내성의 실질적인 출입구인 정양먼(正阳门)이 등장하게 된다.


예전에는 전루(箭楼)와 정양먼(正阳门) 사이의 공간이 빈 공터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은 4차선도로가 뚫려있기 때문에 건너가려면 지하도를 통해서 넘어가는 수밖에 없다.


정양먼(正阳门)을 지나면 바로 톈안먼 광장(天安门广场)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지하도를 통과해서 올라가거나 옆쪽에서 횡당보도를 건너가더라도 신분증 확인과 X레이 검사기를 통과해야만 한다.


톈안먼 광장(天安门广场)이 정치적 상징성이 너무나 크기 때문인지,

실외에 있는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철저하게 신분 검사를 진행하는 공간이 바로 여기이다.



정양(正阳门)은 황궁을 지키는 실질적인 1차방어선이였기 때문에,

군사적인 의미가 매우 컸으며 공산화 이후에는 군병력의 사령부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1991년 이후로 일반인에게도 개방되어 20위안만 내면, 성루에 올라가 볼 수 있는데 시간 관계상 그냥 패스했다)


원래 정양먼(正阳门)과 톈안먼 (天安门) 사이에는

대청문(大淸門)/중화문(中華門)이라고 불리던 문이 하나 더 있었는데,

지금은 헐리고 그 자리에 모주석 기념당이 들어가 있으며 실질적으로 광장의 크기는 더 커지게 되었다.

(청나라 시절에는 궁정 광장으로 활용되었는데, 현재로써는 세계 최대 규모의 개방형 광장으로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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톈안먼 광장(天安门广场)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나를 맞이해주는 것은

인민들이 신처럼 떠받들어 모시고 있는 마오쩌둥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모주석기념관(毛主席纪念堂)이다.



오전에만 개방하는 이곳은 항상 긴 줄을 기다려야만 하며,

카메라는 물론 작은 가방도 들고 들어가지 못하기에 길건너편에 있는 국가박물관 앞에 위치한

물품보관소에 짐을 맡겨놓고 입장해야하기에 과감하게 그냥 패스하기로 했다.


마오쩌둥 사후 1년 후(1976년)에 건립된 이 기념관은

정작 본인은 신신의 영구 안치를 반대했다고 하는데 난 어느 정도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문화대혁명이라는 치명적인 오점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에 대한 신격화는 아직도 진행중이며 사실은 인민을 단결시키는 원동력으로 활용되고 있다.


인민공화국 탄생 50주년을 맞이해서 모든 지폐의 모델을 마오쩌둥으로 교체하는 것을 보면

사실 마오쩌둥에 대한 신격화는 마오쩌둥을 위해서라고 보다는 현재의 권력자들을 위한 조치라는 것이 맞는 표현인듯하다.


서구의 언론들은 말도안되는 미신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하지만,

일종의 종교화된 마오쩌둥에 대한 신봉은 인민들이 딴 생각하지 않게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공산당 정권으로써는 마오쩌둥이 인격화되는 것이 오히려 인민을 통제하기에는 편한 것이다.

인민들 역시도 마오쩌둥에 대한 충성이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이어지면서 정권에 대한 의심없이 그냥 말을 잘 들으면 된다.


마오쩌둥의 공산혁명, 덩샤오핑의 경제혁명을 거치면서

어떻게든 인민들을 위해서 노력한다는 인상을 잘 심어준 공산당 정권은 아직까지도 그 정치적 기반을 잘 유지하고 있다.


5세대 지도자라고 불리는 시진핑까지 오랜 시간에 걸쳐 잘 훈련되고 검증된

차세대 지도자를 계속 세워나가면서 당장은 성에 차지 않더라도 조금씩이라도 개선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989년의 천안문 사태를 제외하고는 별 탈없이 잘 유지해오고 있는 것은 계속해서 기대감을 꾸준히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민들을 위한다는 느낌은 전달하면서 얄밉게 자기 밥그릇은 잘 챙겨먹는 정치인들...

중국이 괜히 대국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더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


모주석기념관(毛主席纪念堂)을 살짝 지나치자

인민영웅기념비(人民英雄紀念碑)와 저 멀리 큰 길 건너편에 위치한 인민대회당이 눈에 들어왔다.



인민영웅기념비(人民英雄紀念碑)는 

중국 건국을 위해서 희생한 독립 운동가와 사회주의 운동가의 넋을 기릭 위해 1958년 세운 기념비로


앞쪽에는 마오쩌둥이 쓴 금석문이, 

뒷쪽에는 저우언라이가 쓴 현정문이 세겨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각 벽면에 8가지의 중요한 사건을 세겨두었다고는 하는데,

2차 천안문 사건 당시 수많은 시위 할생들의 성지로 군림한 이후로 접근을 통제하고 있어서

그냥 먼 발치에서만 아~ 이런 것이 있구나 하는 것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곳이다.



인민영웅기념비(人民英雄紀念碑)를 지나면

여기서 부터가 우리가 흔히 사진으로 보아왔던 톈안먼 광장(天安门广场)의 풍경이 드러난다.


인민영웅기념비(人民英雄紀念碑) 뒤로 중국 국기가 휘날리고 있고,

그 뒤로 마오쩌둥의 사진이 크게 걸린 톈안먼(天安门)이 모습을 드러내며,

양 옆으로는 비슷한 외형을 하고 있는 인민대회당과 중국국가박물관이 마치 사열하듯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지금은 시골에서 올라온 듯 보이는 온갖 단체관람객로 붐비는 곳이지만,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이 사망하자, 학생들과 인민들은 인민영웅기념비로 몰려들었고,

수백명의 대학생이 텐안먼광장으로 몰려들자 전국 각지에서 수만명의 시위대가 가두시위를 시작한 곳이다.


1989년 6월 4일 시위대가 해산하지 않자,

탱크를 앞세워 무차별 발포를 진행하며 수 천명이 희생된 전 세계적으로 충격적인 사건이였다.


1979년부터 실시한 경제 개방으로 고도의 성장은 이룩하지만 다양한 사회문제가 일어나고 있었고,

1980년대 말 동구권의 몰락과 한국에서의 민주화 시위 성공 등 세계사적인 격동기였기에 중국에서도 민주화의 열기가 등장한 것이다.


워낙 민감한 사건이라서, 중국 내에서는 아직도 철저히 금기에 붙히고 있기에,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르지만 덩샤오핑에게도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준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자신의 지지자인 후야오방이 사망하고,

또다른 지지자인 자오쯔양은 평화적 해결을 위해서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추출당했다.

덩샤오핑 역시도 보수파에 의해서 밀려나면서 개혁 개방 정책들이 하나 둘 씩 뒤집혀지고 말았다.


물론 보수파인 장칭이 사망하면서 덩샤오핑은 또 다시 정계 복귀에 성공했고,

개혁 개방 정책은 다시 진행되기는 하지만 제3세대 지도자 장쩌민으로 권력이 승계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장쩌민은 덩샤오핑의 명령으로 텐안먼사건을 무력으로 진압하는데 압장섰던 인물로 적당히 선을 잘 탔던 것 같다)


함부로 말할 수는 없는 사건이지만 그 때 만약 민주화가 일어났다면,

중국은 거대한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도 준비되지 못한 민주화 이후에 큰 혼란이 계속됐는데,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 그것도 사회주의가 지배하던 나라에서의 혼란은 불보듯 뻔한 일이였다.

(대화와 타협이 불가능한 성난 군중들을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단기간에 사태를 수습해버린 것이라 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렇게 단정지어서 말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고,

내가 중국이라는 곳에 대해서 아직까지 아는 것이 너무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중국의 변화과정은 전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기에 

앞으로도 매우 관심있게 지켜볼만한 가치가 있는 아무 흥미로운 나라임에는 틀림없다.


+


톈안먼(天安门)으로 넘어가기 전

아직도 중국의 현대사는 끝나지 않았다.


마오쩌둥과 텐안먼 사태가 지나간 과거라고 한다면,

매일마다 진행되는 국기게양식(일출 시)과 국기하강식(일몰 시)은 살아있는 중국을 지탱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른 새벽부터 베이징을 방문한 관람객들은 매우 부지런히 서두른다.

일출 시간에 맞춰서 진행되는 국기게양식을 관람하기 위해서 긴 줄을 서야만 한다.


국기게양식과 하강식에 참여하는 군인들은 하루 종일 제식훈련만 하며,

최고의 고참급 장병들만이 국기게양식과 하강식에 참여할 수가 있다고 한다.


한국의 국기게양식도 참여하지 않는 내가

중국의 국기게양식을 구경해보겠다고 새벽부터 일어나 부지런을 떨어보았다.


설마 이 새벽부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올까 싶었는데...

검색대를 통과하기 위해서 줄을 서고 있는 사람들의 행렬은 진짜 엄청났다.


일출 시간이 가까워지자 못들어갈까봐 사람들은 밀치고 땅기고 난리가 났고,

다행히 국가가 연주되기 시작할 때 입장할 수는 있었으나 손으로 국기를 펼치는 명장면은 결국 못봤다...T.T

(아쉬운대로 사진은 구글링을 통해서 중국 현지 신문 사진을 글어왔다...)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 있었기에,

조금 더 일찍 검색대를 통과해서 들어왔어도 가까이에서 보기에는 어려웠을 듯하기는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인들의 돌아가는 행렬만 지켜본 것이 너무 아쉽기만 하다.


이 장면 하나 보겠다고 멀리서 온 사람들은

주요 시설의 정식 입장시간인 8시까지 무려 3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하지만,

싸들고온 아침밥을 옹기종기 모여서 먹으면서 텐안먼 광장에서 시간을 때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이 장면만 보고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고, 사실 나도 이날 만리장성으로 넘어갔다.)



톈안먼(天安门)은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중심으로 아직도 경계가 삼엄하게 지켜지고 있는데,

2007년 5월 마오쩌둥 사진에 화염병을 투척하는 사건이 벌어져 중국이 발칵 뒤집어진 적이 있다고 한다.


톈안먼 광장(天安门广场)에 위치한 것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것들이라서 여타 관광지와는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다.


톈안먼(天安门)을 지나고 있을 때

경계병들의 교대가 있었는데 전열을 흐트러트리지 않도록 멀리서부터

큰 소리를 내면서 관광객들이 길을 터줄 수 밖에 없도록 굉장히 고압적인 자세로 지나가버렸다.

(텐안먼 사태 때 인민들을 밀어붙인 탱크가 나에게로 달려오는 듯한 인상을 받는 것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아직까지 대한민국에서는 경찰에 대한 인식이 억압적인 느낌인데,

공안이 무소불휘의 힘을 밝휘하는 여기 사람들은 얼마나 무서울까 세삼 생각해보게 만드는 장면이다.


자본주의보다 더 자본주의화되었다는 중국이지만,

이런 측면들을 보면 아직도 사회주의 국가라는 것이 확실히 느껴지는 대목이다.


+


톈안먼(天安门)은 2차 관문인 황성의 출입구였으며, 

단순히 출입구의 의미보다는 황제가 백성들과 대면하는 공간의 의미가 켰다.


황제는 주로 톈안먼(天安门)의 성루에 올라서 백성들에게 메세지를 전달했고,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만천하에 공표한 곳도 바로 이 톈안먼(天安门)의 성루였다.


황궁의 정문에서 중국의 상징으로,

죽의 장막 시절에는 서방과 소통하는 공간으로 주로 활용되었던 곳이다.

(국경절에 톈안먼에 오르는 사람들이 항후 국가 운영을 이끌어갈 지도자들이였다는 것이다.)


600년간 금단의 구역이였던 톈안먼의 성루는

1988년부터 일반인들에게 입장료를 받고 공개하고 있다.


15위안밖에 하지 않기에 한 번쯤 올라가보는 것도 좋아보이지만

오늘 일정 상 시간도 별로 없고 다리도 슬슬 아파오기에 그냥 패스하기로 했다.

(사진은 구글링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 찍은 것을 그냥 퍼왔음)



톈안먼 광장(天安门广场)만큼 중국에서 정치적이고 상징적인 공간은 없을 것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모두 공존하는 진짜 알 수 없는 중국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중원을 지배한 화려한 과거의 공간이면서도

동시에 성공한 공산 혁명을 상징하는 공간이고,

또한 민주화라는 실패한 혁명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동시에 상징하면서도

억압과 통제가 아직도 존재하는 중국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동시에 아직도 국기게양식을 보기 위해서 새벽같이 사람들이 모여들고,

마오쩌둥의 시신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국민들이 존재한다.


오른쪽에는 중국의 지나간 과거 물품들을 모아서 박물관으로 만들어놨으며,

왼쪽에는 중국의 미래를 결정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인민대회당을 만들어놨다.


공산 혁명 영웅을 기념하는 비석에서

민주 혁명 영웅들은 피를 흘리면서 죽어갔다.


성공한 공산 혁명과 실패한 민주 혁명이 교차되고,

자유로운 관광객들과 이를 통제하는 공안들이 공존하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모습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공존하는

오늘날의 중국의 현실이 아주 잘 드러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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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톈안먼(天安门)을 통과하게 되면 진짜로 자금성이라 불렸던

고궁 박물원(故宮博物院)에 들어갈 수 있게 되며 입장료는 무려 60위안에 달하고 있다.


국가 유적지치고는 굉장히 비싼편이지만,

중국의 다른 지역의 유적지들에 비하면 명성에 비해서 싼 것이라고 한다.


생각보다 톈안먼 광장(天安门广场)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져서,

아무래도 고궁 박물원(故宮博物院) 내부에 대한 이야기는 별도의 포스팅으로 다시 올려야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