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사의 이해 ⑦] 민주당과 제2공화국

2014.04.07 13:07
이승만의 정치이데올로기
국내도서
저자 : 서중석
출판 : 역사비평사 2005.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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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승만 시대에 대한 서중석 교수의 여러 논문을 묶어 놓은 것인데,

그 중에서 이승만 시대의 한국 야당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운 시사점을 전달해준다.


한국 정치에서 본격적으로 야당이 등장한 것은

1955년 창당된 민주당이지만 민주당은 그 이전부터 역사를 가지고 있다.


민주당의 뿌리는 해방 후 등장한 한국민주당(한민당)이다.


한민당은 해방 직후 좌익 세력이 결집되어 있던 건준에 대항하기 위해서

우익세력들이 결집한 정당이였으며 사실상 친일이라고 불릴 사람들까지는 아니였다.


송진우, 김성수, 장덕수 등이 주요 인물이였고,

김성수나 장덕수들은 친일행위를 하기는 했지만 

건준의 여운형도 이들의 행위를 문제삼지는 않았고, 처벌까지 받을 정도의 나쁜 짓을 하지는 않았던 것같다.


미군정의 비호 아래 실질적으로 여당행세를 한 이들은

대부분 지주 출신의 부르주아들이였고,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였기에 

일제시대에도 창씨개명도 하지 않고도 버틸 수 있을 정도로 사회적인 영향력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친일 논란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기에

이승만을 전면에 내세우려고 했지만 이승만이 독자행보를 벌이면서 적당한 유대관계를 유지한다.


오히려 이 시절 진짜 악질 친일파들은 

독립운동가이면서 엘리트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이승만에게 붙었고

그렇기 때문에 반민특위 사건 등에서 이승만이 철저히 친일파를 도와주게 된다.


+


1948년 첫 번째 선거에서 한민당은 29석을 차지하지만

한민당 출신의 무소속과 독촉 일부 인원을 포함하면 70석정도를 차지한 것으로

이승만 지지세력과 무소속구락부 소속과는 거의 비슷하게 삼등분 하게 된다.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을 밀어주었고, 

부통령 선거에서는 이시영을 당선시키지만,


국무총리에 김성수를 밀었음에도 이승만은 이범석(무소속 구락부)을 지명하고,

국무위원에는 대부분 자신의 세력을 임명하였으며, 농림장관에 조봉암을 기용하는 등

내각구성에서 철저히 한민당을 견제하는 형태를 보여주면서 이승만과 갈라서게 된다.


* 사실상 당시 이시영 선생은 나이가 너무 많았고, 부통령은 아무런 실권이 없는 명예직이였다.


1949년에는 위축되는 당세를 만회하기 위해서

대한국민당과 합당을 추진하여 민주국민당(민국당)으로 조직되었고,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소장파(무소속구락부)가 궤멸하자 사실상 여당의 지위를 다시 확보하게 된다.


하지만, 1950년 5.30선거에서 완패를 한 민국당은 24석밖에 차지하지 못했고,

조병옥, 윤치영 등 대표 주자들이 모두 낙선하면서 그 기반이 완전히 흔들리게 된다.


1951년 이승만이 자유당을, 조봉암이 신당, 

그리고 내각책임제를 추진하던 공화민정회의가 신당을 추진했으나,

조봉암 신당은 대남간첩단사건으로 막을 내렸고, 1952년 보궐선거에서는 자유당이 압승을 거두게 된다.


1954년 총선에서 온갖 부정선거가 남무하며, 

자유당이 114석으로 압승을 거두고 사사오입개헌까지 진행되 자유당 왕국이 건설된다.

(민국당은 이 때 15석밖에 차지하지 못하며, 1952년 대선에 이은 연이은 참패로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다.)


친일파의 세상이 되어버린 자유당 정권에 대한 위기의식은

1955년 야권통합의 움직임으로 나타나지만, 결국 조봉암은 제외된다.


한민당-민국당계열, 원내 자유당계열, 

흥사단계열, 조선민주당계열이 통합된 민주당이 탄생하게 된다.


사실상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제1야당이 탄생하게 된 것이며,

현재 새정치민주연합도 그 뿌리를 이 민주당이라고 이야기한다.


신익희, 조병옥, 장면, 김보연, 윤보선 등 다양한 출신들이 모였지만,

사실상 극우반공주의라는 측면에서는 자유당과 기본 성향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민주당 내의 세력은 구파와 신파로 구분될 수 있었고, 

4.19 이후 총선을 계기로 구파가 신민당으로 분당하게 되면서,

이후 김영삼(구파)와 김대중(신파)계열로까지 이어지는 긴 역사를 가지게 된다.



민주당의 구파와 신파는 

초기부터 조병옥과 장면으로 편이 갈려 끝없이 분파성을 보이게 되고,


정책적으로 내각책임제를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구파는 자유당과의 적당한 타협을, 신파는 순수 내각제를 주장하면서 대립하게 된다.


민주당의 구파는 한민당에서 시작된 호남 출신의 지주 부르주아들이였으며,

일제시기에 관료같은 직위를 가지지 않았고, 장덕수를 제외하고는 들어내놓고 친일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깨끗하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으며, 독립투사들보다는 인기가 확실히 떨어졌다.)


미군정 시기에는 한민당 소속으로 실질적으로 여당행세를 했고,

한민당 시절 이승만 정권과 사이가 나빴으나, 민국당으로 넘어오면서 다시 실질적인 여당 행세를 했다.

(핵심 맴버인 조병옥, 윤보선, 김도연 등은 모두 이승만 정권 초기에 고위직에 있었음)


반면, 민주당의 신파는 이에 비해서 일제시기에 관료 출신들이 대부분이였기에,

친일파가 다수를 이루고 있었고, 미군정시절 하급관료에서 고속 승진을 한 원내자유당계가 많았다.

신파의 핵심에는 장면이 있었는데, 천주교의 경제적 지원과 경향신문의 정치적 지원을 받았다.


조병옥과 장면은 미국정부에 의해서

이승만의 후계자로 거론될 정도로 미국과의 사이가 매우 좋았으나,

조병옥은 미군정 시절 친일 경찰을 독려하면서 좌익을 탄압한 경력으로 인기가 매우 없었고,

장면은 4.19 국면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전투적인 정치가보다는 온화한 관료적 스타일이였다.



당시 민주당은 1956년 대선과 1958년 총선에서 상당한 선전을 펼치게 되는데,

이는 민주당이 자유당과의 대립 구도에서 제대로된 공약을 내놓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차별화를 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능동적 적극적으로 유권자를 자기편으로 끌어당긴 정당이 아니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 도시 사람들은 이승만 정부에 비판적이었고, 반자유당 정서가 팽배해갔다.
이승만의 독재와 억지, 자유당정권의 실정과 횡포, 부패 때문이었다.

(중략)

민주당 지지표에는 반자유당표, 소극적인 동정표, 투쟁해주기를 바라는 표 등이 다수 섞여 있었다.
민주당이 깨어지지 않은 이유는 민주당이라는 간판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도 이러한 민주당 지지표의 속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디시 말해서 도시민들이 민주당에 표를 주는 이유를 민주당 간부들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주당은 자유당과 싸우는 야당이라는 입장 때문에, 또 표를 몰아주는 것을 의식해서 때로는 강경하게 여당과 싸우고, 매판재벌을 비판하고 중소자본을 옹호하며 극우반공체제의 이완과 해체를 불러올 자유민주주의 지향성도 보이게 됨을 앞에서 기술하였지만, 그러한 이미지들이 복합되어 있는 민주당이란 간판만 가지고 있으면 대도시에서 몰표가 나오기 때문에 민주당을 깰 수가 없었다.


<이승만의 정치이데올로기 p. 248 - 249 (서중석 2005)>


+


1960년 정부통령 선거가 시작되기 전까지

사실상 민주당은 선거를 포기한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1956년 부통령선거에서 승리했던 장면은 저격사건을 경험했고,

1959년 혁신세력의 조봉암은 사형을 당했고, 민주당 신파의 지지세력인 <경향신문>은 폐간되었다.

결정적으로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조병옥은 선거를 앞둔 1960년 2월 사망하게 된다.


대통령은 이승만의 단독 출마이기에 당선이 확실했고,

부통령은 장면이 현직이기는 했지만 부정선거가 너무나 예상되던 상황이였다.


하지만, 역사는 중고등학생들이 바꾼다.



선거가 시작되기 전인 2월 28일부터 시작된 시위는

4월 11일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면서 본격화되었고,

4월 19일 마침내 전국으로 완전히 확산되게 된다.


1950년대 나름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좌우의 이념논쟁에 의해서 전쟁에서 모두 사망했었다.


하지만, 일본 국군주의 교육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았던 

1940년대 태어난 중고등학생들은 불의한 현실에 대해서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4.19일 피의 화요일,

유일하게 유서를 남겼던 한성여중 2년생 진영숙 학생은 

데모버스를 타고 구호를 외치다 총알에 맞아 숨기고 말았다.


"어머니,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온 겨례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주세요.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4.19이후 미국이 태도를 바뀌면서 군과 경찰도 더 이상 안움직이게 되었고,

4월 25일 대학교수들마져 나서기 시작하면서, 4월 26일 이승만은 사임 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사람들은 4.19 하루만 기억하고 있지만,

거의 2개월에 걸친 긴투쟁이였고, 이승만 정권의 안일한 태도가 큰 화를 만든 것이다.


학생들은 처음부터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지 않았고,

단지 공정선거와 재투표를 요구한 것이였지만 4.19로 확대되면서 사태를 걷잡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결국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이라는 단서를 붙이고,

대통령을 사임하였고, 이기붕은 4월 28일을 자족들과 함께 자살하게 된다.


+


4월 혁명 때 장면은 사실상 부통령을 사임하고 사태를 방관했다.

이미 임기가 거의 끝난 상황이기에 사임이라는 것은 상징성밖에 없었고,

오히려 사임을 함으로써 바로 대통령을 인계받지 못하고 허정의 과도정권이 출범하게 된다.

(장면이 오히려 자유당의 수명을 더욱더 연장해준 셈이 된 것이다.)


학생들의 주도로 혁명은 일어났으나,

미숙한고 비조직적인 혁명세력이 집권할 수는 없었고,

본질적으로는 반혁명세력과 별반 다르지 않은 민주당이 자유당과 손잡고 과도정권을 유지하게 된 것이다.


내각책임제를 비롯한 민주적인 개헌이 일어났지만, 반공적인 성향은 강화된 국가보안법이 개정되었고,

대신에 기본적인 자유를 보장해주는 법률이 통과되었다.


총선에서 민주당은 압승을 거두지만, 조병옥이 사라진 구파는 신민당으로 분당했고,

대통령은 윤보선, 국무총리는 장면이 선출되게 된다.



4월혁명의 영향과 집권 정권의 약함으로 인해서

야당시절의 선심성으로 남발한 공약들이 온화하고 성실한 국무총리 장면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언론의 자유 보장과 경찰 조직 개편이 단행되었으나,

민족주의자나 진보세력을 억압하는 행태는 계속해서 이어졌고, 자유당의 처벌도 지지부진했다.


자유를 얻은 언론은 정권의 실정과 무능을 쉬지 않고 과장해서 보도했고,

강력한 경찰과 군대에 대한 장악력 부재는 후에 5.16쿠테타의 빌미를 제공해준다.


이런 면에 있어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임기 중 언론에 당한 것과 퇴임 후 후임에게 당한 것을 연상시킨다.

(원론적으로는 잘 한 것인데, 결과가 나쁘면 이런 부정적 평가를 받을 수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장면은 3.15부정선거의 원흉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의지 강약을 다시 한 번 드러내면서 사실상 인기를 잃게 된다.

(장준하 같은 사람이 왜 박정희의 쿠테타를 환영했는지 이해할만한 부분이다.)


집권 2년차에 접어들어서 내부적인 혼란을 수습이 되었으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결정적으로 장면의 권력의지가 너무나 허약해서 쿠테타의 빌미를 제공해주고 만다.


사실 기본 정책상 극우반공주의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자유와 민주주의 신장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었고 나름 장기적인 경제정책도 수립했었다.

그리고 통일 정책에 있어서도 다소 유보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그래도 한 발 발전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혁명의 전면에 나서지도 않았고,

공짜로 주어진 정권이기에 큰 틀에서 혁명을 할 능력도 없었다.

경제정책도 기본적으로 특권재벌과 대기업에 의존하는 경제정책을 벗어나지 못했고

당장 주어진 일 수습하기에 바빴고, 군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통제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뭔가 보여주기에는 집권기가 너무 짧았다.


제2공화국과 장면 정부에 대해서는 역사에서 별로 거론이 안된다.


잠깐 스쳐지나간 정권으로 비춰지기 쉽고,

사실 내용을 봐도 그런 성격이 강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4.19의 주체인 민중의 힘에 의해서 압박이 가해지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변화의 기미가 보이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다만, 지도자가 너문 온순하고 변화를 하지 못해서

지지부진했다는 점이 있기는 하지만 민주화가 좀 더 일찍 올 수 있는 기회였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박정희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산업화가 좀 더 늦게 진행될 수 있었다는 점도 인정하는 바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2공화국은 

4.19의 바람이 잠시 머물다가 스쳐지나간 정부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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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의 이해 ⑥] 이승만과 제1공화국 - 서중석 (2007)

2014.04.04 16:47

얼마전에 아끼는 동생이 페이스북에 글을 남겼다.


인도에 자와할렐 네루가 있다면
대한민국에는 건국대통령 이승만이 있다.


이승만의 <독립정신>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독립정신>은 이승만이 고종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한성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중 옥중에서 저술한 외교사 역사서이다.


20대의 어린 나이에 폐기넘치는 외교사 역사서를 저술했다는 점에서

확실히 젊은 시절 이승만은 능력있는 인재였음에는 틀림없으며,

구한말 일본과 청나라에 의해서 흔들흔들하던 나라를 걱정한 애국자였던 것같다.


독립정신
국내도서
저자 : 이승만,김충남,김효선
출판 : 동서문화사 2010.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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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뉴라이트계열에서 1904년에 쓰여진 이 책을 기준으로

이승만을 평가하는 잣대로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 <독립정신>은 한 번쯤 읽어볼만 한 책인 것같다.

물론 이 책에서도 이승만 특유의 독선적인 성격이 드러난다는 평도 있지만, 

뭐 젊은 시절 그 정도 곤조와 폐기는 있어야 독립운동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암튼, 20대의 이승만에 대해서는 별로 평가절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름 독립을 위해서 노력했고, 혼연단신으로 미국에 외교를 위해 뛰어든 점도 훌륭하다.


+


하지만, 30대 이후의 그의 삶에 대해서는

굉장히 논란이 많고, 자세하게 잘 정리된 자료를 찾기 쉽지 않다.


일단,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한 <백년전쟁>에서는 

이승만을 갱스터로 표현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좀 과하다고 느껴지는 부분들이 좀 많다.


그리고 재미를 위해서 그런 것일수도 있기는 하지만,
너무 감정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기에 오히려 스스로 신뢰도를 떨어뜨렸다.

백년전쟁은 다큐라고 보기에는 너무 주관적인 해석이 많이 들어간 영상이라서,
보는 내내 긴가민가하는 의구심을 스스로 자아내게 만드는 면이 너무 강한 것은 사실이다.
(서중석 교수나 이만열 교수같은 석학들 인터뷰를 따놓고 이렇게 애매한 영상을 만들었다는 점은 좀 실망스럽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분들은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에게 반론의 여지를 주었다.



근데, 여기에 등장하는 분들은...

오히려 더 신뢰가 안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전체 맥락은 보지 않고 너무 지협적인 부분을 가지고 전체 주장이 모두 틀렸다는 식으로 몰아가기를 하고 있다.


전형적인 논리적 오류로써 물타기식 주장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런 식의 주장은 정상적인 토론을 불가능하게 만들기에 아예 토론을 하기 싫어지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이들이 지적한 부분이 진짜 맞는지 아닌지 이 역시 별로 신뢰가 안가게 되었다.)


아무튼 의도적이든 아니든 좀 더 체계적으로 <백년전쟁>을 반박하고,

이승만이 잘했다고 이야기하고 싶으면  그 잘한 부분들을 좀 더 명확하게 정리해주었으면 좋겠다.


+


개인적으로는 자료도 충분히 않은 상태에서

이승만이 독립운동에 방해만 되었는지는 명확히 잘모르겠다.


하지만, 

이승만 때문에 독립을 쟁취한 것도 아니고,

이승만 때문에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것도 아니라는 점만은 이야기할 수 있을 듯하다.


그래서 이승만의 독립운동에 대한 재평가도 필요하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해방 이후의 이승만의 행적에 더 주목해야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최근 읽었던 <한국 전쟁의 기원>이나 <전쟁과 사회>에 묘사된

해방 이후 정부 수립과정과 한국전쟁 시기에 보여준 이승만의 행보는

굉장히 실망스럽다 못해 대한민국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과연 이사람은 무슨 일을 한 것인가?

그리고 이 사람을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하는가?



+


이승만의 행적에 대한 연구는

유영익 한동대 석좌교수와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의 의견이 극과극으로 갈린다.


유영익 한동대 석좌교수는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며,

선임과정에서부터 뉴라이트 논란에 휩싸였고 역사교과서 논란에서 편중된 견해를 내놓았던 분이다.


그는 이승만의 '공'과 '과'를 구분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가장 최근 저서인 <건국대통령 이승만>(2013)의 내용을 보면 확실히 편향적인 것은 사실이다.


유영익 교수는 이승만의 업적을 아래와 같이 평가한다.


정치 분야에서는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대통령중심제 정부를 수립한 다음 ‘거의 전제적인’ 권위주의적 통치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의회제도를 존속시키고 양당제도와 지방자치제를 도입하는 한편, 언론의 자유를 비교적 폭넓게 허용하는 등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외교 분야에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유엔과 미국 등 30여 개 국가로부터 승인을 받아내고, 6·25전쟁의 휴전 과정에서 미국 위정자들을 설득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군사 분야에서는 6·25전쟁 중 유엔군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함과 동시에 남한 국민의 충성을 확보함으로써 북한 침략군을 휴전선 이북으로 격퇴하고 나아가 이 전쟁을 계기로 국군의 규모를 ‘63∼70만 대군’으로 육성하는 데 성공했다. 


경제 분야에서는 농지개혁을 단행함으로써 구래의 지주 토지 소유제를 청산하고 그 대신 자작농의 토지 소유제를 확립함으로써 농업의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한국 자본주의를 태동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비록 일반 국민의 경제생활 수준을 크게 향상시키지는 못했지만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을 극복하고 전후 경제 복구에 성공했으며 수입대체산업의 육성으로 공업화의 단초를 열었다. 


교육 분야에서는 의무교육제도를 도입하고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해 이땅에 민주주의가 정착할 수 있는 기초를 닦았다. 나아가 중고등학교를 대폭 증설하고 대학을 확충하며 해외 유학을 장려함으로써 ‘교육 기적’을 이뤄내 산업화와 민주화에 필요한 고급 인재를 양산했다. 


사회 분야에서는 농지개혁으로 전통적인 양반제도를 뿌리 뽑고, 남녀에게 동등한 교육 기회와 취업 기회를 보장하는 정책을 추구해 한국 사회의 평등화에 이바지했다. 


문화·종교 분야에서 이승만은 한글 전용 정책을 철저하게 시행함으로 본격적인 한글 시대를 개막하고 전통문화의 계승과 보존에 필요한 조치를 마련함으로써 민족문화 창달에 이바지했다. 한편으로 기독교를 장려해 유교 국가였던 한국을 아시아 굴지의 기독교 국가로 탈바꿈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뭔가 이승만이 굉장히 잘한 것처럼 보인다.


근데, 책이 너무 대중서라서 그런지 깊이 있는 분석이나 설명은 별로 안보인다.

그리고, 역사학자가 쓴 책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주관적인 해석들이 많이 들어간 표현들이 눈에 띈다.


'거의 전제주의적 통치를 하면서도 민주주의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비록 일반 국미의 경제생활 수준을 크게 향상시키지는 못했지만, 전후 경제 복구에 성공했다'

'해외 유학을 장려함으로써 '교육 기적'을 이뤄내 산업화와 민주화에 필요한 고급 인재를 양산했다.'

'기독교를 장려해 유교 국가였던 한국을 아시아 굴지의 기독교 국가로 탈바꿈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뭔가 앞뒤가 안맞거나 너무나 주관적인 의견들이다.

솔직히 억지로 업적이라고 칭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억지로 맞춘 느낌이 들게 만든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일어났던 온갖 사건 사고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고 있다.


이승만의 공이라고 이야기한 부분에서도 

농지 개혁과 한글 정책에 대해서는 이승만이 원해서 진행된 것이 아닌 정책들이다.


농지 개혁에 대해서는 소장파와 농림부 장관 조봉암이 적극 추진한 것으로

이승만대통령은 실행을 계속해서 미루다가 1950년 5월 전쟁이 나기 바로 직전에 실행하였다.


또한, 한글 정책의 경우에는 오히려 일제시대 이전의 한글로 돌아가자는

마치, 40년만에 한국에 돌아온 이승만을 위한 맞춤화된 한글 간소화 정책을 발표했다가 욕만 잔뜩 먹게된다.

(오늘날의 한글은 1930년대 주시경 선생이 체계화시킨 맞춤법에 기반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승만이 미국에 너무 의존하기는 했지만,

깡다구를 가지고 미국한테서 빼먹을 것은 최대한 빼먹었다는 점과

교육 기회와 여성 인권 향상에 큰 도움을 줬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던 바이지만,


정치, 사회, 경제정책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동의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이승만이 잘못했다고 지적되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너무 언급을 안하고 있다.

(경제의 경우 북한보다 전후 복구가 늦었으며, 1958년 경기 불황이후 침체를 벗어나지 못한 체 2공화국에 넘기게 된다.)


반면에 '대한민국 현대사 1호 박사'였던 성균관대 서중석 교수는

이승만 시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상당히 깊게 파고들고 있다.

(서중석 교수는 얼마전 연세대 석좌교수 선정이 취소되는 헤프닝이 발생하며 좌파역사학자 논란이 있었다.)


이승만과 제1공화국
국내도서
저자 : 서중석
출판 : 역사비평사 2007.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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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승만 정부의 수립시기부터,

4.19로 인해서 이승만 정부가 무너진 시기까지의 역사적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도 필자의 주관적인 해석이 들어가있기는 하지만,

유영익 교수의 책처럼 의도적으로 한 쪽면만 보거나 한쪽으로 억지로 몰아간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이승만 대통령이 나쁘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이승만의 행적이 진짜 파란만장하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미군정 시절, 워낙 미국과 티격티격하면서 사고도 많이 쳤지만,

'반공'이라는 하지 사령관의 궁극적인 목적 달성에는 최상의 카드임에는 틀림없었다.


미군정 하지 사령관도 이승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에

송진우, 김구, 여운형, 김규식 등 꾸준히 고민했지만, 결국은 이승만이였다.


미국 중부 출신 하지 사령관은 전형적인 보수주의자였고,

한국인들을 위한 정책보다는 미국에 이익이 되는 정책이 최선이였기때문에,

'반공'을 할 수 있다면 무슨짓이든 상관없었고, 그 사람이 친일파든 매국노든 상관없었다.


좌익사상을 가진 여운형과 철저한 민족주의자 김구보다는

하지 사령관에게는 지멋대로기는 해도 이승만은 목적 달성만큼은 확실히 할 수 있었다.


여운형이 암살 당한 뒤에는 눈에 띄는 라이벌도 없었고,

김구가 있기는 했으나 그의 정치적 역량으로는 이승만을 뒤집을 수 없었던 것 같다.



민족주의자들이 불참한 5.10 단독정부 선거에서

한민당, 이승만 지지세력, 무소속구락부 세력은 비슷한 비율로 의석을 나눠 가지게 되고,


한민당과 협조체제를 갖춘 이승만은

간선제였던 대통령 선거에서 가볍게 김구를 누를 수 있었고,

부통령에는 한민당의 지지를 받은 이시영이 선출되었으며, 국무총리는 무소속구락부의 이범석이 임명된다.


그림만 보면 사이좋게 나눠가진 것같지만, 

무소속구락부에서는 조소앙을 국무총리로 추천했는데,

이승만은 자신이 추천한 이운영이 부결되자 별다른 힘이 없는 이범석을 지명해버린 것이다.

(내각구성에서도 이승만은 자신의 세력만을 배치함으로써 한민당과 사이가 본격적으로 갈라지게 된다.)


뭐 여기까지는 그래도 잘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당시의 시대상이라든지 특수성을 고려한다면 이 정도의 치열함과 독선은 이해해줄 수는 있다.

(물론, 중간중간 돈 문제와 무장 폭력의 사고들, 주요 정치인의 암살 협의 등의 큰 문제들도 있었다,)


그래도 성숙하지 못한 정치인들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의 권력 다툼이라고 인정해줄 여지는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된 이후의 행보에 대해서는 참으로 암담하기 그지 없다.


+


일단, 반민법과 농지개혁법 등 사회개혁에 앞장섰던

소장파(무소속구락부의 후신) 국회의원들은 이승만에게는 눈에 가시였다.


농지개혁법의 경우에는 오히려 한민당이 더 큰 피해를 봤기에,

이승만으로써는 용서가 됐을지 모르지만, 반민특위로 친일파를 척결하면 이승만에게 타격이 너무 컸다.

(농지개혁은 산업화의 기반을 다지고 봉건적 계급을 타파한 훌륭한 정책이지만, 소장파의 정책이였고 농림부장관은 조봉암이였다.)


반민특위 활동에 위협을 느낀 이승만은

6.6반민특위 습격사건과 국회프락치 사건을 통해서 소장파를 척결해버리고,

김구 암살 사건 발생 이후에는 보도연맹을 만들어서 극우반공주의로 여론전을 펼쳐나간다.


이러한 이승만에 대한 당시의 여론은 최악이였다.

1950년 5.30선거에서 한민당의 후신 민국당과 이승만의 지지세력은 참패를 당했고,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당선되면서 무소속이 200석중에 126석을 차지해버린다.


당시, 제헌 국회의 임기를 2년으로 선정했기에 7월에 대통령 선거가 있어야 정상이였지만,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이승만은 정권을 그대로 유지하게 된다.

(국회 2/3가 반이승만세력이였기에, 사실상 재선이 불가능했는데, 한국전쟁이 이승만을 살려준 것은 사실이다.)


이후 정치적 사건들은 계속 이어지게 된다.

1952년 5월 26일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로 개정을 추진하기 위해서

국회의원들이 탄 버스를 크레인을 동원해서 견인해버리는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켜버리고,

6월 20일에는 국제부락부 사건을 발생시키는 등 갖은 노력 끝에 개헌안을 통과시켜버린다.


당시 전쟁중인 상황이였기에 극우반공주의가 극에 달했고,

이승만은 이를 이용해서 철저히 정적들을 제거하면서 갑작스럽게 진행된 직선제를 통해 당선된 것이다.


자유당을 창당한 이승만은

자유당의 창당 공신인 민족청년단(족청)계도 제거해버리면서 당내 독재체제를 이어가고,

1954년 선거에서는 부정선거를 통해서 자유당이 압승을 거두면서 확고한 지도체제를 구축해나간다.

(이후 진행된 개헌에서 그 유명한 사사오입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하지만, 민주당이라는 제1야당이 출범한 1956년 선거는 이승만에게 위기였고,

신익희의 사망으로 이승만이 대통령에서는 당선되지만, 민주당의 장면이 부통령에 당선된다.


당시 민주당의 신익희-장면 라인과 진보계열의 조봉암-박기출 라인은

후보 단일화를 통해서 이승만에게 대항하려고 했으며 충분히 승산이 있었지만,

신익희가 사망하면서 민주당이 오히려 조봉암이 아닌 이승만을 지지해버렸다고 한다.


공산주의자 출신의 조봉암이 되는 꼴을 못보겠다는 것인데,

온갖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조봉암이 선전을 하면서, 조봉암은 진보당 사건으로 제거당하게 된다.



이후 자유당은 1958년 국회선거에서도 온갖부정선거를 자행하며 126석을 확보하지만,

개헌선을 확보하지 못하면서 영구 집권을 위한 개헌이 어렵게 되었고,

1960년 선거에서 또다시 부정선거를 일으키면서 학생들의 시위가 커지면서 4.19가 일어나게 된다.


+


분명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4번의 대통령 선거와 4번의 국회의원 선거가 진행되었다.


근데, 그 내막을 보면 참으로 암울하다.


1948년 대통령 선거는 간선제로 민족주의자들이 빠진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1952년 대통령 선거는 직선제로 전쟁중에 갑작스럽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유리한 상태에서 당선된다.

1956년 대통령 선거는 민주당 신익희의 사망과 온갖 부정선거로 승리하였으나, 부통령 선거에서는 패배하고 말았다.

            (이때 선거에서 패배한 조봉암은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1960년 대통령 선거는 민주당 조병옥이 사망하면서 단독으로 선출되었으나 부통령 선거에서 부정을 일으켜 4.19가 촉발된다.


1948년 총선에는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빠진 상황에서 한민당, 이승만 지지자, 무소속구락부가 사이좋게 의석을 나눠갖는다.

1950년 총선에는 무소속만 126석이 되면서 반이승만 세력이 2/3를 점령해버렸기에 한국전쟁이 없었으면 정권을 바뀌었다.

1952년 보궐선거(한국전쟁으로 인한)에는 새로 창당한 자유당이 부정선거를 저지르면서 완벽하게 압승을 거둔다.

1954년 총선에는 '곤봉선거'라 불릴정도로 본격적인 부정선거가 시작되었으며, 자유당이 114석을 차지하면 압승을 거둔다.

1958년 총선에도 부정선거는 이어지며 자유당이 126석을 차지하지만, 민주당이 79석을 차지하면서 개헌선을 달성하지 못한다.


1948년에는 단독정부 수립에 의한 반쪽짜리 선거였으며, 

1952년에는 전쟁중에 갑작스럽게 진행된 직선제였고, 1952년 보궐선거부터는 자유당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부정선거가 판을 쳤다.


조봉암은 1952년과 1956년에 연이어 대선에서 2위를 차지하며,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이승만이 이길수 없는 상대가 되면서 제거당하였고,


민주당은 신익희와 조병옥이 연속으로 대통령선거 전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1952년 민국당 시절에 갑작스럽게 고령의 이시영을 내세워 3위를 차지한 것말고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다.

(물론 1956년 부통령선거와 195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굉장한 선전을 펼친다.)


어찌보면 이승만이 계속해서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민주주의가 정착하지 못한 시절 온갖 부정선거와 관권, 금전 선거가 남발했기에 가능했던 것이지만,

당시 문맹률이 80%에 달하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이승만을 견제했다는 것은 대단한 국민들임에 틀림없다.



당시 1948년 여성에게도 동일하게 투표권이 부여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대단한 선진적인 의식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미국이 1920년, 영국이 1928년, 프랑스가 1946년에 이루어졌고,

유럽의 상당수의 나라가 우리나라보다 늦게 여성 참정권이 주어졌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여성에게 동일한 참정권을 줬다는 것은 국민 의식 수준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다만, 1950년대 들어와서 이승만정권이 여성들의 참정권을 이용해서,

온갖 생활용품을 지급하며 금권 선거가 난립하게 만들었다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처음부터 이런 시스템을 도입할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 같다.


+


안타깝게도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만 보면,

이승만은 정치적 야욕에 넘치는 독재자라는 사실밖에 알 수 없다.


그래서 그의 사고를 좀 더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 서중석 교수의 또 다른 책을 읽어보았다.


이승만의 정치이데올로기
국내도서
저자 : 서중석
출판 : 역사비평사 2005.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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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일민주의 - 극우반공주의 - 오륜사상'으로 변해가는지를 설명하고,

이승만의 개인적인 성향에 대해서도 심층적으로 분석한 논문 모음집이다.


뒷쪽에 민주당에 대한 내용과 심산 김창숙 선생에 대한 논문도 굉장히 흥미롭다.

(민주당에 대한 내용을 별도 포스팅으로 정리해보려고 한다.)


서재필이 완전히 서구화된 인물이였다면,

이승만은 미국에 체류기간이 매우 길었지만 완전히 봉건적인 인물이였다.


1875년에 태어나서,

1905년에 미국에 건너갔고, 중간에 한국과 스위스, 중국에 체류한 것외에

1945년 70세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올때까지, 인생의 절반을 미국에서 보냈다.


1953년에 이승만이 대통령 재직시절,

이승만이 1930년대 주시경 선생이 체계화 시킨 맞춤법을 잘 몰라서,

독립신문 시대의 한글로 돌아가자는 '한글 간소화 파동'까지 일어났던 것을 보면

확실히 이승만은 한국보다는 미국식 문화가 더 익숙한 사람이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철저히 봉건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인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유교적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임기 내내 2인자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철저하게 제왕적인 임금이 되려고 했다.


1948년에는 정적들을 견재하기 위해서 이범석을 키워졌다가,

1952년에는 당시 아무런 인지도가 없었던 함태용을 부통령으로 내세우고,

1956년에는 미국 유학시절부터 이승만의 비서였던 이기붕을 내세웠으나 선거에서 지고,

1960년에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이기붕을 다시 당선시키려다가 4.19의 불씨를 만들게 된다.


라이벌로 부상하고 있던 조봉암은 물론이고,

자신에게 충성을 다했어도 자유당이 창당된 이후에는

세력화될 수 있는 족청계(이범석, 양우정, 안호상)도 과감하게 처단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승만 대체할만한 인물로는

미국과 친했던 장면과 조병옥이 있었지만 이 둘은 너무나 나약해서 미국에서도 밀어주지 못한다.


김일성과 같이 우상화 작업을 진행했었기에,

이승만에 대해서는 파시스트적 성향이 있었다는 비난도 있지만,

이승만에 대해서는 강준만의 평가가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공감이 갔다.

'이승만의 시계는 구한말에 멈춰져 있었다. (많은 부정적평가와 긍정적평가를 이루면서도) 이승만은 평생을 복고적 투쟁을 위해 바친 인물이었다. 이 점을 무시한 채, 오늘날의 잣대로 이승만을 평가하는 것은 이승만에 대한 불필요한 악의적 해석만을 낳을 뿐이다'  <한국현대사 산책 (2004)>


실제적으로 이승만은 미국에 건너간 이후로 마치 시간이 멈춘듯하다.

왕족의 후예(양령대군)임을 스스로 자청했던 것이나,
왕손인 영친왕의 귀국을 막았다는 점에서 그는 이씨조선의 왕이 되고 싶었던 것같다.

유교적 분당론에 따르면 정당은 분파의 이익을 대표하는 것이기에 
정치적 위기가 오기 전까지 자유당을 창설하지 않고 일민주의를 주장한 것도 이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이승만의 주위에는 언제나 자신의 말에 충성하는 예스맨들로 가득찼고,
이승만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이승만이 나쁜 것이 아니라 예스맨들이 비리를 저질렀다고 주장한다.

이승만의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사실상 일본 국군주의에 가깝다는 평가도 있지만, 어찌보면 전근대적 군주의식에 더 가까울 수도 있다.

형식은 미국식의 민주주의를 가져오기는 하지만,
내용은 구한말의 군주체제를 유지하고 싶어했던 것같다.

백성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홍익인간을 교육이념으로 정하고,
공자의 왕도정치를 찬양하고, 도의도덕과 예의염치 등을 가종한 것도 어쩌면 이런 맥락일 수도 있다.

겉으로는 철저히 반공과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지만
속으로는 봉건적 사고와 절대군주체제를 유지했던 이중성은

어찌보면 30세라는 나이에 미국에 건너가서 70세에 한국에 돌아왔던
봉건적 가치체계를 가지고 미국식 교육과 생활을 했던 그의 인생이 반영된 결과라 볼 수 있다.
(사실상 이승만이 일제시대에 국내에 거주한 것은 1910년 YMCA선교사로 근무한 3년밖에 없음)

또 하나의 가장 큰 변수는 이승만의 나이였다.

당시의 평균연령이 50세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70이라는 나이는 지금으로 따지면 90~100세 정도는 된다고 생각해야한다.

자유당이 대통령선거는 무투표당선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부통령 선거때문에 3.15 부정선거를 진행한 이유는 80이 넘은 이승만이 언제 죽을지 몰라서라고 한다.
(부통령은 아무 권한이 없지만, 대통령이 죽으면 그 자리를 승계받게 된다.)

워낙 재능이 출증한 사람이라고 해도
70세라는 나이는 그를 보수적으로 만들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솔직히 70세라는 나이는 요즘세대에서도 굉장히 고령이고 완전히 은퇴했을 나이이다.)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왜 그렇게 사람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동상을 세우고 최고의 자리에 집착했는지 한 편으로는 이해가 간다.
(그 덕에 그에게 적당히 충성을 다했던 자유당 일파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될 수 있었다.)

이승만 정권의 횡포는 자유당 정권의 횡포라고 봐야한다는
보수측의 주장에 대해서도 그런 부분에서는 공감이 가기는 하지만,
그런 자유당을 제대로 통제못한 이승만에게 근본적인 책임이 있는 것은 잊지말아야 한다.
(80세가 넘어서까지 정권을 쥐고 있었다는 것은 완전히 이기적인 행동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왕족 출신이지만 과거에는 낙방했고, 대신에 미국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은 사람
청년시절을 조선에서 보냈지만, 대부분의 인생을 미국에서 보낸 사람 
미국을 가장 잘 알고 있고 완전 친미이지만, 자신이 원할 때는 미국에게 땡깡도 부릴 수 있는 사람
기독교를 철저히 신봉하지만 철저히 유교적 사고를 가졌고 유교적 사고를 장려한 사람
극우반공주의의 최선봉에서 민주주의를 부르짓었지만, 2인자를 인정하지 않는 절대 군주였던 사람
조선 왕조를 무너뜨리려고 하다가 감옥까지 갔었지만, 정작 자신은 유일영도자의 꿈을 꾸었던 사람
평생을 미국에서 이방인으로 살다가, 절대 군주에 굶림하여 그 자리를 놓칠 수 없었던 사람

이승만이 보여준 이러한 이중성들은
동일한 전제주의적 독재 정권이였지만,
그 뒤를 이어 나타난 박정희와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줬던 것 같다.


+


[추가 첨언]


댓글로 어느 분께서,

이승만 시대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지적을 해주셨다.


책의 내용에 기반해서 정치적 사건들만 서술하다보니,

책에서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던 사건들에 대해서는 누락이 되어버렸다.

(사실상, 이승만이 자행한 가장 죄질이 나쁜 사건들이라 할 수 있다.)


제주4.3사건 때 아무 죄없는 민간인 사망자 약 3만명 (추정)

한국전쟁 반발 당시 한강다리 조기폭파 사건으로만 민간인 수 백명 (추정)

한국전쟁 중 보도연맹 사건으로만 수 만명 (추정)

한국전쟁 중 부역자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민간인 학살 수 만명 (추정)

한국전쟁 중 국민방위군으로 징집해놓고 굶어죽인 장병만 약 5만명 (추정)


모두 합치면 수 십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억울하게 사망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들만 언급한 것이고, 실제로는 더 많은 사건들이 발생했었다.)


빨갱이 소탕을 이유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빨갱이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인 사건들도 있지만,


보도연맹 사건처럼 계획적으로 살인이 자행된 죄질이 나쁜 사건도 있고,

심지어 계획도 없이 엄동설한에 징집만 해놓고 거지처럼 굶어죽인 사건도 있다.


하나하나 설명하자면 너무 길고...

더 어이없는 것은 피해자에 대한 제대로된 조사조차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관련된 내용은 

김동춘 교수의 <전쟁과 사회>를 읽어보면 그 처절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전쟁과 사회> 관련 포스팅 확인하기 <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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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 Icon
    개인미팅

    대단하십니다 이런 글을 쓰실 수 있다는게... 다만 아쉬운 부분은 반공을 위한 정치살인 이외에도 시민들이 죽은 케이스들은 다뤄지지가 않았네요 위 내용만 가지고서는 우리가 왜 현재 이승만에 대한 총평이 결국은 부정적일 수 밖에 없는(부분은 아니다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상황이 서술되지 않은 게 조큼 서운합니다 ^^;; 암튼 잘봤습니다

  2. 좋은 지적이십니다...
    책의 내용이 정치이데올로기에 맞춰져 있다보니,
    민간 수준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는 포스팅에서 빠져있네요...

    제주 4.3사건, 한강다리폭파사건,
    보도연맹사건, 전쟁 중 민간인 학살,
    국민방위군 사건 등 민간 수준에서도 수 십만명이 희생을 당했죠...

    한국전쟁이라는 특수성이 있기도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역사상 재임기간 가장 많은 사람들이 죽은 대통령이죠.

    하지만, 대부분이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극우반공주의 사상에서 기인했기에 정치적인 사건이라고 봐야겠네요~

    관련 내용은 하단부에 첨언으로 넣겠습니다.

  3. Blog Icon
    일개미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도 김일영 교수님의 책을 읽으면서 이승만이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한국을 위해 상호방위조약을 일본에서 우리나라까지 끌어들였다기 보다는 자신의 기득권을 위해 끌어들인것이 사실상 맞지않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른 책에서 이미 논의된 내용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현대사의 이해 ⑤] 전쟁과 사회 - 김동춘 (2000)

2014.03.31 23:49
전쟁과 사회 -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개정판)
국내도서
저자 : 김동춘
출판 : 돌베개 2006.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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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사회>의 가장 큰 장점은

한국전쟁을 민중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점이다.


1980년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서 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면,

2000년대 김동춘 교수는 한국전쟁 그 자체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전쟁의 정치적 측면, 전쟁과 계급 갈등, 전쟁과 정책을 분리시키는 기존의 인식 태도는
일본 극우파의 공식적인 역사 인식과 유사한 패턴에 불과하며, 한국전쟁에 대한 공식화된 인식은
정치/사회적 과정으로서의 전쟁의 진행 과정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흐리게 하며,  오늘의 정치/사회를 이해하는데 기여하지 못한다."


김동춘 교수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전쟁의 원인과 책임 규명을 하는 것도 필요한 작업이지만,

실제적으로 전쟁 과정에서 발생한 정치사회적 사실들은 거의 정리가 안되었기에,


"전쟁중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그러한 일들이 왜 일어났는가?"

"그러한 일들이 전쟁 후 한국정치에서 어떻게 반복, 재생산 되었는가?"


3가지 질문에 대해서 소홀히 취급해왔던 중요 현상들에 주목해서 한국전쟁을 분석했다.


+


이 책을 읽은 소감은 한국전쟁의 맨살을 본 느낌이다.


정치적 측면에서만 바라본 한국전쟁은 분단이 고착화되는 역사적 사건에 불과했다면,

민중의 관점에서 바라본 한국전쟁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되는 지옥과 같은 비극의 현장이였다.


피난과 점령, 그리고 학살로 이어진 전쟁은

왜 싸우는지도 왜 죽어야하는지도 모르는 민중에게는 고통의 연속일 뿐이였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제작자는 이 책을 10번 이상 읽었다고 한다.


물론 극화되는 과정에서 막판에 약간 억지스러운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보도연맹 사건이나 학도병의 착출, 동족상잔의 비극 같은 민중차원의 고통을 잘 들어낸 영화이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당시 상황에 대한 자료가 제대로 정리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김동춘 교수는 전쟁의 조각난 기억들과 통제된 기억들을 되살려서 이 책을 저술했다고 이야기한다.


"피학살자의 가족을 비롯해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들은 빨갱이로 몰릴까 봐 그 사건을 단 한 번도 공개적으로 발설한 적이 없었다.
그 동네에서는 ‘그날 이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잔인한 망각의 세월이었다."

이념 논쟁의 두려움은 피해자들의 입에 자갈을 물렸고,
그 때의 상처는 마음 속 깊은 속에서 분노로써 자리잡게 되었다.

"한국전쟁을 다시 정리하지 않고서는 오늘의 한국 자본주의 정치, 경제, 사회 질서를
제대로 정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새롭게 갖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 본다면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이 것이 바로 김동춘 교수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이다.


+


이 책이 던진 수많은 화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전쟁에 대한 명칭이였다.


북한에서는 이 전쟁을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르며,

남한에서는 이 전쟁을 6.25사변이라고 부른다.

영어로 이 전쟁의 공식적인 명칭은 Korean War(한국전쟁)이다.


전쟁에 대한 명칭은 굉장히 많은 정치적 목적을 담고 있다.


북한에서는 친일파 척결과 미제국주의 제거를 위한 전쟁이였다는 전쟁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고,

남한에서는 전쟁 개시일인 6.25를 강조함으로써, 남침을 강행한 북한에 대한 책임을 강하게 주장한다.


반면에, 국제적으로는 싸움의 당사자의 이름을 붙이지 않고, 싸움이 일어난 장소에서 이름을 따왔다.

(전쟁의 성격이 내전이라고만도 할수 없고,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연합군이 참여한 복합적인 전쟁임)


한국전쟁에서 시작된 이러한 작명법은 베트남 전쟁, 이라크 전쟁으로 최근에도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어떠한 정치적 목적이나 이념이 담겨있지 않은

'한국전쟁'이라는 명칭이 가장 명확하고 공정한 명칭이라는 생각이 든다.



북한의 주장은 너무나 터무니 없이 자신들의 관점만 우기고 있는 것이고,

6.25사변이라고 하기에는 전쟁이 너무 복합적인 원인으로 시작됐고, 이 또한 정치적 목적이 포함되어 있다.


6.25를 기념하는 덕에 전쟁이 개시된 날짜는 너무나 잘 알아도, 

전쟁이 종료된 날짜는 아무도 알지 못하면서 오히려 전쟁의 분위기를 지속해나가게 된 것이다.


아직도 남한과 북한에서는 누가 전쟁을 먼저 시작했느냐에 대해서 싸우고 있지만,

6월 25일 당일 상황에 대해서는 육본 일직장교였던 김종필이 침묵을 지키면서 명확하지는 않지만,

김일성이 대대적인 남침을 사전에 계획해서 전면전으로 확전시켰다는 것은 소련기밀문서를 통해서 이미 증명되었다.


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누가 진정 전쟁을 원했고, 과연 이 전쟁을 통해서 누가 이익을 봤는지의 문제이다.


김동춘 교수는 한국전쟁의 성격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한국전쟁은 일제 식민지 지배의 극복을 통한 근대국가 수립의 국면에서 미소에 의한 분할점령과
냉전적 세계 질서의 영향으로 인해 국내의 정치적 계급적 갈등이 전쟁으로 폭발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결국 내적 갈등이 냉전적 세계 질서로 인해서 전면전으로 확대됐다는 것이며,

아이러니 하게도 전쟁을 통해 민중은 고통을 당했지만 남북의 정권은 확실히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김일성은 남로당계를 비롯한 자신의 정적을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게 되었고,

이승만도 반공주의를 기반으로 흔들리던 자신의 정권을 확고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일본은 전쟁보급품 수급 기지로써 경제적 부흥의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고,

미국은 2차대전의 조기 종영으로 창고에 쌓아두었던 전쟁물자 제고를 말끔히 해결했으며,

종이 호랑이로 전략했던 중국은 미국와 대등한 전쟁을 치루면서 국제적으로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UN이 참여하게 기회를 열어준 소련은 어설프게 북한을 지원하면서 리더십을 상실하게 된다.)


남한에서 130만명, 북한에서 250만명이 사망했지만,

주변국들은 모두 실리를 챙겼고, 남북한의 정부 지도자도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


전쟁의 전개 양상을 보면, 

소련의 제의로 미군과 소련군이 모두 철수한 상황에서,

실질적으로 전쟁 능력을 갖추지 못한 남한은 초반에 너무나 쉽게 밀렸다.


이승만이 수시로 북진을 외쳤기 때문에,

미군은 남한의 병력을 10만명으로 제한을 했었고, 지원도 최소화해서 전차가 한대도 없었다.


이에 비해서 북한은 병력이 20만명 정도 되었고, 소련에서 전쟁 물자를 지원받았다.

결정적으로 인민군에는 중국 내전에 실전 경험이 풍부한 조선의용군이 6~7만명 정도가 포함되어있었다.


여기에 전쟁이 발발하기 2주전에 전군 중앙 요직의 대규모 인사이동이 단행되었고,

6월 24일에는 각종 작전 명령과 비상경계령이 해제되어서 후방부대의 상당 수의 장병이 휴가나 외출중이였다.


여기에 6월 24일날 밤 수뇌부는 미군들과 밤늦게까지 회식을 진행해서 모두 술에 취해있었다.

미국과 이승만은 이미 북한의 전쟁 준비 내용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별다른 준비를 안한 것이다.


당시 총선에서 이승만이 참패한 상황이여서 정치적으로도 위기였기에,

이 정도로 허술한 상황이라면 남침 유도설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닌 듯하다.

(어찌보면 미군이 이미 철수를 한 상황이여서 정부 입장에서는 손놓고 기다릴 수 밖에 없었을 수도 있다.)


이러니 뭐~ 추풍낙엽처럼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병력도 절반에 전쟁 경험도 전무하고, 거기에 전쟁 장비에서도 완전 밀렸으니...)


전쟁이 터진 후 미군의 참전을 기대하고 상대적으로 여유를 부리던 이승만도,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27일 새벽 국회의원들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주요 문서도 치우지 않은 체 서울을 떠난다.


낙관적으로 전쟁상황을 보고하면서 시민들에게 대비할 기회도 주지않았으며,

27일 대전으로 대피한 이후 미군의 참전이 확정된 이후에서야 공개 석상에서 전화를 통해서 방송을 한다.


그리고 28일 새벽 2시, 4000명 이상이 건너고 있던 한강다리를 조기 폭파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수백명이 폭사하게 되었고 한강 이북에 수많은 병력과 보급품은 고스란히 남겨진 체 북한에게 점령을 당한다.



1차 피난 시기에는 정치적으로 인민군에게 피해가 예상되는 사람들만 피난을 갔다고 한다.

경찰과 공무원, 우익활동가은 피난을 선택했고, 중도파 정치가와 지식인, 자영업자는 그대로 남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때 남은 사람들은 

인민군이 점령했을 때는 해당 지역 출신의 좌익들이 붉은 완장을 차고 동네 주민을 학살하는 것을 경험했고,

국군이 국토를 수복했을 때는 경찰과 군인에 의해서 북한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학살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미군의 무차별적인 폭격과 함께 학살은 수많은 민간인들의 인명피해를 낳았고,

오히려 군인보다 더 많은 민간인들이 사망하면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에 만들었다.


학살은 방식도 잔인했을 뿐만 아니라, 

굉장히 개인적인 원한이나 감정으로 권력을 남용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게 나타났다.

(학살에 의해서 남북한 모두 수십만명씩은 사망한 것으로만 추정되고 있다.)


어느 한 쪽편에 확실히 서지 않으면 쓸데없는 보복의 빌미를 주었고,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모함하는 일도 서슴치 않게 되었다.


특히나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면서 점령을 당한 지역에서는

계속되는 보복이 이어지면서 뭔가 의식있는 사람들은 반대파에 의해서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경험은 1.4후퇴 때 대다수의 사람들이 피난을 선택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괜히 잔류했다가 인민군의 또 다른 보복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한 피난을 한 것이다.


+


국토의 90%를 점령당했던 남한은 국토의 90%까지 점령했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서울을 다시 뺏기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당시 국군은 중공군이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38선을 뚥고 지나간다.

종이 호랑이였던 중공군의 경고따위는 살짝 무시했지만 그래도 좀 맘에 걸렸는지,

UN군은 국군이 38선을 넘은지 1주일 정도 있다가 38선을 뚥고 올라갔다고 한다.


학살은 이북에서도 만만치 않게 진행되었고,

미군의 폭격으로 거의 모든 동네가 쑥대밭으로 변하게 된다.

(당시 평양인구가 40만명인데, 평양에 떨어진 포탄 수가 42만 발이였다고 하니, 미군도 참~ 어지간 하다...)


하지만,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상상을 초월했고,
맥아더는 핵폭탄을 26발이나 떨어뜨리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게 떨어졌으면 그 후유증은 아직도 남아있을 듯하다...)

다행히 이미 소련이 핵을 개발한 상황이였기에,
결국 트루먼 대통령과 계속해서 트러블이 있던 맥아더가 해임되면서 핵전쟁은 면한다.
(당시 미국에서는 맥아더가 대선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인기가 좋았는데, 맥아더가 워낙 전쟁 미치광이라서 대선에는 못나갔다고 한다.)


1951년 7월 이미 전선은 고착화되기 시작했고,

이후 2년 동안은 고지전만 지속되면서 쓸데없는 희생만 이어진다.


"왜 싸우기 시작한지 잊어버렸다"라는 표현이 당시의 상황을 잘 묘사해준다.

(영화 <고지전>은 그 참혹한 상황을 아주 잘 묘사하고 있다.)



정전 협상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진 이유는 바로 포로 문제였는데,

자유송환이나 자동송환이냐의 문제로 논쟁이 이루어진 것이다.


제네바 협정 당시 원칙상으로는 자동송환이 이루어져야하지만,

당시 전쟁의 특수성으로 인해서 미국은 자유소환을 주장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제네바 협정 때 공산주의의 확산을 두려워 자동소환을 주장한 것은 미국이였다.)


이유는 인천상륙작전으로 중간에 고립되었던 인민군의 상당수가 포로로 잡히게 됐는데,

그 중에 상당수는 남한 출신이면서 인민군에 합류한 의용군이였던 것이다.


그들의 고향은 남한인데,

자동송환의 원칙을 적용하면 이북으로 이송되는 애매한 상황이다.


안그래도 중국과 북한과 싸워서 정전을 하게 되서 자존심이 상하게된 미국입장에서는

상당수의 포로에게 자유의사를 물어봤더니 남한행을 선택했다는 것을 통해서 자존심을 세우고 싶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가 이북행을 택했고,

이산가족 찾기 신청자를 보면 이때 월북을 선택한 아들이 남한의 가족을 찾는 경우가 가장 많다고 한다.

(남한행을 선택해봤자 빨갱이로 몰릴 것을 두려워해서 이북행을 택한 사람도 꽤 많았다고 한다.)


더 어이가 없는 사건은

많은 장병들을 그대로 두고 피난을 갔더니

남아있던 장병들일 의용군이 되는 것을 경험한 이승만 정권은

1.4후퇴 때는 의용군이 되지 않도록 참전이 가능한 장병들을 '국민방위군'이란 이름으로 징병을 해버린다.


문제는 그것이 추운 겨울이였고 사전에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는 점이다.

무려 60만명의 장병들을 끌고 남하를 하면서도 아무런 보급품도 없고 식량도 없었다.


한 마디로 거지꼴로 데리고 내려가면서, 북한 인민군에 합류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와중에 군수물자를 관리하던 간부들은 물품을 빼돌리는 일까지 발생한다.


무려 5만명의 장병들이 전쟁에서 싸우다 죽은 것이 아니라,

추운 겨울에 얼어죽거나 굶어죽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이게 그 유명한 '국민방위군'사건이지만

정작 사건의 책임은 말단 책임자의 처벌로 꼬리짜르기를 하고 만다.

(사건 책임자의 꼬리짜르기의 전통은 이때에도 여전했던 것 같다.)


+


참... 가슴 아픈 역사이다...


특히나, 책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는 

북한의 반공분자 처벌이나 남한의 부역자 처벌과 보도연맹사건은

전쟁의 잔혹성뿐만 아니라 왜 한국사회가 오직 자기 살길만 찾는 기회주의자를 양성했는지를 이해하게 만든다.


보도연맹사건의 경우에는

정부에 의해서 계획된 살인이라는 점에서 가장 악랄한 사건이다.


보도연맹이란, 좌익에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전향한 사람의 명단을 작성한 것으로

일제시대에 진행되었던 사상범 보호관찰법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놓은 것이다.


정부에서는 남쪽으로 후퇴하는 과정에서 위험인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들을 대규모로 학살했고, 이 중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냥 이름이 올라간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보도연맹 리스트에 이름이 올려진 사람만 100만명에 달했다고 하니, 도대체 몇 명이 죽었는지 상상이 안간다.


당시 보도연맹 리스트를 관리하고 학살을 자행한 것은 육군본부 정보국이였는데,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에 소속되어 있던 사람들은 이후 대한민국을 주름잡는다.

(백선엽, 장도영, 박정희, 김종필, 박종규)


학살자들에 대한 유골은 수습되지 않았고, 아직도 발굴이 제대로 끝나지 않은 상황이다.

또한,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한국전쟁 때 친일파에게 학살당하거나 월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남한이고 북한이고,

해방 후 새로운 세상을 기대했던 모든 사람들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모두 학살의 대상이 된다.

(그 덕분에 남한과 북한 모두 안정적 정권을 구축하는 계기가 된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해주지 못하며,

정부를 믿을 수 없을뿐만 아니라 항의할 수도 없었다.


권력자가 바뀔 때마다 권력자에 기댈 수 밖에 없게 만들었고,

염치와 도덕이 없으며 나만 생각하는 피난 상황은 전쟁이 끝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전쟁은 전투는 끝났을지 모르지만, 

아직도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전쟁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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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의 이해 ④] 제헌헌법, 한민당과 친일파

2014.03.20 14:56


1948년 7월 17일 선포된 제헌헌법은

안타깝게도 원본이 6.25때 분실되었고, 현재 보관중인 것은 관보 등을 통해서 재작성된 것이다.


분단이 확장되고, 정부 수립 직전에 작성된 헌법이기에,

굉장히 우편향되었을 것이라는 나의 편견과는 완전히 다르게...

재헌헌법의 내용은 굉장한 신선했다.


大韓民國憲法(제헌헌법).pdf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부분은 

전문 첫 줄에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했다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았다는 내용이며,

도대체 건국절 운운하는 사람들은 과연 이러한 내용을 읽어라도 봤는지 의문시 되었다.


대한민국은 정부 수립 시점부터 임시정부를 정통으로 내세우고 있구만...

아니, 어디서 어이없게 건국절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인지...


또한 여러가지 문구들이 눈에 띄는데, 

아직도 존재하고 있고 항상 많은 사람들이 인용하는 문구도 있지만,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2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평화, 차별금지, 각종 자유와 권리 그리고 의무들...

심지어 공공성을 가진 기업들에 대해서는 국유화한다는 내용까지...


당시 일본인들이 기업의 94%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요즘으로 보면 굉장히 좌파적인 내용들이 당시만 해도 가능했다는 것이다.


또한, 정치적인 면에 있어서도 

순수 대통령중심제보다는 내각책임제의 성격이 혼재되어있었다.

독재자의 출현을 막으면 민주주의적 이상을 더욱더 강하게 추진했던 것이다.


물론 이는 잘 지켜지지 않았고,

적산기업(일본인이 경영하던 기업을 한국인에게 배분)으로 오늘날의 재벌들이 탄생하게 됐고,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거나 정권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에 헌법은 독재자에 의해서 걸레짝처럼 수정되어버렸다.


87년 민주항쟁의 결과로 헌번이 다시 수정되어서 본래의 정신을 많이 되찾았지만,

아직도, 제헌헌법에 비하면 굉장히 보수적인 성향이 많이 남아있다.


무려 25년이란 시간이 지났음에도, 

이러한 부분들이 수정이 안되고 있다는 사실이 좀 안타깝다.


물론 헌법의 개정이 과거처럼 정권의 연장을 위해서 이루어지면 안되며,

만약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 했던 방식의 개헌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


+


해방 이후 

과연 어디끼지 친일파로 볼 것인가의 문제도 다시 생각해봐야한다.

분명 미군정에 의해서 수많은 친일파가 부활했고 심지어는 노덕술, 김창용같은 인물들이 버졌이 활동하고 다녔다.


하지만, 그런 극단적인 친일파들 말고,

한국민주당을 주도한 인물들도 모두 친일파라고 보는 것이 맞는 것인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전쟁의 기원>에서는

여운형은 미군정 하지를 만나서 2개의 명단을 전달했다고 이야기한다.


'충성스럽고 믿을 만한 한국인' vs '친일파'


친일파의 명단은 진짜 너무나 잘 알려진 유명한 친일파들이였다.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윤치호, 박종양, 김명준, 한상용, 이진호

기독교계 지도자였지만 일제에 협력했던 신흥우, 양주삼

친일 기업가로써는 경성방직회사 사장 김연수,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

총독부 교육국 관리 엄창섭, 조병상, 신용인, 김대운, 이기용



반면에, 충성스럽고 믿을 만한 한국인 명단은 너무나 다채롭다.

(물론 해당 명단에서는 해외 망명자들의 이름은 모두 빠져있다.)


여운홍, 백상규, 조한용, 이만규, 황진남, 조만식, 안재홍, 이임수, 최동오

김성수, 장덕수, 구자옥, 홍순엽, 이원철, 박용희, 김창수 (7명은 한민당 창당의 주역들)


심지어는 건국준비위원회의 공산주의 지도자였던 허헌과 이강국은 빠져있었다.

이에 대해서 브루스 커밍스는 여운형의 친일 경력이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했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민당의 세력들을 모두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친일파로 규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여운형이 기회주의적인 행동으로 이런 명단을 작성해서 제안한 것일까?


당시, 시대적 맥락에서 상황을 볼 필요가 있다.

일제 말기 좌익 공산주의운동가들은 모조리 감옥에 잡혀갔고,

남아있던 우익 민족주의운동가들은 일제의 강요에 의해서 친일에 가담하게 된다.


물론 조만식이나 여운형처럼 끝까지 버티며 싸운 사람들도 있었고,

송진우처럼 아프다는 핑계를 대면서 이리저리 잘 피해나간 사람도 있었지만,

김성수나 장덕수처럼 끌려가서 강연을 하거나 논설을 신문에 게재한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여운형도 중간에 일제에 협조한 흔적이 있기는 하지만, 지하조직은 운영한 것을 보면 진심은 아니였던 것 같음)


일례로 장덕수는 친일 강연을 한 것으로 잘 알려졌지만,

그는 강연 내내 눈물을 흘리며 억울한 심정으로 이야기했고 듣는 학생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의 강연 내용은 분명히 친일이였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진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 그의 행동은 친일이라고 손가락질을 할 수 있는 것인가?


김성수, 장덕수 등의 인물들은 분명히 나약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해야했지만,

해방된 조국에서 국가를 재건해야하는 시절에 그들의 능력은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여운형은 자신과 같이 건준을 이끌고 있는 좌익 지도자들의 이름을 빼버리고,

보수주의자였던 김성수나 장덕수 등의 이름을 올린 것이다.


이러한 여운형의 의도는 조선인민공화국의 내각구성에서도 옅볼 수 있다.

이 명단에는 해외파(이승만, 김규식, 김구, 김원봉 등)와 공산주의자(허헌, 이강국 등)뿐만 아니라,

김성수, 김병로 등의 이후 한민당의 주력 세력들의 이름도 포괄하고 있다.


조선인민공화국 명단 < 확인하기


이러한 맥락들을 본다면, 

그들이 일제에 끌려가서 강연을 했고, 기사를 썼고, 돈을 냈다고 해서

무작정 그들은 친일파이기 때문에 처단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민족문제연구소는 완전히 반발을 할 것이다.)


당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그들을 어떻게 평가했는지가 더 중요하며,

그렇기에 한민당을 주도했던 세력들을 무조건 친일로 몰아세우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물론 한민당이 만들어지면서, 상당 수의 친일파 세력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한민당에 빌붙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떳떳하게 민족을 이끌 수는 없었다.

자신들의 나약함을 만천하에 드러냈기 때문에 한민당은 결국 정권을 획득할 수는 없었다.


그럴수도 있지라고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들을 지지해줄 수 없었던 것이 그 당시 사람들의 심정이였던 것같다.

(대놓고 사죄라도 했으면 좋았을텐데, 당시 분위기는 '사죄 = 좌익에 대한 승복'으로 흘렀던 것 같다.)


그렇기에 여운형이나 좌익의 지도자들이 인기를 끌었고,

아예 해외에서 활동했던 이승만, 김구 같은 사람이 대안으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진짜문제는 친일파를 척결하자는 사람들을 때려잡았다는 사실이다.

반민특위를 통해 깔끔하게 정리하고 넘어가자는 움직임에 대해서 이승만 정권은 탄압을 가했다.


어찌보면, 이 때라도 반민특위를 통해서 잘 정리되었으면,

이렇게까지 시끄럽지는 않았을텐데, 아쉽게도 2004년 노무현 정권에서야 다시 한번 청산이 이루어진다.


너무나 오랜 세월이 지났기에 조사가 원활하지도 않았고,

친일행위의 대가성으로 받은 재산이라는 근거가 있는 부분만 정리한 것이기에 한계가 있었지만,

그래도 그러한 노력이라도 한 것이 한편으로는 좀 기특하기도 한다.

(물론, 민족문제연구소는 이 정도는 어린애 장난이라고 생각할 듯하다.)


그렇지만, 친일의 자손이라고 해서

무조건 비난받고 탄압하려는 태도는 다소 무리가 있어보인다.


또한, 일제 시대에 태어나서 그게 맞다고 배우고 자란 사람들에게도 어느정도는 감안해줘야한다.

이완용의 친일과 일제 하에 태어나서 배우고 자란 박정희와 서정주의 친일은 명확히 구분해줘야한다.

(물론, 박정희가 군사정권 시기 보여준 친일적인 행동들은 당연히 비난해야한다.)


친일을 한 행위에 대해서는 그 당시의 시대적 맥락에 맞춰서 평가를 해야하는 부분이 가장 적절한 것 같다.

(지금의 친일 평가는 안타깝게도 기록에 남겨진 부분만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기에 그게 너무 아쉽다.)


상처가 아물지 못하고, 깊게 패인체 방치되어 흘러온 것이 문제이고,

상처를 치유하자고 한 사람들이 오히려 고통을 당한 현실이 어쩌면 가장 큰 문제인 것 같다.


과연 이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고 잘 아물게 해서,

이 남겨진 상처 자국을 기억하면서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게 만들 수 있을까?


오늘날 역사를 살아가는 세대에게 남겨진 큰 숙제인듯하다...

열린 공동체 사회 Books/정치/역사 건국절, 건국준비위원회, 김성수, 반민특위, 삼일운동, 송진우, 여운형, 임시정부, 장덕수, 적산기업, 제헌헌법, 조만식, 친일파, 한국민주당

  1. 마음에 닿는 말씀입니다.
    감사히 보고갑니다.

[한국현대사의 이해 ③] 한국전쟁의 기원 - 브루스 커밍스 (1981)

2014.03.20 11:24
한국전쟁의 기원
국내도서
저자 : 브루스 커밍스 / 김자동역
출판 : 일월서각 2001.09.30
상세보기


이 책은 읽을수록 빠져드는 매력이 있다.

물론 뒷부분에 가면 비슷한 내용이 반복되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굉장히 디테일하게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굉장히 인사이트가 많이 느껴지는 책이다.


물론, 나중에 소련의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일부 내용에 오류가 있었다는 것이 발견되기도 했지만 진짜 잘쓰여진 책은 맞는 것 같다.


1980년 이 책이 출간되덜 시절 

대한민국에서 그 임펙트는 엄청났다고 한다.


80년 광주 항쟁 이후 '과연 미국은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가?'라는 질문을 하던

대한민국의 대학생들에게 미국과 한국의 역사적 관계에 대해서 굉장히 깊이있게 파고든 책이였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너무나 당연히 생각했던 내용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버린 것이다.


모두가 중앙정치(김일성, 이승만, 스탈린, 트루먼)에 주목할 때

브루스 커밍스는 당시의 사회경제적 변동과 지방 정치의 영역을 다루면서

사회경제적 해방과, 빈외세,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외쳤던 민중의 염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것이다.


외세와 친일 세력에 의해서 압살된 좌절된 해방(Liberation denied)에 대해서

브루스 커밍스는 1945년 ~ 1950년 사이에 발생한 사건과 식민지 시대의 유산들에서 그 원인 찾고 있다.


조용한 우물에 돌맹이를 던지듯이 이 책은 퍼져나갔고,

많은 부분에서 생각할 꺼리들을 던져주면서 한국 현대사 연구 큰 전환점이 되었다고 한다.


브루스 커밍스는 현재 시카고 대학교의 석좌교수로 '비판적 아시아학' 분야에서 잘 알려져있으며, 

클린턴 행정부시절에는 한반도 외교정책에도 이론적 기틀을 마련할 정도로 실무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역시 세계적인 석학은 다르다는 느낌을 확실히 받을 수 있는 명저이다...)


<사진 출처: 월간조선>


+


이 책이 던져준 수 많은 이슈들 중에서

절대 해결되지 않는 이슈는 '분단은 과연 막을 수 없었던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미군정의 잘못된 판단 때문인가?

좌우로 나뉘었던 민족 지도자들의 잘못인가?

분단만은 막으려했던 민족 지도자들의 능력부족인가?

소련은 그럼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말인가?

아님 이게 다 친일파와 일제의 잔재들 때문이였던 것인가?

김일성과 이승만 이 두사람만 없었어도 이런 비극은 안 잃어났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그 어떤 역사학자도 자신있게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누구 한 사람의 선택이나 실수로 초래된 일이라기에는 너무 복합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내려갈수록 한숨만 푹푹 쉬어진다.

이러면 안되는데... 이러면 안되는데... 하지만 상황은 너무나 안타깝게도 최악으로만 몰려간다.


처음에는 한국에 대해서 잘 몰랐던 미국 사령관 하지조차도,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해보려고 나름 최선을 다해보지만 결국 그 역시 실패한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이 모든 것의 직접적인 시작은 일제의 급작스런 항복이다.


그래도 몇 달 정도는 더 버틸줄 알았는데,

원자폭탄 2대 맞더니 너무나 쉽게, 그리고 갑작스럽게 일제는 항복을 하고 만다.


일제는 미국이 일본 본토까지 쳐들어올 경우에는

일본의 천황을 모시고 만주까지 철수해서 투쟁할 계획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런대도 불구하고 갑작스럽게 항복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소련이 참전하면서 관동군이 너무나 쉽게 소련군에 무너져버렸기 때문이다.


이미 관동군 중 상당수가 중국을 공격하기 위해서 남하를 했던 상황에서

소련의 갑작스러운 참전으로 만주가 뚤리면서 일제는 사면초가로 몰려버린 것이다.


일제의 갑작스러운 항복과 너무나 빨리 남하하는 소련군 때문에

미국은 일단 급한대로 38선에서 분할통치하자는 제안을 던졌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렇게 이어질줄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진짜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대로, "해방은 도적과 같이 왔다."



소련군의 진격에 미국은 가장 가까이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너무나 군인정신이 투철하고 한국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던 하지를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하지가 남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여운형이 주도한 인민공화국이 동네별로 인민위원회를 만들어서 자체적으로 지방자치를 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들이 너무 잘해서, 일본군 철수도 안전하게 진행되었고 농사는 풍년까지 들었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는 시각은 상반되었다.

미군이 보기에는 그대로 놔두었다가는 위협적인 공산주의 천국이 되어버릴 듯했고,

소련이 보기에는 그대로 놔두었다가는 이상적인 공산주의 국가가 되어버릴 듯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군정과 소련군정의 선택은 완전히 상반될 수 밖에 없었다.


소련군정은 자율성을 최대한 부여해, 인민위원회의 자치를 인정했고,

미군정은 일제의 거대한 관료제를 부활시켜서, 인민위원회를 완전히 탄압했다.


이를 가지고 '소련군은 해방군, 미군정은 점렴군'이라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솔직히 굶주린 거지꼴의 소련군은 한반도에 들어오자마자 강간과 약탈을 일삼았기에,

깔끔하고 초콜릿을 마구 나눠주던 미군에 비해서 인기가 없었다는 점은 간과한 것이다.


미군정은 싫어하지만 미군은 좋아하고,

소련군정은 싫어하지만 소련군은 싫어한...

결국은 둘 다 외세였고 완벽히 환영받은 쪽은 없었던 것이다.


미군정과 하지의 선택 기준은 초지일관 하나였다.

'반공/친미' 미국에 이익이 되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통일, 독립, 해방, 혁명 등의 가치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고,

친일파든, 아니 심지어 일본인들이라도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면 손잡았다.

그렇기에 이승만이 사고를 쳐도 묵인했고, 무고한 시민들이 탄압받아도 외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인단, 인민위원회를 인정하고 자율성을 보장하는 듯했지만,

결국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김일성을 밀어주기 위해서 중앙집권화시켜버린다.


토지배분, 노동법 개정, 남녀차별 금지 등

혁명적인 일들을 이루어내지만 이는 북한 인민들의 힘이지, 소련이 만들어준 것은 아니였다.


역으로 북한이 이렇게 빠른 속도로 개혁에 성공해가면서,

오히려 미군정의 입장은 난처해지고 친일파들이 득세를 하면서,

민중들은 섣불리 봉기를 일으켰다가 그나마 있던 힘까지 잃게되고 사회는 극도로 우경화되어버린다.


결국 소련과 미국은 처음부터 분단을 생각한 것도 아니였고,

갑작스럽게 38선을 만들게 되었지만, 그게 그대로 냉전 강대국의 대립으로 이어져버린다.


출발은 루즈벨트의 4개국 신탁통치(미국, 중국, 영국, 소련)아이디어였지만,

약 40여년의 일제시대의 사회경제적 영향으로 좌경화된 한국 사회 분위기와 맞물리게 되었고,

좌우로 갈라진 민족 지도자들과 생존을 위해 몸부리치던 친일파들, 독재를 꿈꾸던 야심가의 등장도 있지만,

결정적으로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강대국들의 이권과 연결되면서 자연스럽게 분단으로 흘러가게 된다.


+


분단이라는 최악의 상황만은 막으려고 노력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좌우 이념 대립보다는 조국의 독립과 해방이 가장 큰 목표였던 사람들이다.


여운형, 김원봉, 조만식... 그리고 김규식, 김구, 김두봉


앞의 3명은 처음부터 좌우 합작의 필요성을 강하게 외친 사람들이고,

뒤의 3명은 뒤늦게 분단만은 막아보려고 좌우 합작을 이야기한 사람들이다.


일제 해방 시점에 건준을 만들고 인공을 이끌었던 여운형은

이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었고, 어떻게 보면 분단을 막을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대안이였다.


그는 건준을 만들 때부터 좌익과 우익을 가리지 않았고,

김성수나 송진우 같은 보수 세력과 박헌영 같은 공산주의자까지 모두 포괄하는 정부를 구상하고자 했다.


그는 대중적인 지지에서는 가장 선두에 서있으면서도

이승만처럼 자신이 대통령이 되야한다고 우기지도 않았고

우익(한민당), 좌익(박헌영)과 끝없이 대립하며 가시밭길을 걸어갔었다.


한민당은 그를 빨갱이이며 친일파로 몰아세우려고 했지만,

미군정의 하지도 좌익으로 분류된 인사중 여운형만은 인정을 했고 그와 좌우 합작을 고민하기도 했다.



서울의 여운형, 평양의 조만식이 있었기에,

미군정과 소련군정의 입김만 없었다면 진정한 해방과 독립이 가능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은 자신들의 이권이 더 중요했고,

가만히 놔두면 진짜 완전히 독립된 사회주의적 국가가 탄생할 분위기였기에,

결국 자신들의 입맛에 가장 맞는 이승만과 김일성이라는 야심가를 선택하게 된다.


이승만의 경우에는 워낙 사고를 많이 쳤기에 미국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카드를 생각하던 미군정에게 송진우, 여운형, 김구 등이 차례로 암살당하면서 사실상 대안이 없었다.


이런 면에서 보면, 미국이 굉장히 밉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름 최선을 다해보려는 노력을 하기는 했던 것같다.


아무 생각없이 친일파와 손잡았다고

마냥 욕하기에는 미군정의 상황이 너무 안좋기는 안좋았다.

(물론 그렇다고 칭찬받거나 인정받을 수준은 아니고, 그냥 정상참작 정도의 수준?)


브루스 커밍스는 북한 내부 사정을 명확하게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우익였던 조만식, 중국통인 김두봉보다는 역시 소련통인 김일성을 밀어줄 수 밖에 없었다.


만약 진짜 자율로 놔두었다면, 민족주의자 조만식이 계속 강세를 유지했겠지만,

조만식은 제거되었고, 김일성은 자발적이던 인민위원회를 중앙정부의 일괄된 통치 하에 정비해버린다.

(상황이 원하는대로 돌아갔기에 미군정처럼 강하게 나가지 않았지, 결국 소련도 똑같이 자국의 이익을 추구했다.)


+


그렇다면 어짜피 누가 뭘했어도

미국과 소련때문에 분단은 피할 수 없었을까?


동유럽이나 터키, 일본 등 당시 미국과 소련의 관심사에서

한반도는 사실상 우선순위에서 밀렸기에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미국과 소련이 분할점령에 대한 논의를 몇 개월만에 한 번씩만 할정도로 사실상 우리는 변방이였다.)


자신들의 이권에서 한 발 물러나서 분열되지만 않았어도,

좌익이나 우익이나 이념 존쟁으로 흘러가지만 않았어도 가능성은 존재했다.


김구 같은 인물도 해방 초기에는 극우파로 분열을 조장했던 것을 보면,

같이 쟁점의 중심에 있던 김성수, 박헌영, 이승만 같은 인물들 역시 큰 그림을 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송진우, 조만식(감금), 여운형, 김구, 김원봉(월북)같은 인물들이 차례로 제거되면서, 

자신의 이권보다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외치는 사람들은 완전히 힘을 잃어버리게 된다.


어떻게 보면 마지막 희망이 될 수 있었던 사람들인데...


김구, 김규식, 김두봉, 김일성이 막판에 만나기는 했지만

어찌보면 그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기에 돌이킬 수 없었던 것 같다.

(이 만남을 대놓고 욕했던 이승만은 진짜 해도해도 너무한 이기주의자인 것 같다.)



당시를 살지 않았던 내가 

그들의 행동을 섣불리 판단하기에는 너무나 교만할지 모른다.


솔직히 나라면 내 이념과 이권을 내려놓고 

분단만은 안된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까?


브루스 커밍스는

행정조직과 자금을 가진 우익과 지방의 강한 조직력과 대중의 지지를 가진 좌익에 비해

중도파는 아무것도 가진 것도 없었고 세력이 너무 부족해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이 이야기도 설득력있다.

어찌보면 중도파의 길을 간 사람은 이상주의자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중도파가 아무리 노력을 했어도

결국은 소련과 미국에 의해서 분단은 피할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도 끝까지 노력했던, 

여운형과 김원봉, 김구과 김규식, 조만식이라는 인물들을 내가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특히, 극우였던 김구가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분단을 막으려고 했던 부분은 진짜 감동이다.)


+


아쉽게도 2권은 한국어로 번역된 것이 없다고 한다.

특히 2권의 내용은 소련의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많은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책 내용 자체가 무지 길고, 박명림 교수가 반박한 내용도 대부분 2권의 내용이라고 한다.)


일단, 어쩔 수 없이 1권(1945년 ~ 1947년)밖에 읽지 못했지만,

기회가 된다면 2권과 박명림 교수의 <한국 전쟁의 발발과 기원>은 꼭 한 번 읽어봐야겠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국내도서
저자 : 박명림
출판 : 나남출판 2008.05.10
상세보기


열린 공동체 사회 Books/정치/역사 건국준비위원회, 건준, 김구, 김규식, 김두봉, 김성수, 김원봉, 김일성, 루즈벨트, 미국, 박명림, 박헌영, 반공친미, 브루스 커밍스, 소련, 송진우, 스탈린, 신탁통치, 여운형, 이승만, 인공, 인민공화국, 조만식, 트루먼, 하지, 한국 전쟁의 발발과 기원, 한국민주당, 한국전쟁, 한국전쟁의 기원, 한민당, 함석헌

[한국현대사의 이해 ②] 식민지 시대의 이해

2014.03.19 20:03


시카고 대학교 석좌교수인 브루스 커밍스는 

그의 대표저서 <한국 전쟁의 기원>에서 일본 식민지 정책의 특징을 플라톤적 식민주의라고 설명한다.


메이지 유신으로 산업화를 맞이한 일본은 

강대국과의 경쟁을 위해서 방어적 목적으로 식민지 경영을 시작했고,

강대국과의 경쟁을 피하기 위해서 일본 본토 가까이를 중심으로 식민지를 개척해서 다른 국가들보다 더 밀착해서 수탈했다고 한다.

(아는 놈이 더 무섭다고... 나쁜 놈들...)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서

한국의 상층 계급 내의 긴장을 조성해서 일진회같은 친일조직을 동원했고,

국권이 넘어가고 연금 혜택을 받은 관료만 3,645명에 귀족이 84명이나 됐다고 한다.


식민지 시절 초반에는 군인 출신의 총독이 자체적으로 통치를 했으며

일본의 천황에 대해서 책임만 지는 형태로 운영되었으나, 1919년 3.1운동은 모든 것을 바꾸었다.


1919년 전후로 일제의 통치방식이 어떻게 바뀌는지는

뉴스타파 김진혁PD가 제작한 미니다큐에 굉장히 잘 설명되어있다.




문화 통치이후, 일본은 강력한 동화 정책을 실시하는데,

외형상 비슷하게 생긴데다가, 조선 사용 금지, 창씨 개명뿐만 아니라 역사마져 새롭게 써버린다.


특히나 민족간의 이간질을 시키기 위한 분할통치 정책

한국인들끼리 적대 의식을가지게 만드는 교묘한 술책이였고,

한국인 관리들은 한국인들과 멀어질수록 댓가를 받지만, 신분 상승에는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똑같은 업무를 해도 일본인보다 돈을 못받고, 경찰, 전쟁포로수용소 간수 등 갈등 유발 업무는 한국인이 맡게된다.)


+


산업적인 측면에서의 수탈도 만만치 않았는데,

일제는 원활한 수탈을 위해서 철도와 교통시설을 확충시킨다.



당시 중국과 대만 등 다른 식민지보다 월등히 철도의 보급률이 높았던 것은 사실이며,

이는 이후 한국의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근거가 되기도 하지만

만주까지 이어진 이 철도로 인해서 물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착출되어서 이동하게 된다.


한국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세계경제에 통합되어버렸고,

인력과 물자의 수탈뿐만 아니라 산업구조까지 모저리 망가져 버리게 된다.

친일을 하지 않으면 기업을 운영할 수도 없었고, 공업 및 금융업은 일본인들이 점령해버렸다.


이렇게 이식되어버린 자본주의는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게 되고,

해방 후 진정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뭔지도 모른 체 혼란의 시기를 겪게 된다.


당시만 해도 철저한 농촌사회였지만 일제의 수탈과 지주 계층의 횡포로

수많은 사람들이 소작농 생활을 견디다 못해서 노동자로 나오거나 일제에 착출당했고,

일본에 약 400만명, 만주에 약 200만명 정도가 끌려가서 일정기간 동안 노동을 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렇게 끌려갔던 사람들은 주로 광산 노동같은 위험한 업무에 투입됐으며,

갱내 작업 같은 업무의 60~70%는 한국인이 담당했고, 이렇게 인력을 착출하는 업무는 한국인들이 맡게 되었다.


<사진출처: 오마이뉴스>


문제는 이렇게 고향에 다시 돌아온 사람들이

경제적 손실뿐만 아니라 사회적 위치의 하락을 경험하게 되었고,

자의식과 한계적 존재성을 인식하게 되면서 주로 좌익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해방 후에 새로운 갈등의 씨앗이 되어버린다)


+


또하나의 특징 중 하나는 일본인의 한국 내 이주민의 숫자이다.


인도에 주재한 영국인의 숫자는 약 6000명이였고,

베트남에 주재한 프랑스인의 숫자는 약 28000명 정도였다.


이를 해양형 제국주의와 대륙형 제국주의라고 구분하는데,

이렇게 많은 인원들이 이주해갈수록 착취는 더욱더 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에서 한국으로 이주해 온 일본인의 숫자는 약 60만명으로,

일본은 완전히 밀착해서 한국을 철저히 종속시키고 영구적으로 지배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중일전쟁을 계기로 수탈은 더욱더 심해졌으며,

진주만 공격 이후로는 동네 어귀까지가 아니라 집안까지 들이닥쳐서 놋그릇까지 뺏어갔다고 하니...


더군다나 얄미운 것은 이렇게 수탈을 해놓고서 철수할 때는 더 악랄하게 철수를 진행한다.


일본인들은 모든 문서를 소각하고

화폐발행을 남발해서 은사금을 친일파들에게 나눠주고 재산을 팔아서 철수 자금을 마련한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한국경제를 거의 마비시켜놓고 도망가버렸고,

심지어는 미군과 접촉해서 공산주의의 잔인성을 부각시키면서 행정직의 고문으로써 한동안 거주한 자들도 있다.


또한, 식민지 시대 말기 상당수의 지식인들을 강제로 친일 행각에 동원함으로써,

해방 이후 이들이 극우파로 몰리게 되면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역사에 크나큰 상처를 남기게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진짜 한 마디로 더러워도 너무 더럽게 식민지 지배를 당한 것이다....


그 덕에 해방된지 70여년이 된 지금까지도 아직도 친일 청산이 안되고,

그 후유증으로 위안부 문제라든지, 친일파 후손의 문제뿐만 아니라 역사 왜곡까지...


아직도 직접적으로 해결 안 된 문제도 산떠미 같은데,

일제의 잔재가 남긴 상처들이 사실상 분단과 독재 정권의 씨앗이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진짜...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사진 출처: 한겨레 신문>

열린 공동체 사회 Books/정치/역사 김진혁 PD, 뉴스타파, 동화 정책, 미니다큐, 분할통치 정책, 브루스 커밍스, 식민지 근대화론, 식민지 시대, 역사를 잊은 민족, 위안부, 친일파, 플라톤적 식민주의, 한국 전쟁의 기원

민주주의 좌파, 철수와 원순을 논하다 - 조희연(2012)

2014.03.08 16:43
조희연...
솔직히 난 성공회대에 들어오기 전까지 그 이름을 몰랐다.

워낙 이쪽 분야를 몰랐기도 했고,
조희연 교수가 전면에 나서서 대중적으로 활동해온 사람은 아니였던 것같다.

근데, 이 쪽 바닥에 오래있던 사람들은,
성공회대 다닌다고 하면 다들 조희연 교수 수업은 들어봤냐고 물어본다.

그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야기했다.
"참여연대는 조희연의 브레인과 박원순의 실행력이 만난 결과이다."

무슨 대단한 사람인가 찾아봤더니,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이고 NGO대학원장이였다.
진보 색깔로 유명한 성공회대에서도 간판이라고 불리는 학자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의 색깔 논쟁에서는 크게 주목받은 적은 별로 없었다.

활발한 저술활동에 비해서 직접적으로 정치권에 발을 담그지 않았기에,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재야의 지식인이기에 크게 대중에게 부각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

조희연, 조효제, 김동춘...
이 분들 수업 정도는 졸업하기 전에 꼭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마지막 논문학기 무리해서 수강신청을 하고,
교수님 수업을 듣게 되서 너무 기쁘다며 메일까지 썻는데 답이 없더라니...

이런 제길....
서울시 교육감 출마로 인해서 수업이 바뀌고 말았다....

처음에는 갑자기 왠 교육감인가 싶기도 했는데...
최근에 책도 내시고 하신 것을 보면 나름 고민을 많이해오셨던 것같다.

곽노현과, 김상곤의 전례를 거울 삼아서,
꼭 당선되어 좋은 정책을 만들어내길 기대하는 수밖에...

+

민주주의 좌파, 철수와 원순을 논하다
국내도서
저자 : 조희연
출판 : 한울 2012.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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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마음에 출마 선언 후 출간한 책 이외에 
가장 최근에 출간하신 책을 찾아보니 2012년에 출간하신 이 책이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진보 진영에서 이렇게 이 분을 띄워주는지...
(물론 대중들은 대부분 조희연이 누구인지 아직도 잘 모른다.)

일단, 가장 실망한 점은 책을 좀 어렵게 쓰신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이미 본인도 알고 계신듯, 책에 대놓고 자신의 단점으로써 써 놓으셨다.)

하지만, 책에서 확실히 솔직 담백한 성격이 느껴졌고,
자신의 단점을 너무나 명확히 잘 알고 이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 내 취향에 맞았다.

반면에 자신의 생각은 명확했고, 시대를 보는 눈도 일관되었다.

특히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박원순의 당선과 안철수의 부각으로 뭔가 될 듯해서 들 떠있던
2012년 쓰여진 책이지만, 굉장히 현실을 냉정하고 명확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재미있는 점은 이미 서문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해놨고,
서장에 들어가면 이를 좀 더 자세히 진짜하고 싶은 이야기까지 다해놨다는 점이다.
(아예 책에 '서장만 읽는 사람들도 존재할 듯하니 이왕 여기서 다 설명한다' 라고 써놨다.)

사람들의 기본 심리까지 대충 파악하고 있다니...
재미있는 사람이다~ 이 분 수업을 못들어본다는 것이 너무나 아쉽다.

+

조희연 교수는 한국 사회를 상이한 두 주체가 각축하고 있다고 가정하고 있다.

거대한 기득권 세력과
'대단히 높은 수준의 평등주의적 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민주화와 민주정부에 실망한 대중

흥미로운 분석이였다.
진보와 보수의 대결이라는 정치인들의 이분법적 사고와는 사뭇다른 접근~

그것도 단순한 기득권과 대중의 갈등이 아니라,
한쪽은 거대한 기득권이며, 한쪽은 대단히 높은 수준의 평등주의적 의식을 가진 실망한 대중이였다.

대중에 대한 이 독특한 표현에는 많은 의미가 포함되어있었다.
기득권 세력이 주도권을 가지고 가기에는 대중의 수준이 너무 높고,
반대로 반독재 세력은 독재와의 싸움에서 선전했지만, 신자유주의적 변화에 무력하게 무너졌기에 대중은 실망했다.

정치인들은 정치의 중심에 진보와 보수의 이념을 중심에 두고 있지만,
조희연 교수는 대중을 중심에 두고 이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통해서 사회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우둔한 대중을 어떻게 이용해 여론을 만들어갈지 고민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접근이다.
보수가 정권을 잡고도 전횡하지 못하는 것과 진보가 신뢰를 잃은 현실을 짧은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조희연 교수는 2008년 이명박 정부의 신보수정부의 출범 이후를
포스트 민주화시대라고 규정하고, 앞으로 보수적 발전이 될지 진보적 발전이 될지 미지수인 상황이라 설명한다.

1987년 민주화 체제를 구축한 후 20년이 지나면서,
반독재세력의 핵심과제는 민주적인 개혁이였고, 정치적으로 민주성과 투명성은 상당히 높아졌다.

하지만, 글로벌 신자유주의를 배경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경쟁 프레임은, 
자본/시장/기업 권력은 시장원리를 확산시켜 나가면서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켰다.

민주 항쟁에 참여한 반독재세력은 정치 개혁에 대해서는 국민적 합의를 이루었지만,
자유 무역, 세계화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잘 모른체 전면적인 개방노선에 참여하면서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에 기대했던 신성장의 방식이
근본적인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면서 현존하는 체재에 순응하는 지배적 프레임이 균열된다.

이 포스트 민주화 시기에 나타나는 다양한 도전을 조희연 교수는 3가지 정치성으로 설명한다.

첫번째는 민주주의 후퇴에 대한 반 MB정서
두번째는 사회경제적 모순을 극복해보려는 반 신자유주의 투쟁
세번째는 정보화와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새로운 모순에 대한 다양한 저항들

쉽게 이야기하면,
정치적 투쟁, 경제적 투쟁, 그리고 제 3의 투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치적 투쟁의 대표적인 것이 나꼼수 현상이고,
경제적 투쟁의 대표적인 것이 노동 운동의 재조명이라면, 
제 3의 투쟁의 대표적인 현상이 바로 안철수와 박원순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 제3의 정치성에 주목하고 있다.

+

정치적 투쟁과 경제적 투쟁은 이전부터 있었던 현상이라면,
제 3의 정치성은 이전의 프레임으로 포괄되지 않는 영역이다.

기존의 정치이념적 측면에서 보면 비판적 자유주의에 해당되며,
다원성과 개인의 자유와 자율에 대해서 일정한 급진적 옹호까지 포함하고 있는 영역이다.

반권위주의적이고, 공정성과 자율성을 강조하며
정치와 사회경제적 해방에서 더 나아가 사회문화적 해방의 동력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제 3의 정치성에 대한 가능성은
바로 안철수 현상이라는 새로움에 대한 기대로 여실히 드러났다.

정치적 민주주의 퇴보에 대한 저항(제 1정치성)과
사회 경제적 민주주의로의 전환에 대한 요구들(제 2정치성)과 혼재되어 등장했지만,

다양한 영역에서 개인의 자유와 자율, 탈권위주의, 공정을 지향하는
급진적 민주주의의 확장은 제 3의 정치성으로써 새로운 민주주의 운동의 형태라는 설명이다.

이는 제도 정치(선거, 정당, 의회) 이외의 영역에서
대중의 직접 행동, 사회 운동 등의 정당이 아닌 다양한 정치 활동으로 나타나게 되고,
이러한 제도정치에 대한 불신들은 역설적으로 정당을 혁신하게 만드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조희연 교수는 제도 정치의 한계를 지적하면서도,
비제도정치가 어떻게 제도 정치에 영향을 주어서 함께 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한다는 점이다.

서로간의 상호작용과 협력모델을 통해서 상생해야만
제도 정치가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고, 비제도 정치가 정치적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참~~~
너무나 당연하고 옳은 말씀이지만, 현실에서는 이걸 진짜 너무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정당들은 대중과 여론을 무서워하면서도 
어떻게든 사람들을 호도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쟁취하려고만 하고 있고,
비제도에 있는 사람들은 마치 정당과 손을 잡으면 영혼을 파는 것처럼 여기면서 협력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워낙 무게 추가 한 쪽으로 실리면서,
어쩔 수 없이 힘을 모으는 양상이 나타나지만 이는 진정한 연대보다는 
이기기 위한 야합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기에 총선과 대선에서 연이은 패배를 경험하고 말았다.

이 부분에 있어서 박원순이 가지는 상징성은 매우 중요한 것같다.

+

확실히 안철수와 박원순은 다르다.
그리고, 조희연 교수도 이 둘에 대한 평가는 굉장히 다르게 언급하고 있다.

박원순과 개인적 친분이 깊으니 당연히 그렇게지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조희연 교수가 단지 그런 부분에서 이 둘을 나눠서 평가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확실히 조희연 교수는 정치인보다는 지식인이기에,
안철수와 박원순 현상에 대해서 날카로운 시선으로 분석하고 있었고 나도 이에 상당부분 공감했다.

내가 보기에는,
안철수는 현상이라는 표현보다는 열풍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듯하다.
순십간에 달아올랐고 본인의 의사보다는 주변에서 더욱더 밀어붙인 것이 강한 것 같다.
시대의 열망인 것처럼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막판까지 고민하다가 어쩔 수 없이 끌려나온 듯했다.

누구와 결합할지, 어떤 현실적이고 정치적 선택을 할지 미지수인 상황에서
2012년 대선을 애매모호하게 마무리했으며, 결국 얼마전 민주당과 합당을 결정했다.
'새정치'라는 구호를 입버릇처럼 사용했지만, 합당을 통해서 결국 구호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나고 말았다.

이 책은 2012년 대선 전에 쓰여졌기에,
안철수에 대해서는 말을 좀 아끼는 모습이 보여졌고 사실은 구체적인 언급이 별로 없다.
그냥 안철수라는 인물이 부각된 이유에 대해서만 설명하고 있으며, 앞으로의 다양한 가능성도 열어 두고만 있다.

이 번 학기 수업을 들었으면, 
안철수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은 부분이 많은데, 굉장히 아쉽게 됐다.

이에 비해 박원순에 대해서는 상당히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박원순이 정치인으로 전면에 나서지 않았지만 시민운동가로 오랫동안 정치를 해놨고,
2012년 당시에도, 이미 시장에 당선되었기에 훨씬 더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가장 흥미로운 표현은 시민운동가 박원순과 정치인 박원순에 대해서는
확실히 분리된 관점에서 냉철한 비판의 자세로 권력을 감시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박원순은 대표적인 시민운동가였지만, 이제는 감시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조희연이 가장 경계하는 부분은 시민운동이 정치 세력화의 기반으로 공격받을 수 있다는 점이였다.

어찌보면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인물들의 정치 진출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고,
시민 운동 분야에서 박원순이라는 인물이 정치권에 진출한 것인데 이에 대해서
시민 운동이 정치적 중립성을 잃었다고 비난하는 것은 편협한 시각이라는 지적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솔직히 법조인, 언론계, 공무원 등도 모두 정치에 진출하면 안된다.)

하지만, 남겨진 사람들은 시민운동의 가치를 지켜야하며,
박원순은 더 이상 시민운동가가 아닌 정치인이기에 감시와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이기에,
어설프게 박원순에게 시민운동가의 모습을 기대하거나, 우리 사람이니까 봐주자는 태도는 경계해야한다.

+

참... 글은 솔직히 좀 어렵게 썼지만...
대부분의 설명은 너무나 명쾌하고 일목요연하기에 너무 재밌게 읽었다.

여기까지의 내용은 전체 책의 1/4에 해당하는 서장까지의 내용이지만,
책의 핵심 주제는 이미 다 소개한 듯하여 여기서 내용 소개는 여기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뒤에 이어서 나오는
현상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들과 정책들에 대한 구체적인 제안도 너무 주옥같지만,
그것까지 다 정리하면 이거는 뭐 답이 안나온다... ^^
(거의 책을 하나 새로 쓰는 수준이 될 듯)

조희연 교수의 강의를 못듣게 되서 아쉽기는 하지만,
이 정도의 내공을 가진 사람이 서울시 교육감이 되는 것은 사회적으로 필요해보인다~

이번 교육감 선거에서 꼭 선전하길 기대한다~~ ^^


열린 공동체 사회 Books/정치/역사 민주주의, 박원순, 서울시 교육감, 성공회대, 시민운동, 안철수, 제 3의 정치성, 조희연, 참여연대, 포스트 민주화시대

[한국현대사의 이해 ①] 한국사회의 특징 - 한홍구 (2014)

2014.03.05 22:53
달변가이신 한홍구 선생님의 깨알같은 강의...
혼자 듣기 너무 아까워서 매주 수업이 끝나면 간단하게 요약해서 소감을 같이 정리해보고자 한다.

완강까지 모두 정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Anyway 할 때까지는 해봐야지~~ ^^

첫 강의는 오리엔테이션으로 한국 사회의 특징을 4가지 정도 정리하셨다.

뭐 사전에 준비하신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냥 막 생각나는대로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한마디 한마디가 진짜 주옥같다~ ^^


1. 단일민족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누가 우리는 같은 단군의 자손이라고 말했으면, 불경한 이야기였다.

단군시조의 개념은 19세말 20세기초에 들어와서 생겨난 근대적 민족 관념이다.
물론, 단일 민족이라는 말이 나올만큼 동일성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하지만, 갑자기 단일 민족의 논의가 시작된 것은
일본과의 관계 정리 속에서 일본에서 주로 사용하는 용어를 사용해서 
우리 민족을 정체성을 지키고자 노력했다는 측면도 존재한다고 한다.
(당시 시대상을 생각하면, 참~ 재미있으면서도 지혜로운 대처였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요즘은 민족을 강조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이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단일민족은 1910년대에는 굉장히 진보적인 사고에서 출발한 것이였다.


2. 체제와 기득권 유지

우리 나라는 2000년 동안에 왕조가 3번밖에 안 바뀐 나라이며,
가장 짧은 조선도 500년은 거뜬히 넘긴다.

임진왜란에서 승전국(명나라)-패전국(애도막부) 모두 망했는데,
조선만은 그대로 살아남아서 300년은 더 버티었다. 

중국의 왕조의 기본적인 특징 중 하나는 정복왕조라는 점이다.
오랑캐가 들어와서 본토를 차지하고, 한족을 완전히 몰아냈다가 다시 완전히 밀려나는 것이 반복된다.

살아남았다는 것은 근본적인 개혁은 못했지만, 
지속적으로 개선을 해서 체재를 유지해왔는 것을 의미하면서도,
보수적인 토양이 굉장히 강하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한다.

현재 한국을 점령하고 있는 주요 성씨는 모두 신라에서 출발함 (대표적인 것이 김씨)

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갈 때 호족은 살아남고,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갈 때 권문세가들을 살아남고,
조선에서 일제로 넘어갈 때 양반들은 살아남고,
일제에서 대한민국으로 넘어갈 때 친일파들은 살아남았음 (오히려, 친일파 청산하자고 이야기한 사람들이 청산당함)
독재에서 민주화로 넘어갈 때 재수없는 몇 명만 처벌당함 (이근환)

대한민국의 기득권 세력은 1000년을 넘게 이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한 가정에서 여러번 과거 급제하기가 힘들었고, 
중국 황제의 힘이 가장 강했기에 기득권의 힘이 약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150년 정도 지난 이후에는 문벌에서 연이어서 과거에 급제하게 된다.

유럽에서는 장자 상속의 원칙을 유지하면서
첫 째가 모든 것을 가져가고 동생들을 고향에서 떠나서 살게 된다.

이에 비해서, 한국에서는 분할 상속을 많이 했다.
(조선 말에 장자 상속이 이루어지기는 했다고 한다.)
4대 정도만 내려오게 되면 재산이 분산되기 때문에 잔반(가난한 선비)으로 전락하게 되고,
그렇게 되니, 똥개도 자기 동네에서는 먹어주니까, 흩어지지 않고 모여살면서 집성촌을 이루게 된다.


3. 사상적 특징

유럽은 힘 쎈놈이 최고였고, 귀족은 무사의 전통이 존재했지만,
한국은 지식이 높은 놈이 최고였다.

변방 국가이기에
중국에서 유행한 것이 20년 정도 지나면 한국에서 유행하며,
한국에서는 동일한 사상이 2번씩 유행하는 특징이 나타난다.

교종 - 신라 시대 / 고려 전기&중기
선종 - 신라 말기 / 고려 말기
성리학 - 고려말 / 조선 중기


4. 조공제도

연개소문 죽은 이래 최고로 중국을 무시하고 있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데,
조공제도만 봐도 전통적인 중국과의 관계는 '천하관'에 기반한 철저한 주종관계였다.

심지어 명나라가 망하자, 소중화의 개념이 등장하는데,
자살한 명나라 마지막 황제의 제사를 300년동안 조선에서 지내줬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철저히 청나라는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며,
박제가 같은 북학파가 청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하지만 완전 무시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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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듣고 있었는데,
시간 다됐으니까 이정도에 마무리한다고 하시더니
바로 담 시간부터는 식민지 시대의 이야기를 한다고 하신다...

현대사가 주제이기에 가볍게 다룬다고 하시면서,
약 2000년의 역사를 이렇게 깔끔이 끝내버리시다니...

조선은 나라마 망할 때도 더럽게 망했다고 하신다.
나라가 망하냐 살리느냐의 갈림길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어짜피 망할텐데, 어떻게 망하냐를 가지고 논의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나라가 망하는데, 싸워서 망한 것이 아니라 도장찍어서 망했고,
고종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그냥 나라를 일본에 내주고 말았다.

망할 때 더럽게 망하니까,
조선 왕조의 부활이 제대로 논의된 적이 거의 없다.

참... 부끄러운 이야기다.

고종은 왕에서 황제로 자신의 신분을 바꾸기는 했지만,
어짜피 그의 존재감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고종에 대한 재평가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이런 점만 놓고 봐도, 나름 노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종이 잘했던 왕은 절대 아닌 듯하다.

그러면서, 담주에는 
일본에게 더럽게 식민지 생활한 이야기를 해주신다고 한다.
바로 옆의 나라에게 그것도 생긴 것마져 비슷하게 생긴 놈들에게 지배당한 것이 얼마나 서글픈지...

벌써부터 담 주 강의가 기대된다.

암튼...
이 번 학기 강의~ 
한홍구 교수님의 책을 처음 만났던 그 설레임이 다시 살아나는 듯하다~ ^^

대한민국사 세트
국내도서
저자 : 한홍구
출판 : 한겨레출판 2006.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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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공동체 사회 Books/정치/역사 기득권 유지, 단일민족, 분할상속, 성공회대, 장자 상속의 원칙, 한국 사회의 특징, 한홍구, 현대사

대한민국사 - 한홍구 (2006)

2013.12.19 08:42
대한민국사 세트
국내도서
저자 : 한홍구
출판 : 한겨레출판 2006.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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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교수의 <한국 현대사 산책>과 함께

한국 현대사에 대해서 집중 조명한 대표적인 추천도서


강준만 교수의 책이 18권이라는 방대함에 비하면

이 책은 4권이라는 장점이 있으나~


역사를 시간의 흐름에 맞춰서 차근차근 알고 싶다면

강준만 교수의 책을 먼저 읽어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한홍구 교수의 책은 한겨레에 연재한 글을 모으다보니,

시간의 흐름보다는 에피소드나 주제별로 다루고 있다.


강준만 교수가 차분히 옛날의 이야기를 설명하고 있다면,

한홍구 교수의 책은 굉장히 필자의 감성이 느껴지는 사설에 가깝다.


특정 주제에 대한 작가의 견해가 매우 강하게 담겨 있기 때문에,

현대사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어보는 사람이라면 굉장히 부담스러울 수 있다.


현대사에 대한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은 사람이라면

한홍구 교수의 견해는 오히려 현실을 왜곡해서 이해할 수도 있다.


한홍구 교수의 책은 역사적 사실과 역사학자의 견해가

혼합되어 있기 때문에 사건에 대해서 너무 편향적으로만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냥 드라마틱한 현대사 이야기를

 강준만 교수의 책을 통해서 큰 그림을 충분히 이해한 다음에,


특정 주제나 에피소드와 관련된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한홍구 교수의 책을 통해서 더 심도있게 생각해보면서 읽는 것이 좋을 듯하다.

 

+


대학생 때 강준만 교수의 책을 읽고 충격이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현대사의 이야기들이 너무나 새로웠고~

이러한 일들이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너무나 비상식적인, 근대 봉건국가에서나 일어날말한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강준만 교수는 특징이 항상 각주를 통해서 자료의 출처를 밝히는데,

가장 많이 인용되는 사람이 바로 한홍구 교수의 자료들이었다.


그래서, 난 한홍구 교수가 아주 나이가 많은 저명한 역사학자일줄 알았으나...

오히려 강준만 교수보다 3살 어린 1959년생의 전형적인 386세대였다.


언젠가는 한홍구 교수의 책을 읽어보리라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2012년 대선을 통해 쏟아져나오는 생전 처음 듣는 현대사 이야기를 들으면서

현대사에 대한 인식을 재정리하고 싶어졌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강준만 교수의 책도 60년대까지 밖에 못 읽었고,

강준만 교수의 책에 대해서 비판도 많은 것이 사실이기에...


그래서 이 번 기회에 맘 잡고 한홍구 교수의 책을 읽어보았다.


한홍구 교수의 책에 대해서는 너무 이념편향적이라는 비판도 많다~

하지만, 그 누구도 어떠한 근거나 사료를 가지고 비판한 사람은 없다.

그냥 빨갱이다~ 좌편향적이다~ 라고만 욕을 할 뿐......


하지만 비판다운 비판을 하지 못할꺼면, 

그냥 입을 다 물고 있는 것이 좋은 듯하다.


(책을 썼을 때의 한홍구 교수는 수염이 없어서 그런지 사뭇 젊은 시민운동가 같다)


+


한홍구 교수의 통찰력과 역사를 분석하는 능력에

이 것이 진짜 학자다운 풍모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특정 부분에서는 공감할 수 없는 것도 있었고,

어느 부분에서는 '이 사람이 역사학자 맞아?' 할 정도로 감성적이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진실에 대한 열정,

그리고, 역사학자로써의 중심을 잃지않으려는 자세는 

존경할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그냥 사료만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건들과 사료들을 통해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시사점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역사가 단지 지나가버린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와의 대화'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어준다.


잊혀지고, 왜곡되고, 때로는 숨겨진...

특정 세력을 위해서 누설해서는 안되는

절대로 전해지지 않는 이야기들이 생생하게 살아있기에~


왜 국방부가 불온서적으로 선정했는지~

왜 보수세력에서 이 책을 그렇게 싫어하는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최근 한홍구 교수의 사진을 보면 수염때문인지, 왠지 역사를 연구하는 아저씨 같다)


+


한홍구 교수는 단지 흘러지나간 역사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병역 관련 문제

사학 재단 문제

사법 개혁 문제

언론 개혁 문제

정치 개혁 문제

일재 잔재 문제

남북 관계 문제


아직도 정리가 되지 않은 현대사의 상처와 문제들을

다시 한 번 수면위로 올려버린다.

(안타깝게도 책이 나온지 5년이 지났지만 해결된 문제는 전혀 없다.)


솔직히 1권을 읽을 때는 와~~ 하고 읽었는데...

뒤로 갈 수록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저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슈일수록 심하다 - 특히 병역문제)


아무래도 연재물을 책으로 엮다보니 생긴 현상인듯하고~

3년이라는 집필기간이 있어서 그런지, 시간이 지날 수록

저자의 필체도 사뭇달라지는 경향이 나타난다.

(역시나 1권이 가장 공격적이고, 현실에 대한 비판도 매섭다~)


하지만, 이 연재물이 노무현 정권 때 진행된 걸 생각하면,

다시 시리즈를 연재한다면 더욱 더 심하게 현실을 비판할 꺼란 생각도 든다.


+


한홍구 교수가 그렇게 싫어하던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것도 박근혜 개인의 능력이 뛰어난 것보다는

아버지의 후광과 기득권 세력의 폭발적인 지지에 힘입어...


역사학자의 입장으로써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선택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여러가지 여건들을 고려했을 때 충분히 가능한 선택이었다.

(국민의 선택이 100% 옳았다는 의견는 아니다.)


물론 이 결과는 5년이 지난 후에나 명확하게 나오겠지만...


하지만, 박근혜 당선자가~

이 역사학자의 경고와 통찰들을 모두 무시한다면~


아버지 박정희에 이어서

대를 이어서 혹독한 역사의 평가를 받아야만 할 것이다.

(오히려 못할 경우 아버지 박정희까지 다시 한 번 역사의 재조명을 받을 것이다.)


인수위 단계부터 벌써부터 레임덕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제발~ 부디~~ 힘들어하는 국민들을 위해서라도~~


박근혜 당선자여!!!

향후 5년간 멋진 대통령이 되어주길 바란다...



열린 공동체 사회 Books/정치/역사 강준만, 남북 관계, 대한민국사, 병역, 사법 개혁, 사학 재단, 일재 잔재, 한국 현대사 산책, 한홍구

30대 정치학 - 김종배 (2012)

2013.12.19 08:36
30대 정치학
국내도서
저자 : 김종배
출판 : 반비 2012.09.17
상세보기


이 책은 정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회, 경제, 정치, 문화적인 측면에서 세대에 접근 하고 있다.


저자도 핑계 삼아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 책은 30대에 대한 연구가 그동안 미비했기 때문에,

대략 평균적으로만 내용을 다루고 있지 디테일에는 약하다고 이야기한다.


386세대와 88만원 세대의 중간에서

상대적으로 정치적으로는 소외된 세대였기에 의미는 있어 보인다.


저자가 여기서 말하는 30대는 1970년대 생을 이야기한다.

그의 핵심 주장은 현재의 30대는 가장 진보적인 세력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처음부터 30대는 진보적이지 않았다.

근데, 시대적 환경과 여러가지 요소들이 그들을 진보적으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70년대는 경제에 있어서 시대의 풍파를 겪은 최악의 세대다.


이들은 20대 초반에는 열심히 놀았지만,

20대 후반에는 IMF 여파로 갑자기 취업 대란을 겪게 되었고,


겨우 자리잡아 30대가 된 이후에는

2002 카드 대란, 2006 부동산 대란을 겪으면서 풍파를 겪게 된다.

세대 간의 양극화가 아닌 세대 안에서의 양극화를 경험한 세대


대한민국의 경제적 아픔에 전면으로 맞서고 있는 세대이다.


386세대는 정치에 대해서는 정면에서 싸웠지만,

사실상 경제 발전의 혜택을 받은 세대이다.


20대에는 졸업만 하면 오라는 곳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었다.

30대에가 된 이후에는 열심히 모으면 집도 살 수 있었고 안정적 자산 구축이 가능했다.


70년대 생은 또한, 88만원 세대와는 또 다르다고 주장한다.

이유는 아직까지 88만원 세대는 경제적 독립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산 계층이 아니라 아직까지는 소비 계층이기 때문에 경제 현실감이 아직 떨어지고,

아직까지는 학생이기에 세대 안에서의 양극화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


정치-문화적인 측면에서보면,

70년대 생은 정치적 참여에서도 386세대와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70년대생은 전형적인 탈정치화 세대였다.

솔직히 90년대 대학가는 정치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각 대학의 가장 인기 있는 학과도 법대에서 경영학과로 서서히 움직였다.

(내가 다닌 중대 광고홍보학과는 90년대 중반 서울대 경영학과보다 커트라인이 높았다.)


99학번인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선배들은 우리를 불쌍하게 봤다.

IMF 이후 98학번부터 학교 분위기가 달라졌고,

학부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99학번부터는 대학의 분위기가 180도 바뀌기 시작했다.

선후배간의 유대 관계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대학만의 고유 문화가 사라졌고, 대중 문화 속으로 서서히 편입되어 버렸다.


실제로 내가 있던 하숙집의 형들만 봐도~

맨날 스포츠, 게임, 여자 이야기만 하면서 수업도 잘 안들어갔다~

시험기간에 도서관에 다니는 날보면서 굉장히 신기하게 여기었고~

학부제의 피해자라는 안스러운 눈빛으로 날 쳐다봤었다~


그러던 70년대 생들은 오히려 뒤늦게 정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2002년 노무현 당선

2004년 탄돌이 열풍

2007년 노무현 서거

2008년 광우병 사태


386세대는 잡혀갈까봐 발발떨면서 데모를 했엇지만,

70년대생은 수백만의 시민과 함께 연이어 승리를 이루던 세대이다.

(광우병 사태에 대해서도 이명박 대통령의 사과를 받아내기는 했었다.)


386세대가 주축이 된 2002대선 노사모 때만해도

굉장히 진지하게 접근했었다고 한다.

게시판만 봐도 논문형식의 장문의 글들이 줄줄이 올라왔다.

비분강개한 태도로 시대를 바꾸고, 투쟁해야한다는 의견이 넘쳐났다.


하지만, 70년대 생의 본격적인 정치참여가 시작된 이후 트렌드가 바뀌었다.

정치를 가지고 놀기 시작한 것이다.

정치 참여 양상이 온라인 게임 양상으로 나타내기 시작했다.

게임 캐릭터를 고르듯이 정치인을 선택하고, 그와 함께 놀기 시작한다.


정치인에 대한 팬덤 현상이 등장했고,

정치가 하나의 놀이 문화와 게임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980년대에는 거리로 나와서 대자보에 글을 쓰고, 짱똘을 들 때,

2000년대에는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쓰고, 촛불을 들기 시작 했다.


이것이 이들만의 독특한 선거 참여 문화이고,

젊은 층이 참여하는 선거운동의 대세가 되고 있다.


+


미디어 활용에 있어서도

디지털 1세대답게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인터넷 시대로 바로 진입한 88만원 세대와 다르게

PC통신이라는 독특한 매체를 통해 인터넷 시대를 개척했고,

SNS를 활용한 선거운동에서도 가장 앞장 선 세대이다.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점은 

30대의 SNS 이용 특징 중에

상대적으로 트위터 활용도가 매우 높고,

주로 다루는 메세지도 정치 사회 이슈가 대다수라는 점이다.


이 중 45% 가 기존 미디어의 뉴스를 RT하지만,

42% 가 트위터에서 스스로 자체 생산한 메세지 RT한다는 점이다.


기존 미디어를 유통하는 수준이 아니라,

새로운 메세지를 생산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


그런데 또한 흥미로운 점은 투표율 역시 제일 낮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 저자는 핵심 정치 구호가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1980년대 386세대의 모토는 직선제 개헌

2010년대 88만세대의 모토는 반값 등록금


30대를 관통하는 정치적 목적은

너무나 나열식으로 많기만 하지 핵심이 없다고 이야기를 한다.


온라인 상에서 말은 가장 많이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는 투표는 안한다?


이 이야기는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그것을 통채로 꽤뚫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의미도 된다.


그래서 투표장에 나오게 하는 동기 부여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가장 큰 이슈인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


저자는 30대를 의식화된 진보성이 아니라 정서에 의한 진보성이라 규정한다.


글쎄...

이 말에 30대가 좀 서운하게 들을 수도 있기는 하지만,

삶의 의한 문제 의식은 있지만 구체적인 사상이나 구체성은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긴 하다.


70년대생들이 세상이 잘못됐고, 바꿔야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정작 어떻게 바뀌어야하는지에 대해서는 진지한 고민은 없어 보인다.


진짜 흥미로운 점은 이 책이 대선 전에 나왔다는 것이다.


70년대 생은 어찌보면, 처음으로 대패를 겪었다.

그것도 2012년에 총선에 이은 2연패이다.

그리고 반드시 이길줄 알았던 선거에서 질 수 없는 패배를 했다.


정치적으로 보면, 처음으로 격는 극식한 좌절감이다.

과연 이들은 이후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좌절을 겪고, 실망한 나머지 정치에 대해서 관심을 끊어버릴 것인가?

아니면, 이 좌절을 계기로 단순히 놀기만 하던 정치에 진지한 태도를 보일 것인가?


대한민국의 선거 문화를 변화시켜 온 이들이~

이제는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의 정치지형을 변화시켜보길 기대해본다.





열린 공동체 사회 Books/정치/역사 30대, 386세대, 70년대생, 88만원 세대, 김종배, 오마이뉴스, 이털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