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다상담 11 - '종교와 죽음' 편

2014.09.26 22:43


사랑하면 무조건 아프다. 


부재의 고통이 없으면 사랑이 사라진 것이다.
아프다는 것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다. 

고통을 받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먼저 떠나는 건 죄악이다. 
고통으로 느껴지지않는 죽음은 아무런 의미없는 것이다. 

종교는 미래의 공포를 먹고 산다

여하한 자유라도 사랑이 있다면 방종일 수 없다 - 김수영 


+


개인적으로 다상담이 끝나서 다행이다...

계속 더 했으면 그냥 안 들었을 것 같다...


점점 지루해지고 패턴이 반복되면서...

좀 더 자극적인 사연을 기대하게 되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름답게 마무리해서 다행이다.


열린 공동체 사회 Pot cast/[Bunker1] 강신주 강신주, 다상담, 종교와 죽음

강신주의 다상담 10 - '꿈' 편

2014.09.26 22:24


꿈을 가지면 안된다.


우리는 꿈없이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꿈은 현재를 살지 못하고 미래를 살게 만든다.


꿈을 생각할수록 현재를 살기 어려워진다.

내일을 생각하면, 우리는 즐겁게 놀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하러 산에 가고 여행가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으려고 산을 가는게 좋은 것이다.

여행은 그냥 가는 것이다...
항상 가는 여행지는 확인 하러가는 것이다.

소유한다는 것은
목적없이 돌아다니고~ 그냥 편히 있는 것을 이야기한다.

인생을 여행이라 하는 것은 
목적지를 정하고 틀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목적을 정한 순간 과정은 무시될 수도 있다.
삶은 과정이지만, 결과만 생각하게 만들어버린다.

꿈은 2종류로 나뉜다. 

1) 현실을 못보게 만드는 꿈
- 개꿈, 그저 바라는 허상, 꿈에서 허덕이며 불행하게 만듬
- 현실을 은폐하는 꿈

2) 현실을 보여주는 꿈
- 꿈을 알고 현실을 바꾸려고 노력하게 만듬
- 건강하지만, 현실은 아직 불행한 상황


꿈 자체가 없는 사람이 있다.
대부분은 꿈을 포기해버린다.

풍경과 현실은 다르다
산을 구경하는 사람과 올라가는 사람의 감정은 다르다.

꿈이 강할수록 현실은 더 고통스러워진다.

민주주의에 대한 꿈이 강하면... 
삶은 고난의 연속일 수 밖에 없다.

일제시대 독립이 불가능하다고 여긴 사람들이 있다.
1940년대 독립에 대한 꿈을 접은 사람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서정주이다.

우리 시대의 꿈과 당나라 시대의 꿈은 다르다.
우리 시대의 꿈은 사회에 의해서 만들어진 꿈일 확률이 높다. 

막상 해보지 않으면 내것인지 아닌지 잘 알지 못한다. 
해보고 신나면 내것이고, 했는데 욕이 나오면 내 꿈이 아니다. 

내 꿈인지 남의 꿈인지 알려면 이루어봐야 알 수 있다. 
꿈의 수준에서는 무엇인지 알수가 없다.

여행갈 때 땅끝마을에서 달마산은 가봐야한다.
산에 올라가봐야지, 산을 갈지 말지 버릴 수 있다. 

꿈을 얻는 순간, 앞이 보인다. 

죽을 때 우는 건 현재가 좋은거다
천국간다고 생각하면 죽는 것은 기쁜거다

연애를 하면 좋은것이 현재가 즐거워진다.
예술도 좋은것은 현재를 즐겁게 해준다.

여행이 매력적인 것은 매너리즘을 벗어나게 해준다.


열린 공동체 사회 Pot cast/[Bunker1] 강신주 강신주, , 다상담, 벙커1

강신주의 다상담 08 - '소비' 편

2014.02.02 22:17


내가 강신주의 강의를 좋아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공감하기보다는 그는 나와 다른 관점에서 사물을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슷한 맥락으로 흘러가면서

강신주의 다상담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쯤...

'소비'편에서는 다소 색다르게 자본주의를 이야기했다


이번 강의에서는 초반부터 남달랐다.


진짜 돈을 불로 태우는 퍼포먼스를 통해서

강신주는 돈이 가지고 있는 허상에 대해서 인식의 전환을 시도한다.


예상치 못한 강펀치를 맞은 느낌이라고 할까?

강의 스킬이 늘은 것인가? 아니면 특별한 임펙트가 필요했나?


어쩌면, 그만큼 자본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깨는 것이 어렵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


이 번 강의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 성격을 명확하게 지적한 부분이다.


사람들은 종이 뭉치에 불과한 돈에

단순히 종이가 아니라 그 이상의 가치를 부여한다. (벤야민, 짐멜)


종교에서는 흔히 천국이라는 백지수표를 약속하면서

현세에서 착하고 성실하게 살 것을 요구하지만,


자본주의에서는 돈만 있으면 현세에서 바로 천국을 경험하게 해준다.


이 점이 바로 자본주의가

그 어떤 종교보다 강력하게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원동력인 것이다.


자본주의에서의 소비는 메트릭스의 메카니즘을 가지고 있다.


돈을 계속해서 벌어서 쓰지 않으면 돈이 순환되지 않아서,

시스템 자체가 무너져버리기 때문에 끝없이 소비를 부추길 수밖에 없다.


월급은 돈을 쓰라고주는 것이며,

사람들이 쓴 돈으로 기업은 다시 제품을 만들어 낸다.


만약 사람들이 돈을 안쓰고 가지고만 있으면 

물가가 더 오르게 되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뭐 괜찮다.

그게 자본주의 시스템이 만들어진 원리이까~


근데 문제는 사람들이 돈을 어떻게 쓰냐,

바로 소비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의 문제에 달려있다.


+


돈이 많은 사람들은 사실 소비에 대해서 고민을 덜한다.

일단, 돈이 있으니까 그냥 사보고 아니면 말고가 가능하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은 제한된 자원에서 돈을 소모해야만 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가난한 사람들이 더 과소비를 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첫 번째 이유는

수입이 불안하게 되면 있을 때 써버려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건설작업장에서 일하시는 일용직 근로자들이다.

사업을 직접하는 사람들이나 프리랜서들에서도 비슷한 경향이 나타나는데,

돈을 벌 때는 바싹 벌게 되지만 어떤 때는 일이 없어서 수입이 계속 없을 때도 있다.

(나도 처음에는 이런 소비패턴이 이해가 잘 안갔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경향이 자주 나타난다.)


이들에게 돈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기 때문에

있을 때 확~ 써버리지 않으면 어짜피 그냥 사라져버리는 돈이 된다.

그렇게 때문에 수입이 좋을 때 필요 이상으로 물건을 사게 되는 과소비가 나타난다.



두 번째 이유는

돈을 쓰는 것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다.


30일 죽도록 일을 하고나서

하루만에 다 쓰고 이를 만족해하는 경우가 많다.


월급은 다시 열심히 일을 하도록 몰핀주사를 놓는 것이며,

카드 청구서는 내가 일을 해야만 하는 이유를 인식시켜 준다.


월급은 분명히 받기는 하지만, 

통장에 스쳐지나가는 사이버 머니일 뿐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시 열심히 카드를 긁어대기 시작한다.


허무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소비를 함으로써 어렵게 돈을 벌게된 굴욕을 해소하게 된다.


돈을 쓸 때는 자유를 느끼게 되면서

이는 사실은 노동자의 삶을 은폐하려는 회피의 수단이다.


스트레스를 소비로 해소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결여된 행복(사랑, 성취감)들을 보상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여릴수록 먹는거로 스트레스를 푸는 여자와 유사한다.

드라마에 흔히 등장하는 실연당하고 열무비빔밥을 먹는 여자가 이런 맥락이다.


+


이러한 과소비들을 제어하는 방법은

자신의 노동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자신의 노동의 가치를 소중히 여긴다면 함부로 돈을 못쓰게 된다.


노동의 가치를 생각하지 않고 쉽게 번 돈은 쉽게 쓸 수 있다.

(복권 당첨, 부모님의 용돈, 남편의 월급)


하지만, 부모나 남편이 어떻게 돈을 벌어왔는지 생각하고,

돈을 쓸 때 스스로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고민하면 돈을 함부로 쓰지 못한다.

(사실 왠만한 주부들은 남편의 월급을 쉽게 쓰지 못한다.)


막상 써 놓고 나서 손에 들고 있는 쇼핑백들에 허무감은 밀려오게 된다.

과연 내가 그렇게 고생해놓고 진정 필요한 것을 산 것인가?


소비를 하는 순간

나는 주인이며 왕이된 기분이겠지만,

사실은 백화점 직원들에게는 손님이 아니라 돈이 왕이다.


점원들은 손님을 존중해주는 것이 아니라

돈을 쓸 것같아 보이는 손님들을 존중하기 마련이다.


소비를 통해서 자유를 만끽하려 하지만,

사실은 돈이 있어야만 그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돈은 물건과 다르게 다양한 제품을 구입할 수 있기에

다양한 가능성을 제공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동일가여도

물건보다 돈이 더 효용이 높기 때문에 사람들은 돈에 더 목을 메게 된다.


이에 온갖 마케팅과 광고는

사람의 심리를 교묘하게 자극해서 불필요한 소비를 유발한다.


자본주의의 생존 매카니즘은

우리는 끝없는 소비의 연속으로 유인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무서운 것은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과연 우리는 사람보다 자본이 우선시 되는 이 메카니즘을 깰 수 있을까?



+


마지막으로 정리할 내용은

주제와는 다소 동떨어지지만 그래도 인상깊었던 부분이다.


바로 여성(Gender)의 문제이다.


강신주의 강의에는 여성들로 가득차기 마련이다.

그만큼 사회에서 여성들이 억눌리고 스스로에게 갇혀있다는 이야기다.


가장 인상 깊은 비유는 정실부인과 첩의 비유였다.


정실부인은 첩이 되고 싶어하고
첩은 정실부인이 되고 싶어한다.


정실부인은 온갖 사회적 역할을 부여받지만 남편의 사랑은 못받는다.

첩은 남편의 사랑은 독차지 하지만 사회적 역할은 부여받지 못한다.


첩은 사랑만으로 먹고 살았지만,
정실부인은 사랑빼고 모든 권력을 가지게된다.

그래서 이혼하면 아내는 모든 권력을 박탈당하기에 사회적으로 이혼을 금지시켰다.


과감히 떠날 수 있는데도 머물고 있다면,

언제 떠날지 모르기 때문에 그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한다.

반대로 욕해도 하라는 대로 하고 있으면, 그 때부터는 무시를 당하게 된다.


정실부인은 떠나지 못하는 존재였고,

사회는 이러한 메카니즘을 정당화 시켜주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이혼도 가능해졌고, 첩을 두지도 못한다.


아내는 정실부인이면서 사랑도 받아야 하는 존재가 되었고,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위자료를 받고 과감히 이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이혼을 하지 못하는 여성들이 많이 존재한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바뀌면서 반대의 현상도 나타날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도 여성은 사회에서 소수자이고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여성들은 아직도 너무 착하고, 좀 더 모질어질 필요가 있는 것 같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은 능력에 비해서 아직도 목소리가 너무 작은 것같다.


강신주의 비유가 다소 눈쌀을 찌푸리게 만들면서도

충분히 공감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직까지는 대한민국의 현실인 것 같다.

열린 공동체 사회 Pot cast/[Bunker1] 강신주 강신주, 노동의 가치, 다상담, , 소비, 여성, 자본주의

강신주의 다상담 05 - '가면' 편

2014.02.01 20:25


강신주의 다상담 강의를 몇 번 듣다보니,

다소 비슷한 맥락이 반복되는 느낌을 받게 된다.


고정 관념이라는 알을 깨고 나와서

자아를 찾아가고, 스스로에게 솔직해져야 한다...


과연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나는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과 시선을 생각하는가?

착함이라는 허상이 어떻게 나를 속이고 있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신주 강의는 끌리는 맛이 있다.

그건 바로, 아직도 내가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


페르소나(persona)는 

그리스의 고대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일컫으며,

타인에게 비치는 외적 성격을 나타내는 심리학적인 용어이다.


강신주가 이야기하는 가면은

단지 페르소나만을 의미하지는 않고 있다.

오히려 내면에 억지로 눌려있는 욕망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가면을 쓴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약한 사람이 생존을 위해서 사용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가끔 강자임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약한 척하면서 가면을 쓰는 경우도 존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구나 가면을 쓴다.

이는 솔직하지 못해서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심지어 어린 아이들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일부러 우는 법을 배운다.

아이들도 생존을 위해서는 가면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가면을 쓰는 것을 사람들은 대체로 싫어하지만,

무언가를 얻기위해서는 때론 자신의 감정을 속여야만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나마, 무언가를 위해서 일부러 가면을 쓰는 경우는 덜 불행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가면을 써야하는 경우에는 스스로 불행을 느끼게 된다.


근데, 상당수의 사람들은 원하지 않는 가면을 쓴 체 살아가고 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우리들은 나보다 강한 사람을 항상 대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가면을 쓸 수 밖에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가면을 쓰는 훈련을 하게 되고,

자아가 강해지는 시기(5~7살 때와 사춘기 시절)에 멋모르고 가면을 벗어던졌다가

아무런 능력이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호되게 당한 후에 다시금 가면을 집어들게 된다. 


강신주는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아직 경제적으로 독립할 자신이 없으면,

그냥 부모님한테 빌 붙어서 가면을 쓴 체 착실히 살라고~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냥 주는 월급받으면서 안정되게 살고싶으면 가면 쓴 체 살면된다고...

남의 회사에서 일해주는 대가로 받는 돈받으면 비유도 맞춰줘야하는 거라고~


가면을 벗어던진다는 것은 그만큼

용기도 필요하지만 희생을 각오해야하는 행위인 것이다.

가면을 누군가 앞에서 한 번 벗게 되면 그 사람 앞에서는 다시는 쓸 수 없다.


이는 가면을 쓴 사람을 대하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상대가 가면을 쓰고 대하는 것이 오히려 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상대가 가면을 쓰고 있을 경우에는 속으로는 싫어해도 절대 나를 해치지 않는다.

하지만, 갑자기 상대가 가면을 벗어버리면 그 맨얼굴을 감당해내기가 솔직히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가 가면을 벗지 못하도록

절대적 힘의 우위를 유지하는 것 필수적이며 점점 더 차이를 벌리게 된다.


절대 권력자인 박근혜와 이건희,

이런 사람들 주위에는 가면 쓴 사람들이 철의 장막을 이루게 되고,

그들은 이제 가면을 벗은 사람을 대하는 것이 오히려 더 부담스럽게 된다.


+


근데 이와는 다르게 가면을 써야하는 경우가 또 한 번 있다.


상대방과 더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고, 상황을 빨리 탈출하고 싶을 때

이건 아니다 싶으면 빨리 웃으면서 비유맞춰주고 대화를 끝내고 나와버려야 한다.


오히려 마음이 안드는 상대를 대할 때

상대에 대한 아무런 감정도 투영하지 않고 오히려 더 친절하게 대하게 된다.


피상적인 관계로 남고 싶고, 다시는 보고싶지 않다면

쓸데 없이 시간낭비 감정 낭비하지 않고 가면을 쓰고 그냥 흘려보내는 것도 방법이다.


하지만, 내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나의 가면을 벗어던질 줄 알아야 한다.


가면을 쓰고 있는 한 우리는 솔직한 감정을 주고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가면을 벗어야만 한다.


하지만, 흠모하는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오히려 더 두꺼운 가면을 쓰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그것도 과연 사랑일까? 


난 그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을 계속해서 유지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 같다.


+


나의 20대는 밝고 명랑한 교회 오빠였다.

집에서는 착실한 아들이였고, 학교에서는 성실한 학생이였다.

그러면서도 나름 주관도 있어보였기에 꽤 괜찮은 녀석이라 평가받았다.

(자뻑일수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그런 이미지였던 것 같다.)


하지만,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닌 정글 속의 야생마가 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한 번도 가면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나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면서 기존의 삶이 가면처럼 느껴지게 된 것이다.


독실한 기독교인

성실한 신입사원

착실한 막내아들

다정다감한 교회오빠

뭐든지 할 줄 아는 슈퍼맨


남들이 이렇게 봐주는 것이

사실은 나도 원하는 삶이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고 난 좀 더 자유로운 영혼이였다.


남들이 만들어놓은 기준에 나를 맞추고 있었고,

그렇게 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내가 그걸 원한다고 생각했었다.


일탈과 욕망, 저항, 거만, 잉여 같은 단어들이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새 나는 그것들을 원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그것들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계속해서 내 속에서 억눌러오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난 스스로 잘 만들어놓은 새장을 벗어나고 싶어졌고,

그 것을 깨고 나오는 순간 그 동안 쌓아둔 것이 무너질 것을 직감하게 됐다.


내가 가면을 일부러 쓴 것은 아니지만, 

어린 시절부터 너무나 오랫동안 가면을 쓰고 있었던 것 같았다.


만약, 그게 가면이 아니였고, 

순간적인 일탈이였다면 어느새 자연스럽게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었겠지만,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제대로된 나를

찾기 시작했다고 느낀다는 것은 그 것이 순간적인 감정만은 아니였던 것 같다.


가장 먼저 새로운(?) 맨 얼굴을 보여주게 된 것은 여자친구였다.

은밀히 조금씩 내비치는 내 맨 얼굴에 그녀는 내가 변했다고 느꼈던 것 같다.


평생 가려면 내 맨 얼굴도 사랑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예전 새장 속에 있던 나의 모습을 사랑하는 그녀에게 난 솔직해지려고 했다.


결국 아름답게 헤어지길 선택했고,

그녀는 너무나 순순히 그 선택에 공감해주었다.


그런 후 너무나 편함을 느꼈지만, 아직도 그녀가 많이 생각난다.

이 것이 내 선택에 후회는 없지만 아쉬움이 아직도 남는 이유일 것이다.

(헤어질 때까지도 긴가민가했는데, 난 진짜로 그녀를 사랑했던 것 같다.)


+


이별은 나에게 변화의 시작이였고,

이제 본격적으로 다른 삶을 살아보고자 했었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 자신을 찾고 싶었고,

내가 있던 모든 것을 떠나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졌다.


현재의 자리가 스스로에게 불편했고,

뭔가 다른 나의 모습에 다른 사람들이 실망하는 것도 싫었다.


그런 후 이것도 아닌 저것도 아닌 애매한 삶을 살다가,

예전의 그 삶이 그리워서 다시 교회로 돌아가게 되고 직장도 옮기게 된다.


예전과는 다른 삶을 살고 싶어도

별로 변하지 않는 나를 보면서 솔직히 뭐가 본질인지 헸갈렸다.

(남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일탈이나 욕망이 솔직히 나에게는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난 다시 예전의 나름 괜찮았던 삶을 유지하면서도,

약간은 다른 방식으로 적당히 솔직한 삶을 살고 싶었고,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반쯤만 가린 가면을 쓰면서 타협점을 찾고 싶었다.


솔직히 이야기한다면,

어떤 것이 가면이고 어떤 것이 맨 얼굴인지 확신이 안섰던 것같다.


역시나 다시 돌아간 온실은 따뜻했지만, 

역시나 온실은 나에게는 너무나 답답한 곳이었다.


+


그렇게 시작한 30대의 삶은 많은 것은 생각하게 만들었다.

어찌보면 그제서야 진짜 내가 누구인지 제대로 찾아가기 시작한 것같다.


20대 후반에 충동적이고 감정적으로 왔다갔다했다면,

본격적으로 무엇이 가면이고, 무엇이 본질인지 찾기 시작한 것이다.


교회와 새로운 직장이라는 온실 속에서

제대로된 나를 찾을 때까지 철저히 고민하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내가 상상했던 양 극단에는 나는 없었다.

난 처음부터 그 중간 어디쯤, 남들이 보기에는 애매모호한 어딘가에 있던 것이다.


남들 기준으로 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그 지점에

나는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고 나만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난 크리스챤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기성 교회에서 원하는 그런 크리스챤은 확실히 아니였다.


난 기업가 마인드가 강하지만,

그렇다고 자본주의 논리에서 이야기하는 자본가도 노동자도 아니였다.


난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사회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그런 혁명을 원하지는 않는다.


난 솔직하고 욕망에 충실한 삶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주체할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힌 삶을 원하지도 않는다.


도저히 알 수 없는 지점에 위치한 나의 삶을 찾기 위해서

새로운 방향성이 보이자마자 과감하게 난 다시 떠나기로 했다.


강신주는 어느 곳을 떠난다는 것은

그 곳이 최악이라고 느낄때만 떠날 수 있다고 했지만,


난 지금있는 곳이 어쩌면 최선일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음에도,

내게 어울리지 않는 옷이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그곳을 떠날 수 있었다.


난 내가 이미 충분히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하고 싶었고 계속해서 변하고 있다.


+


지금의 나는 가면을 쓰고 있는가?


직장을 그만두고 학생이 된 이후로

나는 완전 새로운 영역에서 새로운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강신주의 말처럼 새로운 것을 시작했을 때,


'이제는 끝이다.'라는 느낌이 들면 남들이 원하는 선택을 한 것이고,

'이제 시작이다.'라는 느낌이 들면 스스로 원하는 선택을 한 것이라는데,


난 확실히 제대로 된 선택을 했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워낙 긍정적이라 첫 사랑, 첫 입사, 첫 이직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너무나 아프고 외로워서, 

누군가를 만나보기로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아직도 그 때 잠시 만났던 여자분께는 죄송한 마음이 많이 든다.)


심지어, 예전부터 알던 사람들과 다시 만났을 때도

그들 역시 나의 선택이 의외이지만 아주 잘 어울린다고 이야기한다.


어찌보면 나만 나 스스로를 잘 몰랐던 것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들은 어쩌면 이미 내가 그들과는 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난 가면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은 이미 나의 맨얼굴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 때도 강자들 앞에서 하고 싶은 말은 했고,

약자들에게도 절대 내 힘을 과시하고자 했던 적은 없었던 것같다.


강한 사람들이 기분 나빠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도 진심은 전달했고,

약한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지 않도록 그들 앞에서도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지혜와 가면은 엄연히 다른 것인데,

난 그 부분을 잘 구분하지 못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나의 고민은 완벽히 해결했는가?

다시는 강신주의 강의 따위는 듣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하지만, 이번에도 여전히

이 문제에서 완벽하게 자유롭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아직도 가슴 한편에는 찝찝함이 남아있고,

나는 가면을 완벽하게 벗어버리지도 또한 계속 쓰고 있지도 않다.


이는 한 극단에 치웃치지 않는 내 성향탓일 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가면이라는 것의 존재 자체가 나의 특성을 설명하기에는 부적합할 수도 있다.


다만 내가 맨얼굴이라고 생각한 것이 가면이였거나,

내가 가면이라고 생각한 것이 나의 맨얼굴이 아니였으면 한다.


사람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진실을 은폐하거나 인정하지 않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인 가면이든 맨얼굴이든

그 모습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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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다상담 02 - '고독' 편

2013.12.11 17:44


강신주 박사는 고독을 

강한 자의식의 상태라 이야기한다.


나에게 집중하고, 계속해서 긴장하고, 

나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에 몰입하지 못하는...


고독이라는 상태는 불안정한 상태이기,

이 상황을 벗어나려고 하게 되고, 이럴 경우 2가지 선택을 하게 된다.


고독을 벗고 나오느냐 

아니면 더 깊은 고독으로 들어가느냐...


고독을 즐기는 방법도 불안정 상태를 탈출할 수 있다.

더 깊은 고독으로 들어가는 것은 일종의 방어기제이며,

스스로를 고독에 갇두면서 보호받을 수 있지만 세상과는 점차적으로 멀어지게 만든다.


평생 혼자 살 자신이 있으면, 고독을 즐겨도 된다.

하지만, 고독을 즐기는 것도 잠시뿐 언제가는 돌아오기 마련이다.


모든 자기 의식은 타인에 의해서 매게되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쁜 것인가?

무엇이 좋은 것인가?


내가 좋은 것이, 내가 이쁜 것이 정답이지만,

이런 주관적인 감정에서 조차 다른 사람과 교감을 할 때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잠시동안은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할 수 없어지고, 결국은 사람을 찾게 된다.


+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고독하지 않은 존재를 보면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다.


어린 아이들은 고독이 없다.

하지만 어른이 될수록 점차적으로 고독을 느낀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에는 꽃잎을 봐도 몰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몰입을 하게 되면,

세계에 대한 관심이 없어지고,

세계가 나를 밀어낼 때 고독은 없어진다.


멀리서 여자친구가 걸어오는데, 나머지는 모두 배경일 뿐 여자친구만 보인다.

반대로, 여자친구와 있는데, 자꾸 시계를 보고 스마트폰만 만지게 되면 몰입이 끝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사랑이라는 감정과 고독이라는 감정은

몰입할 대상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로 구분되어질 수 있다.


+


몰입이라는 감정은 어떤 것일까?


부모님이 막~~ 야단칠 때~~

그 내용에 집중하고 있으면 맘이 어렵다.

하지만, 딴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별로 마음이 어렵지 않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극장에서 영화가 더 재미있는 것은 몰입하기 좋은 환경 때문이다.


무언가에 몰입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순간적으로 놓아버릴 수 있다는 것이고,

모든 억압에서 자유로와지면서 다른 모든 세계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진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냥 나와는 구분된 풍경으로만 보이면 고독을 느끼지만,

만지고 싶고, 관심이 가는 대상이 있다면 고독은 사라지게 된다.


결론적으로 고독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어떻게하면 무언가에 몰일 할 수 있을까 고민해보면 된다.


강신주 박사는 이를 모든 금기된 것을 벗어나는 것으로 설명한다.


스피노자의 평행론을 이야기하면서

기독교의 금욕 생활은 정신과 고통이 반비례한다고 보지만,


스피노자는 몸이 건강해야 정신도 건강하기에, 

정신이 건강하려면 금욕생활을 하면 안된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업악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무언가에 몰입해볼 때 고민이 해결된다는 것이다.


강신주 박사의 이야기는 '사랑'편과 크게 다르지 않다.

(http://socialplanner.tistory.com/entry/죄와-벌-김수영-1963)


'앞뒤 제지말고 스스로 감정에 솔직하고 지금 이순간을 즐기라.'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서,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시선이 두려워서

솔직하지 못한 것이 스스로의 불행을 만들고 있다고...


쓸데없이 남을 배려한다고

스스로를 옥죄이지 말고 당당하게 감정을 표현해라~

(단, 남에게 피해나 상처를 주지 않는 선에서...)


다소 추상적인 결론이지만,

그 본래의 의미에 대해서는 상당히 공감하는 바이다.


+


그렇다면, 과연 실천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몰입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어려가지가 있을 수 있다.

운동, 취미활동, 술, 마약 등 모든 것이 고독을 줄여줄 수 있는 수단이 되지만,

모두 일시적인 관점이며, 근본적으로는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것들이 효과가 크다.


그래서, 사랑을 하거나 종교, 특정한 신념을 가지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을 못해서 종교를 도피처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교회에 수 많은 여성분들이 사랑에 실패해 종교에 더 몰입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순수한 신앙적인 판단에서 그러는 것은 뭐라할 것은 아니지만,

사랑의 아픔을 피하기 위해서 신앙에 매달리는 분들을 보면 한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많이든다.


상처를 신앙으로 승화시켜서 극복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게 과도하게 흐를 경우 신앙이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종 보인다.

(여기에 상처는 사랑 이외에 수 많은 다양한 상처가 포함된다.)


사랑과 신앙이라는 부분...

둘 다 균형을 맞춰줄 필요는 분명히 있어 보인다.


+


나에게 현재 몰입할 대상이 존재한다.

그렇게 때문에 나는 고독하지 않을 수 있는 것 같다.


대학원에 입학해 공부를 하기 시작한 이후로 

혼자 있는 시간이 부쩍 늘어났지만, 오히려 회사를 다닐 때보다 고독함을 덜 느낀다.


이유는 사랑도 신앙도 아닌 신념이라는 부분이 생겼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는 목표가 너무나 명확하고, 아직은 수풀을 헤메고 있기는 하지만,


이 숲을 헤쳐나왔을 때 

세상을 향해 무엇인가를 던질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을 하지 않지만,

종교에 대한 열정도 예전만 하지 않지만,

갈급함이나 답답함을 느끼지 않는 평안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다시 사랑하고 싶은 욕심은 많이 있지만,

신념이라는 부분이 아직은 상대적으로 굉장히 크기에

신념을 같이 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무리해서 사랑에 목메고 싶지는 않다.


어느 새 남들이 말하는

3포세대(연애, 결혼, 출산)에 자연스레 합류해버렸지만,

남들이 날 3포세대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이런 남들 시선에는 자유로운 듯하다.


다만, 이 신념이라는 몰입의 힘빨이 떨어지기 전에,

다시 고독을 느끼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사랑이 다시 시작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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