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26 [제주] 남의집, 제주살다

2019.04.09 23:06


제주에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볼만한 일을 누군가는 현실로 만들어본다.


남의집 프로젝트 X 어반플레이 X 플레이스캠프


이들은 이러한 발찍한 상상을 현실로 만들었다.


서귀포에서 밤산책하기

플레이스캠프 제주에서의 하루 밤

그리고 제주 현지민 집에 놀러 가보기


제주 출장 일정을 끝내고, 

1박 2일의 시간을 나만의 방법으로 좀 더 색다르게 제주를 느낄 수 있는 시간들이였다.


남의집 프로젝트 - 남의집 제주살다


+


제주는 매력적인 여행지지만,

요즘은 살고 싶은 동네로 자주 연상된다. 


과연 제주에 놀러가는 것과 사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지난 제주 방문 제주에 산다는게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1)천정부지 오르고 있는 땅값

2)관광지이기에 생활물가

3)부족한 자원 (육지에서 조달해야만)

4)여름에 매우 습하고 겨울에 매몰찬 바람

5)현지인과 이주민 간의 생각 차이


제주는 섬이라는 특수한 지리적 환경 뿐만 아니라 역사적 맥락에서도 독특한 특성을 갖는 곳이다. 


목호의 , 7 작전, 제주 4.3 

제주가 슬픔과 침묵의 섬이 되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들이다.


외부 세력에 의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고,

여성들은 살아남아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다.


화산 섬이라는 척박한 환경뿐만 아니라 외부 세력에 의한 온갖수모 속에서도

악착같이 살아남았기에 강인하면서도 폐쇄적인 문화가 존재한다.


이러한 외부인에 대한 보수적인 성향때문에 관광지임에도 불구하고

외부 관광객에게 굉장히 불친절한 편이며 외부 이주민에 대해서 배타적이라는 평도 듣는다.


남성들은 굉장히 가부장적이고, 여성들은 생활력이 엄청 강하다는 점도

스페인 바스크 같이 척박한 환경의 지역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2010 이후 제주 인구는 급격히 증가하면서 올해 70만명을 돌파할 예정이라고 한다.

10년만에 20만명이 늘어났고 이중 상당수는 외지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다.


제주가 이제는 단순 관광지가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삶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되고 있다.

나는 앞으로 3개월간 제주를 들락날락하면서 제주사람들과 함께 호흡을 맞출 예정이다.


내가 만날 그룹에는 제주 토박이와 이주민들이 섞여있기에 더욱더 기대가 된다.


+


이번 일정을 통해 제주 사람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만나보고 싶었다. 


서귀포 토막이와 함께하는 야밤의 동네 한바퀴

제주 이주민이 들려주는 제주에서 살아남기

그리고 최근 핫플로 뜨고 있는 관광지에서의 하룻밤


혼자 올레 길을 걸어봤던

회사 워크샵으로 단체로 놀러왔던

어르신들과 함께 기업방문을 했던

참가자들을 데리고 모듈을 진행하러 왔던


그러한 뜨내기 방문객으로써의 제주가 아니라

현지인과 이주민이 섞여 살고 있는 삶의 터전으로써의 제주를 느끼고 싶었다. 


아주 짧은 여행으로 그러한 것을 느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조금이라도 그들의 삶을 느껴볼 있었던 기회였다.



+


나의 일정은 제주시에서 저녁 6 일정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서귀포로 이동하는 것부터 도전은 시작됐다. 


항상 제주에 오면 택시를 타거나 렌트카를 이용했기에, 버스를 타는 자체가 낮설었다. 


해외에 나가서도 대중교통을 자주 이용하는 편인데, 오히려 서울을 벗어나 대중교통을 이용해본젓이 거의 없다. 전주와 여수, 진주에서도 버스 시간도 안맞고 동선도 안좋아 주로 택시를 타거나 현지인 차를 얻어타고 다녔다. 지방에서는 대중교통이 안좋다는 기본 인식이 있어서인지, 오히려 해외보다 도전을 안해왔던 나이다. 이번에는 혼자이고 동선도 너무 길기에 버스를 이용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최근 버스노선이 개편되고 상당부분이 공공화되면서 이용하기 편해졌다는 버스를 체험해보고 싶었다. 


대중교통 어플은 역시 친절했지만, 가장 문제는 역시 버스 간격이다. 서울에 비하면 버스 간격이 너무 길어 대기 시간이 엄청났다. 다행히 서귀포 가는 길은 버스 시간이 딱딱 맞아 생각보다 일찍 도착할 있었고 1시간 반만에 집합 장소에 도착할 있었다. 덕분에 인근에서 혼자 저녁도 먹을 시간이 있었다. 놀라웠던 점은 그래도 서귀포는 시내인데도 7시에 식당의 절반이 문을 닫았다는 점이다. 3월이 제주도에는 비수기라고는 하지만 그리고 시내에서 약간 외각진 곳이긴 했지만 저녁 7시에 절반의 식당이 문을 닫는 점은 나에게는 새로웠다. 장사가 안되도 새벽까지 문을 못닫고 아둥바둥 버티는 서울의 상인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단체로 블로그에 올라온 맛집만 찾아다녔던 나로써는 색다른 일정이 시작된 것이다. 


+




주차장에서 모이기로 했지만, 어이없게 주차장은 여러 곳에 나뉘어 있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담당자도 현지 상황을 몰라 주차장 위치를 물어보는 질문에 동문서답만 했다. 결국 흩어져있던 사람들이 모이는데 10분이상 시간을 보낸 투어는 시작됐다. 투어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혼자 여행객이였다. 다양한 액티비티를 찾아서 참여하던 사람도 있고, 일부러 일정을 투어에 맞춰 사람도 있었다. 대학생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이미 혼자서 제주도를 차례 왔던 사람들이였다. 밤에 것이 없어서, 기존과는 색다른 경험을 원해서 신청한 사람들이였다. 나처럼 단체로 와서 정신없이 왔다가거나 렌터카를 타고 관광지만 찾아다녔던 것을 벗어나 진짜 제주를 느끼고 싶어하는 분위기였다. 기존의 방문과 다른 투어를 원했기에 현지전문가와 함께하는 밤산책은 분명 매력이 있었다. 주최측에서는 다른 투어도 기획했는데, 여기만 성공하고 모두 취소됐다고 한다. 서울과는 다른 경험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서울에서 통했던 테마의 모임은 성공하기 어려웠던 것같다. 굳이 제주까지 관광객들에게는 제주만의 색깔이 느껴지는 색다른 경험을 필요했던 것 같다. 


서귀포 토박이 출신인 길잡이는 어린시절 서귀포 풍경과 현재의 풍경을 비교하며 다양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서귀포 시민들도 모를만한 길을 찾아다니며, 서귀포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볼 있었다. 관광지로만 왔던 서귀포시내를 이렇게 한 밤중에 걸어보는 것은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단순 토박이가 아니라 건축 전문가이기에 시내 풍경 속 숨어있는 재미를 찍어서 이야기해주는 재미도 쏠쏠했다. 하지만, 컨텐츠는 너무 풍부하셨는데, 너무 의욕이 넘치셔서 솔직히 따라가기 벅찬 측면이 있었다. 너무 혼자 앞서 가시는 바람에 뒤에 사람들이 조금씩 쳐지는 경향이 나타났고, 참가자간에 대화를 하는 시간이 너무 적어서 뒤에 쳐진 사람들은 그냥 따라다니기 바뻤다. 2시간 넘는 시간을 계속 걷기만 하니 일부 참가자들은 힘들어하는 모습도 보였던 것같다. 


야경의 백미는 역시 이중섭 기념관 옆의 생가였다. 조경을 잘해놓은 덕에 밤에 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다. 올레길을 걸으며 낮에 왔던 풍경과는 사뭇 이미지가 많이 달랐다. 나무 사이에 숨겨놓은 조명에서 삐집고 올라오는 불빛들이 꽃들과 만나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역시 카메라는 상황이 주는 감성까지는 담지 못하는 듯하다)



예상대로 어처구니 없는 시간에 투어는 종료했고,

이제 숙소인 플레이스캠프 제주까지 차로 1시간 정도 이동해야만 했다.


버스는 이미 끊어졌고, 택시비는 7만원 가까이 나오는 상황.

예견되었던 상황이였기에 당황하지 않았고, 예상했던 대로 숙소에서 여기까지 차로 이동하신 분들이 많이 계셨다.

덕분에 카풀로 여유있게 성산일출봉 인근에 있는 플레이스캠프 제주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요즘 핫플레이스로 뜨고 있다는 플레이스캠프 제주였지만,

역시나 평일 밤 12시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팬시하면서도 과하지 않은 분위기가 왠지 정감이 갔다.

숙소도 크지 않지만, 깔끔하고 팬시한 느낌이 단기 체류하는 관광객에 최적화된 느낌이였다.

(다소 차가운 듯한 느낌도 있어서 길게 체류한다고 상상했을 때는 글쎄...)


낮에 만난 플레이스캠프 제주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말에 사람이 북적북적 될 경우에는 사뭇 다른 모습이 연출될 것같기는 하지만,

비수기인 3월 평일 낮의 모습은 그져 쏘쏘하다는 표현이 가장 적당한 듯하다.


팬시한 카페와 가게, 식당의 모습은 서울 성수동이나 연남동과 별로 다를 바가 없지만,

한적한 가게들의 모습은 바쁜 일상을 사는 서울사람들의 삶과는 또 다른 모습이기는 했다.


+




이제 마지막 목적지인 남의집 호스트가 살고 있는 김녕지역으로 다시 버스로 이동하게 됐다.

원래 제주에서도 가장 잘 살던 지역있다는 김녕은 이제 김녕 해수욕장과 해녀들의 지역으로만 기억되고 있다.


그래도 제주시에서 비교적 가깝기 때문에, 

서쪽의 애월쪽 집 값이 너무 올라 이제는 동쪽인 조천을 거쳐 김녕까지도 이주민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남의집 예약자가 나밖에 없어서, 1:1 만남이 되어버렸다.

평일 낮 시간 관광을 즐기지 않고 남의집에 간다는 것 자체가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남의집 프로그램도 금토일 주말에 예약자가 몰렸고,

그나마 월요일까지는 좀 괜찮았다는 것같은데, 주중에 열린 프로그램들은 참여자가 적다고 한다.


이러한 이색 프로그램도 제주 현지인들보다는 아무래도 관광객들이 신청하기에,

비수기 평일 낮이라는 시간에 신청한 내가 오히려 신기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암튼 덕분에 집주인장과 오붓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기에,

예상치도 못한 수확을 얻었다면 얻었다고 할 수 있게 되었다.

(혼자 왔다고 해서 액자도 만들어 주셨다.)


예술 프로젝트로 제주에 내려왔다가, 살기 위해 다시 내려와서 이제는 제주 현지인과 결혼해

이주민과 현지인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집주인은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집주인의 라이프 스토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흥미로웠는데,

집주인과 함께 김녕에 남겨진 예술가들의 작품들을 찾아다니는 행보는 색다른 재미를 주었다.


이주민들이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서 살고 있는 것과 다르게,

집주인은 오히려 현지인들의 커뮤니티에 들어가 이주민의 문화를 이식시키고 있었다.


관광으로 먹고살지만, 외지인에게 별로 친절하지 않은 제주의 특색을

그녀만의 방식으로 소화해서 현지인들과 함께 소소하게 일을 만들어가고, 이주민들도 끌어들이는 모습이 새로웠다.




대대적으로 일을 벌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이미 제주의 삶에 들어갔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같다.


제주에 온 지 6년되었다는 그녀의 삶들은 잠깐 제주에 쉬러온 이주민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깊게 뿌리내리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살짝 스쳐지나가는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


그녀의 사는 모습을 엿보면서 제주에서 이주민이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지 상상해볼 수 있었다.


나의 고향도 아니면서, 잠깐 쉬러온 것도 아닌, 그렇다고 현지인들과 똑같을 수도 없는

이미 도시 속의 삶이 익숙해졌지만, 제주에서의 삶도 어느 정도 익숙해져버린...


어느 중간쯤에 위치하면서도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듯한 모습은

때로는 장점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굉장한 약점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을 탈피해 어느 한 곳에 정착해버린다.

하지만, 이러한한 불안정을 이겨내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면 이것이 바로 혁신의 출발이 된다.


현실을 고통이 아닌 도전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그녀의 태도에서 

앙트로프로뉴어십의 자세를 배울 수 있었고, 혁신을 만들어내는 혁신가의 리더십을 볼 수 있었다.


사실 변화와 혁신은 원대한 꿈에서 시작되기 보다는,

이러한 변방의 작은 곳에서 시작해서 점차 사람들이 모이며 커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집주인이 시도해보려는 생활 속에서의 이러한 작은 도전들이 

오히려 나는 더욱더 의미있는 일이고, 큰 도전이 될 초석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


제주에 살아보고자 참여했던 이번 프로젝트는 어느 새 제주를 이해하고 느끼는 시간이 되었다.

현지인들과 잘 어울리지는 못했지만, 외지인의 관점에서 제주에 산다는 것이 어떤것인지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서귀포 밤거리를 걸으면서,

플레이스 캠프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김녕일대 예술품들을 둘러보면서,


사실 일정 상은 대단한 여행을 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조용히 제주를 느끼며 여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들은 소소한 재미를 줬다.


뭔가 마음으로 제주를 받아들인 느낌이라고 할까?

아직 말로 표현은 안되지만 제주가 좀 더 친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과연 3개월 동안 나는 제주의 어떤 모습을 보게 될까?


더 이상 관광객 모드가 아닌 제주 사람들과 함께 고민하는 팀기업가 모드로 전환해야한다.

이제 제주는 나에게 더 이상 놀러갈 곳이 아닌, 삶의 터전이자 비즈니스의 현장이 될 것이다.


제주 사람들과 만들어나갈 새로운 시간들이 벌써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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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그들이 사는 세상 - 연길과 간도, 조선족과 한민족

2017.08.21 01:51


중국 동북지역에서 두 번째 만난 사람들은


안중근이나 윤동주처럼 100년 후까지 명성을 남긴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100여년 전 그 땅을 살았고 지금도 그 땅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였다.



'간도'라고도 불렸던 지역은 역사적/정치적으로도 특수한 지역이다.

지금의 엔벤 조선족 자치주 지역에 해당한다고 보기도 하지만 이 또한 명확하지 않다.


간도는 원래 조선의 땅인데, 일제가 맘대로 넘겨줬기에 다시 찾아야한다는 주장도 일각에 존재한다.

또한, 연길에 사는 조선족을 남북통일과 중국 교류의 교두보로 활용해야한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이미 연길 지역은 중국의 영토이며, 그들은 중국 국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북한과의 접경지대인 연길, 용정, 도문, 화룡, 훈춘에는 인구의 50%이상은 아직도 조선족이다.


1952년 옌벤 자치구(현재는 자치주) 설립된 이후로도

그들은 언어와 의복, 음식 등 자신들의 문화를 꾸준히 지켜왔기에 한민족이라는 표현이 어울리기도 한다.


과연 궁금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짧은 여행으로 그들의 삶을 알 수는 없었지만,

어설프게나마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살펴보고, 현재 그들의 삶에 대해서도 들어볼 수 있었다.


+


간도 이슈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은 전문가들이 설왕설래를 하고 있기에,

섣불리 딱부러지게 말하기 어렵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여진족과 만주족의 기반이 된 지역이며,

우리의 입장에서는 고구려와 발해의 기반이 된 지역이기에 쉽게 포기하기 어려운 지역이다.


역사적 자료마다 기록이 제각각이고 해석도 너무나 다양해서,

어떤 사람은 만주까지 간도로 보는 반면, 함경도를 간도라고 표기한 지도도 존재한다.


과연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본다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요즘이야 국경이라는 것이 명확하게 구분되며 지도에 영토를 명확하게 표기한다.


하지만, 수백년 전에는 국경이라는 개념도 애매모호했고, 정확한 지도를 그린다는 것도 불가능했다.


대충 산기슭이나 강줄기가 있다면 이를 중심으로 경계를 나누었고,

길 한번 잘못들었다가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는 일은 허다했을 것이다.


간도라는 명칭에도  알 수 있듯이 명확한 지역이나 도시를 명칭했다기보다는

청나라와 조선 사이의 경계가 되는 지역을 그냥 간도라고 불렀을 것으로 보여진다.


(간도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열심히 정리해주신 자료)

http://blog.naver.com/cms1530/10068932122


국경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가 중국 대륙을 지배하기 위해서 대규모 이주를 하면서 시작된다.


만주족이 비워 무주공산이 된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한족의 이주를 장려했더니,

너무 많은 한족이 몰려들어 만주족의 전통이 훼손을 당하자 버드나무 울타리를 쳐서 이주를 막게 된다.


그러자 이번에는 반대편에 있던 조선인들이 야금야금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병자호란(1636) 이후에는 전쟁으로 끌려갔던 수십만명의 조선인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게 된다.


중국에서는 이 때 이주한 사람이 약 50만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며,

조선족의 이주 역사를 여기서부터 설명하지만 사실상 현재의 조선족과는 연결고리가 약한 편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오가기 시작하면서부터 경계는 흐릿해지기 시작했고,

출신이 다른 이주민끼리 분쟁이 자주 발생하게 되면서 청나라와 조선은 경계를 설정하게 된다.


1712년(숙종 38년/강희 51년) 청나라 사신 목극등이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면서

애매모호했던 국경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나 이 비문은 후에 논란을 증폭시키는 출발점이 된다.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이 되는 분수령에 돌을 새겼는데

여기에서 2가지 오류가 영토 분쟁의 씨앗을 만들게 된다.


첫 번째는 과연 토문강이 무슨 강을 지칭하는가의 문제이며,

두 번째는 경계비가 세워진 위치는 두만강의 수원이 사실상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한말 고종은 토문강이 송화강 지류라는 주장을 할 수 있었고,

이미 수많은 조선인들이 두만강 북쪽지역에 대규모로 거주하고 있었기에 무리한 주장도 아니였다.


특히 압록강 접경지역으로 분류되는 서간도 지역보다

두만강 접경지역인 북간도 지역에 대한 논란이 더욱 큰 것에는 지리적인 특성도 작용했다.


압록강은 배를 타고 건너가야 하지만,

두만강은 수심이 낮아 걸어서도 충분히 강을 건널 수 있다.


(두만강 도문 접견지역에서 바라본 북한 지역 - 생각보다 너무나 가깝다)


이미 조선시대부터 수많은 사람들은 두만강을 건너 청나라 사람들과 교류를 해왔고,

1880년대 청나라에서 봉금령을 해지하면서 조선인들이 본격적으로 대규모 이주를 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의 조선족의 기원이라고 볼 수 있는 초창기 생계형 이주자들이다.


다수의 조선인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중국인들이 이주자들이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청나라와 조선의 분쟁은 다시 시작됐고, 고종은 본격적으로 간도의 소유권을 주장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분쟁은 어이없게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제가

남만주철도 부설권과 푸순 탄광 채굴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를 넘겨주는 협약(1905)을 체결하면서 종료된다.


광복이후 다시 한번 소련의 지지를 등에 업은 북한은 간도의 소유권을 다시 한 번 주장하였으나,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이 간도의 중국 소유를 인정(1962)하게 된다.


+


사실 영토보다 더 관심이 갔던 것은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다.



워낙 오랫동안 방치되어왔던 비옥한 땅이기에,

청나라의 봉금령과 조선의 월강죄에게 불구하고 조선인들은 간도지역에서 도둑농사를 해왔다.


1869년 한반도 북부에 대규모 기근이 발생하자 함경도 일대 주민들은 목숨을 걸고 간도로 향했고,

1885년 봉금령이 해제되고 월강죄가 사라지면서 부터는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된다.


1899년 함경도 회령 종성 등에 거주하던 문병규, 남도천, 김하규, 김약연은

자신들의 식솔 141명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간도로 넘어와 명동촌을 개척한 것도 이런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학전이라는 명목의 땅을 따로 내어놓고 '학전'에서 나오는 수입을 교육기금으로 활용했다.

이들은 유교적 전통에 기반해 마을을 만들고 학교를 세웠으며 자신들의 문화를 이어갔다.


그리고 1906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에는 독립운동가들이 이 지역에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자연스럽게 신학문과 기독교가 이 지역에 전파되었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양성된다.


청산리 대첩, 봉오동 전투가 모두 이 지역에서 일어났으며,

문익환, 김재준, 강원용 등 진보적 기독교인들이 모두 이 지역을 거쳐갔다.


1930년대까지 이 지역에서 의병 및 항일 독립 운동이 활발할 수 있었던 원동력도

중국 영토와 기독교의 비호, 그리고 신학문으로 교육받은 인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1930년대 초 만주사변 이후에는 일제가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서

조선인들을 반강제적으로 동원해 농지를 개간하고 중국 동북지역을 군량미 생산 기지화하게 된다.


당시 조선인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이래저래해서 대략 216만 명의 조선족이 만주와 간도 지역에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래서 광복직후 약 80만명이, 중국 국공내전 기간에 약 30만명이 국내로 다시 귀국하게 되는데,

이들은 주로 일제에 의해서 반강제적으로 이주한 남한 지역 출신이였다고 한다.


결국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직후엔 1950년에는 111만 명의 조선족이 중국에 남게되고,

이 중 절반 이상이 옌벤 조선족 자치주 지역에 거주하게 된다. 


한중수교(1992)년 무렵에만 해도

조선족의 인구는 192만명에 달했으며 그 중 97%가 동북지역에 거주했으나,


지금 동북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죽은 50만명 정도 밖에 되지 않으며,

한국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80만명, 대도시에 거주하는 조선족이 50만명,

 제 3국 거주자가 약 20만명에 달할 정도로 조선족 마을의 공동화 현상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특히 2000년대 이후에는 학생 수가 급감하면서 마을 단위 학교들이 폐교되고 있고,

민족교육도 점차 쇠퇴하면서 점차적으로 민족적인 정체성도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고 한다.


실질적으로 조선족들은 한민족이 아닌 중국의 조선족이 되어가고 있으며,

특히 젊은 세대일 수록 도시로 떠나고 있고 역으로 한족들은 더욱더 유입되고 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시대적 현상일 수도 있지만,

이들이 남북화해와 대중관계의 주역으로 활용해야한다고 말로만 주장하면서

이들에 대해서 어떠한 조처도 없이 방관해 대한민국의 태도를 생각하면 뭔가 아쉬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들 중에 상당수는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이며 민족의 아픔을 감당한 사람들인데,

대한민국에서는 외교적/산업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자원으로만 접근해온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봤을 때 윤동주 생가에 표기된

'중국조선족애국시인'이라는 명칭이 조선족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표현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떻게 윤동주를 중국인이라고 표기할 수 있지?' 하면서 분노하는 한국인들이 많이 있지만,

조선족은 이미 물리적으로 중국인으로 분류되고 있으며 심리적으로도 한국보다 중국이 더 친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현실인 것이다.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대중교포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엄연히 중국인이다.

한국어를 사용하고 한국식 문화를 유지하고 있지만 어느새 그들은 중국인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또한 이들은 대부분 남한보다는 북한과 더 친밀하게 지내고 있다.


물리적으로 북한과 가까운 것과 남한 출신들이 해방 후 상당 수 국내로 귀국한 것도 중요한 이유지만,

조선족을 대하는 남한사람들의 태도 역시 중요하게 작용하는 듯하다.


조선족이 북한을 방문하기 위한 비자는 48시간이면 나오지만,

남한을 방문하기 위한 비자는 보증금 3000만원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한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의 기업들 역시 많은 조선족들과 컨택을 하지만,

문화적 차이와 인식의 차이가 너무 커서 단순 통역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모든 측면에서 조선족이 중요한 것은 맞지만,

뭔가 제대로된 관계 설정이나 상호간의 이해는 전혀 없이 기술적으로만 접근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시간이 조금만 흐른다면 사실 상 조선족은

그냥 중국의 다른 소수민족에 비해서 우리와 문화가 상당히 비슷한 존재 이상은 아닐 것 같다.


북한과 남한이라는 정치적 대립 상황 속에서 조선족은

그 어느쪽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중국 정부의 지원으로 생존해나고 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우리가 인터넷으로 키배를 뜨고 있는 세상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 어디에도 간도는 없었고, 우리민족이라는 연대는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우리가 너무 현실을 모른 체 우리들만의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제는 거의 이민 4세대로 넘어가고 있는 조선족들과

과연 우리는 어떻게 결합하고 연대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


단순히 우리 민족이니까 잘해보자는 접근은

너무 나이브 한 것을 넘어서 파렴치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고 알려고 노력했는가?


그들이 사는 세상에 대해서 그동안 우리는

관심도 없었고 그들에 대해서 아는 것도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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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얼음과 불의 노래 - 윤동주와 안중근

2017.08.20 01:56


2017년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


어렸을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름을 들었던

하지만, 정작 왜 그런 삶을 살았는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두 남자의 삶의 흔적을 살펴보았다.



불꽃같은 삶을 살다가 뤼순감옥에서 생을 마감한

안중근 (1879 - 1910)


삶을 고뇌하다가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한

윤동주 (1917 - 1945)


동일한 시기를 살지는 않았지만,

일본 제국주의에 대하여 불과 같은 심장과 얼음과 같은 정신으로 맞섰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존경받고 사랑받고 있는 인물들이다.



대한민국에서 정규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독립투사 안중근과 저항시인 윤동주의 이름은 다들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는 것과

윤동주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을 냈다는 것도 대충은 알고 있다.


하지만,

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는지와

왜 윤동주가 끝없이 고뇌에 찬 시를 썼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그들의 행적을 따라가며 그들의 삶을 느껴보고

오늘날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생각해보는 것이였다.


+


내 마음에 먼저 들어온 것은 불꽃청년 안중근이였다.


"어렸을 때 이름은 '응칠(應七)'이였으나, '성질이 가볍고 급한 편이여서 중근(重根)'이라는 이름으로 사용하게 됐다" 라고 스스로 자서전인 <안응칠역사>에 남길 정도로 거침없는 상남자 스타일이다.


조선말기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해보겠다고 가족을 떠났고,

그의 어머니는 또한 쿨하게 처자식까지 있는 그를 보내주었다.


잘생긴 외모에 거침없는 언변, 그리고 명필까지...

모두가 꿈꾸는 영웅호걸 다운 독립투사의 이상향같은 존재이다.


하지만, 정작 왜 하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알려지지 않았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은 1909년 10월 26일로

아직까지 국권을 침탈당한 경술국치(1910년 8월 29일)가 일어나기 1년 전이다.

(시기적으로도 독립운동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에 좀 애매한 시점이다.)


또한, 물리적인 측면으로만 봐도

러시아 점령하고 있는 중국 땅에서 한국인이 일본 근대화의 영웅을 저격한 것이다.


러시아, 중국, 조선, 일본이라는 4개국가가 직접 연결되어 있었으며,

영국과 러시아의 변호인이 안중근의 변호를 자청할만큼 국제적인 관심을 받았던 사건이다.


그리고, 안중근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동양평화'를 위한 결단이였다고 주장했다.


일제로써는 근대화의 영웅이 암살을 당한 테러사건이였지만

안중근의 거사는 정치적/외교적으로 굉장히 많은 상징성과 메세지를 담고 있었다.


체포 된 이후 하얼빈 영사관에서부터 뤼순감옥, 관동법원에 보인 언행을 보면,

안중근은 '동양평화'라는 원대한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고도의 정치적 외교적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안중근이 주장한 '동양평화론'은 단순히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였으며,

3국의 중립지대 설치, 평화회의 개최, 공동은행, 공용화폐 등 굉장히 구체적인 구성이 담겨있었다.


사형집행일이 급하게 잡히는 바람에 완성을 못해서,

안중근이 구상했던 전체적인 내용을 현재로써는 알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안중근은 독립투사보다는 평화의 수호자에 가까웠으며,

단순히 민족의 독립만 생각한 것이 아니 동양 전체의 평화를 주장한 사상가라 할 수 있다.


안중근을 대면했던 검사와 헌병, 형무소장의 태도를 보면

안중근이 어떤 인물이였는지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형무소장이였던 구리하라는 안중근에게 특별히 독방을 내주며

다양한 편의를 봐주면서 수시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로 지냈으며,


하얼빈에서부터 안중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던 간수 지바 도시치는 

고향으로 돌아가 매일 안중근의 영정과 위폐를 모시며 기념비까지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지바 도시치의 스토리 보기: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857233)


뤼순감옥에는 수많은 정치인들이 수감되어 있었지만,

안중근은 수감시절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지금도 특별히 하나의 섹션을 구성해 놓을 정도로

중국인들에게도 굉장히 강한 영향력을 준 인물이였다.


한국에서는 그를 독립투사로 자꾸 한정하고 있었지만,

안중근의 시선은 이미 동양평화를 향하고 있었고 당대의 영향력은 엄청났다.


이런 부분들이 사실 제대로 부각되지 못한 체

우리가 너무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안중근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


하얼빈에서 만난 안중근의 행적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겠다는 목적 하나로 하얼빈에 왔고,

저격한 이후에는 체포된지 며칠만에 바로 뤼순 감옥으로 이송되었기에,

실제 안중근이 하얼빈에 머문 것은 11일 밖에 되지 않는다.


안중근의 흔적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은 하얼빈 역 안중근 기념관이다.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이 기념 표지석을 세워달라는 요청에 시진핑 주석이 화끈하게 응답한 결과물이다.


하지만, 지금은 하얼빈 역 자체가 대규모 공사중이라서 아쉽게도 볼 수 없었다.

(2020년까지 공사가 진행된다고 하니 방문을 원하시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대신 임시로 마련된 듯한 안중근열사기념관을 통해서 흔적을 확인해볼 수 있었다.

임시로 마련해서 그런지 사진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허름해서 좀 아쉬움이 많이 느껴졌다.


아쉬움을 달래며, 안중근의 흔적들을 찾아서 하얼빈 시내를 돌아다녔다.


안중근이 거사를 모색했던, 김성배의 집터와 동흥학교, 조린공원은

모두 걸어다닐 수 있는 동선에 있었다.


10월 22일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은 김성백의 집에 체류하면서

3일간 조린공원과 동흥학교 등을 돌아다니며 거사를 준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행히 조린공원에는 안중근의 흔적을 기념할 수 있는 표지석이 만들어져 있지만,

동흥학교와 김성백의 집터는 아는 사람만 찾아갈 수 있는 상황이다.


특히 김성백 집터는 이전 주소를 통해서 위치가 대충 확인될 뿐이며,

현재 주변 지역이 공사중이라서 머지 않아 이 일대가 모두 철거될 예정이라고 한다.

(김성배의 행적과 안중근과의 인연을 생각해보면 너무나 안타까운 상황이다.)



+


첫날, 하얼빈에서의 안중근의 흔적이 안타까움의 연속이였다면,

마지막날, 대련에서의 안중근의 흔적은 그래도 위안이 되는 부분이 많았다.


많은 한국인들이 그곳을 방문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뤼순감옥과 관동법원에서는 안중근과 관련된 많은 것들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주은래나 쑨원 등이 안중근에 대해 남긴 평가 뿐만 아니라,

실제 안중근이 사용했던 감옥이나 관련 자료들이 굉장히 잘 전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뤼순감옥과 관동법원의 음산한 분위기는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이러한 곳에서 안중근은 5개월 가까이 지내며 글을 쓰고 공판에 참여했던 것이다.


당시 안중근의 공판은 큰 화제였으며, 방청을 위해서 전 날부터 줄을 서는 진풍경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가 워낙 일본에서는 거물이였기에

재판을 진행하는 판사와 검사에게도 외부에서 엄청난 압박이 가해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 관선 변호사들은 안중근의 형량을 줄이기 위해서 단순 살인 사건임을 주장했다.

그리고 피고인의 신분상의 애매모호성을 강조하며 처벌이 불가함을 주장했다.


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안중근은 이러한 모든 것을 부정했으며,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써 이토를 죽인 것이고 국제공법에 의해 처벌해줄 것을 요구했다.


마침내 사형을 선고받은 안중근은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는가?'라고 되물었으며,

집핍을 끝마치지도 못한 체 항소도 하지 않고, 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져버렸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안중근의 시신을 아직도 수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효창공원의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묘지 옆에는 안중근의 가묘가 남겨져 있으며,

언제든 안중근의 유해가 수습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형무소장이였던 구리하라는 사형이 집행된 이후 시신을 수습해 장례 미사까지 치뤄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안중근의 유해가 반일 운동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시신을 유족에게 인도하지 않았다.


1945년 패전한 일본은 뤼순 형무소의 모든 기록을 소각해버렸고,

현재로써는 뤼순 형무소 뒤편의 사형수 묘지에 묻혀있을 것이라는 추정만 가능한 상황이다.


더군다나 황해도 해주 출신의 안중근은 북한에서도 굉장한 존경을 받고 있기에,

중국 정부에서도 남한의 유해발굴 작업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국가와 민간 차원의 유해 발굴단이 수차례 뤼순을 방문했고,

일대 주민들과의 끈질긴 탐문 조사를 통해서 어느 정도 위치를 파악하기도 했지만

현재로써는 중국 정부의 협조 없이는 더 이상 일을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안중근은 죽는 순간까지 동양평화를 주장했지만,

안중근이 상상하지도 못했던 북한과 남한이라는 새로운 적대관계는

죽은 안중근이 아직도 구천을 떠돌며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상황이다.


안중근이 서거한지 벌써 100년이 넘었지만 동양평화는 아직도 묘연하다.


+



동(冬)섣달 꽃과 같은,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



윤동주가 가장 존경해마다하지 않았던 시인 '정지용'은

사후 윤동주의 시집이 처음 발간될 때 서문에 그를 이렇게 표현했다.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광복을 경험하지 못하고 죽었던 윤동주에게

대한민국은 언제나 추운 겨울이였고 자신은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잉어 한 마리였다.


윤동주는 흔히 민족시인이자 저항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삶은 독립운동이나 적극적인 저항과는 사실상 거리가 멀었다.


일각에서는 윤동주의 죽음을 시대적 분위기에 억울한 희생량으로 보기도 한다.

그래서 저항시인으로 포장되는 부분이 다소 과장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영화 '동주(2016)'에도 이러한 시각은 살짝 반영되어 있다.


동주 [일반판] (2DISC) - DVD
배급 : 이준익 / 박정민,강하늘역
출시 : 2017.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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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민족주의적 시각은 윤동주의 시를 너무 과도하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윤동주의 삶과 행적들을 돌아볼 때 좀 더 문학적 감수성을 그의 시를 볼 필요는 있다.


윤동주는 끊임없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고뇌했으며

절망적인 사회적인 상황에서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의 시는 이러한 외부적인 환경과 개인적인 고뇌 가운데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시대의 아픔을 노래했으며 개인의 마음을 담아낸 것이다.


아름다운 한글로 시를 썼다는 점에서는 철저히 일제에 저항했지만,

일제의 탄압에 대해 순응하며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일부 기록을 통해서 저항적인 면모들도 나타나지만

평생의 동지였던 송몽규에 비해 그의 행보는 확실히 차이가 존재한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윤동주의 시는 좀 더 문학적이며 인류애적 시각에서 볼 필요가 있다.


암울한 시기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도 못했던 인텔리의 고민들이 승화되어있는 것이다.


송우혜가 쓴 <윤동주 평전>에 따르면 윤동주는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지만,

사상적으로는 송몽규와 같이 민족주의적인 측면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윤동주 평전
국내도서
저자 : 송우혜
출판 : 서정시학 2014.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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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함께 체포됐던 고희옥은 윤동주를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아주 농했던 창백한 인텔리'로 묘사했다고 한다.


송몽규처럼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 이미 윤동주도 사상적으로는 한 배를 타고 있었다.


증거우선주의 원칙에 따라서 고희옥을 풀어준 것을 봐도

윤동주도 자신의 사상에 대해 어느 정도 문서화된 기록을 남긴 것으로 예측이 된다.


일본으로 건너 간 이후에는 강처중에게 편지로 보낸 5편의 시만 전해지기에 확인이 어렵지만

교토에서의 윤동주는 좀 더 송몽규와 친밀하게 움직였던 것으로 예측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희전문대학시절의 시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민족주의적 시각을 들이대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민족주의라는 시각이 오히려 윤동주 시가 가진 인류 보편애적인 가치를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아름다운 한글로 시를 썼으며 이를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특히 연전 4학년 시절(1941) 쓰여진 시들에서는 기독교적 색채도 강하게 녹아져 있다.


저항시인 윤동주보다 인간 윤동주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이 부분에 있다.



아름다운 명동촌에서 수많은 동시를 썼던 윤동주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송몽규를 따라서 문인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 윤동주

기껏 부모님 졸라서 평양에 갔다가 숭실중학교 편입시험에 떨어졌던 윤동주

아버지의 반대에도 무릎쓰고 시인의 꿈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윤동주

한 여인을 남몰래 짝사랑하며 고백한 번 해보지 못한 윤동주

송몽규은 경동제대에 합격했지만, 릿쿄대학에 입학할 수 밖에 없던 윤동주

몰래 도시샤 대학으로 편입하고 차마 고향집에 찾아가지도 못한 윤동주


강력한 카리스마의 민족 저항시인이기 보다는

너무나 인간적이고 하나하나가 마치 내 이야기 같은 윤동주의 이야기이다.


굉장히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캐릭터를 가지고 있었지만,

윤동주를 둘러싼 시대적 상황은 너무나 극단적이고 암울하기만 했다.


그 시대를 살아가야만 했던 윤동주는 이러한 아픔과 고통을

'시'라는 언어를 통해서 고귀하게 승화시켜버렸다.


일제에 순응했던 문학가들이나 독립운동에 투사한 실천가들 사이에서

윤동주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그 시대를 살아갔던 것이다.


윤동주의 삶은 너무나 인간적이기에 매력적이면서

그의 시는 너무나 인간적이기에 시대적 아픔이 더욱 더 강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그 시대에 내가 태어났더라면 난 아마도

이광수나 송몽규가 아닌 윤동주와 같은 삶은 살았을 것을 같다.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에 순응할 수도 없는...

지식인으로써의 양심과 생존의 갈림길에서 선택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윤동주는 이러한 고통을 시로 승화시켜서 시대의 아픔을 대변해주었던 것이다.


일본 유학시절 윤동주는 실천까지 이어지진 않았지만,

지식인으로써 민족을 위해 무엇을 할지 송몽규와 많은 생각을 나눈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기록들이 결국은 윤동주가 2년형을 언도받게 만들었으며,

형무소에서 일본군의 생체실험에 이용되어 옥사에 이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윤동주의 재능을 생각하면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라 할 수 있다.

왜 하필 그 시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어 옥사까지 이르렀을까...


하지만, 반면에 광복 이전에 일본에서 옥사했기 때문에

광복 이후, 시대의 아픔을 노래한 그의 시가 더 주목받을 수 있었다.


윤동주는 죽었지만, 그의 죽음이 그의 시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준 것이다.


다만 민족주의적 해석이 너무 강한 나머지

원래 그의 시가 가진 아름다움이 희석된 측면이 있다는 점이 함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윤동주를 다시 살려내기 위해서는

인간 윤동주가 가지고 있었던 시대적인 아픔과 개인적인 고뇌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얼음같이 차겁고 냉정한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차갑게 불렀던 그의 노래는

안중근의 가졌던 열정보다 더욱더 뜨겁게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매력이 있다.


이것이 안중근처럼 현실에서 직접 실천하지 않더라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문학이 가진 힘이라고 할 수 있다.


+


이번 중국 여행을 통해서 만났다던 2명의 인물은 상반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뜨거운 가슴으로 행동한 안중근

차가운 지성으로 고뇌한 윤동주


하지만, 안중근의 행동은 동양평화에 대한 사고의 확장을 가져왔으며,

윤동주의 문학은 시대의 아픔을 승화시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든다.


불이 얼음을 녹이고, 얼음이 불을 죽이듯

이들의 행적과 이들이 남긴 메세지들은 우리의 가슴을 다시 한 번 뛰게 만든다.


그리고 이들이 추구한 것은 단순히 민족이 아니라 평화와 사랑이라는

인류 보편적인 가치였다는 점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이를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는 철저히 우리의 몫이다.


윤동주가 송몽규, 정병욱, 강처중과 함께 했던 것처럼

안중근이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했던 것처럼


우리가 과연 어떤 사람들과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윤동주처럼 괴로워하거나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것까지 안중근처럼 뛰어들어보거나


선택은 우리에게 달렸다.


그 선택이 무엇이든 우리가 선택한 내일은

분명 오늘과 다른 새로운 날일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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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China / Beijing ⑬ - 베이징에서 밥먹고 다니기

2014.07.21 23:11


여행에서 먹는 이야기를 빼먹을 수는 없다.


개인적으로 별로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입맛도 까다롭지 않아서 음식에 대해서 민감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왠지 여행가서 먹을꺼리 이야기를 안할 경우에는

뭔가 빠진 듯하여 가이드북을 찾아보면서 맛집에 대한 정보도 열심히 메모해두었다.


사실 거기를 꼭가봐야한다는 것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소개된 곳들을 가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였다.



근데, 주객이 전도되었다고 별것도 아닌데 그것때문에

길찾아서 헤매고 괜히 안가도 되는 곳까지 찾아가고 하냐고 에너지 낭비가 심했다.


그래서 3일째까지는 열심히 찾아다녔으나...

그 이후로는 그 에너지면 관광지를 하나라도 더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맘을 비웠다.


맘을 비우고 그냥 일반 밥집에 자주 가게 되었다.

(한국식으로 이야기하면 김치찌개나 된장찌개를 먹을 수 있는 백반집)



그리고, 가이드북에 나온 집들을 찾아다니면서 느낀 것은

굉장히 유명하고 비싼집들 위주로 설명이 나와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을 소개하는 가이드북에 

어떤 음식점이 나올까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과일 수 밖에 없다.


동네 지나다니는 밥집이 소개될리는 만무하며,

설사 현지인들이 싸고 맛있다고 생각한다해도 여행객에게는 다르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오래된 집 위주로 소개할 수 밖에 없고,

어느 정도 맛이 검증된 특색을 갖춘 중국의 프랜차이즈 음식점들을 소개할 수 밖에 없다.



가이드북에 소개된 음식점들은 대부분 1인당 70위안 이상으로

많게는 1인당 200위안 씩 되는 음식점들도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


서민들의 경우 10~20위안으로 한끼를 먹는 것이 다반사이며,

간단한 요리를 시켜 먹으면 1인당 50위안 수준에서 밥을 먹는다.



1인당 100위안씩 하는 음식은 특별한 날이나 먹는 음식으로

사실 한국에서도 17000원 정도 하는 음식을 평소에 먹는 음식이라 부르기에는 과한 편이다.


한국으로 이야기하면 한정식집이나,

삼호가든, 샬레드고몽 같은 유명 식당들을 소개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퓨젼 요리로 뜨는 체인이라고 비비고, 마마스같은

다소 비싸지만 특색있고 새로 뜨는 체인들을 소개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어짜피 가이드북을 찾아다니면서 맛집을 다닐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돈을 지불하고서라도 특색있는 음식을 원하기에 그렇게 소개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중국 주재원인 누나는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비싼집이나 어느 정도 검증된 프랜차이즈들만 소개한다고 불만이였지만 

나처럼 중국에서 10년 산 주재원과 여행다니는 사람은 드물기에 일반 밥집을 찾아들어가기도 힘들다.


암튼, 초반 3일동안은 럭셔리하게 잘 먹고 다녔고,

나머지 3일동안은 동네 식당에서 중국식 현지 음식을 맛볼 기회를 가졌다.


남들은 중국 식당 아무 곳이나 들어가서는 음식조차 제대로 시킬 수 없다고 하지만,

나야 뭐 누나가 알아서 한국인의 입맛에 맞을만한 음식만 잘 시켜주니까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리고 워낙 식성 자체가 까다롭지 않아서,

남들은 못먹는다는 쌍차이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잘먹었다.



사실 중국의 음식점은 다들 어느 정도 요리를 잘한다고 한다.

특히 쓰촨성같은 경우에는 왠만한 식당에 들어가도 실패할 일이 거의 없다고 할 정도란다.


근데 가장 큰 문제는 요리의 종류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쓰촨요리, 광둥요리, 북경요리, 산둥요리 이런식으로 구분이 되는 것은 옛날 이야기이고,

어느 음식점을 가도 이 모든 것을 다 취급하는 것은 기본이며 심지어 여기서 퓨전화된 음식들까지 존재한다.


그나마 일반 밥집에 가면 메뉴가 조금 달촐해지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프랜차이즈 식당의 경우에는 지역은 기본이고 국적도 불분명한 요리들로

메뉴판이 너무 두꺼워서 사진을 보면서 시키는 것도 매우 힘든 지경이다.



음식을 사진만 보고 고르는 것도 찝찝한데,

문제는 사진을 봐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는 점에 있다.


누나의 조언대로 탕류는 왠만하면 기름져서 못먹는다고 해서 제외하고,

대부분의 쎈 불에 볶은 요리 위주로 많이 먹게 되었다.

(사실 쎈 불에 볶은 요리가 어찌보면 중국요리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볼 수도 있을 듯하다)


암튼 종류도 너무나 다양하고 가격도 진짜 너무 천차만별이라서

아무것도 모르는 나같은 사람은 가이드북에서 소개시켜주는대로 다니는 것이 속편할 듯하다.

(문제는 관광지 찾아다니는 것보다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이 더 어렵다는 사실...)



그리고 어느 정도 검증된 음식점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아직까지 중국 사람들조차 식품의 안전에 대해서 장담하기 어려운 것이 중국의 현실이다.


워낙 이상한 재료로 음식을 만든 사건들이 많이 터져서~

기본적으로 길거리 음식이나 값이 싼 음식들에 대한 불신이 많이 커졌다고 한다.


부자들이야 조금 돈 더 주더라도

안전한 음식을 먹기 위해 비싼 음식점으로 향하게 되지만,


서민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값이 싼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기 일수이고,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들이 중요한 식품의 공급처인 것이다.



어짜피 굉장히 비싼 음식점 아니면 안전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이기에,

그냥 왠만해서는 믿고 먹는 수밖에 없는 듯하다.


그래도 난 서민적인 음식들을 체험한 것들이 더 기억에 남는 듯하다.


워낙 음식의 맛을 안따져서 그런 것일수도 있지만,

그래도 비싼 음식점에 갔을 때 같은 볶음 요리도 불맛이 느껴지는 것을 보면 아예 맹추는 아닌 듯하기에


내가 먹은 것은 음식보다는 서민들의 생활이요 향기였던 것같다.

아이와 함께와서 출근하는 길에 들려서, 퇴근하는 길에 친구와 함께 밥을 먹는 모습들을 보며,

그들과 같은 공간에서 그들의 일상을 즐긴다는 것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비싼 음식점에서도 그러한 곳에 올 정도의 생활 수준이 되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으며 어떤 것을 먹는지 보는 것도 나름 흥미꺼리였다.


한국도 소득차에 따라서 다른 수준의 식당을 즐기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가격표를 보고 있으면 중국에서의 빈부격차가 너무나 크다는 것이 절로 느껴졌다.


한 식구가 먹을만한 가격을 1인분으로 먹어야 하는 식당이지만,

그런 식당들도 언제나 사람들이 바글바글해서 줄서서 대기표를 뽑고 기다린다.



의외로 가장 기억에 남은 음식은

요리사가 직접 옆에 와서 잘라주었던 베이징 카오야가 아니라

숙소 주변에서 새벽 4시부터 나와서 판매를 하고 있던 전형적인 아침식사였다.


한국으로 치면 아침부터 김밥파는 것과 비슷한 모습인데,

국기게양식을 한 번 보겠다고 새벽부터 나가는데 벌써부터 나와서 음식을 파는 모습이 인상적이였다.


식당이란 식당에서는 모두 이런 식으로 길가로 나와서 음식을 파는데,

분명히 저녁 10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것을 봤는데 한 집도 빼지 않고 새벽 4시면 다 나와있었다.


한국 사람들도 대단하다고 하지만, 

만만디 중국인들도 돈 버는 일에 대해서만큼은 진짜 대단할 정도로 부지런하다.


일어나자마다 숙소에서 슬리퍼 끌고 나와서 

튀긴 빵과 찐 만두, 삶은 계란을 한 보따리 샀는데,


말도 안통하는 나에게 어떻게든 더 팔아보겠다고 자꾸 흥정을 붙이는 모습이

한 편으로는 귀여우면서도 악착같은 이들이 한 편으로는 무섭게도 느껴졌다.


중국이 전 세계의 예상을 뛰어넘는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룬한 배경에는

이러한 서민들의 모습들이 숨겨져있다는 사실에서 예전의 대한민국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암튼 중국은 뭐 하나를 봐도 그냥 넘길 수 없는 

볼 때마다 새롭고 알면알수록 더욱 모르겠는 대단한 나라이다.

열린 공동체 사회 Travel 베이징 카오야, 빠오즈, 중국 아침 식사, 중국 음식

2014 China / Beijing ⑫ - 금일미술관(今日美术馆) 그리고 중국미술관(中国美术馆)

2014.07.21 10:38

베이징에는 3개의 유명한 미술관이 있다.


중국미술관(中国美术馆)

금일미술관(今日美术馆)

중앙미술학원 미술관(中央美术学院 美术馆)


마음같아서는 모두 방문해보고 싶었으나...

역시나 여행에서 가장 큰 문제는 항상 부족한 시간이다.


다산쯔798과 함께 방문하고자 했던 

중앙미술학원 미술관(中央美术学院 美术馆)은 일정이 꼬여서 실패했고,


중국미술관(中国美术馆)과 금일미술관(今日美术馆) 중에 고민하다.

환타아저씨의 추천 별점에 혹하여 금일미술관(今日美术馆)을 선택하기로 했다.



중국미술관(中国美术馆)은 1962년 개관한 국립미술관이다.


외관에서부터 느껴지는 거대함이 최고의 명성을 자랑할 듯하지만,

오히려 국립이라는 정체성에 발목이 잡혀서 얼마 전까지도 사회주의를 찬양하는 도구로 활용되었었다.


국립이라면 왠지 좋을 것 같아보이지만,

역시나 예술이라는 분야는 어디에 구속되어 있을수록 오히려 그 한계가 드러나기 마련인 듯하다.


하지만, 2003년 리뉴얼 과정을 거쳐서 과거의 정치 색깔을 빼버리고,

중국의 전통 미학을 중심으로 다양한 특별전을 개최하면서 새롭게 명성을 얻고 있다고 한다.


얼마나 정치적 색깔이 빠져있는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금일미술관(今日美术馆)이나 중앙미술학원 미술관(中央美术学院 美术馆)에 다소 밀리는 느낌이다.


중국미술관(中国美术馆)이 왕푸징이라는 베이징의 한복판에 위치해있다면,

금일미술관(今日美术馆)은 베이징 동쪽의 다소 외진 신도심에 위치하고 있다.



물론 지리적으로는 외각지역이고 지하철 역에서 10분정도 걸어가야만 하지만,

동네 분위기나 거주자들의 모습들을 보면 새로 개발되어서 부유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 같은 느낌이다.

(인근 맥도날드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그동안 본 중국인들과는 좀 다른 서울의 강남지역 같은 느낌이 좀 들었다)


미술관의 외형부터도 중국미술관(中国美术馆)과는 너무나 다른

현대 미술을 중심으로 다루는 중국 최초의 비영리 개인 미술관이라는 느낌이 입구에서부터 느껴진다.



금일미술관(今日美术馆)은 

2002년 중국 제일의 부동산 개발업자 장바오첸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장바오첸은 베이징 영화 아카데미를 졸업했으며

'문화가 있는 개발'이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사업을 진행한다는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미친듯이 진행되는 개발로 돈밖에 모르는 중국인들이라는 비난에 대해서 다소 의외의 인물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미술관 역시도 현재를 나타내는 것뿐만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는 것을 주제로 삼아서

현대 미술을 주로 다루면서도 젊고 창의적인 예술가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하고 있다.

(단순 전시 기회만 주는 것이 아니라 인재 육성을 위한 아카데미 프로그램까지 연결하여 폭 넓은 지원을 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중국에만 국한되지 않고 비중국인들의 전시도 자주 유치하면서,

국립 시설인 중국미술관과는 확실히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굉장히 대조적인 공간이다.

(두 곳을 모두 방문해서 비교할 수 있었다면 매우 좋았을텐데 굉장히 아쉬움이 많이 드는 대목이다)



건물을 구성도 매우 특이하다.

총 6개의 전시관으로 구성되어있지만 공간은 3개로 나뉘어서 활용되고 있다.


핵심이 되는 메인 전시장은 원래는 보일러 공장이였다고 한다.


건축가 왕 후이는 건물의 외관을 그대로 보존하려고 했지만 

주변의 현대적 건물들과 맞지 않는다는 주변 건물들의 비난에,

사다리꼴 모양의 철제 구조물을 세워서 독특한 건물 외관을 창출하는 것으로 타협을 해주었다.


이 건물 2층에는 메인 안내데스크가 존재하며 티켓도 이곳에서 구입하는데 

중국여행 중 최초로 영어를 너무나 능숙하게 잘하는 안내원을 만나서 천만 다행이였다.

(전시관이 너무나 다들 떨어져 있어서, 만약 영어를 못했다면 나머지 전시관들을 못 찾아갈 뻔했다는...)


여담으로 중국의 안내원들은 대부분 영어를 잘 못하지만,

영어로 무엇을 물어보면 최대한 친절하게 도와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한국 사람처럼 중국인들과 쉽게 구분이 안되는 외국인들은

중국어를 잘하더라도 되도록이면 영어를 사용하는 것이 훨씬 이득인 것 같다.

(중국어를 너무 잘해서 자연스럽게 물어보면 오히려 굉장히 불성실하게 대답해주기 일수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전적으로 중국어 잘하는 누나에 의존하다가

언젠가부터는 일부러 내가 가서 영어로 물어보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어로 하다가 말이 잘 안통해서 떠듬떠듬 중국어로 물어보면 굉장히 기뻐하면서 친절히 알려준다)


메인 건물에는 총 3개의 전시관이 존재하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부터 2층까지 차례로 관람을 하면 된다.



나머지 전시관은 별도 건물에 위치하고 있다.

금일미술관 본관 뒷편에는 아트센터라는 아주 기다란 형태의 건물이 존재한다.


여기도 예술과 관련된 시설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중간 중간에 있는 식당들도 일반 식당과는 좀 다른 예사롭지 않는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금일미술관 옆의 건물 역시 뭔가 예사롭지 않은 건물이지만,

이 곳은 예술과 관련된 건물같지는 않고 주상복합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암튼 이 건물 사이로 길게 길이 나 있는데,

이 사이에 위치한 온갖 조형물들이 굉장히 인상적이여서 살아있는 전시회를 온 느낌이다.



다싼즈798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중국 사람들은 진짜 외부 조형물을 너무나 좋아하는 듯하다.


건물당 1개는 기본이고, 왠만하면 2~3개씩 전시해놓고 있다.

그리고 그 모양이나 형태도 매우 다양해서 지나가면서 볼꺼리가 쏠쏠하다.


양 옆으로 길게 늘어선 조형물들은 무슨 놀이동산(?)에 온 듯 하지만,

그 형태가 괴기한 것들이 너무나 많아서 마냥 즐겁게 보기에는 좀 심오하다.



본관 앞에는 중국 현대미술의 거장이라 불리는

웨민쥔의 작품이 조형물로 만들어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웨민쥔의 작품은 베이징 여행을 하는 내내 굉장히 자주 볼 수 있었다.

원래 웨민쥔이 누구인지도 몰랐으나 너무 비슷한 작품이 계속보여서 도대체 누군지 찾아봐서 알았다.


자신의 웃는 모습을 다양한 형태로 표현한 그의 작품은

다른 작품을 봐도 한 눈에 웨민쥔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독특함을 가지고 있다.


항상 밝게 웃는 듯한 모습을 하고는 있지만,

그 웃음이 절대 웃기지 않는다는 점이 너무나 강렬하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밝고 즐거운 것이라고만 생각해왔던 웃는 얼굴이

중국 인민들의 애완을 이렇게 잘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웃는 얼굴이라는 단순한 소재를 가지고

이렇게 다양한 작품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그 천재성에 놀랄 수 밖에 없다.


회화로 볼 때나 조형물로 볼 때나 각각의 느낌도 너무 다르고,

같은 작품 안에서도 너무나 다양한 표정과 느낌을 전달하고 있어서 너무나 신비로운 작품이다.



당연히 별관 앞에도 매우 독특한 작품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모든 작품들이 한결같이 매우 강렬한 인상을 주고 있어서,

사실 계속보고 있다보면 좀 피곤한 측면도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좀 가볍고 쉽게 쉽게 넘어갈만한 작품이 없다보니,

하나하나 유심히 보고 있으면 조금 피곤해지는 경향도 있다.


다들 대단한 작품인 듯하기는 한데,

뭔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듯하고 한마디도 좀 과하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사실 이러한 느낌은 조형물에서만 느끼는 것은 아니다.

도시의 풍경을 볼 때도 전반적으로 대단한 것들이 많이 있는데,

뭔가 정돈되고 절제된 느낌은 찾아보기 힘들고 어딜가나 뭔가 과하다는 느낌이랄까?


처음에는 대륙의 힘이구나~ 하고 대단하고 생각했는데,

너무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균형과 조화를 고려한 흔적은 찾아보기 힘든 느낌이다.


가끔은 과하지 않게 절제되고 생략된 것도 멋질텐데,

너무 화려하고 대단한 것들만 계속 있으니까 보는 사람이 오히려 피곤한 느낌이다.



하지만, 전시관 내의 시도들은 나름 신선했다.


전반적으로 너무 과하다고 흉본 것을 살짝 들었는지

한 명의 작가에 의해서 기획되어서 정돈된 느낌이 들어서인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상당히 과감하게 생략하는 묘미를 잘 보여주었다.


아주 넓은 전시공간 자체를 모빌만 설치해놓고 

모빌에 영상을 빔으로 쏘아 바닥에 누워서 그 영상을 감상하게 만들어두었다.


굉장히 단순하면서도 엄청난 작업을 해놓은 발상 자체가 참신했고,

이 넓은 공간을 이 한 작품으로 채울 생각을 한 것 자체에 대해서도 대단하다고 생각되었다.

(너무나 넓은 공간에 편안한 모래쇼파를 배치해놔서 영상보다가 살짝 잠도 자고 나왔다)



이에 비해서 제2전시관에서 본 회화 작품은

나름 독특한 느낌이 있고 강렬한 인상을 주기는 하는데 별로 정이 안갔다.


다싼즈798에서도 조형물에 대해서는 볼 때마다~

와 대단하다~ 독특하네~ 멋진데? 이런 반응을 보였으나, 

회화작품들에 대해서는 강렬하기는 한데 뭔가 비호감이 계속 느껴졌었다.


조형물들도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기괴함이 많이 녹아져 있기는 한데,

회화의 경우에는 그게 그 다지 호감으로 연결되기 보다는 비호감으로 계속 느껴졌다.


뭐 그냥 느낌이라서 왜 그런지는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그냥 뭔지 모르겠는 중국만의 기괴함이라고 이야기할 수 밖에 없을 듯하다.



물론 모든 회화 작품이 그런 것은 아니다.

내취향에 맞게 굉장히 심플하고 모던한 스타일의 작품도 종종 눈에 띄었다.


강렬한 느낌은 덜하지만, 또 이런 작품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것이

인구 14억의 중국 대륙의 힘인 듯하다~ 진짜 뭐하나 없는 것이 없다고나 할까?



아트센터에 있는 위치하고 있는 제2전시관에서

제3전시관을 찾아가는 그 사이에도 조그만한 전시관이 하나 더 있었다.


굉장히 소규모 전시전으로 포스터 한장 달랑 붙어 있어서,

유심히 보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쳐버릴만한 아주 아담한 공간이였다.


가만히 서 있는 조형물한테 살짝 인사라도 하려고 갔다가,

여기에도 전시관이 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들어가본 전시관이다.

(젊은 작가를 위한 개인전이였는지 사실 안에 작품은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은 듯...)



제3 전시관에서는 매우 독특한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일단 들어가자마자 입구에 전시된 작품이 눈에 확~ 들어왔다~


유명인사로 보이는 듯한 사람들의 방명록을 작품으로 전시해놓은 것이다.

전시 때마다 그냥 적어놓고 지나가는 방명록을 전시작품으로 활용할 생각을 하다니...


이들이 유명인지, 아님 아무나 그냥 방명록을 남겨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알록달록 배경색을 잘 구성해 보기에도 이쁠뿐만 아니라 매우 인상적인 작품이였다.



작가는 매우 독특한 사람임에 틀림 없었다.


'십이야'라는 이 독특한 작품은 하루 밤에 이루어지는 남녀간의 대화를

다양한 앵글에서 동시에 찍어서 그 것을 한 꺼번에 볼 수 있도록 빔으로 쏴주는 작품이다.


커튼으로 쳐있는 입구를 지나서 들어가면

4면으로 둘러싼 벽에 각각 다른 각도에서 촬영한 영상이 동시에 상영되고 있다.


당연히 중국어를 모르기에 뭔소리를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남녀의 모습을 다양한 각도에서 감정이 잘 살아나도록 찍은 것이 인상적이다.


같은 상황도 시각이 다름에 따라서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매우 극명하게 잘보여주고 있어서 모래쇼파에 누워서 하나도 못알아들으면서도 한참을 보다 나왔다.


   


더 독특한 전시는 바로 옆 방이였다.

메인 전시룸 옆에 또 하나의 커튼이 있었고, 그 커튼을 졎히고 들어갔더니...


어두운 공간에 긴 벤치형 의자만 달랑있고, 조명이 그곳을 비취고 있었다.

바닥의 화살표를 따라서 의자 옆에 있는 커튼을 졎히고 들어갔더니 좀 전에 본 영상의 세트장이 있었다.


물론 배우들은 그들이 아니였고 그다지 연기를 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냥 앉아서 자기들 나름대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이는 작가의 의도에서 벗어난 듯)


아무도 없는 상황이였다가 나 혼자 쓱~ 들어갔더니 약간 당황하는 눈치였고,

딱히 연기를 하기보다는 그냥 뻘쭘하니까 괜히 뭔가 하는 척하면서 잠깐 준비된 듯한 대사를 나눴다.

(대사를 나눈 것인지 연기를 한 것인지는 중국어를 알아듣지 못하니 구분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짧은 대화 이후 계속 침묵을 지키고 각자 딴짓을 하고 있었고,

눈치가 재는 왜 안나가고 계속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까~ 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말은 안통하지만 뻘쭘하니까 그만 나가달라는 느낌을 확~~ 받을 수 있었고,

난 뭐라도 제대로된 연기를 언제하려나 보다가 이건 아닌 듯해서 그냥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작가의 의도는 배우로 보이는 이들이 뭔가 좀 재미있는 것을 보여주길 원했겠지만,

글쎄~ 실제 사람을 배치한 것은 특이한 발상이기는 하지만 통제할 수 없다는 치명적 단점이 드러나보였다.


며칠째 여기에 사람이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연기를 계속하고 있어야 하는 사람들...

이들에게 사명감이 없다면 별다른 의지도 없을테고 명연기자들이 이런 알바를 할리도 만무하다.


발상은 좋았으나 변수를 예측하지 못한 좀 아쉬운 전시인듯하다.



금일 미술관을 나오는 길 역시~

꾸준히 퍼져있는 조형물들이 배웅을 해주었다.


조형으로 특화되었다고는 들었지만 

진짜 공간 디자인과 조형물은 실컷본 공간이다.


다싼즈798에 비하면 매우 협소한 공간이지만,

오후 내내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단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았다.


뭐랄까~~ 한국의 미술관들에서 느끼지 못했던

뭔가 중국 특유의 독특함을 많이 느낀듯한 기분이다.

다싼즈798에서부터 뭔가 일맥상통하는 것도 좀 있고~


일단 규모와 수량, 그리고 다양함은 기본이고~

독특하면서도 굉장히 기괴함이 녹아져 있는 느낌이랄까?


암튼 다산쯔798과 금일미술관은 역시나

이번 베이징 여행에서의 최고의 공간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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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China / Beijing ⑪ - 다산쯔(大山子)798 과 중앙미술학원(中央美术学院)

2014.07.21 09:19

나름 베이징 여행에 있어서 

방문하는 장소들에 대해서 테마를 정해서 골고루 방문했다.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공간들 (고궁, 천단공원, 이화원)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공간들 (만리장성, 용경협, 스차하이)

생활을 느낄 수 있는 공간들 (후통, 왕푸징, 난루오구시앙, 싼리툰)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공간들 (다산쯔798, 중앙미술학원, 금일미술관)


베이징의 다양한 모습을 보고싶었고,

이 중에서도 가장 기대했던 코스는 바로 마지막 문화 테마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시간관계상 중앙미술학원은 생략할 수 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다산쯔를 찾아가는 것이 어려웠고, 너무 넓어서 체력이 고갈되어 버렸다)


만약 나에게 베이징에 다시 방문할 기회를 준다면,

꼭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은 바로 다산쯔(大山子)798과 중앙미술학원(中央美术学院)이다.


시간 배분을 잘못하여 다산쯔(大山子)798의 경우에는 

너무나 더운 날씨에 3시간만에 급하게 돌아봐서 아쉬움이 남았고,


금일미술관(今日美术馆)까지 가봤더니

더욱더 중앙미술학원(中央美术学院)에 못 가본 것이 너무 아쉬웠다.



중국을 대표하는 예술교육기관으로는

흔히 '8대 미술학원'이 존재하는데 이는 이제 완전 고유명사화 되어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미술학원이 미술 전문 고등 교육기관을 의미하며 정책적으로 전국으로 넓게 퍼져있다)


아무리 그래도 역사와 전통이라는 것이 있어서,

이 중에서도 중앙미술학원(베이징), 중국미술학원(항저우), 쓰촨미술학원(충칭)을 3대 미술학원으로 뽑는다.

(최근에서는 종합대학교의 미술대학이 디자인학과를 중심으로 뜨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칭화대이다)


하지만, 이 중에서도 역시나 최고로 뽑는 것이 중앙미술학원이며,

현대 미술의 거장들과 미술계의 주요 인사들은 대부분 이 학교 출신이라고 할 정도로 영향력은 막강하다.

(8대 미술학원 중 중앙미술학원만 국립이고, 나머지는 모두 해당 성에서 운영하는 곳들이다)


재학생 졸업전시회가 열리는 6월 중순에는

화랑 관계자들이 찾아와 스카우트 경쟁을 벌이기도 하며

심지어는 2~3학년 때 이미 유망주들을 발굴해 전속계약을 맺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1918년 중국 최초의 국립미술교육기관인 북평예술전문학원으로 시작해서,

1950년 화북대학교 미술학과와 합병하면서 마오쩌둥이 직접 중앙미술학원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미대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중국의 미술대학에서는 중국화라는 분야가 당연히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화 관련 학과들이 매우 세분화되어 있고 여전히 전통 중국화 기법을 중시하면서 고수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중국의 미술시장에도 이어져서,

전통미술과 중국화가 여전히 강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한국화가 굉장히 어려움을 겪는 것과는 굉장히 대조되는 현상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사실 여기까지는 너무 전문적인 미술계에 대한 이야기였고,

일방인들에게 중앙미술학원이 친근한 것은 바로 중앙미술학원의 미술관 때문이다. 



건물 모양부터 예사롭지 않은 이 미술관은

예상과는 다르게 일본인 건축가 아라타 이소자키가 디자인했다.

(당연히 중국애들, 그것도 미술대학의 건물이기에 모교 출신의 중국인이 디자인했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유명작가에서 졸업생들까지 폭넓은 전시로 미술 애호가들의 호평을 받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학기말에 벌어지는 재학생들의 전시회라는 점이 매우 이채롭다.


기성작가와는 또 다른 특유의 개성과 발랄함 때문에

중국 미술계의 거상들이 반드시 방문하여 새로운 인재를 영입하려고 경쟁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중앙미술학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바로 다산쯔798이 위치하고 있다.



1957년 대약진 운동이 시작될 때부터 공장지대로 개발된 이 곳은

무기를 만들던 군수공장 지대였으나, 중국의 개방과 함께 20여년간 페허나 다름없이 버려져 있었다.


러시아의 지원으로 개발이 시작되어 

구동독 건축가들이 전형적인 바우하우스 양식의 건축물로 지어놓았는데,

이러한 독특한 건축양식의 공간들을 주목한 것은 바로 중앙미술대학의 학생들이였다.



1996년부터 버려져 있던 이 싸고 넓은 공간은

중앙미술대학의 조소과 작업실로 쓰이기 시작했고,

가난한 예술인들 사이에 입소문을 타기 시작해서 집단 창작단지로 변신하게 된다.


2001년 중국 화가 황루이는 재생프로젝트 '베이징 798 예술구'라는 전시를 개최하는데,

이 기획이 해외 언론의 폭발적인 조명을 받으면서 베이징 현대 예술의 메카로써 국제적인 관심을 받게 된다.


중국 정부는 원래 이곳을 아파트촌으로 만들려고 했었으나,

예술인들의 지속적인 활동으로 계획을 전면 백지화하고 '문화창의산업특구'로 지정하게 된다.



이 곳은 분위기가 매우 오묘하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 포인트이다.

일단 아직도 군수공장 특유의 삭막함이 상당부분 남아있는데,
이는 아시아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건축양식이기 때문에 일부러 그대로 남겨둔 듯 보인다.

또한, 높은 굴뚝과 파이프관 등 아직도 산업시설도 눈에 띄는데,
그러한 와중에서도 높게 자란 나무들과 독특한 조형물들이 공장지대가 아님을 증명해주고 있다.

콘트리트 구조물들과 시멘트 바닥들은 싸한 분위기를 조성하지만,
공장 특유의 높은 천장을 유지하고 있는 갤러리는 또한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러한 삭막함 가운데에서도 노천 카페가 종종 눈에 띄고,
가장 큰 번화가에는 세련된 인테리어의 다국적 갤러리와 카페, 레스토랑이 넘쳐나고 있다.

이런 독특한 매력때문인지 베이징의 관광명소가 되면서 TV에도 많이 소개되었고,
한국에서도 VJ특공대나 다큐멘터리 같은 다양한 프로그램에서 다싼즈798을 소개한 적이 있다.


어떤 벽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래피티가 세겨져 있고,
어떤 벽에는 마오쩌둥과 붉은 별 등 정치적 그림과 상징물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예술적 자유로움이 존재하는 듯하면서도
역시나 여기는 중국이라는 느낌이 들 수 밖에 없는 독특한 공간이다.


아무래도 정부 차원에서 관여를 하기 시작하면서
사전 검열이나 정치적 입김이 작용할 수 밖에 없기에 그러한 면에서는 비판을 받고 있다.

또한, 현실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보다는
순수예술의 맑고 투명함만을 강조하다보니 무미건조하다는 평가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여기를 방문했을 때 흥미로웠던 점은
전시되고 있는 작품들이 생각보다 굉장히 다양하다는 점이다.
굉장히 중국스러운 작품에서부터 굉장히 중국스럽지 않은 스타일까지...

때로는 일본에 와 있는 것같기도 하고,
때로는 미국에 와 있는 것같기도 하다가도,
역시나 여기는 중국이라는 것이 느껴지는 작품들도 존재한다.


국제적인 갤러리들도 이곳에 많이 진출해있는데,
남한의 갤러리도 한참 열리고 있었으며, 심지어 북한도 갤러리를 운영중이였다.
(북한의 갤러리를 굉장한 호기심에 들어가봤으나, 자연풍경 아니면 공산당에 대한 작품만 있었다.)

이외에도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독일 등
다양한 나라의 국제적 갤러리가 여기로 몰려들어서 굉장히 글로벌한 공간이 되어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눈에 잘 드러오는 것은

건물 앞에 하나 씩 만들어놓은 매우 독특한 양식의 거대한 조형물들이였다.


뭐라 정의할 수 없지만 중국이 아니면 보기 힘들듯한

매우 독특한 형태의 조형물들이 존재했으며 하나같이 일정 수준 이상의 스케일을 자랑하고 있었다.



갤러리와 사람들을 피해서 골목에 들어서면

수 많은 나무들과 건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터들이 발견되는데,

이곳에서는 걸레마져도 빨간 벽과 센스있게 깔맞춤함으로써 스스로 예술품이 되고 있었다.



살인적인 무더위와 햇빛으로 인해서

이 동네를 모두 걸어서 구경하기는 매우 힘든 상황이였고,

겨우 3시간 남짓 최대한 힘을 내어서 빨빨거리고 구경하느냐 완전 녹초가 되어버렸다.


살아있는 미술공간이다보니 여타 미술관보다는 월등히 넓은 공간을 자랑했고

하루 코스로 이곳만 제대로 돌아다녀도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넓게 다양한 공간이 분포하고 있었다.


근데 최근에 이 공간도 부동산 과열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불과 20년 사이에 임대료는 5배이상 폭증했고 가난한 예술가들은 다시 길가로 내몰리고 말았다

(홍대에 몰렸던 예술가들이 이태원으로 밀려나고, 또 다시 더 싼 곳으로 밀려나고 있는 한국의 현실과 매우 유사하다)


다싼즈798에서 밀려난 예술가들은 환티에, 쒀자춘, 차오창디, 지우창 등으로

새로운 예술구를 찾아서 개척해서 나갔지만, 최근에는 이곳들 조차도 돈 있는 사람들이 밀고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이는 비단 한국과 중국만의 상황은 아니며,

뉴욕의 예술가인 알렉산드라 에스포지토는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예술가들은 미생물처럼 가장 더럽고 후미진 곳에 들어가 땅값을 올리고 다시 더러운 곳을 찾아 떠나야 한다."


배고픈 예술가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끝없이 후미진 곳을 찾아 떠나야하고,

그 공간을 채워줄 예술가들을 찾기 위해 갤러리들과 기획자들은 다시 그들의 뒤를 쫓는 현상...


그리고 그 공간이 돈이 되기 시작하면 젊고 배고픈 예술가들은 또 다시 새로운 곳을 찾아떠나고,

돈 좀 있는 기성세대들은 그들의 참신함을  얻기위해서 그들의 공간을 다시금 파고드는 순환적 현상...


물론 이런 식의 순환으로 끝임없이 예술공간들이 확대 재생산된다면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만 주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예술공간 확장에는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솔직히 일반인들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오히려 고맙기만 하다.

홍대앞 예술거리 - 청담동 미술거리 - 신사동 가로수길 - 이태원 도깨비 시장 등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핫플레이스들은 일반인들이 예술을 더 친숙하게 느끼도록 만들어준 기능을 했다.


하지만 문제는 젊고 가난한 예술가들이 더 이상 갈 곳이 없을 정도로

부동산 거품이 계속된다면 과연 그들은 어디로 갈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이다.

단적인 예로 중앙미술학원과 홍익대 앞에는 이제 더 이상 파고들어간 공간이 없어 보인다.


돈이 없어서 너무 가난해서 예술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면서,

한국에서는 이미 순수 미술쪽은 인재난에 허덕이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협동조합이나 사회적기업 쪽에 유난히 예술가들이 생존을 위해서 뛰어는 경향도 많이 보인다)


중국이 짧은 시간만에 세계 3대 미술시장으로 성장하는데는

다산쯔798같은 인프라들이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새 여기도 상업주의가 스며들면서

예술가 지역에 예술가가 없어지는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위기감이 조성되고 있다.


과연 이곳이 예술지구로 얼마나 순수성을 계속해서 유지해나갈 수 있을지,

단지 상징성만 남고 빛좋은 개살구로 관광객을 위한 공간으로 전락하게 될지 귀추가 주목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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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China / Beijing ⑩ - 천단공원(天坛公园) 그리고 이화원(颐和园)

2014.07.20 00:16

고궁(故宮)

만리장성(万里长城)

천단공원(天坛公园)

이화원(颐和园)


이들은 중국어 회화교재나 중국을 소개하는 책자에 항상 나오는

중국과 베이징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역사 유물이며 최고의 관광지이다.


베이징의 햇살이 너무나 뜨겁기에

하루에 한 곳씩 오전 일정을 이용해서 방문했다.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7월의 베이징에서 이 곳을 돌아다닌다는 것은 살인행위인 듯하다~)


역시나 이곳을 둘러보지 않고서는 

베이징을 방문했다고 이야기하기 어려울 정도의 명불허전(名不虛傳)인 곳들이다.


4군데의 가장 큰 공통점은 역시나 그 스케일이 주는 중압감이다.


경산공원에서 내려다 본 장엄한 위엄의 고궁(故宮)

팔달령에서 내려다봐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만리장성(万里长城)

가도가도 끝이 안나는 방대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천단공원(天坛公园)

인간의 손으로 만들졌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호수가 펼쳐지는 이화원(颐和园)


이들이 주는 감동에 압도당하지 않는다면,

베이징이 주는 대륙의 거대함을 제대로 느껴보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천단공원(天坛公园)이라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사진을 연상한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여기서 열심히 사진을 찍어댄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기년전(祈年殿) 앞에서 사진을 찍고,

회음벽(回音壁)과 삼음석(三音石) 앞에서 소리가 울리는지를 확인하고만 돌아왔다면,

천단공원(天坛公园)이 주는 매력을 1/10도 체 느끼지 못했다고 과감히 이야기할 수 있다.



그 엄청난 크기에서 주는 감동과

그 엄청난 크기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자연의 편안함과 만족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원을 가득채우고 있는 중국인들의 풍요로움...


이러한 것들이 한데 어울어진 천단공원(天坛公园)은

중국의 공원이 주는 매우 오묘한 매력의 집합체적인 공간이였다.



솔직히 공원에서 노는 중국인들은

중국에 올 때마다 보는 풍경이라서 그다지 새롭지 않다.


단동에서도, 심양에서도, 상하이와 쑤저우에서도 보았던,

춤을 추는 사람과 붓글씨를 쓰는 사람, 제기차는 사람, 태극권을 하는 사람은

중국의 어느 공원을 가더라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놀이 문화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천단공원(天坛公园)을 굉장히 맘에 들어하는 이유는

그 광활함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 때문이다.



또한 천단공원(天坛公园)의 스케일에 맞게

여타 공원에 비해서 춤을 추는 사람들의 규모와 다양성, 그리고 집단들의 숫자 역시 엄청났다.



자리를 지켜야하는 관리자들도

물을 사용해서 붓글씨를 쓰는 어르신의 작품에 넋을 잃고 쳐다보는 등

공원 곳곳은 나름 자신만의 문화활동과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공원에서 이런 사람들을 본다면 이상한 짓을 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공원 자체가 많지 않으며 그나마 있는 공간들도 마음껏 노는 공간이 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인들만 공원을 이렇게 자기맘대로 즐기고 있을까?

미국의 센츄럴파크의 경우에도 온갖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공원을 향유하고 있었다.

(캐치볼을 하는 사람, 러닝을 하는 사람, 누워서 책을 읽는 사람 등 다양한 모습이 연출된다)


왜 한국에서는 이런 자연스러운 모습들을 찾아보기 힘든 것인가?

과연 공원이라는 공간들은 누구를 위한 것이고 누구의 것이 되어야 하는가?



천단공원(天坛公园)에서는 공원의 구성물들을 보기 위해 부지런히 돌아보지 않고,

그냥 그늘진 곳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시민들이 놀고 있는 모습만 보고 있었는데도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뉴욕의 센츄럴 파크처럼

누구나 자유롭게 풀밭에 들어가 누워서 자거나 놀 수 있는 분위기까지는 조성이 안된다는 것이다.


정책적으로 못들어가게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너무나 잘 관리된 잔디밭에 아무도 안들어가 있으니 

중국어도 못하는 내가 무모하게 들어가지도 못한 체 그냥 벤치에서 구경하는 수밖에 없었다.



천단공원(天坛公园)에서

자연스러운 풀밭과 나무, 그리고 서민들의 생활을 즐겼다면,


이화원(颐和园)에서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호수와 건축물들을 통해 황실의 위험을 느낄 수 있었다.


이화원(颐和园)의 메인 출입구인 동문으로 들어가서,

황실들의 주요 거쳐였던 인수전, 덕화원, 옥란당, 낙수당을 지나서 호수를 따라 걷다보면,


이화원(颐和园)의 상징적인 건물인

불향각(佛香阁)이 저 멀리에 높게 솟아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화원의 입장권은 30위안이지만, 

주요 건물을 들어갈 때마다 10위안씩 내야하며,

모든 시설을 다들어 갈 수 있는 통표 티겟은 60위안이다.


이미 고궁(故宮)과 천단공원(天坛公园)을 방문한 경험을 바탕으로,

통표를 구입하기보다는 입장권만 사고, 필요한 건물만 추가로 들어가기로 맘먹었다.

(시간적 여유만 있다면 통표로 온종일 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지만, 시간 관계 상 선택과 집중을 하기로 했다)


추가 요금을 받는 덕화원, 옥랑당, 쑤저우거리는 모두 그냥 패스했지만,

이화원(颐和园)의 상징적인 건물인 불향각(佛香阁)은 추가 요금 10위안을 내고 올라가봤다.



역시나~~ 앞에서 보는 것만으로 대단한 위엄을 자랑하는 건물로,

입구에서부터 배운전(排雲殿)의 지붕과 불향각(佛香阁)의 입구가 하나의 건물처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배운전(排雲殿)에서 불향각(佛香阁)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과히 살인적이라 할 수 있다.


감히 올라갈 엄두를 낼 수 없을 정도로 가파른 계단을 자랑하는데~

아마도 황제들은 이 계단을 사용하지 않고, 뒷 길로 가마를 타고 올라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설마 이 경사를 가마를 타고 올라갔다고 보기에는 양 옆의 폭이 너무 좁아보인다)


암튼 중국은 어딜가나 사람 기죽이는데는 일각연이 있는 듯하다.

(만리장성에서 팔당령 정상으로 가는 길을 올려다봤던 느낌이 다시 살아나는 듯...)



또 하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로 이 유리기와이다.

황제만 쓸 수 있었다는 이 붉은 기와는 주로 유리창 지역에서 생산했었다고 한다.

(이화원의 유리기와들은 최근에 개보수를 단행했는지, 너무나 반짝반짝하고 맨들맨들했다는...)


이 수많은 유리기와들이 자금성에서도 눈에 확 들어온다고 생각했었는데,

개보수가 잘되어있어서 그런지 여기서는 유난히 더 눈에 잘 들어오는 느낌이였다.



특히나 불향각(佛香阁)에 올라서 내려다 본

이화원(颐和园)의 풍경은 한 마디로 입을 다물 수가 없는 장관이였다.

(개인적으로는 자금성과 만리장성보다도 최고의 장관은 이곳이였던 것 같다.)


붉은색 유리 기와를 넘어서 펼쳐져 있는 곤명호(昆明湖)는

항주에 있는 서호(西湖)를 모델로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도대체 중국인들은 못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이걸 사람이 만들었다니...)


청나라 말기, 서태후가 이곳을 개보수하다가 

국고를 탕진해 멸망을 앞당겼다는 이야기에 너무나 어이없다고 생각했는데...

왠 걸~~~ 이 정도 스케일이면 진짜로 망할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서태후와 광서제의 

슬픈 이야기가 곳곳에 숨어있는 이화원(颐和园)


가이드북을 들고다니면서 이곳저곳 살펴보면서,

왜 황제들이 이곳에 집착했는가, 서태후는 궁궐 복원보다 여기를 왜 더 신경썼는가...

너무나 대단하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주의 서호(西湖)처럼 여유롭고 풍요가 느껴지지 못하는 것은 

인위적으로 만들다보니 화려함이 너무 지나치고 이곳저곳에 정치적 사연들이 녹아있기 때문인 것같다.


진짜 멋진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맘이 편안해지는 못하는 것은 내가 너무 사전에 공부를 많이한 탓인가?


이화원(颐和园)은 

감동과 아쉬움이 교묘하게 교차하는 신비로운 공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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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China / Beijing ⑨ - 용경협(龙庆峡) 그리고 지나친 호객 행위

2014.07.18 17:24


팔달령에서 만리장성을 내려온 시간이 오전 11시

순간 다음 일정을 어떻게 할지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베이징 시내로 돌아갈까? 

아니면 북으로 2시간 더 올라가서 용경협을 방문할까?


차를 운전해서 가면 1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이지만,

버스를 한 번 갈아타고 가야하기에 가는데만 2시간, 베이징으로 돌아오는데는 3시간이 걸린다.


새벽부터 움직였기에 지금 베이징 시내로 돌아가면

오후에 두 군데 정도는 돌아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되기 때문이였다...


하지만, 이왕 여기까지 온것이 아깝기에 용경협까지 한 번 가보기로 했다.



팔달령에서 용경협으로 가기 위해서는

919번 버스를 타고 연경으로 가서 875번 버스로 갈아타야만 했다.


분명히 버스를 갈아타는 곳에 내려서

875번 버스를 찾는데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이게 왠일인가...

'바이두가 잘못된 정보를 알려주고 있나?' 싶었는데...

표지판을 유심히 살펴보니 택시기사들이 칼로 875번만 지워버린 것이다...

(웃긴 것은 지워진 자리에 누군가 또 875번이라고 작은 글씨로 적어두었다는 점)


이래놓고는 천연덕스럽게 관광객인줄 알고 접근해서

용경협 가려면 택시타야 한다면서 40위안만 달라는 것이다...

(아~~ 진짜 돈이 뭐라고 이런 식으로 호객행위를 하는지, 해도해도 너무한다 싶었다)



용경협에 해당하는 버스 정류장에 내렸는데,

횡하니 시골의 한적한 정류장에 우리말고는 아무도 내리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어딜가나 그 많던 인파들이 여기는 전혀 없는 것인가?

주차장에 도착하는 순간 깨달은 사실은 버스를 타고 이곳에 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아까 그 버스정류장에서 40위안을 주고 

택시를 타고 오는 사람들도 좀 있는 듯 보였다.

(이곳은 대부분 단체여행이나 자기 차량을 통해서 오는 관광지였다)


굉장히 외져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산새는 확실히 좋아보였고, 빨간 글씨로 용경협 3글자를 밖아놓은 것이 눈에 확~ 들어왔다.



주차장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를 반긴 것은 역시나 호객꾼들이였다.


오늘따라 워낙 뜨거운 땡볕이였기에,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주차장까지 거리도 매우 길게만 느껴졌는데,


시골 아줌마처럼 생긴 사람이 다가오더니 

밥은 먹었냐고 물어보기 시작해서 용경협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말타고 가야한다며,


한국어로 '말타고'를 연 이어서 외쳐대는 것이다.

저 위에 높은 곳까지 무려 3리(12km)나 가야한다고 우기면서 '말타고' 가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베이징 시내 한복판에서 사기를 당해봤기에~

그들의 호객 행위에 대해서 쳐다보지도 않았다.


구글 지도와 바이두의 길안내 서비스,

그리고 여행 가이드북까지 있는 우리들한테 거짓말로 호객행위를 하다니...


실제 용경협 입구까지의 거리는 1.2km였고,

그들은 무려 10배나 뻥튀기를 해서 우리를 골탕먹이려고 한 것이다.

(입구까지 찾아오는데 표지판도 잘 안되어있어서 당황한 관광객들의 등을 쳐먹으려는 것이다.)



호객행위를 무시한 체 묵묵히 걸었더니 바로 입구에 도착했다.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또 한 번 사기를 당할 뻔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제 첸먼대제에서 경산공원까지 무려 3시간을 주구장장 걸은 후

너무나 힘든 상황에서 스차하이로 투벅투벅 걸어가고 있을 때 전동오토바이가 등장했었다.


3위안에 경산공원에서 스차하이 입구까지 두 명을 모두 태워주겠다는 것이다.

워낙 짧은 거리였기에 택시를 타기도 애매했기에 나름 적당한 가격이라 생각해서 탔는데...

(사기꾼의 얼굴을 찍어두었다. 한국이면 그냥 확~ 신고해버리는데... 암튼 이 놈들은 2인 1조로 움직이고 있었다)



갑자기 골목길로 들어가서 후통 투어처럼 여기가 어디라고 자꾸 설명하더니

어딘지 알 수도 없는 이상한 골목에서 우리를 갑자기 내려주는 것이다.

(순간 이 녀석들이 사기꾼이라는 것이 확~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원래 후통 투어비용이 300위안이기 때문에 

니들은 후통 투어를 했으니 후통 투어비용을 지불해야한다며 고성을 질러댔다.

(외국인을 상대로 전문적으로 사기를 쳐 먹는 전문 사기꾼들이였던 것이다.)


중국어를 전혀 못하는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지만,

이미 중국에서 10년 이상 산전수전 모두 겪은 누나는 그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생각보다 중국어를 너무 잘하고 전혀 쫄지않고 공안에 함께 가자고 덤비니까,

완전 기세 등등하던 그들도 서로 역할을 나눠서 욱박지르기와 달래기를 병행하며 협상에 들어갔다.

(공안에 가면 니들은 두 명이니 600위안을 내야하는데 그냥 깎아서 100위안만 달라고 우기기 시작했다)



후통 투어를 하겠다고 한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미 후통투어가 1인당 150위안에 2시간 정도 된다는 것을 알기에 속을리 만무했고,


구글지도와 바이두 길안내 서비스 덕에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기에 으슥한 골목길임에도 불구하고 쫄 일이 전혀 없었다...


공안에 가자고 다시 타라고 해서 진짜 다시 탔더니,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것을 깨달은 그들도 차마 가지는 못하고 다시 협상에 돌입했다...

(정글만리에 나온 것처럼 역시나 협상에서는 만만디 자세로 나가는 사람이 이기는 듯하다)


결국은 우리 보고 그냥 가라고 했지만,

괜히 한 푼도 안줬다가는 후안이 생길까봐 처음 약속했던 돈만 주고 와버렸다.


1km도 안되는 길을 좀 편하게 가보려다가

완전 기분도 잡치고 시간은 시간대로 돈은 돈대로 버리고 엉뚱한 곳에 내리게 것이다.

(실질적인 여행의 첫 날이였는데, 아주 된통 걸려서 베이징 여행 내내 트라우마가 되었다)



안 그래도 어제의 경험 때문에

호객행위라면 진절머리가 나는데 오늘만 벌써 거머리같은 호객꾼이 붙은 것이 두 번째이다.


아무리 관광지역이라고는 해도

돈때문에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못되게 변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여유를 즐기고 싶어서 자연을 만나러왔는데...

사람때문에 기분을 상하게 만들다니... 이들이 너무나 밉게 느껴졌다.

(대한민국도 천민자본주의가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급격한 자본화로 중국도 심각한 문제인 듯하다)



용경협은 원래 수심이 낮아서 배가 다닐 수 있는 협곡이 아니였다.


짱쩌민이 이 곳을 방문했다가

이 아름다운 곳을 배를 타고 지나가면 좋겠다고 하니까

댐을 만들어서 배가 다닐 수 있는 환경을 인공적으로 조성해버린 것이다.

(강을 막아서 배를 띄운다는 발상이 누군가를 연상시켜서 솔직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암튼 그렇게 확보한 해수면을 가지고 유람선을 타고 협곡을 관람하는 관광지로 만들었고,

베이징의 '작은 구이린'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시내에서 85km나 떨어져 있지만 주요 관광지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독특한 구조 때문에 배를 타려면 해수면 높이까지 올라가야하고,

그 길을 용 모양의 독특한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해서 관람객들에서 또 하나의 볼꺼리를 제공하고 있다.

(발상자체는 매우 기발하기는 한데, 비주얼적으로 너무나 촌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전체적으로 너무나 한적해서

보트가 출발하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 걱정했지만,

어디서 나타났는지 신기할 정도 꾸준히 사람들이 계속 오더니 금세 만선이 되어서 출발할 수 있었다.

(역시나 중국은 어딜가나 사람이 부족하다는 것을 경험하기는 어려운 진짜 대국인 듯하다)



유람선을 타고 배 한 척 없는 조용한 협곡을 지나가는데...

마치 고요한 자연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인상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무협영화에서나 등장할 듯한 절경들이 쫘~ 펼쳐졌고,

무림의 고수들이 절벽을 타면서 산등성이를 넘나드는 모습이 연상되었다~


산꼭대기에 있는 정자에서는

신선같은 어르신께서 술 한잔 기울이며 시 한 수를 읊고 있고,


오랫만에 벗과 함께 풍류를 즐기러 나온 선비는

세상이 내껏인 듯 호방하게 웃으면서 떠나라가 노래를 부르고 있는 곳....



강물의 흐름을 잘 조절하고 있는지,

물이 고여서 발생하는 녹차라떼나 큰빗이끼벌레 등은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너무나 깨끗하고 맑은 물이 

하얀 거품을 내면서 잔잔한 파동을 만들고 있었고,

이러한 거품들을 가르면서 유람선은 자꾸만 자연속으로 나를 이끌었다.



햇볕이 너무 강해서 가만히 앉아있기도 뜨거웠는데,

협곡의 한가운데에서는 관람객들을 위해서 줄타기 퍼포먼스가 진행되고 있었다.


번지점프처럼 레저 스포츠 상품 중 하나일 줄 알았는데,

안내원의 설명으로는 관광객들을 위해서 줄타고 협곡을 건너는 퍼포먼스를 수행 중이라는 것이다.


아니 그렇다면 저 사람은 하루에도 몇 번씩 관광객들 보라고

저 높은 곳에서 반대편 산등성으로 넘어가는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줄타기 퍼포먼스 뒤로는 번지점프를 하는 사람이 보였다.

무서워서 뛰어내리지 못하고 있자, 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목소리를 숫자를 세어주었다.


이게 진짜로 도와주는 것인지

아니면 빨리 뛰어내리라는 압박인지 헷갈리기는 했지만 암튼 숫자에 맞춰 멋지게 뛰어 내렸다.


환타 아저씨의 가이드북에 번지점프를 하는 정박장에 내리게 되면,

산을 타고 넘어서 반대편 정박장에서 배를 타야한다고 설명하기에 배에서 안내렸다.


다른 승객들이 모두 내리길래 번지점프 안할 것인데,

그냥 타고 있다가 가도 되냐고 물어봤더니...


안내원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한국인이냐고 물어보는 것이다.

(10년 넘게 내이티브 중국인으로 살은 누나가 한국인인지는 전혀 눈치를 못채기에 발음의 문제는 아닐 듯)


다들 환타 아저씨 책을 읽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안내리고 그냥 보트를 다시 타고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인인가 보다...



암튼 우리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배에서 내려서

산등성이 하나를 넘은 후 정박장에서 다른 유람선을 타게 되지만,


우리는 그냥 그 배에서 내리지 않고 타고 있다가,

산등성이 넘어에 있는 정박장으로 이동한 후 넘어온 사람들을 태우고 먼저 출발점으로 돌아왔다.

(협곡을 걸어서 넘는 것도 나름 재미있을 듯은 하지만 햇빛이 너무 뜨겁고 이미 만리장성을 다녀온지라...)



유람선은 출발지의 강 건너 편에 내려줬고,

산 밑을 내려가는 길 옆에는 백화동이라는 동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료는 아니고 10위안의 입장료를 추가로 받는다)



100가지 꽃이 있는 동굴이라는 의미 답게

자연 동굴을 온갖 꽃과 조형물들로 장식해놓은 듯한데


그 형세가 너무 가짜스러워서

차마 혹시 진짜가 아닐까 도저히 의심을 해줄 수 없는 지경에 올라있었다.



마치 어렸을 때 놀이동산에서

전 세계의 인형 모형들을 전시해서 노래를 불러주던...


그 추억의 장소를 연상시키기는 했지만,

그러한 감동보다는 땡볕을 피해서 동굴이 선사해주는 시원함이 더 만족스러웠다.


뭔가 열심히 노력해서 만든 것은 알겠는데,

10위안이나 받으려면 좀 현실적이거나 사실적인 구성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튼 자연이 준 선물인 용경협(龙庆峡)은

그 풍경이 절로 풍류가 흘러 나올 정도로 훌륭하기는 했으나...


황금같은 여행기간을 쪼개서 투자한 시간을 생각하면,

시간적 여유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면 무리해서 오기에는 다소 아쉬운 장소였다.


케이블카를 타고 산등성이도 올라보고,

번지점프같은 것도 해보면 더 많은 것을 즐길 수도 있겠지만...


이미 너무 많은 협곡들을 다른 관광지에서 봐서 그런지...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너무 아쉬움이 남는 장소이다.


돌아가는 길에 주차장에서는 

말을 탄다거나 거짓 입장권을 판매하는 등의 사기꾼을 조심하라는 안내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택시운전사로 보이는 호객꾼말고 모두 사라진 것을 보면,

누군가 신고를 했거나 단속이 강화된 시간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기분 전환하고 즐기기 위한 여행인데,

여행의 재미를 완전히 떨어뜨리는 사기행위는 제대로 단속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어찌보면 용경협에서의 흥을 떨어뜨린 주범은 도를 지나친 호객행위때문인지로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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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China / Beijing ⑧ - 만리장성(万里长城)에 대한 오해와 팔달령 등반기

2014.07.18 12:22


만리장성(万里长城)은 진시황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은 흉노족의 공격에 대비해서 만리장성을 쌓는다.


현재의 몽골과 내몽골 지역일대를 지배하던 흉노족은

뛰어난 기동성을 자랑하는 기마병을 가지고 있었기에 진시황으로써는 두려움의 대상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나라는 흉노족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부 반란에 의해서 멸망하게 된다)


진나라 시절 쌓아올린 만리장성은 지금과 같이 거대한 모습보다는

대부분 그냥 흙으로 쌓아올려서 기마병이 넘어오지 못할 수준으로 지어졌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만리장성이 오늘날의 형상을 갖추게 된것은 명나라 시절이다.

몽골과 일본의 침입으로 계속해서 시달리던 명나라는 진시황의 장성을 재건했고,

영락제 때 시작해서 오늘날의 모양의 장성이 구축된 것은 16세기 경인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만리장성의 위치는 사실상 국경을 의미하기에 아직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진시황시절에는 현재의 위치보다 다소 북쪽으로 배치되었던 것으로 다소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와도 연관이 있기 때문에 중국과 한국의 역사학계가 한판 붙은 적도 있다)


현재의 중국의 국경선은 청나라 시절 완성된 것으로

명나라 때보다는 영토가 더 확장되었기에 만리장성의 대부분은 중국 영토 안으로 들어와 있는 상황이다.

(장성의 위치를 보면 확실히 북방민족을 경계한 것으로 현재의 내몽골, 만주지역 등은 모두 명나라의 영토 밖에 있었다)



암튼 현재 남아있는 만리장성은 지속적인 개보수를 거친 결과물이기에

수 천년전 이런 건축물을 지은 진시황의 만행으로만 치부하는 것은 뻥이 심하게 섞인 것이다.


사실상 현존하는 모습들은 모두 최근에 개보수를 진행한 모습들이다.


실제로 걸어서 장성을 올라가보면, 

개보수 과정에서 어이없게 낙서를 세겨둔 모습들이 많이 발견된다

(심지어 한글도 발견된 것을 봐서는 작업과정에 한국인이나 조선족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흔히 만리장성을 방문한다고 하면

베이징시의 영역 안에 있으면서도 상대적으로 보존이 잘되어있고 풍경이 좋은 4곳을 이야기한다

(팔달령장성, 거용관 장성, 사마대 장성, 금산령 장성)


주로 베이징시에서 가까운 팔당령과 거용관을 주로 방문하며,

트래킹을 즐기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북동쪽에 위치한 사마대와 금산령을 연결하는 코스를 애용한다고 한다.

(지도에서 보면 알겠지만 내몽골의 남단을 타고 만리장성은 쭉 이어지기 때문에 장성은 여러군데 존재한다)


여행 안내 책자들에서는 거용관 - 팔당령 장성을 거쳐서 명13릉을 구경하는 코스를 추천하는데,

솔직히 거용관과 팔달령 중에 하나만 보면 됐지 굳이 둘 다 볼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든다.


어짜피 비슷비슷한 장성이고 그 느낌만 받으면 되기에

베이징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가려면 거용관을, 경관이 좋은 곳을 가려면 팔달령을 가면 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팔달령을 방문하는 것으로 일정을 짠다고 한다)



굳이 코스로 3군데를 묶어놓은 이유는 그렇게 해야지 딱 하루 코스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미 베이징 시내를 많이 벗어나서 왔는데 한 군데만 가기는 좀 그렇고,

한 군데만 가도 이미 반나절이 후딱 지나가기 때문에 시내로 돌아와 다른 일정을 소화하기 애매해진다.

(팔달령-명13릉 코스로만 약간 아쉽기 때문에 거용관을 굳이 끼워넣는 듯한 분위기이다)


그리하여 난 과감히 팔달령을 찍고, 더 멀리 용경협까지 가보기로 했다.

국기게양식을 보기 위해서 새벽부터 나왔기에 소화가능한 일정이였던 것 같기는 하다.

(대중교통으로 용경협까지 가는 것이 이렇게까지 멀지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가능한 선택이였다)



팔달령을 올라가는 방법에는 총 4가지 루트가 있다.


가장 편하고 일반적인 방법은 역시나,

서쪽 버스 정류장쪽에서 케이블카로 올라가는 방법이다.


관성입구로 들어가지 말고, 별도 케이블카 타는 지역으로 가서 케이블카를 타면,

팔달령의 가장 꼭대기의 바로 아래까지 아주 편안히 모셔다주며 살짝 마지막 한 고개만 오르면 정상이다.

(아래 사진을 보면 열심히 올라가는 사람과 대조적으로 케이블카를 타고 편안히 오르는 사람들이 보인다)


서쪽 버스 정류장쪽에서 케이블카를 타기 싫으면

남루 코스틑 타고 걸어서 올라가는 방법이 있기는 한데, 역광이라서 사진이 잘 안나온다고 한다.

(솔직히 나는 북루 코스를 타고 올라갔기 때문에 남루 코스가 어떤지 정확히 모르겠다)



동쪽 정류장쪽에서는 슬라이딩카를 타는 방법과 북루를 타고 올라가는 방법이 있다.


사실 슬라이딩카는 옆에서 보이기에는 

굉장히 재밌어보이는 방법으로 케이블카보다 가격이 싸기는 한데...


역시나 괜히 싼 것이 아니다.

팔달령 고개의 절반까지 밖에 안올라가기에 나머지 험난한 절반 코스는 걸어올라가야한다.

(싸다고 해도 케이블카의 2/3정도 가격이기 때문에 가격대비 효율은 오히려 떨어진다.)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걸어올라가거나 케이블카를 타거나 선택하라고 하고 싶다.



877버스를 타고 동쪽 버스 정류장으로 도착했는데,

표지판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아무 생각없이 길따라 올라왔더니 갑자기 왠 동물원이 나왔다.

(슬라이딩카를 타는 사람들은 여기서 타는 것이 맞기는 하지만 난 그게 아니였기에... T.T)


주변사람들에게 만리장성 어떻게 올라가냐고 물었더니

그냥 위로 더 올라가서 북루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 여기서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한다.

(케이블카 타려면 서쪽정거장으로 30분 이상 걸어가야하는데 그 시간이면 그냥 올라간다며...)



환타 아저씨가 북루를 더 추천해서 북루에 마음이 더 있던 것이 사실이지만,

제기랄 케이블카를 선택할 기회조차 박탈당했다는 마음에 슬라이딩카라도 탈까하다가...


슬라이딩카의 루트가 굉장히 애매해보여서 그냥 걸어올라가기로 했다.

(나중에 올라가서 보니까 슬라이딩카를 타고 올라갔다면 진짜로 돈이 아까울 뻔 했다)


하지만, 북루는 거리가 짧은대신에

경사가 남루보다 훨씬 심하다는 치명적 단점이 있다.

(절반쯤 올라오고 나서 남은 경사를 보는 순간 누나는 그냥 포기하고 내려가 버렸다)



그래도 역시 살인적인 경사를 자랑하지만

맘먹고 오르면 굉장히 빠른 속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 북루의 매력인 듯하다.

(올라와서 뒤돌아보면... 이걸 어떻게 올라왔나 싶을 정도이지만 한 편으로는 맘이 뿌듯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환타아저씨 말대로 사진찍기에는

역광의 문제와 구도의 문제 등에서 확실히 남루보다 북루가 월등히 좋은 것은 사실인 듯하다.



처음 올라갈때만 해도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 이렇게 혼잡하지는 않았는데,

꼭대기에 올라서 보니까 진짜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케이블카와 슬라이딩카로 올라온 사람에, 남루로 올라온 사람까지 합치니 엄청난 인파다)


만약 이른 시간대에 올라오지 않았다면,

꼭대기에 올라오는 구간에서는 줄서서 올라와야 하는 것은 아니였나 싶을 정도였다...

(진짜 위에서 내려다보면 무슨 저글링이 산타고 올라오고 있는 모습을 보는 느낌이 들 정도다)


꼭대기에서 내려가는 코스는 굉장히 혼잡스러웠지만,

케이블카 타는 곳에서 한 번 빠지고, 슬라이딩카 타는 곳에서 한 번 빠지니...

갑자기 한적해진데다가... 장성과 별로도 도보로 내려올 수 있는 코스를 따로 만들어놨다.


아주 잘 딱아놓은 촘촘한 계단이기에 내려가는 사람에게는 최적인 코스인데다가...

사람들이 훌쩍훌쩍 빠져나가니까 완전 한산해서 산책하는 기분이였다.



동물원 입구로 올라가서 천하의 만리장성인데 

중국애들 답지 않게 입구가 왜 이렇게 허점한지 이해가 안갔는데...


아니나 다를까 관성이 있는 쪽으로 내려와보니,

제대로된 입구가 존재하고 있었고 각종 기념 촬영을 할 수 있는 장소들이 넘쳐났다...



엉뚱한 곳으로 올라가서 

괜히 만리장성입구가 허접하다는 헛소리만 퍼트리고 다닐뻔 했다는...


암튼 처음 출발점이였던 동부 터미널로 다시 돌아와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이번 여행의 가장 험난했던 용경협으로의 여정을 시작했다.

(참고로, 팔달령에 있는 식당들이 바가지가 심할 줄 알았는데 맛도 나쁘지 안하고 가격도 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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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China / Beijing ⑦ - 난루오구시앙(南锣鼓巷)과 왕푸징다제(王府井大街)

2014.07.18 05:41


개인적으로 쇼핑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것저것 아기자기한 것을 구경하는 것은 매우 좋아한다.


그래서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신사동 가로수길이나 이태원 경리단길 같은 곳을 구경하는걸 좋아한다.


베이징에서도 이런 흥미로운 것들 볼만한 거리가 바로  

난루오구시앙(南锣鼓巷)과 왕푸징다제(王府井大街)라고 들었다.


가로수길과 비슷하다는 난루오구시앙(南锣鼓巷)은 매우 만족스러웠으나,

명동과 비슷하다는 왕푸징다제(王府井大街)는 너무나 실망스러운 곳이였다.



일단 환타 아저씨는 가이드북에서 삼청동 카페 골목과 비유를 한다.

약간의 고풍스러운 분위기와 전통적인 느낌은 그런 비유도 괜찮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사람이 많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중국에서 사람이 적은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적절할 비유일 수도 있다.)


확실히 신사동 가로수길과 같은 세련된 맛보다는 고풍스러운 것이 더 맞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곳이 생겨나게된 유래는 너무나 흥미로웠다.



이 곳이 그 유명한

베이징에 하나뿐이라는 연기학원인 북경중앙연극학원이다.


장쯔이, 공리, 탕웨이 등 중국이 배출한 월드스타들이

모두 여기 출신이고 당연히 선남선녀들이 여기로 몰려들었다.


근데 이들이 외국인들과 사귀기 시작하면서 외국인들이 찾아오기 시작했고,

이들을 위한 분위기 좋은 카페가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카페 골목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게 소문이 나면서 배낭여행족들도 몰려들기 시작하고, 

결국은 관광명소가 되면서 시 당국은 아예 도로를 새롭게 재정비를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이제는 굉장히 독특한 오리엔탈리즘의 동네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솔직히 분위기가 굉장히 묘한 것은 사실이다.


일단 다루는 품목 자체들도 매우 다양하다.

전통적인 가게들도 아직도 존재하는가 하면, 굉장히 트렌디한 디자인샵도 있었다.



반면에 아주 아기자기하게,

엽서를 판매하며 대신 보내주는 서비스를 하는 곳도 존재했다.

해외여행을 즐기는 관광객에게는 굉장히 매력적인 공간이 될 수 있는 곳이다.



여기에 매우 상업화된 인기 프렌차이즈 업체들도 들어와 있었다.

테이크 아웃을 전문으로 하는 이런 곳들은 걸어다니면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어 있어

전통적인 중국의 노점이 서양식 테이크아웃의 형태를 띄고 물건을 판매하고 있었다.



너무나 서구적인 것이 많고 상업화되었다고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는데,

적당히 서구적인 것과 적당히 중국적인 것이 잘 섞여 있는 듯한 인상은 매우 흥미로웠다.


물론 앞으로 상업시설이 더 들어오면 중국적인 것이 많이 사라질수도 있는데,

지금 정도의 모습이라면 베이징 시내에서 가장 독특하고 매력적인 공간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이에 반해서 왕푸징다제(王府井大街)는 실망 그자체였다.

오래된 거리라고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그냥 현대화된 거리였다.


쇼핑명소 1번지이기에 대규모 국영 백화점이 들어선 지역이라고 하는데,

백화점이 쫙 줄서서 세계적인 매장들이 있는 것이 나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인 요소가 되지 못했다.

(아시아에서 가장 큰 쇼핑몰이라는 동방신천지같은 곳은 사실 나에게는 별로...)



가이드북에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찻집과 서점, 문구점 등이 있다고 하는데,

사실 알고 보니까 대부분이 다른지역에 본점을 두고 있는 분점들이 대부분이였다.

(열심히 찾아서 간판을 보고 나서 그 허망함이란... 내가 이미 중국 여행을 꽤 많이 한듯...)



더욱 놀라운 것은 왕푸징(王府井)이라는 이름이 유래된

왕부에서 사용했던 우물이라는 것이 그 흔적만 남겨진 체 길가의 한 구석에 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생각해보면 한국에서도 인사동 같은 곳에 예전에 뭐가 있던 곳이라고

아무런 이정표도 없이 간단한 흔적만 남겨져 있던 것을 본 경험이 있는데  그거와 비슷한 것 같다.



이 동네에서 전통이라는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은

먹자골목이라고 부를 수 있는 왕푸징샤오츠제(王府井小吃街)밖에 없었다.



온갖 종류의 다양한 꼬치구이들과 들고 다닐 수 있는 간단한 먹거리를 파는 이곳은

솔직히 사람이 너무 많아서 걸어다니면서 무엇을 먹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혼잡스러웠다.


대로변에도 사람들이 드글드글하더니 

이 쫍은 골목에는 더 많은 사람들도 완전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이 곳에서의 의외의 발견은

우물에 대한 또 다른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전시해놓은 물품이였다.


굉장히 최근에 발견된 흔적같은데,

진짜 우물의 흔적만 남아있던 왕푸징에 그나마 위안이 될만한 조형물이 등장한 것이다.


더군다나 왕푸징샤오츠제(王府井小吃街) 입구 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상업적으로나 관광상품으로나 아주 훌륭한 아이템이 될 수 있는 녀석이였다.

(좀 작기는 하지만 우물 흔적 하나만으로 왕푸징을 대변하기에는 빈약했기에 가뭄에 단비같은 존재인 듯하다)



오히려 왕푸징에서 최고의 장관은

왕푸징 꼬치골목이라도 불리는 동화문미식야식장(东华门美食坊夜市)이였다.


왕푸징 보행자 거리가 끝나는 롯데인타이백화점이 위치한 사거리에서

맞은편 대로에 길게 쭉~~ 늘어서 있는데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좌판이 벌어져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혼잡하기만 하던 왕푸징샤오츠제(王府井小吃街)에 비해

일연로 쭉~~ 늘어서 있으니까 깔끔하면서도 끝이 보이지 않으면서 그 규모에 압도당할 수 밖에 없었다.



팔고있는 품목도 너무나 다양해서 보는 재미도 쏠쏠했지만,

너무나 길게 늘어져 있어서 끝까지 가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외국인들이 주로 밤에 와서 여기서 먹는다는데,

가장 큰 단점은 앉아서 먹을 공간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좌석만 좀 잘 깔려 있다면 진짜 대단한 관광상품이 될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규모였다.


우물유적지를 못 찾아 헤매고 있는데,

길가던 한국인 주재원이 가르쳐 준 왕푸징의 명소였다.

이거마져 보고가지 못했다면 왕푸징에 대한 기억은 진짜 최악의 장소가 될 뻔했다~


+


사실 관광객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보기를 원한다.

그리고 기대했던 것과 다른 모습이 펼쳐졌을 때 급실망을 하게 된다.


분명 가이드북에서 설명을 잘못한 것은 아니였지만,

하도 왕푸징, 왕푸징 하니까 전혀 다른 모습을 기대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에 비해서 난루오구시앙(南锣鼓巷)은 사실 듭보잡이였기에 큰 기대가 없었는데,

중국적인 요소와 서구적인 요소가 묘하게 조합되면서 내가 중국에서 보고싶었던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건물 외관은 전통적인 글로벌 기업이 전령하고 있었던 첸먼다제(前門大街)나

건물 외관부터 내부까지 너무나 현대적인 것만 존재하는 왕푸징다제(王府井大街)와는 다른 것이였다.


너무 뻔하기만 했던 옌다이셰제(烟袋斜街)에서 만족을 얻지 못한 것도

어찌보면 이러한 사전 기대라는 항목이 만족감에 큰 영향을 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암튼 결과적으로는 다양한 쇼핑거리들을 만나게 된 것이

중국을 한층 더 이해하는데는 많은 도움이 된 것같아서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방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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