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 - 양희송 (2014)

2015.01.21 10:11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청어람 양희송 대표는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이라는 책에서, 

나와 같은 가나안 성도의 규모가 어림잡아 100만명 정도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내 주변에도 신앙은 유지하지만,

교회는 나가기 싫다는 일명 '가나안 성도'(거꾸로 읽으면 안나가)가 꽤 많다.


그들은 흔히 이야기하는 sunday christian도 아니다.

대형교회에서 대학부를 함께하면서 나에게 많은 영감을 준 믿음의 선배들였다.


어설픈 교역자보다도 훨씬 더 많이 공부했고, 열정도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교회들의 행태를 보면서 결국은 교회를 떠났다.


나름 자신의 방식대로 신앙생활은 이어가고 있고,

다시 교회라는 공간에 모여서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고 싶어하기도 하지만,

기존에 있는 기성교회에 모일 의지는 별로 없어보인다.


단체로 특정 교회에 모이는 방법도 있기는 하지만,

마땅히 그럴만한 교회를 찾기도 어렵고 우루루 몰려가면 그것도 기존 신도들이 싫어할 것이다.


이미 대한민국 교회에서는 특정 교회가 입소문이 나면,

청년들이 우루루 볼려가는 현상이 몇 년째 이어지고 있다.


특히 상징적이였던 많은 대형교회들에 문제가 생기면서,

삼일교회나 사랑의교회 청년들이 다른 교회로 몰려가는 현상이 나타났다.


하지만, 이들이 개척교회로 빠져가가기는 쉽지 않다.

대형교회가 가지는 인프라의 장점에 너무나 익숙하기에 인근 다른 대형교회나

어느 정도 기반을 갖춘 새롭게 떠오르는 교회로 몰려가는 현상이 몇 년째 계속되고 있다.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현상이지만,

대놓고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는 껄끄러워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희송 대표의 책은

나와 같은 가나안 모드에 들어간 성도들에게 큰 자극을 줄 수 밖에 없다.


양희송 대표는 나름 열심히 가나안 성도를 이해하려고 했고, 

이들을 통해서 기존 교회들이 자성을 하고 새롭게 거듭나는 계기가 마련될 바랬다. 


사실 이 책의 분석의 깊이는 그다지 높지는 않으며, 

교리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굉장히 깊이있게 다루지는 않고있다. 

어찌보면 화두를 던지는 수준에서 최대한 가나안 성도를 변호해주고 있다. 


그 덕에 나같은 아직 교회에 몸은 담고 있는 

심정적 가나안 성도들은 심적인 위안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며, 

이미 교회를 떠난 가나안 성도들은 스스로의 선택에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는 가나안 성도를 길 위로 나온 것으로 표현했다. 

교회를 공간적인 개념으로 생각하는 경향에 대한 경종을 날리는 의미도 있었다. 

이는 어찌보면 공간에 집착하는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과연 여기서 끝인가?

난 개인적으로 양희송 대표가 일부러 화두 정도만 던진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다양한 각도에서 가나안 성도 현상을 분석해보려고 노력했고,

이를 교리적인 해석을 통해서 이들의 입장을 대변해주고 시사점을 제시하였다. 


어찌보면 일단 쨉을 날린 듯한 느낌인데, 

벌써부터 보수적인 성도들 사이에서는 부정적인 반응이 나오고 있다. 

아마 이러한 반응을 예상하고 이 정도 수준에서 일단 수위조절을 한 느낌이 강하다. 


개인적으로는 양희송 대표의 언급 정도가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에서는 가장 적당한 수위가 아닌가 싶다. 

더 이상 논란을 확산하기에는 아직은 이 사회가 받아들이기에 부담스러울 것이다. 


그러면서도 아쉬운 것은 가나안 성도 현상의 해결책을

오히려 가나안 성도 스스로에게 공을 넘기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기존 교회들의 반성과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빼놓지는 않았다. 


하지만, 논리의 방점은 가나안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대안적인 모임들을 만들어 새로운 형태의 에클레시아를 만들어나가길 요구한다.


못할 이유야 없지만,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모임부터 만들고 보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특히나, 교회 내의 각종 논란과 교파간의 갈등 등으로 교회가 분열되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움직임은 자칫 더 큰 혼란만 야기할 수 있다.


무작정 모임만 만들어봤다가 실패하는 경험은

무작정 창업해 실패하는 경험만큼이나 큰 상처가 될 수도 있다.


과연 ‘가나안 성도’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까?


양희송 대표의 표현처럼 ‘가나안 성도’가 당당하려면 

오히려 교회 안의 신앙인들보다도 더 깨어서 하나님의 음성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끝임없이 하나님과 일대일로써 교감을 이루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그냥 교회에 남아서 기본적으로 시키는 것이라도 잘 지킬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일 뿐이니까. 


이미 가나안의 길에 올라선 나의 이 여정이 과연 어떻게 될지, 

과연 기존 성도들의 인식에 경종을 울리며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지, 

아니면 찻잔 속의 태풍처럼 일시적인 신앙적 권태기에 불과할지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영역이 아닌가 싶다.

열린 공동체 사회 Christianity 가나안 성도, 양희송, 청어람

  1. 가나안 성도분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는 모임을 합니다.

    010 3545 9632 많은 연락주세요

문창극 파문과 온누리교회

2014.06.12 14:09

어제 밤 문창극 파문이 일어났다.


신임 총리로 임명한 박근혜 정권은 예상치 못한 암초였고,

문창극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사람들에게는 결정적 증거가 나타난 것이다.

(아마 이게 시작일테고... 앞으로 더 시끄러워질 듯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강연 장소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3군데 모두 너무나 익숙한 곳이였고, 모두 다 내가 주로 활동했던 온누리교회였다.


온누리교회는 나의 모교회일 뿐만 아니라,

나의 20대에서 온누리교회를 빼고는 설명할 수 없기에...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KBS의 악마의 편집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자연스럽게 강연 풀영상이 등장하면서, 나도 공유받아서 들어볼 수 밖에 없었다.



일단 풀영상을 본 후의 소감은...

강연 내용의 알맹이가 너무 없다는 것이다...


중앙일보라는 대형 매체의 대기자라는 사람이...

수백명의 대중앞에서 강연을 하는 자리에서 이야기함에도,

어떻게 1시간이라는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중구난방일까?


자기가 하고 싶은 역사 이야기를 막~~ 하더니...

마지막에는 여러가지 다양한 기도가 필요하다며 기도제목을 막 던지면서 마무리한다.

(과연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연관이 얼마나 되는지 의문이 가는 내용들도 있다...)


어떤 사람이 이런 글을 썼더라~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더라~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들 역시도

전체적인 현상들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다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에 맞춰서 여러 현상들을 취향에 맞게 해석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크리스챤이기에 크리스챤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크리스챤의 관점이라고 보기에는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부족한 발언들이였다.


왜 선교사의 눈에는 조선말의 풍경이 그렇게 보였는지...

왜 일제시대가 가지는 의미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지...

왜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비극이 일어났는지...

왜 한국전쟁에 미국이 참전하게 되었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

왜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에서 수많은 희생이 뒤따르게되었는지...


중요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충분한 고민없이,

너무나 손쉽게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였다라고 결론내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나마 내가 크리스챤이니까~ 이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대략이라도 이해할 수는 있지, 이거는 뭐 다른 사람들이 듣기에는 억지려 끼워맞춘다는 느낌밖에 주지 않는다.

(거기에 한국인을 비하하는 듯한 표현들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들은 귀에 상당히 거슬린다...)


안그래도 이런 생각을 하면서,

과연 어떤 해명을 내놓을까 연합뉴스에 나온 보도자료를 찾아봤더니...


"논란이 되고 있는 글들은 언론인 출신의 자유 기고가로서 쓴 것이고, 

강연은 종교인으로서 교회 안에서 한 것이어서 일반인의 정서와 다소 거리가 있을 수 있다"


얼핏들으면, 굉장히 합리적인 답변인 것같기는 한데,

그렇다면 맞춤형으로 여기서는 다른 이야기, 저기서는 다른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인가?


그러기에는 너무 종교적이지 않은 이야기들이 많이 섞여있는 듯하다...

미안하지만, 종교적 신념은 지키면서도 위기를 피해가고 싶다는 핑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나도 크리스챤이지만, 

그 종교적 신념이라는 것 자체가 정상적인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암튼, 하나님 뜻이라는 단어를 너무 함부로 남용하지 않았으면 한다.

크리스챤이라면 겸손히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 항상 고민하고 기도해야하는 것이 정상이거든...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주장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이용하는 것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인가...


+


솔직히 내 주변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온누리교회를 다녔던 사람이고,

지금도 상당수가 온누리교회에 다니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상황이 반갑지만은 않다.


소망교회, 사랑의 교회, 삼일교회, 명성교회 등

대형교회들이 여러 스캔들에 휩쓸릴 때에도 그나마 여기는 괜찮은 편이라 생각했다.


2007년 대선 때 믿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야한다는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가 하용조 목사님이 비난 받은 것 이외에는

그래도 정치적인 문제나 내부적인 갈등에 있어서 대외적으로 큰 어려움들을 겪지 않았던 대형교회였다.


10년 넘게 있으면서 이상한 것들도 많이 봤지만,

그래도 여기는 그나마 괜찮은 편이라고 생각했기에 얼마전까지 이곳에 남아있었다.


지난 1년간 이곳저곳 동네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차라리 온누리교회가 더 괜찮겠다고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괜찮은 교회도 몇 군데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이켜보면, 이런 뉘앙스의 강연이 왠지 익숙하다.

어린 시절 이런 뉘앙스의 강연이 상당히 많이 있었던 기억이 얼핏얼핏 난다.


그리고 지금도 주일 예배의 장로님들의 대표기도를 듣고 있으면

문창극보다 더 하신분도 상당히 많이 있다는 생각도 든다. (심지어 목회자들 중에도...)


내가 같이 사역하고 알고 지내던 훌륭하신 목사님과 장로님도 많았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도 상당히 많이 있었고, 그래도 그냥 참고 넘어갔던 적도 많았다.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곳이고 좋은 추억이 가득한 곳이기에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부정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냥 마음에 안드는 강연이나 설교가 있으면,

저런 사람도 있을 수 있지라는 생각을 했었고 어쩌면 나도 내부 논리에 빠져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과연 이번 사건에 대해서 온누리교회의 대응이 너무나 궁금하다.

정치적 이슈에 대해서는 그래도 나름 굉장히 차분하고 신중하게 대처를 해왔던 교회이기 때문이다.

(2004년 김선일씨 피습사건이라는 대형 사건에 대해서도 굉장히 낮은 자세로 대처를 했었다.)


온누리교회에 대한 비판도 상당히 많은 것은 알고 있지만,

상당히 깊숙히 활동을 하면서 느꼈던 부분은 그래도 본질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점이였다.


기업화되고, 대형화되고, 성과주의적인 흐름 속에서도

나름 순수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모습들을 보았기에 10년동안 나는 거기에 있을 수 있었다.

(물론 순수한 신앙적 열정이 다른 사람에게 폭력으로 행사되는 모습도 많이 보았다.)


제발 이번 사건에 대해서 어설프게 대응하지 말고,

온누리 교회가 다시 한 번 거듭날 수 있는 계기로 삼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질 뿐이다...

열린 공동체 사회 Christianity 문창극, 온누리교회

  1. 결국 온누리교회는 최악의 대응을 하고 말았다. 다른 원로 목사님들과 함께... 그것도 문창극 사퇴 하루 전에...http://goo.gl/6LYKWQ

왜 박근혜 정부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지 못하는 것인가?

2014.05.18 12:21


성경에는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주었던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크리스챤이 아니라도

지나가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만한 유명한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이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래~ 어려운 이웃을 돕고 살아야지~' 라는 미담으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 이야기를

왜 전하게 됐는지, 그리고 이 이야기를 통해서 전하고자한 말씀이 뭔지를 정확히 볼 필요가 있다.


누가복음 10장 25절~37절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이 이야기는 예수님을 시험해보고자 한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였다.


예수님이 생존해서 활동할 당시

예수님을 주로 공격한 사람들은 당대 지식인들이였다.


그들이 전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하는 예수님을 질투하기도 했고,

자신들이 듣기 싫은 소리를 하고 다니는 예수님을 미워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질문을 한 이유는 어찌보면,

'그 입 다물라~ 그냥 좀 가만히 있으라'라는 감정의 표현이였을지도 모른다.


+


율법학자는 예수를 시험해보고자 질문을 던진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5절)


다분히 의도가 숨겨진 질문이다.

난해한 질문을 통해서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할 경우 망신을 주고 싶었고,

맘에 들지 않는 답변이 나올 경우에는 꼬투리를 잡아서 문제를 삼고자 했을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우문 현답으로 대응하신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6절)


공을 다시 율법학자에게 넘기신 것이다. 

율법학자는 자신의 지위가 있고 사람들이 보고 있기에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네가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7절)


율법학자는 이미 자신의 정답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과 다른 대답이 나오면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오히려 예수님의 역질문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정답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나 쿨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28절)


율법학자는 열받았을 것이다.

예수님을 시험해보고 망신주고 싶었는데 어이없이 끝나버렸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알면서 '왜 그렇게 살지 않느냐'는 이야기로 들렸을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있었고, 이대로 물러서면 자신의 체면이 말이 아니였다.


이에 나도 아는데 그렇게 살기 어렵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율법학자는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29절)


이 질문에 답변을 해주는 것이 바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일화인 것이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서 길가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는데

제사장이 이를 보고 피하고, 레위인도 이를 보고 피하고, 사마리아인만 그들 보고 도와준다.


당시의 이스라엘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제사장은 사회의 최고 지도자 계급을 의미하며,

레위인은 사회의 지식인 층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은 이민족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으로 이야기하면 동남아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 정도로 보면 될 듯하다.


그 사마리아인은 그에게 응급처치를 해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서 주막으로 데려가 돌봐주고 주막 주인에게 추가로 도와주도록 경비를 지급한다.


예수님은 다시 질문을 던진다.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6절)


이에 율법학자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답을 하고,

다시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이야기를 하면 대화는 마무리를 짖게 된다.


+


이 이야기는

2000년 전 이스라엘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이지만,

2014년 대한민국 사회에 많은 메세지를 전달해주고 있다.


과연 우리는 율법학자처럼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데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닌가?


세월호 사건이 터지자,

우리는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묻는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과연 우리가 그것을 몰라서 질문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데, 그것을 실천할 용기가 없는 것인가?


율법학자의 두 번째 질문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그는 자신의 삶을 합리화하고 싶어서,

이웃이 도대체 누구냐고 예수님한테 질문을 한다.


그 안에는 나도 이웃을 사랑하고 싶은데, 

'도대체 이웃이 누구인지도 모르겠어서 어쩔 수 없다'는 메세지가 숨겨져 있다.


그는 자신을 합리화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바른 말을 하는 예수님을 어떻게든 깎아 내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입으로 내 뱉기는 했지만,

'어떻게 하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사랑해줘야만 하는 이웃의 범위를 굉장히 좁히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만의 세상에서 살고 싶어하는 전형적인 특권의식에 빠진 사람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알고 있으면서도 몸소 실천하지 않는, 

자신의 태도를 어떻게든 합리화하고 싶었던 것이다.


세월호 사건을 통해서 터져나오는 목소리들에 대해서

자꾸 피하려고만 하고 책임 지지않으려고 하는 것은 이런 율법학자의 자세와 같은 것은 아닌가?


+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전달해주고 있다.


우선은 이웃의 범위를 축소하려는 율법학자와는 다르게,

예수님은 이웃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주신다.


사람들이 무시하는 이방인이지만 

오히려 자비를 베풀줄 알았던 사마리아인이 바로 이웃이라는 것이다.


물리적인 공간이나, 혈연적인 관계만 생각하는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에서 이웃을 보면 그 누구도 이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이웃이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였으며,

누군가를 이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다.


우리에게 이웃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사랑할 마음이 없기에 사랑할 대상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해서 먼저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볿 수 있게 해준다.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발견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에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율법학자처럼 
어떻게하면 사랑하지 않아도 욕먹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될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이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예수님은 진정한 이웃의 자세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준다.


당시 사마리아인은 지금의 외국인 노동자들처럼 부유한 삶을 살 수 있는 환경이되지 못했다.

가진 것이 많아서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으로 최선을 다해서 도와준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주막 주인을 통해서 추가적으로 보살펴주도록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


이는 싸구려 동정이나 생색내기가 아니다.

그는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는 것이다.


그는 주막 주인에게 다시 주막으로 돌아올 것을 약속한다.

단지 잠시 그를 도와준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이웃의 자세인 것이다.


+


과연 우리는 세월호의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게 이웃이 되고 있는 것인가?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그냥 못 본 척하고 내 일 아니라고 넘어가는 것은 아닌가?


내가 그들의 이웃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내가 그들을 사랑할 마음을 갖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닌가?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웃어주는 것이 바로 이웃의 기본 자세이다.


그들에게 사랑할 마음을 갖으면 우리는 그들의 이웃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유가족들의 목소리에

얼마나 귀를 기울여주고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는가?


사회정의, 관련자 처벌, 시스템 개선, 피해자 보상

모두 필요하고 중요한 화두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이 먼저가 되야한다.


세월호 사건이 나의 분풀이 대상으로 전락해서는 안된다.

아무리 열받고 화가나는 사건이여도, 유가족의 목소리를 우선 들어줘야 한다.


그들이 왜 진도에서 20km행진을 벌여서 청와대까지 걸어서 가고자 했고,

그들이 왜 영정사진을 들고 KBS와 청와대를 방문했었는지 들어줘야 한다.


이들이 원하는 정확한 진상규명을 통해서,

세월호 사건을 통해서 과연 우리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정확히 찾아낼 수 있도록 함께 목소리를 내줘야 한다.


현재 유가족이 원하는 것은

싸구려 동정이나 지나가는 위로, 물질적 보상이 아니다.


그들은 왜 자신의 가족들이 죽을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명확히 밝히고 이런 슬픔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어보겠다는 것이다.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심정일텐데 

무서울 정도로 너무나 합리적이고 침착한 주장이다.


아이들을 가슴에 영원히 품은 체,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침착하게 현실을 대면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들에게 오히려 너무 고마울 뿐이다.


[전문]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에 관한 가족 대책위 성명 전문


+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주지 못한 것처럼

세월호에 탑승한 희생자들을 구조하는 것에는 실패했다.


강도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쳐버린 것은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의 개인적인 윤리에 대한 문제였지만,


사고 신고를 받고도 제대로된 대처를 하지 못한 것은

이 일화에 등장하지 조차 않는 정부 지도자들의 무능력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제대로 자신의 소명을 다하지 못했기에,

진정성을 가지고 진상을 명확하게 규명해야하며,

이를 기반으로 관련자 처벌, 시스템 개선, 피해자 보상을 해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어찌보면, 정부의 올바른 태도를

착한 사마리인의 이야기에서 찾는 것은 너무 큰 기대일지도 모른다.


지금 논의되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이야기이고,

당연히 정부로써는 해야하는 의무사항이 안지켜지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에게 이웃이 되어달라는 것은

그런 기본적인 것은 당연히 지켜야하고, 진정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면 그것을 넘어선 자세를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그 피해자의 가족들에게 반드시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 사건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충격을 받은 모든 국민의 이웃이 되야한다.


이 사건을 통해서 피해를 입고 상처를 받은 것은

유가족들뿐만 아니라,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모두 지켜 본 국민들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그들에게 이웃이 되어주지 못한다면,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의 이웃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잃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이웃이 되고 싶다면,

착한 사마리아인이 했던 것처럼 고통을 당한 사람들을 최선을 다해서 지속적으로 돌봐줘야 할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이제 그만,

처음 질문을 던졌던 율법학자와 같은 태도를 버려야만 한다.


먼저 빠져나갈 궁리만 계속해서 할 것이 아니라, 

진실을 밝히고 정확한 내용들을 국민들에게 알려줘야 한다.


그리고, 무엇이 잘못됐는지 명확히 알았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아는 것을 바로 실천에 옮겨야 한다.


그것만이 정부가 살아남는 길이다.

유가족이 요구한 명확한 진상규명마져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참아주던 국민들마져 그들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기본적이고 당연한 것을 한 이후에는

사마리인이 했던 것처럼 피해자들을 끝까지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줘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피해자들의 이웃이 되어주지 못한다면,

이 일로 충격을 받고 정부에게 실망한 대한민국 국민들의 이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진정한 이웃이 되어주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대한민국 국민들은 대한민국 정부가 우리의 이웃이 되어줄 수 있다고 다시 한 번 정부를 믿어 줄 것이다.

열린 공동체 사회 Christianity 강도 만난 사람, 누가복음, 대한민국 정부, 박근혜 정부, 세월호, 예수님, 율법학자, 이웃, 진상규명, 착한 사마리아인, 크리스챤

도피성(cities of refuge, 逃避城)과 예수 그리스도

2014.04.06 17:05
여호수아 20장에는

도피성(cities of refuge)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40년의 광야 생활이 끝나고,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이스라엘 민족은 정복한 땅을 지파별로 나누게 된다.

지파별로 땅을 나눈 후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내린 첫 번째 명령은 도피성을 지으라는 것이다.

도피성에 대한 이야기는 모세가 살아있던 시절부터,
출애굽기 21장, 민수기 35장, 신명기 19장에 이미 언급하셨던 개념이다.

도피성이라고 하면 뭔가 좀 어려워보이는데,
영문을 그대로 번역한 '피난처'라는 표현이 오히려 더 쉽게 다가올 수도 있을 듯하다.

당시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함무라비 법전에도 등장하는 보복법이 존재했던 시절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유가 무엇이 됐던 사람을 죽인자는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의적으로 사람을 죽인 자도 있지만,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도 분명히 존재할 수 있다.

이에, '도피성'이라는 공간을 마련해서 사람을 죽인자는 
일단 이곳으로 피난을 가서 회중 앞에 재판을 받을 기회를 주는 것이다.

도피성이라는 공간은 이스라엘 지역에 총 6곳이 존재했는데,
어디에서든 하룻 밤만 이동하면 피난을 갈 수 있는 곳에 위치해있었다고 한다.

일단, 보복을 당하기 전에 재판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이였다.
하지만, 사고가 아니라 고의로 사람을 죽인자는 받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실수를 저질렀거나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에게 해명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공간이였던 것이다.

+

이 도피성이라는 공간은 
제사를 담당하는 레위지파에서 담당을 했으며,
도피성에 들어온 사람은 재판을 통해서 그 죄를 밝히게 된다.

이를 통해서 고의로 사람을 죽인 경우에는 처벌을 받게 되고,
만약 고의가 아닌 실수로 사람을 죽인 경우에는 도피성에서 유배생활을 해야했다.

이는 보복에서 보호해주는 것도 있지만,
고의가 아닌 실수나 우연적인 사건에 의해서라도
사람을 죽인 경우에 대해서는 그에 맞는 처벌을 받게한다는 의미가 있다.

어쩌면 굉장히 합리적인 것 같고,
지금 존재하는 무죄 추정의 법칙이랑도 이어지는 것같고,
과실치사 같은 항목들하고 이어지는 합리적인 처사라는 생각이 든다.

당장의 위험이나 억울함을 
피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하나님의 배려인 것이다.

도피성에서 유배를 하던 사람들은 들어온 시기와 상관없이
대제사장이 죽게 되면 유배생활이 끝나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한다.

30년 동안 도피성에 있던 사람도 있고, 
단지 며칠만에 도피성에서 나오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참 아이러니 하다.

대제사장이 죽는 순간 도피성에 유배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사면을 받게 된다.
그들은 자유를 누리게 되기에 오히려 대제사장이 죽는 날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

하지만, 당시 대제사장이 어떤 존재인지를 잘 알아야한다.
영적인 지도자이면서 모든 사람의 존중을 받던 사람이였다.
죄지은 사람의 해방은 민족을 대표하는 지도자의 희생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대제사장이 죽을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들도 물론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들은 대제사장의 희생이라는 커다란 슬픔을 가져야만이 속죄함을 받을 수 있던 것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스토리라인이다.

누군가의 희생 그리고 그를 대가로 얻게 되는 속죄함

인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이다.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도피성에 해방이 왔다면,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류에게 해방이 온 것이다.

도피성은 처음에는 안식처가 되어주었지만,
도피성에서의 유배생활이 계속되면서 그들은 해방의 날만 기다렸을 것이다.

대제사장의 죽음은 그들에게 새로운 자유를 주었고,
그들은 그 자유를 만낏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제사장의 희생을 가슴에 기억해야만 했다.

이는 오늘날을 살고 있는 크리스챤에게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무겁고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사람들의 그 짐을 덜어주고 휴식을 취하게 해주는 도피성이였으며, 
동시에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희생을 하는 대제사장이였던 것이다.

내가 오늘 누리고 있는 이 자유는
거져 받은 것이 아니기에... 너무나 소중히 그 희생을 기억하면서 사용해야겠다.


열린 공동체 사회 Christianity 대제사장, 도피성, 모세, 민수기, 속죄함, 신명기, 여호수아, 예수 그리스도, 유배생활, 죽음, 출애굽기, 피난처, 함무라비 법전, 해방

평신도들의 대화 (불교, 천주교, 개신교) - 새길교회 (2014)

2014.03.03 06:15


3대 종단의 성직자 간의 만남도 보기 힘든데...

평신도들의 만남이라는 부분이 너무나 신선했다.


과연 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

이들의 이야기에 과연 누가 귀를 기울인다는 말인가?


근데, 어느새 나도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종교 = 성직자' 라는 공식은 어떻게 보면 오늘날 종교들의 문제점의 출발점이 된 것 같다.


+


3명의 내공은 장난이 아니였다.

난다긴다하는 성직자들조차 따라오기 힘들정도의 내공을 가진 분들이지만,

이들은 엄연히 성직자가 아니기에 이들의 목소리는 one of them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이들이 이야기한 부분들은 반드시 모든 종교인들이 기억해야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3대 종단의 문제인식이 유사한 것을 넘어서 너무나 똑같다는 사실이다.


조성택 교수의 문제제기는 너무나 신선했다.


종교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의 포교율이 얼마인지만 생각한다.

하지만,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절반은 아예 종교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왜 그런 현상이 발생했는지에 대한 고민은 전혀 하지 않고 있는 것같다.


또한, 조성택 교수가 지적한 불교계의 가장 큰 문제점들은 너무나 충격적이다.


그동안 불교계는 개신교와 천주교가 가진 많은 장점들을 배워왔다.

교육이나 봉사 등 사회에서 필요한 곳에서 섬기는 것이나, 다양한 시스템을 배웠다.

그런데 그런 과정에서 기독교가 가지는 나쁜 점도 상당부분 그대로 배꼈고,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라는 것이다.


원래 불교에는 제가자와 출교자의 구분만 있으며,

다같은 수행자이지만 어디에서 수행하느냐의 차이만 존재했다.

하지만, 스님들이 성직자라는 새로운 계급을 가지게 되면서 그들이 전부인 것처럼 변질되었다.

열린 진리관이 점차적으로 기독교의 배타주의를 그대로 닮아가는 형상도 나타나고 있다.


크리스챤으로써는 아주 뼈아픈 지적이다.

기독교가 가진 단점을 아주 정확하게 지적하면서도 동질화된 불교의 현실을 알 수 있었다.


반면에, 개신교의 각종 분란으로

상대적으로 고평가 되고 있는 천주교의 고백 역시 너무나 신선했다.


최근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넘어오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귀찮게 안한다.' 그리고 '교구 중심이라서 익명성이 매우 강하다.'

시국미사나 정치적 메세지를 전달하는 굉장히 적극적인 모습도 인상을 준 것 같다.


하지만, 천주교 역시 배타적인 태도, 불투명한 재정, 교회 중심주의라는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워낙 권위적인 데다가, 내부적으로 관리를 잘하고 있어서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제2 바티칸 공회 이후 천주교는 굉장히 많은 개혁을 해왔고,

프란체스코 교황의 비권위적, 가난한 사람의 편에 서는 모습은 굉장히 깊은 인상을 주고 있다.


하지만, 사실은 너무나 당연히 해야되는 모습이였고,

그동안 그렇지 못한 것들이 너무나 부끄러운 모습이다.


천주교에서 평신도의 존재감은 거의 없다고 봐야한다.

그동안 천주교의 이미지는 김수환 추기경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로마시대의 계급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평신도는 사명도 없고 매우 수동적인 존재일뿐이다.

평신도가 나서서 무엇을 하려고 하면, 오히려 평신도들이 너희가 뭔데 나서냐면서 방해를 하고 있다.


+


개신교도인 나에게 

3대종단의 문제제기가 너무나 똑같다는 사실은 참으로 신선하게 다가왔다.


분명 자신의 종교의 문제들에 이야기하고 있는데,

하나같이 다른 교회의 평신도들이 와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실천적 개선방안도 너무나 유사했다.

적극적인 포교보다는 내부적인 개선이 선행되야 한다는 것이다.

제도 안에 갇힌 성직자들보다 오히려 평신도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상대 종교에 대해서 좀 더 포괄적으로 배울 것은 서로 배우는 자세도 지적했다.


불교가 가진 관용의 마인드

천주교 가진 영성 수련의 방식

개신교가 가진 실천적이고 적극적인 자세


종교가 가지는 삶의 지혜를 서로 배우고,

종교간에 대화를 넘어서는 협력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3명의 평신도들의 이야기들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론이였지만, 현실을 생각하면 아주 혁명적인 이야기이다.


+


그렇다면 진짜 개신교의 개혁에도 평신도가 답인가?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현재의 상황을 보면 그것도 답이 되기는 어렵다.


무엇인가 제대로 사역을 하고 싶다면,

당연히 신학교에 가서 목회자가 되야만 했다.


평신도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중요한 역할은 항상 목회자가 했고,

목회자가 아무리 능력이 없어도 중요한 역할은 평신도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목회자 중심의 교회가 된 문제가 고착화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측면으로 현상을 바라볼 필요도 있다.


역할에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에,

권한의 문제도 있지만 목회자에게 책임을 부여하는 측면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최근 신천지의 공격때문에

교회 내에서 목회자가 아닌 사람은 더욱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평신도 중에 누가 신천지인지 모르기에 평신도의 입지는 더욱더 좁아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신뢰가 무너진 현실을 고려한다면

평신도에 의한 개혁도 사실상 어려운 것이 현재 교회의 이슈이다.


사회에서 지탄받고, 내부에서는 신천지가 창궐하고...

어떻게 보면 오늘날 교회는 사면초가의 위기에 빠져있다고 할 수 있다.


+


그렇다면 진짜 답은 없는 것인가?


신천지 현상은 사실은 그동안 왜곡된 개신교 성장의 거울이다.

신천지를 비롯한 이단의 교리나 방식들은 왜곡된 개신교의 모든 부분들을 차용했다.


최고의 극단적인 부분들만 응집해서 광신도를 만드는 그들의 방식을 보면,

개신교가 잘못된 방식으로 사람들을 호도해왔던 뼈아픈 과거를 반성하게 만든다.


극단은 극단과 통하는 법이며,

생활 속의 종교가 아닌, 삶의 전부가 되어버린 종교

그 가장 극한의 왜곡된 모습들이 오늘날 이단이 보여주는 행태들이다.


오늘날 교회는 이단을 보면서 단순히 욕할 것이 아니라,

이단이 보여주고 있는 교회의 추악한 이면들을 깨달아야만 한다.


천주교가 제2 바티칸 공회를 통해서 살아난 것처럼

개신교 역시 기존의 왜곡들을 인정하고 털고 나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천주교처럼 중앙집권화되지 않았기에 굉장히 힘든 일이지만,

대대적으로 교리과 방향성을 정리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자멸할 수 밖에 없다.


더 깊고 구체적인 부분은 교리적인 이슈들이기에 

나같은 평신도가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목회자들이 스스로 깨고 나오지 않으면,

평신도들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교회는 점차 쇠락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평신도들이 나서서 목회자들에게 목소리를 점차적으로 내야만 한다.

목회자와 평신도가 모두 함께 깨어나오지 않으면 교회의 미래는 없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처럼 살기 원하는 나같은 평범한 평신도가

매일 교회에서 살다싶이하면서 삶의 피난처로 교회를 가는 것이 아닌,

생활 속에서 예수님을 편안하게 만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교회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열린 공동체 사회 Christianity 개신교, 목회자, 불교, 새길교회, 성직자, 종교, 종교간의 대화, 천주교, 평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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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도맛 주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 (Scriptural Studies in the Kingdom of God) - 조지 앨든 래드 (2001)

2013.12.29 09:33
하나님 나라의 복음
국내도서
저자 : 조지 앨든 래드 / 박미가역
출판 : 서로사랑 2009.04.28
상세보기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책


책의 내용도 좋았지만, 책을 읽고 나서 들은

이승구 교수님(합동신학대학)의 강의는 사실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였다.


돈으로도 못간다는 하나님 나라가

내가 생각하던 그런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였다니...


한국의 교회들은 도대체 신도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바라는 것인가?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만드는 내용이였다.


+


유대인들의 하나님 나라는 이미 멸망했다.

선지자들과 세례요한은 언젠가 그 나라가 회복될 것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셔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이야기했지만 유대인들은 아직도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한국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죽어야지 가는 내세에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누구 말이 맞는 것인가?


이 책과 이승구 교수님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서 하나님 나라는 이미 도래했지만,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Already but not yet


이건 또 무슨 OOOO한 이야기인가?

온거면 온거고 아닌거면 아닌거지, 이미 임했으나 아직 오직 않았다?


이는 일단 세대의 구분에 대한 기초 발상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이 세대가 끝나면,

죽어서 새로운 세상으로 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 세대가 끝나면, 새로운 세대가 온다고 생각했다.

(성경에서도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 세례요한, 예수님 모두 오는 것으로 표현했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우리가 간다는 개념보다는 이 땅에 온다는 개념으로 해석해야하는 것이다.


과연 그렇다면 성경에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 것인가?


성경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모두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니까 현재도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이고, 미래에도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현재의 하나님 나라와 미래의 하나님 나라의 차이는 무엇일까?


현재의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 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권세로 옮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임했음을 인정하고,

매 순간,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통치에 따라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임함을 인정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의 이유(소명)을 알려주시며,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이 떠지게 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눈에 안 보이는 방식으로 이미 임했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인정할 수 없었다.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모세와 다윗의 영광이 회복될 줄 알았는데,

바뀐 것은 하나도 없는데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 이야기하니, 예수는 사기꾼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아직도 메시아가 오길 기다리고 있다.)


+


하지만,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 했지만,

앞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이야기하신다.


그 날에는 눈에 보이지 않던 하나님 나라가 눈에 들어나게 될 것이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것이며,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이 계신 곳에 가게 될 것이다.


어찌보면 사람들이 그렇게 열망하는 하나님 나라는

주님이 재림하실 때 앞으로 오게될 그 하나님 나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한 것이 중요한 이유는

현재의 삶이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이미 승리한 전쟁이기에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다.


단지, 언제올지 모르는 미래를 바라만 보고 참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느끼고, 즐기고, 용감하게 맞서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미래성만 있다면 현재가 너무나 불행한 것이고,

현재성만 있다면 미래에 대한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현재성과 미래성을 모두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현재에도 행복할 수 있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축복을 받은 것이다.


+


이미 이런 이야기를 책이나 강의를 통해서 들은 사람은

뭐 새로운 이야기도 아닌데, 그렇게 호들갑이냐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과연 대한민국의 교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얼마나 제대로 하는지 궁금하다.


일단 신도들은 전통적으로 내세에 대한 견해가 매우 강하기 때문에,

죽은 후에 하나님 나라를 가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경우가 너무 많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극락, 전통 신앙에서 이야기하는 천당과 동급으로 천국은 존재한다.


어찌보면 극락과 천당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죽은 후에 가는 곳이 천국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이 쉬웠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위협소구가

포교활동이나 헌금을 끌어들이는 것에는 더 효과적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천국에 대한 왜곡된 견해를 낳았으며,

결정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제대로 설명해줄 수 없게 되어버린다.


사후 세계를 준비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면,

현실의 세계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하며, 이 세상에서 행복해도 되는 것인가?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했다. 그리고 앞으로 임할 것이다.

이 것이 주는 가장 중요한 메세지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지금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기에,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기에 우리는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으며,

지금 사는 이 삶을 더욱더 하나님 뜻에 맞게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빨리 오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열심히 그리고 서둘러서 전 세계에 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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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bibi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미 도래하였다는 설명도 중요하지만 마지막 챕터를 읽어 보면 완성될 하나님 나라을 기다리며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의 중요성이 엄청남을 발견합니다. 혹시 그것을 지나친 것은 아닌지요?

Run With the Horses (주와 함께 달려가리이다) - Eugene H. Peterson

2013.12.19 08:39

이 글은 2010년 10월 23일 작성한 글을 다시 게재한 내용입니다.


주와 함께 달려가리이다
국내도서
저자 :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 / 홍병룡역
출판 : IVP 2003.11.20
상세보기


인상깊은 구절
선을 매력적인 모습으로 그려내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예레미야

 

5개월간 지속된 생명의 삶 큐티본문에...

참 맘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마치 벽에다 이야기하듯이

지겨울 정도로 반복되는 회개에 대한 예레미야의 권고...

 

과연 순모임에서 난 순원들과 무엇을 나눌 수 있을까?

매일 아침 순원들한테 말씀 문자도 보내줘야되는데...

 

특히 예레미야서 같은 경우에는 강해서도 별로 없다...

그래서 난 책장에 오랫동안 꽂혀만 있던 이 책을 꺼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예상을 뛰어넘고 너무 재밌게 읽은 책이다~ ^^

 

+

 

유진 피터슨 아저씨는 책을 어렵게 쓰기로 유명하시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피터슨 아저씨는 너무 아는 것이 많다...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혼자서 저 멀리 달려가신다...

 

하지만, 이책은 그래서 더욱더 매력있게 느껴질 수 있었다.

 

예레미야서의 내용은 상상력이 없이 읽으면

완전 지루하다 못해 토할 정도로 비슷한 내용이 반복된다.

 

하지만, 유진 피터슨 아저씨는 시대적 배경과 상황을 잘 고려하여~

예레미야과 주변 인물들의 심리까지 완전 분석하여 주셨다~

 

마치 내가 그 시대에 살면서 예레미야를 지쳐보는 것처럼... ^^

그래서 더욱더 예레미야서의 본질을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었다~

 

+

 

선을 매력적인 모습으로 그려내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p.15)

 

예레미야의 삶을 단편적으로 설명해주는 말이다...

 

예레미야의 삶은 진짜 너무 매력이 없는 삶이다~

생애 대부분을 미친놈 취급받으면서 외롭고 힘들 길을 걸었다.

 

그 누구보다도 힘들었던 삶이였을 것이다...

부귀영화나 즐거움은 고사하고 온갖 핍박과 멸시, 조롱만 남무했을테니...

 

이 것이 진정한 크리스챤의 삶인 것인가??

온갖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이 마치 예수님을 보는 듯했다...

 

나에게도 이런 사명이 주어졌다면...

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아직까지는 내가 내공이 많이 부족한 것 같다...



열린 공동체 사회 Christianity Eugene H. Peterson, Run With the Horses, 예레미야, 유진 피터슨

The Screwtape Letters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 C.S. Lewis

2013.12.19 08:36

이 글은 2010년 10월 14일 작성했던 내용을 다시 게재한 글입니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보급판)
국내도서
저자 : C.S.루이스(Clive Staples Lewis) / 김선형역
출판 : (주)홍성사 2005.09.30
상세보기


군대에서 막 제대하고,

누구보다도 열정이 있었던...

스무 세 살의 순수한 청년 시절,

 

난 이 책을 통해 새로운 자극을 받았다.

 

 

근데, 7년이 지난 지금

이제 세상이 뭔지 조금 알겠다는

서른 살의 청년이 된 지금,

 

난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새로운 마음을 가지게 됐다.

 

그 때는 뭐가 뭐지도 제대로 모른 체

기존의 기독교인들을 비난했지만,

 

이제는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고 살아가는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었다.

 

난 어느 새 속물이 되어 있었고,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놀아나고 있었다.

 

 

난 이 책을 통해서

무엇보다도 날 먼저 사랑해야겠다는 것을 알았다.

 

스스로 정죄하지 말고,

스스로 타협하지 말고,

 

나의 부족함을 알고,

당당하게 나 자신을 지켜나가는...

 

너무나 당연한 말들이지만,

어느새 잊고 있었던 것들을...

 

다시 한 번 맘을 다잡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CS루이스 아저씨의 책은

사실은 약간은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이 아저씨도 나처럼 생각이 너무 많기에,

때론 너무나 심오해서 너무 깊게 들어가버린다.

 

하지만, 언제나 핵심을 집어주는 센스는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것같다~

 

때론 뜨끔하면서,

때론 아차싶으면서,

 

어느 새 난 이 책을 다 읽고 말았다...

그리고, 알고 당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갖게 해준다...

 

너무나 당연하게 당해왔던 나 자신이 부끄러우면서도,

이제는 당하지 않을 생각을 하니 너무나 통쾌하다~ ^^

 

Thank's 루이스 아저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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