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nker 1] 강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 시즌2 Episode 01 - 해방 후 민족음악

2015.01.31 23:49


오랫만에 들어보는 강헌선생의 강연!!


역시나 명불허전이였지만,

이번 강의는 서론이 좀 너무 길고, 

결론이 조금은 아쉽게 급 마무리된 느낌이 들기는 했다.


1860년대 러시아 5인조와

1945년 해방 직후 한국의 민족음악


다른 듯하지만, 매우 닮은 이 2가지 이야기는

'김순남'이라는 한국이 낳은 천재가 역사의 회용돌이 속에서 사라져버린 안타까운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강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 시즌2 Episode 01 - 누가 우리를 주변이라고 부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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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5인조는 분명 중학교 음악교과서에 나왔던 것 같은데, 강헌선생의 강연을 듣기 전까지는 완전히 씨커먼케 잊고 살았던 그냥 암기의 대상이였다. 민족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민요를 중심으로 음악활동을 펼친 흐름이 있었다.


(사진 출처: 알라딘 블로그 http://blog.aladin.co.kr/763908185/6702903)


하지만, 그들이 가진 의미는 대단했다.

(진짜 우리나라의 암기식 교육의 폐해가 심각하다...)


밀리 발라키레프
세자르 큐이

  이 중에서 음악을 제대로 공부해본 사람은 리더겪인 밀리 발라키레프 뿐이며, 나머지는 각자 다른 직업을 가진 체 틈이 나는대로 음악활동을 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들이 지은 모든 곡을 합쳐도 당대 라이벌이였던 차이코프스키 혼자 지은 곡에 숫자에서도 안되고, 음악적인 완성도에서도 완전히 밀린다고 한다. (물론 차이코프스키는 이들을 개무시했다.)

  당시 러시아 왕실과 귀족들은 일부러 프랑스어를 사용했고, 당대 러시아에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독일어로 작곡을 했다고 한다. (강헌 선생은 이들을 마치 지금 대한민국에서 영어로 잘난척하는 것에 비유한다.) 하지만, 1860년대 러시아에서도 근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슬라브주의라는 우리만의 독창성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당시 전세계적으로도 민죽주의 열풍이 일어나고 있었고, 덴마크나 체코에서도 비슷한 민족주의 음악가가 나왔다고 한다. 당시 러시아의 음악계는 안톤 루빈스타인과 니콜라이루빈스타인을 중심으로 전형적인 서유럽의 음악이 대세를 이루었고 상트페트로부르크 음악원이나 모스크바음악원을 만들어 적극적으로 서유럽의 음악을 도입하고 있었다. 이들 세력의 최고 에이스는 차이코프스키였고, 이들은 민족주의 흐름을 철저히 무시하면 '5인조'라는 별명을 붙였는데, 역으로 5인조는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내는데 활용한다. 5인조는 상테페트로부르크에 무료음악원을 개설하는 등 철저히 민중에 다가서는 행보를 보였고, '음악은 기교가 아니라 시대와 민중의 삶이 전달되는 도구'여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음표가 직접 말하게 한다는 주장을 하며 러시아의 민요들을 재해석한다. 이는 역으로 차이코프스키에게 영향을 주었고, 차이코프스키라는 뛰어난 테크니션을 이를 통해서 세계적인 음악으로 거듭나게 되었다고 한다. 라이벌이 선의의 경쟁을 펼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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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해방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이런 선의의 라이벌이 형성될 수 없었다.

1945년 해방이 이루어지자, 일본인들이 빠져나간 빈공간을 정리하기 위해서 음악계에서도 자생적인 움직임이 시작된다.
<조선음악건설본부>라는 이름으로 재빨리 만들어지지만, 급하게 만들어지면서 친일파와 민족주의자가 모두 모이게 된다. 당연히 판은 깨지고 친일파는 현재명을 중심으로 <고려교양학 학회>를 만들게 되고, 비주류의 젊은 음악가들은 <조선프로레타리아 음악연맹>을 만들게 된다. 음악이 아니라 영어가 전공이였던 현재명은 일본인들의 도움으로 미군정과 손쉽게 연을 닿게 되었고, 경성음악학교라는 교육기관과 한국최초오케스트라를 보유하면서 완벽하게 음악계를 장악하게 된다. 1945년 10월, <고려교양학 학회>가 미군정 환영 음악회를 열 때<조선프로레타리아 음악연맹>은 경성방직 파업음악회를 개최하는 완전 상반된 움직임을 보였지만, 세력은 급격히 현재명파로 기울게 되면서 1945년 12월 <조선프로레타리아 음악동맹>은 <조선음악가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1946년 <고려교양학 학회> 역시 <대한음악가협회>로 이름을 바꾸게 되고, 이제 음악계는 크게 3가지 흐름으로 나뉜다.

현재명을 비롯한 주류 세력은 서양음악을 중시하는 서양음악진영
조선시대의 전통 음악을 다시 살려야한다는 전통음악진영
일제시대 대중들이 즐겨부르게 된 트로트와 엔카를 이어가자는 대중음악진영

하지만, 이들과는 또 다른 제4의 길을 걸은 세력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민족음악진영이였다.
민족음악진영은 일제시대때부터 활약했던 안기영을 제외하면 모두 2세대의 젊은 음악가들이였다.

안기영은 미국 유학파이며, 작곡가이면서도 테너였다.
홍난파가 서양음악듣고 한국것을 버렸다면, 안기영은 서양음악의 틀을 활용해 우리의 음악을 만들어보려고 했다.

한국에 돌아온 안기영은 이화여전에 교수로 재직하며, 학생들과 지방을 다니면서 민요를 악보에 옮기는 일을 한다.
서양음악진영은 그의 작업을 무시했고, 전통음악진영은 자신들의 밥그릇을 건드린다고 경계했다고 한다.

안기영은 한국의 밀리 발라키레프였고, 그의 창작곡들은 대중에 큰 호응을 얻게 된다. 
1929년 발표된 <그리운 강남>의 경우에는 안기영이 월북해서 현재는 교과서에서 사라져버렸지만, 당대에는 최고의 히트곡이였다고 한다. 서양음악의 기본 화성을 썼지만, 서양음악의 틀안에서 한국적 요소를 녺이는 성과를 낸 것이다.

(유튜브에 검색해보니, 월북했다고 이북 노래라고도 나오는데, KBS 무대에서도 추억의 노래로 소개도 되기도 했다.)


안기영은 1936년, 라미라 가극단을 만들어서 한국최초 뮤지컬 <견우 직녀>를 만들고 향토가극을 무대에 올렸다.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반도가극단으로 이름을 바꾼 두 번째 작품 <은하수>에서는 대박을 치며 정점에 오르게 된다.
팀을 3개로 나눠서 만주와 일본으로까지 순회공연을 다닐 정도였고, 이후 이 극단의 출신들이 대중문화를 장악하게 된다.

한국최초의 개그맨 윤복일(윤항기/윤복희의 아버지)을 비롯하여,
황해 / 백설희 / 백성희 / 김희갑 / 장동희 등 이들이 끼친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음악가동맹>에서 그의 활약은 미비했으며,
월북한 이후에도 큰 활약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1980년까지 살아서 노래를 만든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의 작품 중에 현재 남한에는 이화여대 교가만 남아서 알려져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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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17년 태어난 윤이상과 동갑내기 김순남은
이 정도 수준으로 만족할 수 없었고 그가 이끈 민족음악진영은 완전히 새로운 음악을 추구했다.

안기영의 음악은
화성의 문제 때문에 한국의 음악에 대한 현대적 해석을 하지 못했다.
또한, 우리 전통 음악이 가지고 있던 장단과 서양음악의 박자의 차이를 극복하지도 못했다.

이에 김순남과 그의 2년 후배 이건우는 아예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버린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왕성한 작곡활동을 통해서 
한국최초의 교향곡, 한국 최초의 피아노 협주곡을 만들어냈고,
아름다운 우리말로 쓰여진 시를 가지고 수많은 가곡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나중에 월북해서는 한국 최초의 오페라를 작곡하기도 했다.)

(조수미가 부른 버전도 있는데, 노래는 조수미가 더 잘하기는 하는데, 반주가 너무 기교가 많이 들어가서 이걸로 대체)

그의 연주는 전통적인 장단도 아니고, 서양음악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연주였다.
화성은 더욱더 기가막혀서 연주자 입장에서는 마치 악보에 장난을 쳐놓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민족적 정서를 담고 있기에 듣는 이에게는 너무나 쉬고 친숙한 음악이였고,
그가 작곡한 <인민항쟁가>의 경우에는 북한의 국가로 알려질만큼 좌익을 대표하는 노래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그가 이끌던 <조선음악가동맹>은 현재명의 견제로 고전을 면치 못했고,
좌익 세력이 완전 궁지에 몰리면서 결국 월북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미군정 음악담당 공사 헤이몰츠 대위는
줄이어드 음대에 입학허가까지 받아주었지만 김순남은 이를 거절하고 월북해 러시아로 떠나게 된다.

러시아에서도 천재성을 인정받은 김순남이였지만, 김일성의 남로당계 숙청과정에서 깡촌으로 유배되어 악보를 배껴그리는 일을 하다가 언제 죽었는지도 모른 체 역사에서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행적이 사라진 1954년 동갑내기 윤이상이 세계적인 음악가의 반열에 오르기 시작한 해이다.
역사적인 비극만 없었다면, 윤이상보다도 더 뛰어난 세계적인 음악가 탄생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은 세계적인 음악가가 된 윤이상의 '광주여 영원히!'


개인적으로는 역사의 한 점이 될 수 밖에 없었던, 당시 희생된 수 많은 천재들이 너무나 안타깝다.

 한 역사학자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외세의 힘에 독재자의 폭력 때문에 남한과 북한 모두 용기가 없거나, 비겁하거나, 능력이 없거나, 눈치가 빠른사람들만 살아남을 수 있던 시대가 그 때가 아니였나 싶다.

 그런 비극의 시대가 다시는 오지 않도록, 정신 바짝 차려야지!!


열린 공동체 사회 Pot cast/[Bunker1] 강헌 강헌, 그리운강남, 김순남, 러시아5인조, 민족음악, 벙커1특강, 안기영, 윤이상, 조선음악가동맹, 진달래꽃

[Bunker 1] 강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 Episode 05 - K-pop 한류 (2013.10.24)

2014.06.08 04:26


강헌선생~~

음악을 사회적인 안목으로 볼 줄아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나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확인해주는 강의였다.

그는 문화를 산업의 측면에서도 분석할 줄 아는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 다섯번째 강의는 나름 신선한 충격이였다.

(하지만 강의 제목은 아주 맘에 안든다,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철지난 부제를 달다니...)

강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 EP.05-1 <K-pop 한류 글로벌 스탠더드를 꿈꾸다> - 방송듣기 (클릭)


이번 주제는 K-pop과 한류 현상에 대한 역사적 맥락과

산업적인 측면에서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좌파 문화평론가인줄만 알았는데, 

산업이라는 측면에서도 문화 컨텐츠를 볼 줄 아는 감각이 남달랐다.


실제 산업에도 몸을 담궜던 사람이기에,

문화를 잘 알고, 사회를 보는 눈도 있고 사업도 직접 해본 이쪽 분야에서는 보기 드문 물건이다~


근데, 솔직히 강연 내용 굉장히 풍부한데

재미적인 측면에서는 사실 예전 강의만은 못한 것 같기는 하다.

(결론도 약간은 실망스러운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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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이번 강의도

역사적인 맥락을 먼저 집고 시작한다.

이제는 기본적인 강의 패턴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한국 가수의 최초 해외진출은

<김씨스터즈>(이난영의 두 딸과 조카로 구성)이다.


이남영은 '목포의 눈물'로 국민 여가수가 된 인물로

1939년에는 <저고리 시스터즈>라는 이름으로 프로젝트 그룹으로 활동하기도 한다.


당대 최고의 솔로 여가수 4명(이난영, 박향림, 장세정, 이화자)은 

정식 그룹은 아니지만 같이 활동을 하면서 194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린다.


한국전쟁에서 이난영의 남편인

오케이레코드 음악감독 김해송이 납북된 이후

이난영은 <저고리 시스터즈>를 복제한 <김씨스터즈>를 데뷔시킨다.


최초의 데뷔는 1953년 피난가는 열차 안이였고,

미8군을 방문한 미국의 프로듀서에게 스타우트되어

라스베가스 호텔에서 하루 8시간씩 노래를 부르는 강행군을 수행한다.

(성공하기 전 비틀즈도 하루 8시간씩 노래를 불렀다니, 원래 무명은 다들 그렇게 생활했었나보다.)


1959년 한국인 최초 미국에 진출한 걸그룹이 되었고,

1962년 한국인 최초 빌보드차트(알앤비 부문)에 진입하며,

당대 최고의 쇼였던 <애드 설리번쇼>에 무려 22번이나 초청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끈다.

(애드 설리번쇼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즈가 데뷔해서 큰 호응을 얻은 그 쇼이다.)



<애드 설리번 쇼>에는 이난영도 초청받아서 같이 무대에 서는데,

당시 미국 비자받는 것이 매우 어려워서 애드 설리번이 직접 도와줬다는 후문도 있을 정도다.


1967년 대한민국의 GDP가 2,067달러였는데,

이들 한달 출연료가 10,700달러였고, 스타더스트 호텔에서 받은 주급은 무려 15,000달러였다고 한다


김시스터즈에 이어서 걸그룹이 국내에 쏟아져나오는데,
이시스터즈, 정시스터즈, 김치캣 등이 있었으나, 1968년 펄시스터즈가 걸그룹을 평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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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빌보드 차트가 여러종류가 있는데,

장르별 차트말고 가장 메인이 되는 차트는 HOT100이다.


동양인 최초로 빌보드 HOT100에 1위를 차지한 것은

1963년 일본인 사카모토 큐의 <스키야키>가 3주간 1위를 기록한 것이다.

(조선계라는 소문도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근데, 이 노래를 왜 좋아했는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검토를 해볼 필요성이 있다는 강헌 선생의 설명이다.


당시 시대적 상황을 보면,

도쿄 올림픽이 개최되면서 일본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이 급증하던 시기이다.


메이지 유신시절부터 교류가 많았던 영국과는 달리

전쟁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미국에는 문화적 교류가 많지 않았는데,


영국에는 상당수의 일본노래가 번안되어서 전파되었지만,

미국에는 일본노래가 번역도 없이 그냥 흘러들어갔다고 한다.


원래 이 노래는 <하늘을 보면서 걸어가자>라는

의미의 제목을 가지고 있었지만 미국에 넘어갈 때는 <스끼야키>라는 이름으로 넘어간다.


당시 일본 문화가 퍼져나가면서

<스끼야키>라는 음식은 일본 음식을 대표하는 것 중에 하나였다고 한다.


한마디로 원곡 가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그냥 일본이라는 이미지를 살리기 위한 작명인 것이다.

(지금으로 이야기하면 윤종신같은 가수의 노래가 '불고기'라는 이름으로 미국에 진출한 것이다.)


1963년이라는 시기는 미국에서 문화적 공백기였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사라져버렸고, 비틀즈는 등장하기 바로 직전이였다.

(당시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으로 분위기가 매우 애매모호한 상황)


여기에 일본에 대한 호기심이나

태평양전쟁으로 일본을 경험한 사람들의 추억 등이 겹치면서 가져온 결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후 1979년 일본의 걸그룹 핑크레이디가

<Kiss in the dark> 라는 영어 노래로 HOT100 37위까지 기록한다.

(근데, 당대 미국의 반응은 약간은 무시하고, 신기해하는 태도를 유지했다고 한다.)


2009년 원더걸스가 <No body>로 한국가수로는

최초로 빌보드 HOT100 올라서 76위까지 기록하였고,


2010년 Far East Movement라는 

한국계와 일본계 미국인 그룹이 빌보드 HOT100 1위를 차지하지만,

이들은 사실상 미국에서 자란 현지인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인 듯하다.


하지만, 

2011년 빌보드 하위차트에 K-pop이라는 장르가 등장하게 되고,

2012년 싸이가 <강남스타일>로 HOT100에서 7주간 2위를 기록하고,

2013년 후속곡인 <젠틀맨>으로 HOT100에서 최고 5위까지 오르는 기록을 세운다.


아시아인이 두 곡이나 HOT100에 오른 것은

1963년 일본인 사카모토 큐(1위 / 58위)와 필리핀의 로키 펠러(16위 / 55위) 이후로

50년만에 최초이기에 싸이의 열풍은 대단한 것으로 K-pop의 영향력이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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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렇게 긴 역사를 이야기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만큼 문화컨텐츠로 해외에서 성공한 것이 어렵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빌보드 HOT100에서 제대로 상위권에 오른 것은

비영어권 아시아인으로는 사카모토 큐와 싸이밖에 없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만큼 음악이라는 영역에서 문화적 장벽을 깨는 것이 어려운 것이며,


세계에서 2번째로 큰 일본시장 조차도

2002년 보아가 최초로 오리콘 1위를 기록하기 전에는 전무했다고 한다.


이후 동방신기가 12번 오리콘 차트 1위를 기록하고,

카라가 해외가수 최초 발매 첫 주에 1위를 기록하는 등의 기록이 나온 것도

보아가 문을 열어놨기 때문에 가능했던 업적이라는 설명이다.


암튼 이렇게 긴~~~

해외차트에서의 한국음악의 성과를 설명하고 난 후 이제야 본격적으로 한류를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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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의 시작은 1996년,

중국에 문화적 개방이 시작되던 시기에

한국의 TV드라마가 중국의 방송에 굉장히 헐값에 처음 팔리면서 부터이다.


<사랑이 뭐길래>, <사랑을 그대 품안에>, <별은 내가슴에> 등이

중국 아줌마들에게 선풍적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한국 드라마 사재기가 시작됐다.


일본에 대한 중국인들의 문화적 반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국드라마를 수입한 것인데 이게 중국에서 완전 먹혀들어간 것이다.


강헌 선생은 한국드라마 성공요인을 3가지로 뽑는다.


1) 중국의 문화 컨텐츠 부재

공산당이 지배하는 중국에서는

중국 문화를 상징하는 예술 감독만 존재하기에,

한국처럼 트랜드에 맞춰서 그때 그때 컨텐츠를 찍어내는 능력이 부재했던 것이다.


최근에는 그래서 한국의 트랜디한 중급 영화감독들이

중국에서 상당수 캐스팅되어서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2) 한국드라마의 현실적이지 않은 막장스토리

한국 드라마가 보여주는 소비문화가

이제 막 형성되는 중국식 자본주의의 욕망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재벌2세와 신데렐라 스토리
서구드라마와는 다른 개연성있는 욕망이 중국인들의 마음을 자극하고 있다는 것이다.


3) 가족이라는 키워드

서구드라마, 일본드라마에서는 볼 수 없는

가족이라는 키워드가 아직까지는 중국과 동남아시아에는 먹힌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자

중국의 한 기자가 '한류'라는 이름을 붙여서 불렀다고 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우연적'이라는 것이다.


1) 한류는 계획적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자생적인 현상

2) 내수용으로 제작된 컨텐츠가 해외에서 우연히 성공한 헤프닝

아줌마들이 드라마에 열광했다면,
청소년들은 드라마에 나오는 OST에 열광하게 된다.

(한국노래만 소개해주는 라디오 프로그램도 만들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되자 연기도 하고 노래도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중국에 진출해서 인기를 끌게되고 그게 바로 안재욱과 장나라였다.


이후 2000년부터는 드라마와 상관없이

베이비복스와 HOT같은 아이돌그룹이 본격적으로 진출하는데,


문제는 중국에 공연 인프라가 전혀 없어서, 
한국에서 모든 장비를 가져가야 했기 때문에 사실상 돈이 남질 않았다고 한다.

드라마도 당시에는 워낙 헐값에 팔아먹었기에 빛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베트남에서 김남주가 광고모델을 했던,

드봉 화장품이 드라마의 인기를 등에 엎고 완전 대박을 치자,

문화컨텐츠의 상업성을 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한다.


이후 중국에서도 삼성이 전지현으로 대박을 치는 등

문화 컨텐츠가 가지는 파괴력으로 한국 기업들이 승승장구하게 된다.


하지만, 컨텐츠 자체만으로는

중국은 별로 돈을 벌 수 없는 시장이다.


일단 외화 유출이 철저히 불가능하며,

실질적으로 저작권 보호도 제대로 안되기 때문에

미국의 메이저 배급사와 음반사가 모두 철수한 시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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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돈이 되는 시장은 일본 시장이였다.


1996년 강헌선생이 직접 참여한 <넘버3>만 해도,

전국적으로 히트를 치며 관객 30만을 기록했는데도 실제 이익은 2억 밖에 없었다.

해외수출할 때 국가당 800만원이였고 실비를 제와하면 겨우 국가당 300만원밖에 안남았다.


영화판 자체가 돈벌이가 안된다고 판단되었고,

가장 큰 투자자인 삼성영상사업단도 이 시장에서 철수한다.


하지만, 1997년 멀티플렉스가 도입되기 시작하고,

강제규 감독의 <쉬리>가 일본에서 완전히 히트를 치면서 200억을 벌어들인다.


당시 음반산업 시장도 비슷한 처지였다고 한다.


IMF이후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무료 다운로드로 음반산업은 일순간에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당시 1위였던 지구레코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업체가

온라인에 대한 이해가 전혀 안된 상태에서 아직도 주판과 전표를 만지고 있었고,


결국 대형 음반사 6곳 중에서

발빠르게 대처했던 SM과 DSP(베이비복스 소속)만 살아남게 된다.


여기서 이수만의 비즈니스 감각이 빛을 밝휘하는데,

내수시장 붕괴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수만은 해외진출을 시도한다.


HOT로 중국에서 성공을 경험하지만,

돈벌이가 안되었기에 SES를 중심으로 일본에 도전한다.

(당시 일본의 음반시장 규모는 한국의 22배였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의 벽은 매우 높았고,

음악 대통령 서태지도 2년동안 시도했지만 실패했던 땅이였다.


이수만은 처음부터 해외시장을 겨냥한 컨텐츠를 기획했고,

SM을 코스닥에 상장시켜서 확보한 자본으로 보아에게 30억을 투자한다.

(진짜 승부사인듯... 만약 보아가 실패했다면.... ㅜ.ㅜ)


이수만은 상당부분 수익성을 포기하면서까지

보아를 일본기획사를 통해서 철저히 현지화 전략으로 일본에 진출시킨다.


이미 어려서부터 일본어, 영어, 중국어를 교육받은 보아는

자연스럽게 일본어를 구사하면 현지인처럼 자연스럽게 일본에서 활동하게 된다.


하지만, 일본의 벽은 높았고 더 이상 안되겠다 싶어서

일본 시장에서 철수를 고려하던 2002년, 오리콘 차트에서 대망의 1위를 차지한다.



아무로나미에 이후 성공한 여자가수가 전무한 일본시장에서

보아는 아무로나미에를 뛰어넘는 최고의 기록을 세우며 일본을 점령했고,


2005년에 SM은 동방신기를 데리고 일본에 직접 진출한다.


드디어 문화컨텐츠로 돈을 벌기 시작하고,

2007년부터는 유럽진출에도 성공하기 시작했고,

컨텐츠의 종류도 온라인 게임, 뮤지컬 등으로 점차 확대되어 나가게 된다.


여기에 관광산업으로 내수 경제에도 도움이 되는데,

관광지 방문이 아니라 문화컨텐츠를 소비하러 오다보니 수익성이 높은 관광객인 것이다.


해외진출 기업들도 코리아 브랜드의 후광을 얻게 되고,

박지성, 최경주, 김연아 같은 스포츠 스타들의 효과도 한 몫을 단단히 하게 된다.


+


하지만, K-pop의 미래가 밝다고만 할 수는 없다.


K-pop은 시작부터

댄스아이돌그룹이라는 니치 시장을 파고들어갔다.


자본주의 논리로 보면 별로 매력적인 시장이 아니기에

절대 메인 스트림이 될 수 없는 장르라는 것이다.


그룹으로 활동하다보니 관리비가 많이 들어가고,

오랫동안 준비를 해야하기 때문에 손익분기점을 맞추기 어렵다.


특히 어려서부터 장기간 훈련시키는 것은

선진국에서는 아동학대에 걸리기 때문에 시도조차 못하는 육성 프로그램이다.

(사고치고 돌아다닐까봐 어려서부터 숙소에 가둬놓고 합숙을 시킨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선택권이 별로 없었다.

일본처럼 내수시장이 크지 않기에 해외진출을 해야만 했고,


언어도 안되는데, 노래실력도 월등하게 뛰어나지 못하니

군무로 승부하고 비주얼 중심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그룹 맴버 한명 한명에게 캐릭터를 부여해서,

각각이 별도의 팬을 보유하게 만들고 만능엔터테이너로 키우게 된다.


근데, 강헌선생이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건 사실 일본에서 아이돌 양성하는 것을 그대로 배겨온 방식이다.

(HOT, 슈퍼주니어, 동방신기 모두 일본에 롤모델이 되는 그룹이 존재한다.)


암튼, 문제는 투자비용이 너무 높다보니,

SM과 YG를 제외하고는 모두 경영난에 빠져있는 상황이다.

(JYP도 국민동생 '수지'가 벌어들이는 것으로 겨우 버티고 있다고 한다.)


SNS열풍에, 인터넷 강국 코리아의 자발적 애국자들의 활약으로

비주얼 중심의 컨텐츠가 전세계로 빠르게 확산되기는 했지만,


해외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반응에 대해서는

미국처럼 약간 건방지게 쌩까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여기에 장르적으로 댄스 아이돌에 편중되다보니,

중국시장에서 한국드라마가 사라진 것처럼 어느 순간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안정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메인스트림 시장인 락밴드나 R&B에도 진출해야한다는 것이다.


락밴드와 R&B가 메인스트림이 될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적인 입장에서 최고의 비용효율성을 가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번 뜨면, 그냥 10년은 가고 투자비용도 크지않다.

한번 뜨면, 심지어 기존 앨범까지 다시 팔리기 시작한다.


심지어는 세계투어 다니면서 돈을 벌면서 마케팅을 진행하고, 
비틀즈는 10년마다 미공개곡을 발표하고 있는데 아직도 50년 정도 분량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 컨텐츠의 데이터베이스도 제대로 구축되지 않아서,

해외에서 자유롭게 한국의 문화컨텐츠를 감상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정도 수준이면 국가에서 대규모 투자를 통해서

온라인을 통한 데이터베이스 제공은 정도는 해줘야한다는 것이 강헌 선생 의견이다.


결론은 국가차원에서 문화산업에 투자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피터드럭커의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강연을 마친다.


"21세기는 문화컨텐츠가 국가권력을 좌우할 것이다"


+


약간은 다른 문화컨텐츠 산업인

게임업계에 종사하면서 느꼈던 바에 의하면,

문화컨텐츠 산업이라는 것이 참 쉬운 산업이 아니다.


물론 제조업도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문화 컨텐츠는 어디서 대박이 터질지 잘 모른다.


아무리 기획을 잘해도 시장에서 반응이 안나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다작을 내놓기 마련이고, 이중에 대박을 친 몇 개로 전체를 먹여살리는 구조이다.

(영화, 게임, 음원 모두 마찬가지인데, 아이돌은 그래서 안전장치로 다수의 맴버를 활용한다.)


K-pop의 성공요인도 이제와서야 쭉~~ 분석할 수 있지,

처음부터 이렇게 잘 기획되서 성공했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한국 드라마의 성공이 우연적인 것처럼...)


한국의 아이돌은 철저히 일본의 시스템을 그대로 배낀 것이고,

일본애들이 중국에 진출하지 못하니까 한국이 중국을 비교적 쉽게 점령한 측면이 분명히 있다.


다만 일본 아이돌이 하지 못한 것을 한국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은

워낙 혹독한 육성프로그램과 인터넷 강국이라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며,

강헌 선생이 설명한대로, 해외진출의 절실함이 여기에 큰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과연 K-pop의 열풍이 어디까지 갈까?


일단 이미 가전시장에서 일본을 뛰어넘은 것처럼

한국의 아이돌 산업은 일본을 뛰어넘은 것은 사실인 듯하다.

어찌보면 현재 삼성전자가 처한 고민을 SM이 동일하게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 번도 1등을 해본 적이 없고,

철저하게 원조를 배껴서 더 우수하게 만들어 청출어람이 뭔지를 보여줘왔다.


하지만, 가장 창의성이 필요한 문화컨텐츠 산업에서

과연 얼마나 뛰어난 창의성을 발휘해낼지는 솔직히 미지수이다.


강헌선생의 설명처럼 메인스트림에 진출하는 것이 중요할 수도 있지만,

비즈니스 마인드로 보면 너무 뻔한 시장에 들어가는 것이 과연 좋은 선택이라 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한글을 가르치는 세종학당이 아무리 있다고 한들,

언어의 장벽이라는 거대한 핸디캡이 있는데 정면 승부를 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굉장히 재미있게 들었는데,

굉장히 진부한 결론으로 끝나고 말았다.


댄스아이돌이라는 장르가 별로 상품성이 높지 않은 것은 사실인데,

그럼 상품성이 높은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는 것이 더 창조적인 솔루션일 듯한데...


재팬애니메이션도 어떻게 보면,

메인스트림에 도전하기보다는 니치 시장을 치고 들어간 전략이였다.


강헌선생이 강연중에도 언급한 것처럼

문화는 감정의 상품인데, 그들의 자존심에서 아시아의 락밴드를 실력이 있어도 쉽게 인정하진 않을 듯하다.


그런 면에서 싸이의 성공은

꼭 댄스 아이돌이 아니여도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새로운 측면이 있다.


문제는 후속곡 <잰틀맨>에서 보여준 것처럼

전작의 성공포인트를 억지로 살리려고 하다보면 아류작만 양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잰틀맨 뮤비를 보는 내내 억지로 쥐어짜낸 것이 너무나 느껴졌다.)


개인적으로는 싸이의 성공요인은 참신성과 자연스러움이였는데,

지난번처럼 성공을 위한 요인들만 울어먹기만 하면 아마도 서서히 내리막을 달릴 것 같다.


기존의 것은 살리더라도, 뭔가 다른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해야할 것이다.

메인스트림에 진출하더라도, 천재적으로 뛰어나지 않으면 뭔가 다른 것을 보여줘야할 것이다.


박지성은 두개의 심장이라 불릴 정도로 뛰어다녔고,

최경주도 탱크라 불리면서 강철 체력을 과시했으며,

김연아도 최고의 점프라는 능력을 보여주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참... 결국은 나도 뭐 별다른 결론은 없네...

그냥 뭐 자신의 특색에 맞게 하고 싶은거 잘하는 수밖에... ^^


오히려 강의 내용만 보면, 전략적으로 성공한 것은 보아밖에 없는데...

너무 위험한 전략이여서 개인적으로는 사업적 선택으로 좋은 선택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역시 대박은... 우연에서 나온다...


싸이가 그냥 마음 비우고, 

지가 하고 싶은대로 한 것이 <강남스타일>이였던 것처럼... ^^

열린 공동체 사회 Pot cast/[Bunker1] 강헌 K-POP, Kiss in the dark, 강남스타일, 강헌, 김씨스터즈, 넘버3, 댄스아이돌, 동방신기, 보아, 빌보드 차트, 사카모토 큐, 쉬리, 스키야키, 싸이, 아이돌, 애드 설리번 쇼, 음반산업, 이난영, 저고리 시스터즈, 핑크레이디, 한국드라마, 한류

  1. 싸이 행오버 뮤직비디오봤더니...
    역시나 또 성공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강남스타일때처럼 어깨 힘 좀 빼고...
    음악을 즐기면 좋겠구만... 점점 추해지는 느낌이다...

    싼마이 느낌과 추해지는 것은 분명히 다른 건데...

[Bunker1특강] 강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 Episode 04 - 두개의 음모

2014.05.12 04:05


언제나 실망을 시키지 않는 강헌 선생의 강의

처음에는 조금 지루하게 흘러갔는데, 역시나 뒤로가면서 몰입도는 최고였다.

(문제는 한참 재미있는 시점에서 녹음 불량으로 강의가 끝났다는 거... T.T)


원래 이 강의의 제목은 '두개의 음모'이다.


대중음악이라는 시장을 만들어낸 <사의 찬미>(1926)와 

트로트라는 최초의 장르를 폭발시킨 <목포의 눈물>(1935)가 주인공이였기 때문이다.


[BUNKER1 특강] 강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 EP.04-1 <두 개의 음모 : <사의 찬미>와 <목포의 눈물> 속에 숨은 비밀>


근데, 안타깝게도 녹음 상태가 안좋아서, 

<목포의 눈물>에 대한 강의 내용은 업로드가 되지 않았다...T.T


진짜 너무 아쉽다...

<목포의 눈물>에 대한 설명에서는...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사이의 긴장과 갈등 속에서 어떻게 우리 문화가 탄생하고 형성되었는지 설명해준다고 했었는데..


그래서 아쉬움 마음에

나름 자료를 찾아가며, 강의내용을 재구성해봤다.


+


강의의 타이틀은 '두개의 음모'이지만,

이 강의 핵심 내용은 한국 대중가요의 출발점을 찾고자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강의 내용을 끝까지 들을 수 없기에 그냥 개인적인 추측일 뿐이다.)


강의의 주인공은 앞에 언급된 2개의 노래지만, 

그 앞에 역사적인 2개의 노래가 추가로 소개된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1985)

<희망가> (1921 or 1922)


강헌 선생은 강의 초반에

민비(명성황후라는 이름으로 알려진)에 대한 비판과 함께,

동학 농민 운동의 <새야 새야 파랑새야>라는 노래가 가진 의미를 설명하는데,


대부분의 내용은 미화된 '민비'에 대한 진실과

'동학농민운동'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깨닫게 하고자 하는 강사의 의도가 깊이 깔려있었고,

굉장히 긴 시간을 할애했지만 핵심 내용은 의외로 간단했다.

(이미 대충 아는 이야기라서 개인적으로는 지루했지만, 처음 듣는 사람은 흥미로웠을 듯~)



<새야 새야 파랑새야>는

누가 만든지도 모르고,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었는데,

실제로 정읍 지역에 있던 오리지널 민요와는 전혀 다른 선율을 가지고 있는 새로운 노래였다.


당시 피지배계급의 민속문화는

구전으로만 전승되었기에 지리적 한계에 붙이치면 전파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리랑>도 지역마다 모두 다른 버전이 존재했고, 

<강강수월래> 같은 노래도 전라남도에만 존재하는 지역적인 민요였다.


궁실 수준에서의 종묘제례악은 존재했지만,

서민들 수준에서 대중적인 음악은 존재했다고 보기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3개의 음으로만 이루어진 이 단순한 노래는

동학 농민운동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가게 되었고 기존의 민속음악과는 다른 형태의 노래였던 것이다.


이는 전국적으로 대중적인 노래의 시발점이 되었지만,

근대의 형태의 노래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 강헌 선생의 평가이다.


+


그래서, 근대적 형태의 첫 번째 노래로 볼 수 있는 것은

1921년 혹은 1922년에 녹음되었을 것으로 판단되는 <희망가>이다.


1905년 판소리 등의 전통 음악들이 음반으로 녹음되기는 했지만,

전통 음악이 아니면서 최초로 녹음된 노래이기에 대중 음악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근대의 시작을 알렸다고 하기에는 여러가지로 한계가 존재한다.


일단,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많은 한계가 존재한다.

제목은 <희망가>인데, 내용은 굉장히 절망적이며, 2절은 계몽적인 내용으로 돌아선다.


이는 1920년대 시대상을 굉장히 잘 표현해주고 있는 것으로

당시 많은 민족주의자들은 만주에 가서 독립 투쟁을 꿈꾸었고,

한반도에 남은 사람들은 우리가 빨리 힘을 키워서 일본에게서 최소한 자치권이라도 획득하자고 여겼다.


이른 바 자치주의자라고 불린 이들은

계몽주의적 견해를 가지고 부국강병을 주장했으며, 서구적인 이상을 추구했다.


춘원 이광수의 <무정>이라는 소설의 마지막 대사 '배워야지요"는

당시 자치주의자 지식인들의 사고를 대변해주는 표현이였고, 이들은 결국 식민지의 주구로 전락한다.

(강헌 선생은 소설의 이광수가 있다면, 음악에는 홍난파가 있었다고 설명을 해준다.)


어찌보면, 희망가의 가사 역시 이러한 좌절과 절망,

그리고 서구 사회에 대한 무한한 동경과 계몽주의가 교묘하게 섞여 있는 것이다.

이 노래의 가사는 2.8독립선언을 주도했던 동경 유학생 그룹이 쓴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또한, 형식적인 측면을 살펴보면,

화음을 넣지 않고 똑같은 음으로 부르며 반주도 없는 아카펠라 형태이다.


노래를 부른 두 여성의 이름은 박채선과 이류색으로,

이들의 이름과 발성법을 볼 때, 이들은 기생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식 음약 교육을 받지 못했고, 전통적인 잡가 민요의 발성을 사용하고 있다.


단순히 화음을 넣지 않은 것으로 근대의 노래라고 할 수는 없다.

당시 홍난파가 한국 전통 음악은 화성이 없기에 미개한 음악이라고 <신조선음악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했지만,

이는 철저히 서구 중심의 사고이고, 화성이 꼭 있어야 한다는 것은 없기에 이것을 문제삼기는 어렵다.


근데, 문제는 이 노래에는 오리지널 곡이 있다는 사실이다.

<새하얀 후지산의 기슭>이라는 일본의 엔카에 한국어 가사만 바꾸어 만든 노래인 것이다.

더군다나 <새하얀 후지산의 기슭> 또한, 영국 춤곡을 바탕으로 편곡한 <우리가 집으로 돌아올 때>라는 찬송가를 편곡한 것이다.


결국 이 노래는 일본 것이기는 한데, 서구인들이 만들 것에 우리 가사를 붙인 것으로,

당시 식민지 시대의 문화적 현상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당시에는 대중음악이라고 하기에는 시장 조차 없었다.


당시 기생들의 학교였던 권번에서 1919년부터 일본 엔카를 정규 커리큘럼으로 넣게 되고,

일본인 고객들을 대상으로 하기위해서 이 노래를 녹음해서 전파하게 된 것이다.


대중 음악의 단초가 마련되기는 했지만, 대중들을 위한 대중들에 의한 음악은 못된 것이다.


당시에는 음반 한 장이 쌀 한 섬 가격이였고, 

음반을 재생할 수 있는 유성기 한 대는 서울 사대문 안 집 한 채 값이였기 때문에,

음반으로 제작되었다고 대중적으로 전파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였다.

1927년 라디오가 처음 방송을 타게 되었기에, 이 노래는 녹음되었어도 대중들은 들을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



이러한 시대적 배경 하에서,

진정으로 대중음악이라는 시장 자체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사의 찬미>(1926)였다.


1926년 8월 발표된 윤심덕이 부른 <사의 찬미>라는 노래의 원곡을 들어보면,

<희망가>에 비해서 피아노 반주라는 것이 생겼고, 철저히 서양 음악의 어법이 스며들어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루마니아의 작곡가 이바노비치가 만든

관혁악 왈츠 곡 <도나우 강의 잔물결>을 원곡으로 짜집기해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서구의 클래식 선율을 끌고 와서 멜로디 라인을 만들고,

일본 유학에서 서양음악의 벨칸토 창법을 배운 윤심덕이 노래를 부른 것이다.


이 곡은 발표되자마자 어마어마한 히트를 기록했으며,

음반을 듣기위해서 사람들이 유성기를 구입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당시 유성기가 2000대쯤 보급되어있었던 시절인데,

앨범이 3~5만 장 정도 팔린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에 그만큼 유성기가 늘어났을 것으로 보인다.

(유성기 증가량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남아있지 않지만, 앨범만 샀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사의 찬미>에 대한 반응은 신드롬이라고 부를 정도였고,

경성뿐만 아니라 지방의 토호들도 자기 집 마루에 유성기 1대쯤은 놓고 <사의 찬미>를 듣는 것이 유행이였다.


여기에 그해 10월 나운규의 <아리랑>이 개봉하면서 종전의 히트를 치며,

한국에도 영화 시장이라는 것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다.


1926년에 대중문화의 쌍두마차라고 할 수 있는 음악과 영화에서

대중적인 시장이 형성되면서 근대적인 의믜의 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강헌 선생은 <사의 찬미>에는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풀리지 않는 거대한 음모가 숨겨져 있다고 이야기한다.


+


<사의 찬미>는 제목 그대로 죽음에 대한 노래이다.

하지만, 이 노래가 히트를 치게 되는 것에는 윤심덕에 대한 스토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앨범이 발매되기 2주 전인 8월 4일 동아일보 사회 면에는

'현해탄의 정사(情死)'라는 굉장히 자극적인 톱기사가 실리게 된다.



홍난파의 유학 동기인 조선인 소프라노 윤심덕이 

조선 연극계의 희곡작가이자 연출자인 와세대 대학 출신 김우진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하며,

시모노세끼와 부산을 오가는 관부연락선에서 함께 바닷물에 뛰어들어 동반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1987년생 동갑이 이들은 당시 29살이였고,

윤심덕은 미혼, 김우진은 아들 둘이 있는 유부남이였다.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던 엘리트 남녀가

식민지 조선에서 해외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덕수환에서 자살을 한 것이다.


당시, 정사(情死)라는 것은 

일본 지식인 사회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문화 코드였다.


봉건적인 결혼제도를 벗어나 자유 연애가 시작되었고,

결혼을 할 수 없는 비극적인 연인들이 많이 생겨나면서 동반 자살이라는 것은

수많은 문학 작품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실제로도 많이 발생하기 시작한 새로운 현상이였다.


정사(情死)가 일종의 로맨티시즘의 극치로 포장되던 시기에

조선인 최고 엘리트 남녀가 자살했다는 사실은 일본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게다가, 자살하기 2주 전에 앨범을 녹음했는데,

그 노래의 제목이 자살을 예견하는 듯한 <사의 찬미>였다.

더군다가 작사가는 노래까지 불렀던 사연의 주인공인 윤심덕이였다.


라디오도 없던 시절, 그 노래를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앨범을 구매하는 것이였고,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불렀다는 그 앨범을 듣기 위해서는 고가의 유성기를 구매해야만 했다.


'죽은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것은 노래 자체에 대한 관심도 있었지만,

오히려 노래에 담긴 사연과 죽은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과학적 호기심이 결합되면서

유성기라는 기계와 <사의 찬미>라는 앨범은 폭발적으로 팔려나간 것이다.


+


근데, 이들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우선, 이들이 자살을 했다는 증거가 없었다.

목포의 어마어마한 갑부였던 김우진의 아버지는 김우진의 시신을 찾기 위해서

500원이라는 어마어마한 현상금을 걸었지만 결국 못찾았다.(당시 500원이면 미국 유학도 가능했다.) 


그리고 그 배를 탄 사람 중에서는 이 둘을 목격한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몇 년 후 이탈리아에서는 이들을 목격했다는 사람도 등장했다.

(이들의 죽음에 대한 의문은 2011년 MBC 서프라이즈에서도 소개된 적이 있다.)


과연 이들에게는 무슨일이 있었던 것인가?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윤심덕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이해가 필요하다.


윤심덕은 평양에서 태어난 가난한 집의 장녀였다.

아버지는 콩나물 장사를 했고 어머니는 병원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하지만, 잡초같은 생명력으로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서 경기여고에 들어가서

당시 최고였던 경성 사범에 입학했고, 최고의 직업이였던 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원주에 있는 고등학교에 발령을 받았으나, 

총독부 관비 유학생 자격 시험에 1등으로 합격해서 장학금을 받고 동경에서 성악을 공부한다.


전형적인 미인은 아니였지만 키가 컸고 늘씬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고,

재주도 많고 요리도 잘하고 꺽달진 평양 여성의 기질도 가지고 있어서 이성들에게 인기도 매우 좋았다.


일본 도쿄 제국극장의 매니저가

한 달에 150원씩 줄테니까 전속 가수를 하자는 제안까지 했다고 한다.


윤심덕은 이를 거절하고 귀국을 하였지만,

아직 한국에서는 서양음악을 이해해줄 수 있는 시장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자유 연애를 표방한 인터뷰를 한 것으로 유명해졌고,

첫 번째 공연은 호기심으로 히트를 쳤지만, 그 다음부터는 공연에 실패하고 다시 선생으로 돌아갔다.


동경 유학까지 갔다왔으나 실질적인 가진 것은 없었고,

오히려 가족들이 모두 서울로 찾아오면서 부양가족만 늘어나게 되어버렸다.

(전형적인 성공한 첫째의 모습이였고, 당연히 가족들을 책임지는 역할을 떠맡게 된 것이다.)


윤심덕은 남동생과 여동생을 모두 유학보냈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용문이라는 한량을 유혹해 600원을 뜯어내서 남동생을  미국 오하이오 대학에 보냈으나,

이용문의 첩이 되었다는 스캔들이 경성에 퍼지면서 하얼빈으로 피신을 갔다가 1년 후에 다시 돌아온다.


돌아온 윤심덕은 당시 기생들도 천시여겼다는 여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하였다.

하지만, 극단 <토월회>의 첫 공연은 실패하였고, 막다른 골목에 쳐했을 때 일본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다.


1926년 일본 오사카의 신생 레코드사에서 

26곡의 노래를 녹음하는 조건으로 무려 500원이라는 금액을 주기로 한 것이다.


여동생 윤성덕을 노스웨스턴 대학에 유학을 보내려고 했던 윤심덕은

윤성덕을 피아니스트로 대동하여 오사카로 건너가게 되고 이틀간 녹음을 한 후 동생을 바로 미국으로 보낸다.


동생을 미국으로 떠나보낸 다음 1주일 후,

윤심덕은 한국으로 돌아오는 배에서 김우진과 함께 자살을 했다는 동아일보의 기사가 나왔고,

그런 다음 <사의 찬미>라는 앨범이 발매되면서 종전의 히트를 치게 된 것이다.


+


여기서 강헌 선생은 

이들에 대한 타살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일단, 동반 자살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석연치 않은 구석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일단, 윤심덕은 성향 상 사랑때문에 자살을 할 사람이 아니였다.

동경 유학시절부터 수많은 남자들의 눈물을 뺐었고, 공공연하게 자유연애주의자라고 말하고 다녔다.


성공에 대한 욕심도 매우 컸고, 

주변 사람들한테는 이탈리아 유학을 가고 싶다는 이야기도 했었다는 것이다.


자살을 암시하는 듯한 이야기가 있었다는 증언도 있지만,

연극이나 예술을 하는 사람이 지나가듯이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수준이다.


여기에 김우진도 거부의 부모의 반대를 무릎쓰고 

큰 결단을 한 체 일본으로 건너간지 체 1달도 되지 않은 상황이였기에 

갑작스럽게 사랑때문에 자살을 한다는 것은 굉장히 무리가 있다.


연출가를 꿈꿨던 김우진은 

일본 유학시절 부모님 몰래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하다가 집에 끌려갔었고,

부모님의 거대한 재산도 모두 포기한 체 홀연단신 다락방에서 하숙을 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김우진 역시 실패로 인한 좌절도 아니고,

갑작스럽게 사랑 때문에 자살하기에는 너무나 석연치 않은 것이다.


그리고 진짜 둘이 사랑을 했을지의 문제도 의심의 여지가 있다.


김우진과 윤심덕은 동경 유학 시절이절 1921년 만난적이 있다.

3.1운동 직후여서 계몽적인 분위기가 팽배했고, 여름방학 때 동경 유학생들이 모여서 순회공연을 다녔다.


이 때 김우진이 총연출을 맡았고, 

윤심덕이 배우겸 가수, 홍난파가 바이올린 연주를 담당하게 된다.

당시에도 이미 김우진은 유부남이였고, 오히려 홍난파와 윤심덕은 썸씽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는 

어렵게 생계를 유지하던 윤심덕의 소식을 들은 김우진이

윤심덕과 그 가족들을 목포로 초청해서 가족 음악회를 열었던 기록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둘 다 가족들을 대동하고 있던 상황이였기에 둘이 뭔가 일을 벌렸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렇다면, 이들의 사랑이 싹튼 것은

동생을 미국에 보낸 후 한국으로 돌아오는 배타기 까지의 행적이 확인 안되는 1주일밖에 없다.


성공에 대한 열망이 너무나 강했던 두 사람이 

갑자기 사랑에 빠져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살을 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다.



+


그렇다면 누구에 의한 타살이라는 것인가?

역시나, 이 사건을 통해서 가장 이득을 본 사람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표면적으로 돈을 번 것은 레코드 회사였지만,

가장 많은 돈을 벌게 된 것은 유성기를 판매한 회사였다.

(당시 레코드 가격이 쌀 한 섬이였다면, 유성기의 가격은 사대문 안의 집 한채 값이였다.)


일단 윤심덕을 일본으로 끌어들인 일동 레코드는 신생 레코드 회사였다.


잘 나가는 레코드사가 모두 동경에 있는 것에 비해서 오사카에 본사를 두고 있었고,

1926년 만들어졌다가, 1928년 바로 사라졌으며 일본 레코드 산업 연감에도 기록이 없는 회사이다.


윤심덕이라는 인물이 유학을 마칠 때만 해도 나름 상품성이 있었겠지만,

이미 그 때가 되서는 나이도 이제는 많았고, 유명하기는 하지만 사회적 평판도 별로 안좋았다.


신생 회사가 상업성이 떨어지는 가수에게 거액을 주면서 녹음을 요청했고,

생기자마자 동전의 히트곡을 출시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근데, 이 회사의 특징은 바로 일본 축음기 회사(일축)의 자회사라는 점이고,

당시, 일본 축음기 회사는 일본 정부의 국영기업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이 사건으로 가장 큰 돈을 벌게 된 것은 유성기를 팔았던 일본 정부였던 것이고,

추가적으로 한국에는 음반시장이라는 어마어마한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어버렸다.


설마~ 정부 차원에서 나서서

사람을 죽이고 돈을 벌 수 있었을까?


당시 시대상을 보면 충분히 가능했다는 것이 강헌 선생의 설명이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일본 정부는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 위해서

조선인들이 모든 우물과 식수에 독을 타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조선인 5000명이 넘는 숫자가 학살당했는데,

일본 경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본 민간 자경 단원들에 의한 학살이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웃으로 함께 살던 사람에게 학살을 당한 것이다.)


집단적인 광기를 발휘한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고,

심지어는 조선인으로 의심되는 일본인들도 상당 수가 희생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 정도의 시대 상황에서,

거대한 수익이 예상되고, 추가적으로 신규 시장이 개척될 수 있다면,

이 정도 이슈를 만들어내는 것에는 양심의 가책 따위는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


강헌 선생이 이렇게 의심하는데는

기획 타살의 정황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 노래가 발매될 때 작사를 윤심덕이 한 것으로 되어있다.

스토리 상 죽음을 예견하고 직접 써야지 감동이 오기 때문에 상업성을 갖추려면 필수조건이다.


근데, 윤심덕이 쓴 글을 찾아보면 너무나 형평없다는 것이다.

다재다능한 윤심덕이였지만 글쓰기는 잼뱅이였는데, <사의 찬미>의 가사는 너무나 아름답다.


근데, 더 의심스러운 것은

일동 레코드의 계약조건에는 <사의 찬미>라는 노래가 없다는 것이다.


계약서에는 26곡이라고 명기되어 있었고,

26곡의 리스트에는 <사의 찬미>는 빠져있는데, 정작 죽은 후 나온 앨범은 <사의 찬미>였다.


피아노연주를 한 동생 윤성덕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그 노래를 녹음한 것은 맞지만 왜 이 노래를 추가로 녹음했는지 이유는 모른다고 한다.


이미 익숙한 멜로디의 노래였기에,

갑작히 즉석에서 사전 준비 없이 추가적으로 녹음했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다른 노래들이 박자를 정확하게 지키면서 불렀지만,

이 노래만큼은 박자를 정확하게 지키지도 않았고, 반주와 노래 사이에 교묘하게 안맞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제대로된 연습도 없이 즉흥적으로 감정에 맞추어서 부르는 성격이 너무 강하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에 대한 강헌 선생의 주장에는 반론의 여지도 있다.

이 정도는 상업성을 위해서 충분히 여론을 이용해 먹을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앨범을 발매하려고 했는데, 윤심덕이 연인과 함께 자살을 했다.

근데, 마침 그 때 연습삼아 녹음한 곡이 하나 있었다. 

(물론 노래의 내용이 죽음을 예견했다는 것이 너무 우연스럽기는 하지만...)


그래서, 그냥 그녀가 작사한 것으로 거짓말하고서

연습삼아 녹음한 것을 그냥 정식 앨범으로 발매를 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원래 의도는 아니였는데, 이를 상업적으로 이용했다는 그는 진짜 천재적인 장사꾼이다.)


강헌선생은 집단 광기의 무서움을 이야기했지만,

자본에 대한 탐욕은 집단 광기보다 더 무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암튼, 결과적으로 진실은 미궁에 빠져버렸지만 

<현해탄의 정사(情死)>로 출연한 <사의 찬미>는 한국에 대중 음악시장을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사의 찬미>는 서양의 음악에 가사를 붙인 것이기에

진정한 의미의 대중 가요가 처음으로 등장했다고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강헌 선생이 한국 대중가요의 효시로 꼽은 것은 

이 강의의 두 번째 주인공인 <목포의 눈물>(1935)였을 것이다.


+


아쉽게도 <목포의 눈물>에 대한 강의 내용은 없다.

그래서, 강헌 선생이 다른 강의에서 언급한 내용을 기반으로 강의 내용을 유추해보았다.

(강헌 선생의 강의를 직접 들은 것은 아니기에 다소 강의 의도와 다를 수도 있다.



<목포의 눈물>(1935)은

문일석(24세)의 노랫말에 손목인(22세)이 곡을 붙이고, 이난영(19세)이 불렀다.


지금도 목포에 가면 유달산 이난영 공원에는 노래비가 있으며,

수많이 리메이크 되기도 했고, 고 김대중 대통령의 애창곡으로도 유명한 노래이다.


1925년 이후 일제시대의 대중음악계는

트로트와 신민요가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고 한다.


신민요는 고유 민요가 일본 엔카의 영향을 받고 변질 된 것인데,

1927년 경성라디오가 개국하고 유성기가 대중화되면서 신민요는 쇠퇴히고 트로트가 대중음악을 장악한다.


<목포의 눈물>이 바로 일본의 엔카를 한국식으로 변화시킨 트로트였다.

당시 8만장의 판이 팔려나갔는데, 이는 요즘으로 치면 1천만장 정도 팔린 것으로 봐야한다고 한다.


트로트에 대해서는 우리 전통 음악이다 일본 음악이다 논란이 많지만,

그 출발은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 맞다는 점은 인정해야한다.


1910년 9월 일본은 초등음악 교과서로 <학부창가집>을 발간한다.

창가는 근대 일본의 노래들이며, 어린 아이들에게 일본의 노래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일본의 공연물들이 들어오게 되면서,

신파극이 한국에 들어오는데 이 신파극에 사용된 노래들이 바로 엔카였다. 

(신파극은 오늘날의 뮤지컬처럼 중간 중간에 노래가 들어가는 형태로 구성 되어있다.)


대중적으로 근대 일본의 노래들이 

식민시대부터 한국에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엔카는 원래 정치 사회적 의미가 담긴 애국계몽의 노래였다.


엔은 원래 연설하다 강연하라는 뜻의 한자이며,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사용된 운동권적인 노래였다.


일본 고유의 음악이라기 보다는

서구 음악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근대 일본 대중음악이였으나, 

군국주의가 강해지면서 정치적 메세지가 사라지고 점차 사회적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사랑노래로 변화된 엔카는 장조에서 단조로 바뀌게 되었고, 

이렇게 변화된 형태의 엔카가 한국에 상륙하게 되면서 1930년대 트로트로 정착하게 된다.


단조 3박자와 5음계를 사용한

고복수의 <타향(타향살이)>(1933)가 먼저 등장해 히트를 쳤다.


여기에, 단조 5음계를 사용했고, 

전형적인 트로트 박자를 사용한 <목포의 눈물>(1935)이

이난영의 클린톤 음색과 결합되면서 전국민의 사랑을 받는 트로트 전성시대를 열어가게 된다.


당시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작곡가들과 가수들도 등장하기 시작했고,

1910년 이후 일본식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들이 문화의 소비층이 되었다.

또한, 유성기의 확산과 경성라디오의 개국으로 대중가요 시장도 새롭게 형성되고 있었다.

(목포이 눈물도 작사가, 작곡가, 가수 모두 20대 초반의 새로운 세대였다.)


음악사적인 설명은 이렇지만,

트로트와 <목포의 눈물>의 이면에는 또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다.


1930년대에는 트로트라는 말을 안쓰고 유행가라고 불렀다고 한다.

음악적 장르적인 특성도 있었지만 그 노래가 담고 있는 가사의 의미가 매우 컸기 때문이다.


원래 엘리트의 문화는 서민층과 구분하고 대립되는 도구가 되었다.

하지만, 트로트는 서민의 문화였고 그 노래가 바로 내 이야기였기에 공감할 수 있는 노래였다.


고복수의 <타향>은 민족 이동을 끊임없이 겪은 민족에게 큰 호소력을 주었다.

그리고  <목포의 눈물>은 제국주의에 대한 민족주의의 울분과 저항이 담겨져 있는 노래였던 것이다.


+



1930년대 사회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기자들이 많이 포진해있던 조선일보에서,

1934년 민족 고유 정서를 북돋우기 위해서 오케 레코드사와 함께 향토노래 가사를 공모한다.


목포출신의 무명시인 문일석(본명 윤재희)은 

24세의 어린 나이에 '목포의 노래'를 습작으로 지어 응모를 하게 되고,

결국 '목포의 사랑'이라는 작품으로 3000여편의 응모작 가운데 1등으로 당선된다.


일본 와세대 다학에서 유학을 할 정도로 명문가의 자제였지만 

집안에서 유행가 가사를 응모하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 필명으로 응모한 것이다.


사실 1절 가사를 보면, 그냥 애절한 사랑의 노래로 들린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깊이 숨어드는데

부두의 새악씨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음


어떤 여인에 대한 연상을 시키고 있는데,

사실은 당시 목포라는 지역이 가진 애환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 당시 목포라는 지역은 호남지역의 기름진 쌀과 목화가 

일본으로 실려나가는 항구도시였고, 굶주린 민초들의 눈물이 바다를 적셨던 곳이다.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한 포인트는 여기에 있었지만, 정치적인 메세지로 해석하기는 쉽지 않다.)


근데  2절 가사를 보면 민족 저항 내용이 너무나 강하게 담겨 있다.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임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임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이 일본을 겨냥한 것이라 하여,

작사가인 문일석은 일본경찰에 끌려가서 호된 문초를 겪게 된다.

(3백년 전 이순신 장군이 유달산 노적봉 밑에 진을 치고 왜적을 물리쳤다는 것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오케이 레코드사는 이 가사가 문제가 되자,

'삼백년 원앙풍'이 잘못 표기된 것이라고 가사를 바뀌서 검열을 통과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삼백년 원한 품은'으로 다시 바뀌서 불렀고,

'임 자취'는 이순신 장군을, '유단산 바람'은 민족의 정기를 의미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문일석은 일제의 감시와 징용을 피해

함경남도 항흠 산골 공사장에서 숨어살다가 젊은 나이(28세)에 요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목포 출신의 무명 시인 문일석이 지은 가사는

목포 출신의 무명 가수 이난영이 부르게 된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이난영(본명 이옥례)은 어려서부터 떠돌이 생활을 했고,

떠돌이 유랑극단인 <태양극단>의 식모살이와 무명의 막간 가수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의 애절한 삶이 쳥량한 목소리의 콧소리에 녹아나면서 서민적인 정서를 대변해준 것이다.)


1933년 오케이 레코드 사장 이철에 의해서 전속가수로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고,

1935년 <목포의 눈물>이 대히트를 치면 엘레지의 여왕으로 등극하게 되고 이후에도 사연 많은 삶을 이어간다.

(나름 유명한 가수였지만, 그 사연들을 보면 전형적인 시대의 아픔을 간직한 서민의 삶이였다.)



<목포의 눈물>은

겉으로는 근대식 일본음악양식을 가지고 있지만,

속으로는 완전히 민초바닥정서를 가지고 있는 트로트라는 장르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후 1935년에서 1938년 사이에는 트로트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다.

<눈물젖은 두만강>, <번지없는 주막>, <나그네 설움>, <홍도야 울지마라> 등...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1938년 군인 출신 총독이 조선에 오면서 트로트 금지령이 내려온다.

군인들이 성전을 치루는데 무슨 감성적인 노래를 부르고 있냐는 것이다.


국민가요 개창 운동이 펼쳐지고, 

일본 군가풍의 노래가 등장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노래가 바로 남인수의 <감격시대>(1939)이다.


민초들의 민족주의적인 감성을 대변해주던 노래가

제국죽의적인 군가에 의해서 억압을 받게 되는 것이다.

(1970년대 유신시절 청년 문화가 박정희의 국민가요에 탄압받던 것과 너무나 유사한 패턴이다.)


[Bunker1특강] 강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 Episode 02 - 청년문화의 바람이 불어오다


하지만, 민초의 노래였던 트로트는 그 질긴 생명력을 발휘하였고,

1960년대 이미자와 나훈아, 남진, 배호 등으로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심지어 역으로 조선출신들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 엔가 가수들로 활동하기도 했다고 한다.


역시 서민 문화는 그 파워가 있다~


트로트가 비롯 일본에서 시작된 음악장르이지만,

아직도 대한민국 국민들의 정서에 뿌리깊게 남아있을 수 있는 이유는

그 트로트가 서민들의 애환을 담았던 민족주의적인 정서에서 출발해기 때문일 것이다.


강헌 선생의 맛갈나는 강의를 직접 들어봤으면 좋겠지만,

녹음이 안됐다기에 나름 자료들을 찾아서 관련 내용을 재구성해보았다.

(다시 말하지만, 강의를 직접들어보지 못했기에, 강헌 선생님 의도와 다소 다를 수도 있음)


문화적 엘리트들이, 그리고 요즘 젊은 세대들이 트로트를 아무리 무시하여도,

트로트가 아직도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서민의 애환을 담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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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ker1특강] 강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 Episode 03 - 모차르트의 투정과 베토벤의 투쟁

2014.04.25 14:05

지난 포스팅에 이어서,

내용이 너무 길어서 내용을 나눠서 정리했다.


[Bunker1특강] 강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 Episode 03 - 클래식 속의 안티 클래식


지난 포스팅에서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나오기 전의 배경을 주로 다루었다면,

이번 포스팅에서는 이 두 사람의 실제 인생에 대해서 정리해보고자한다.


다시 말하지만, 역시나 강헌 선생의 강의를 직접 듣는 것이 훨씬 좋을 것이다 (진짜 강추)

강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 EP.03-2 <클래식 속의 안티 클래식 : 모차르트의 투정과 베토벤의 투쟁>

1부 강의 내용이 서론에 가까웠다면

2부 강의 내용은 본격적으로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삶을 다루고 있다.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 ~ 1791)의 본명은 
<볼프강 오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 테오필로스 모차르트> 이다.

모차르트는 테오필루스라는 말을 좋아했는데,
서명을 할 때, ‘아마데’를 사용했고, 비슷한 뜻을 가진 아마데우스를 그냥 미들네임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아마데우스는 '신이 사랑하는’ 뜻을 가졌는데,
모차르트는 빈의 귀족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그나마 사이가 좋았던 귀족도 일찍 죽어버렸다.

로베르트 엘리아스는 모차르트의 삶을 한마디로 정의해버린다.
 
“그는 천재도 아니고, 신동도 아니고, 궁정사회의 시민 음악가였다. 
이것이 그의 본질이고, 비극의 시작이고, 하지만, 그의 위대한 작품의 원동력이다."

살리에리는 궁정사회의 궁정음악가였기에, 아무런 고민이 없었으나,
모차르트는 궁정사회의 시민음악가였기에, 끝없이 괴로운 삶을 살게 되었던 것이다.

모차르트는 잘 알려졌듯이 당대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다.
6살때부터 12살까지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순회연주를 다녔는데,

이 순회연주에서 모차르트는 큰 명예를 얻었으나,
실제로는 별로 돈벌이는 되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나, 6살 때는 상업적으로도 성공할 수 있었지만,
9살 때는 이미 한 번 돌았기에 그다지 돈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너무 어릴 때부터 슈퍼스타가 되어버리면서
정규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고 사회적인 사교력은 급격히 떨어지게 된다.
(마이클 잭슨이 20살까지 제대로된 인터뷰를 하지 못한 것과 동일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근데, 당시 음악가는 귀족의 지원을 받지 않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어찌보면 어렸을 때 모차르트의 이런 성장과정은 그의 인생에 독이 된 것일 수도 있다.

모차르트는 찰스부르크라는 자유로운 도시에서 성장했다.
모차르트 이외에도 카라얀이라는 음악가를 배출한 이 작은 도시는
유럽의 동서남북의 모든 감각이 모여있는 작지만 희안하고 독특한 동네였다.

"게르만주의와 라틴주의가 활홀하게 만나 키스한 곳"

찰스부르크에서 자란 자유로운 영혼이 빈이라는 궁정사회를 선택한 것은 결정적 실수였다.

당시, 독일이나 이탈리아처럼 분권적인 국가에서는
음악가는 이 동네 저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해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최고의 음악 도시였던 빈은
함부르크 왕조라는 중앙집권적인 절대 왕정이 지배하고 있었다.

실제로 모차르트는 프라하에서 더 인기가 좋았는데,
모차르트는 끝까지 빈을 고집했기에 그의 인생은 꼬일 수 밖에 없었다.

만약 그가 음악가가 아니라, 철학가나 작가였다면 
동 시대의 칸트처럼 자신의 재능으로만으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건축과 음악은 귀족의 지원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천재성은 인정받지만 그 어느 귀족도 모차르트를 지원해주지 않았다.

+

하지만, 모차르트가 처음부터 빈에서 실패한 것은 아니다.

뮌헨-만하임-아우구스브루크-파리-로마-피렌체-나폴리-런던를 돌면서
구직활동에 완전히 실패했던 모차르트는 찰스부르크에 돌아와 오르간 부연주자가 되지만,

콜레라도 대주교와 사사껀껀 대립하면서,
결국 뮌헨으로 도망갔다가 빈으로 가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함부르크 왕조의 수도였던 빈은
최고의 도시이지만 매우 변덕스럽고, 속물주의적 동네였다.

모두가 반대했지만, 아버지의 그늘인 찰스부르크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모차르트는
너무나 몽상가였기에 굉장히 자신이 있었고, 실제로 3년간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름을 날렸기에 인지도가 있었고,
천재적 피아노 연주 실력이 있었기에 개인 레슨을 시작해 연주 기회를 늘려나갔다.

당시에는 공개 연주회라는 개념이 없었기에
예약연주회라는 개념을 도입해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마침내 왕실의 의례로 오페라를 제작했으나,
모차르트는 그의 실험정신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신뢰를 잃게 된다.

모차르트의 공연을 본 왕은
"그대의 작품에는 음이 너무 많은 것 같소"라는 반응을 보이는데,

당시, 오페라는 설명을 위주로 이야기를 진행했는데,
모차르트는 모든 내용을 음악으로 처리해버리는 획기적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시대를 앞서가도 너무 앞서갔고,
제작 당시부터 여배우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고 한다.

왕실과 귀족의 신뢰를 잃기 시작했고,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바니>같은 불후의 명작을 통해 귀족을 씹으면서 적을 두었고,
1789년 예약연주회마져 완전히 실패하면서 몰락하게 된다.

미카엘 프루베르트나 프리메이슨 쪽 사람들의 후원과
귀족들의 가장무도회의 배경 음악을 만들어 주면서 생계를 유지해나간다.

가부장(아버지)와 봉건영주(대주교)로 부터의 탈출하고자 했던 모차르트는 
절대 아부하지 못하는 성격이였고, 사실은 끝없이 사람들의 사랑받고자만 했었다.

그의 인생은 자신의 삶에 대한 이념이 부재했기에 투정이 될 수 밖에 없었고,
계몽주의에 대한 인문학적 이해가 없기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빈에서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죽기 3년전에야 깨달았다.

+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 ~ 1827)은
모차르트보다 14년 뒤에 태어났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작곡가로 활동한 것은 모차르트가 죽은 이후였다.

베토벤은 모차르트처럼 천재적인 재능을 갖지는 못했지만,
베토벤을 키운 것은 8할이 수 많은 컴플렉스였다.

하이든이 무어인이라고 욕할 정도로 용모는 형편없었고,
재능이 부족한 어린 시절 모차르트를 흉내내서 공연을 다니기 위해서 나이를 3살이나 속였다.
아버지의 학대로 자랐고, 벨기에계의 독일 귀족이라고 알려졌지만 그의 신분도 사실은 속인 것이였다.

프러시아계 사생아라는 소문도 있었지만, 
후에 조카 양육권을 가지고 재판을 할 때 서민 재판장에 선 것으로 봐서는 귀족이 아님은 확실한 듯하다.

사회 부적응자로 유년시절을 보냈던 베토벤은 
성격도 굉장히 파탄적이였고 분노를 조절하지도 못했으며,
평생 가계부를 썼을 정도로 돈에 대해서 처절한 집착을 보이기도 했다.
(30살이 되면서부터는 활성화된 음악시장으로 본격적인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베토벤은 자신만의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런 작품도 못만들었던 21살의 나이에
가난한 사람을 위한 음악을 하겠다고 선언한다.

베토벤이 태어난 본이라는 곳은 
카톨릭의 영향이 강했던 보수적인 지역이였다.
훗날 보수적이라는 이유만으로 프랑크푸르트를 누르고 서독의 수도가 된 지역이였다.

하지만, 프랑스와 너무 가까워서 계몽주의가 빨리 전파되었고,
베토벤은 진보적인 본의 지식인 층의 영향을 받아서 진보적인 성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기에 베토벤은 항상 상킬로트(프랑스 하급계층 공화주의자)의 상징인 긴바지를 입었다.
다른 음악가들이 하인의 상징인 반바리를 입었던 것과는 매우 대조되는 측면이다.

여기에 베토벤의 아버지의 무능도 큰 영향을 주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그래도 꽤 유명한 음악 교육가였지만,
베토벤의 아버지는 매우 성격도 문제고 능력도 부족했기에 베토벤은 이를 벗어나고 싶어했다.

첫 스승이였던 네페가 일루미나티의 열성 지지자였고,
슈나이더에게도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독일에서의 자유는 관념적 추상적이였고,
베토벤은 평생을 공화주의자로 살았지만, 실천으로 옮긴 것은 전혀 없었다.

베토벤은 정신적 공화주의자만 자본주의를 온몸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루롤드 대공, 발트슈타인 백작같은 계몽귀족들과 교류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해나갔다.

빈에서 35년을 살면서 80번의 이사를 했고,
귀족들과 함께 그들의 가족과 먹고 자면서 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는 성격의 문제 때문에 
모차르트와 마찬가지로 궁중 대악장에 임명되지 못했다.

그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루돌프대공도 추기경이 되었지만
베토벤이 귀족 질서에 맞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에 끝까지 그를 임명하지는 않았다.

베토벤은 끝없이 귀족의 여인들만 사랑했고,
신분상 사회적 인정을 받을 수 없는 끝없는 사랑만 했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은 모두 사회적 인정을 받기를 꿈꾸었던 사람이였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귀족의 후원이 끊어졌을 때 생계가 어려웠지만,
베토벤은 공개 연주회와 출판 인쇄 산업을 통해서 귀족 눈치를 보지 않아도 생계가 가능했다.

모차르트의 꿈은 자기의 목적대로 쓰는 것이였으나 먹고 살아야했으나,
베토벤은 서양 음악사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목적에 의해서 곡을 쓸 수 있었던 사람이였다.

베토벤도 헌정이라는 것을 하기는 하지만,
이미 곡을 만들어놓고 귀족에게 억지로 헌정해서 돈을 뜯어가기도 했다.

+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음악적 공통점은 피아노라는 악기로 빈에 자리를 잡았다는 점이다.

둘 다 피아노 즉흥 연주가 매우 뛰어나고,
부르조아 사회에서 부르조아 악기로 자리잡는데 기여를 했다.

피아노는 이탈리아의 크리스토퍼 포리가
메디치가의 의뢰를 받아 만들었으며, 하프에 비해서 표현을 확대시킨 악기였다.

19세기 산업혁명기에 피아노는 최대의 산업이였으며,
거실에 피아노가 있는 것은 부르조아적인 삶의 상징이 되었다.

1850년대 1년에 5만대씩 생산되면서,
피아니스트가 인기를 얻었고, 최초의 스타는 프란체 리스트였다.

이러한 피아노가 대중화되는 교두보가 되는 것이 바로 베토벤과 모차르트였다.

베토벤은 피아노 소나타를 무려 39곡이나 작곡했지만,
당시에는 오페라와 교향곡이 대세였기에 실제 피아노 솔로 연주가 이루어진 것은 거의 없었다.

바로크 시대에만 해도 그냥 곡이 쭉 직진으로 연주되면서 끝났는데,
소나타 형식이 도입되면서 음악이 서사적인 플롯의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소나타의 형식이 되었다는 기악 음악이 본격화되었다는 것이고,
기악의 표현이 입체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철학적으로는 변증법적 토대에서 만들어졌다.

기악 음악과 소나타 형식은
19세기 후반까지 낭만주의 시대를 지배하는 전형적인 형식이 된다.

하이든-모차르트를 거쳐서 베토벤에 고전주의는 완성되었고,
낭만주의 시대의 서막을 여는 역할을 베토벤은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베토벤은 또한 당대 민요를 수집해서 작품에 녹여냈고,
시민들이 음악을 즐기기 시작한 시대를 만들어낸 장본이였다.

베토벤이 위대한 것은 위대한 시대에 태어났기에 가능한 일이였고,
베토벤이 죽었을 때 장례식에 시민 2만명이 모였고 역대 궁정악장들이 베토벤의 관을 들고 장지까지 갔다고 한다.
(베토벤은 궁정악장이 되고 싶어서 그렇게 난리를 쳤는데, 결국 되지는 못하고 대신 그들이 그의 관을 무덤으로 보내준다.)

베토벤도 모차르트 못지않게 불우한 시대를 지냈으나,
그래도 베토벤은 귀족들과 적당히 코드가 맞았고 상당한 후원을 받았다.
또한, 시기적으로 시미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음악을 할 수는 있었다.

+

하지만 베토벤의 삶에 대해서는 과대 포장된 경향이 좀 있다고 한다.

베토벤은 초기 작품에서부터 귓병을 앓고 있었다.
하지만, 베토벤 제자 체르니의 회고에 따르면 완전히 멀지는 않았을 확률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이 귀먹어리가 되었다는 소문은 베토벤에게 단점보다는 장점으로 작용하였다.

베토벤이 쓴 하일리겐슈터트의 유서나
그의 기존 행동을 보면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정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베토벤을 공화주의자라고 보기에는 뭔가 구린 측면이 많았다고 한다.

보나파르트가 빈을 점령하면 파리로 가려고 했다는 점이나,
에로이카라는 이름을 짖는 과정도 뭔가 이익을 챙기고자 한 측면이 있다.

또한, 1813년 나폴레옹 전쟁으로 경기가 어려워지고 후원도 끊어지자 큰 좌절을 겪었고,
1814년 워털루 전투를 다룬 <월링턴의 승리>, <영광의 순간>를 작곡하면서 큰 돈을 벌게 되고,
베토벤은 전후 협정을 하는 빈회의에 초대를 받아 보수파들과 흥청망청한 삶을 살게 된다.
(흔히 이야기하는 노년에 변절한 예술가들이 부귀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많이 든다.)

하지만, 향후 10년간 로시니의 재기발랄한 오페라가 대세를 이루면서
완전히 무력한 존재가 되어버렸고 베토벤은 다시 내면의 세계를 만나게 된다.

오스트리아는 전형적인 경찰국가가 되어가었고,
베토벤은 온갖 소송에 휩싸이고 성병에도 걸리면서 인생의 내리막길로 가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발표한 두 곡은
그의 노년을 너무나 아름답게 만드는 명곡이였다.

베토벤은 교향곡 9번 "합창"을 프로이센 왕에게,  "작은 미사"를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하며,
같은날 이 두 곡을 초연하는데, 이 두 곡은 베토벤의 작품 중 가장 대표적인 명작으로 남게 된다.

베토벤은 후대에 수많은 평가를 받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베토벤의 곡을 높게 평가한 반면,
헤겔은 베토벤을 개인적 감정의 포출이라고 굉장히 폄하하고 비판하였다.

하지만, 베토벤의 음악이 위대한 점은
시대에서 가장 극적으로 진보적인 이념을 음악을 통해서 들어내려고 했으나,
그 안에는 신념뿐만 아니라 갈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라고 강헌 선생은 설명한다.

합창의 4악장은 평생 품고 있던 내용은,

"서롭고 가난한 사람들도 다같이 즐겨라 "
"고뇌을 넘어서 환희를 모든 사람이여 즐겨라"

강헌 선생은 베토벤에 대한 가장 명확한 평가로 다음을 뽑는다.

"사이언스(기술)를 컨시어스(의식 혹은 양심)로 만들었다"

+

베토벤이 현대 음악의 영원한 챔피언일 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부르주아 시대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라 강헌 선생은 설명한다.

베토벤은 부르주아 시대가 열리는 시기를 이끈 음악가였다.
그리고 베토벤은 부르주아 시대가 역사를 배신하는 것을 보지 않고 죽었다.

그렇기에 베토벤의 음악에는 
부르주아 혁명에 대한 갈등은 있으나 의심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낭만주의 후계자들의 음악에서는
부르주아적 이상에 대해서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 믿음이 흔들림이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완벽하게 부르주아를 수호했던
베토벤의 음악은 부르주아 시대를 대변하는 최고의 음악의 자리를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바흐에 대한 부활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한다.

바흐는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개신교도의 모습을 갖췄다고 한다.
근면 성실했으며, 모든 악보의 말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작곡가였다.
이전에 유명한 카톨릭 신도는 있었지만, 개신교 신도 음악가 중에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렇기에 그는 부르주아적 이상에 가장 정확하게 들어맞는 인간형이였고,
유태인 금융자본가의 자손이였던 멘델스존이 그를 무덤에서 끄집어 낸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대에도 유명하지 못했고 75년간 잊혀져있던 바흐라는 인물은
새로운 부르주아 계급의 대변인으로 추앙되기 시작했고 갑작스렐 바흐의 예찬이 시작된다.

바흐를 살려낸 것은 부르주아의 승리곡이였던 것이다.

모차르트는 신동이 아니였다.
그는 오히려 아버지와 시대가 만든 괴물이였고 음악을 만들어내는 기계였다.

모차르트의 싸움으 어떻게 보면 개인이 자아를 찾고자 하는 싸움이였고,
그의 삶에 있어서는 그냥 편히 쉬고 있는 현실보다는 음악에 몰두해서 작곡을 하고 있는 것이 더 편했던 것이다.

그의 삶이 불행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자신이 그 싸움에서 승리 할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반면에 베토벤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보다 아름다운 것을 위하여 세상에 파괴시키지 못한 규칙은 없다."

계급적 투쟁에서 승리한 부르주아의 자신감이
베토벤의 미학적 자신감에서도 흘러 넘치고 있었다.

불과 몇 년차이가 나지 않지만, 모차르트가 투정으로만 끝냈던 싸움에서
베토벤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 째낀 완벽한 승리자로 남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을 파괴시킬 수 있는 권능이 베토벤과 그의 시대에 등장했던 것이고,
그래서 베토벤은 영원한 승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

참~~ 주옥 같은 강의 내용이다.

클래식에 무뇌한이던 나를
고전주의 음악 100년의 역사를 꽤뚫어보게는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시대가 만든 투정꾼과 투쟁가의 삶
그리고, 그들을 갈라놓았던 천재적 재능과 이념적 기반의 차이...

천재적인 재능으로 수백곡을 작곡한 모차르트보다
많이 흔들리기는 했지만 이념적으로 무장한 베토벤이 왜 더 칭송받는지,

그리고, 승자의 역사가 만들어낸 바흐와 베토벤의 업적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만드는 역사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과 천재성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그 기반에 깔려있는 정신이 중요하고,
그것이 시대를 어떻게 이끌어나갈 수 있느냐가 핵심인 것같다.

(물론, 역사와 시대는 자신의 입맛에 맞게 나의 행동을 전혀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지만...)


열린 공동체 사회 Pot cast/[Bunker1] 강헌 강헌, 고전주의, 공개연주회, 공화주의자, 기악 음악, 나폴레옹, 낭만주의, 네페, 돈 조바니, 로베르트 엘리아스, 로시니, 루돌프 대공, 모차르트, 바흐, 발트슈타인 백작, 벙커1, 베토벤, 부르주아, 살리에리, 상킬로트, 소나타, 아마데우스, 예약연주회, 오스트리아, 찰스부르크, 체르니, 클래식, 투쟁, 프로이센, 피가로의 결혼, 피아노, 하이든

[Bunker1특강] 강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 Episode 03 - 클래식 속의 안티 클래식

2014.04.25 11:39

어느 새 강헌 교수의 광팬이 되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면서 미국에서 일어났던

댄스음악에 기반을 두고 시작되었던 Jazz와 Rock'n'Roll


[Bunker1특강] 강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 Episode 01 - Jazz


[Bunker1특강] 강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 Episode 01 - Rock'n'Roll


1960년대~ 1970년대 한국에서 일어났던

청년문화의 중심에 있었던 모던 포크와 그룹사운드의 이야기


[Bunker1특강] 강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 Episode 02 - 청년문화의 바람이 불어오다


너무나 맛깔나는 강의는 같은 강의를 꼭 두 번씩 듣게 만들었으며,

다시 내용을 정리해서 기록해두게 만들었다.


진짜 나중에 하나로 묶어서 책으로 내도 좋을 듯하다.



강헌 교수가 이번에 건드려준 부분은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오면서 유럽에서 일어났던

클래식음악의 고전주의 시대에 일어났던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이야기이다.

 강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 EP.03-1 <클래식 속의 안티 클래식 : 모차르트의 투정과 베토벤의 투쟁> < 방송듣기


하지만, 전체 역사적 흐름을 알기 위해서


바흐 - 하이든 - 살리에리 - 모차르트 - 베토벤 으로 이어지는

클래식 음악의 대가들의 이야기가 차레로 이어진다.


(조연으로 비발디, 헨델, 슈베르트, 멘델스존 등의 교과서에서 한 번쯤 들어봤던 사람들이 등장한다)


음악사 수업시간에 딱딱하게

바로크 - 고전주의 - 낭만주의로 흐름이 이어진다고 외웠던 내용이~

이렇게 흥미진지하게 이어진다니~~ 너무나 재미지고 흥미진지했다~~


관심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원문 강의를 들어보시면 좋을 듯하고, (완전 강추!!)

개인적으로 기억하기 위해서 강의 내용을 재편집해서 다시 정리해두기로 했다.


+



일단, 개인적으로 알고 있던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이야기

아마 대중에게 잘 알려진 이야기도 내가 알고 있던 이야기랑 큰 차이는 없을 듯하다.

(본 단락의 내용은 강헌 선생의 강의에 없는 내용임을 사전에 말씀드립니다.)



타고난 천재이자 신동이였던 모차르트

불굴의 의지로 장애를 극복한 베토벤


약간의 시간차이를 두고 등장했고,

둘 다 당대 최고의 음악시장이였던 비엔나에서 활동했지만,


조금은 다른 색깔의 음악을 추구했기에,

같은 고전주의로 분류되지만 베토벤은 낭만주의의 출발점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모차르트의 곡은 가볍고 선율 중심이라는 평가를 받는다면,

베토벤의 곡은 무겁고 장중해서 모티브 중심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래서 베토벤의 곡들은 각각의 악기들이 따로 연주하면 별로지만,

모든 악기가 함께 조화롭게 연주될 때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특징은 그들의 작곡형태 차이에서 발생했다고 볼 수도 있는데,


모차르트는 타고난 천재성을 바탕으로 순십간에 곡을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하다.

하루 밤 사이에 오페라를 만들어내기고 했고, 그의 대표적인 교향곡인 39-40-41번은 단 6주만에 만들었다.


'나는 머릿속에 완성된 스코어(악보)를 그저 오선지에 옮기고 있을 뿐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길정도였기에, 그냥 악보를 찍어내는 기계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다.

젊은 나이에 요절했음에도 불구하고 600여곡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천재성에 기반한 결과인 것이다.

(너무 쉽게 써서, 당대에도 수많은 표절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고 노력도 안한 다는 오해도 받았으나, 실제로는 공부로 열심히했다고 한다.)


반면, 베토벤은 수없이 악보를 고치면서 정교하게 곡을 완성해나간다.

너무 진지하기에 좀 어둡고 무겁다는 의견도 많이 받고 있지만, 그 많큼 대작으로 평가받는 곡들이 많다.


이 둘의 삶에 대해서 나와 같은 일반인들은

영화를 보고 나서 이들에 대한 인상을 가지게 된 것이 사실이다.


모차르트의 삶을 그린 <아마데우스> (1984)

베토벤의 삶을 그린 <불멸의 연인> (1994)


그런데, 영화라는 것이~~ 주인공을 영웅으로 만들기도 하고

역사적 사실을 재미를 위해서 다소 왜곡하는 경향이 있는데, 


어찌보면 이 둘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보다는 극화된 재미에 우리는 더 큰 감동을 받기 마련이다.

특히나, 재미난 이야기를 좋아하는 한국인들은 그들의 삶에 대해서 다소 왜곡된 편견을 가지게 되어 버렸다.


나도 당연히 그랬고, 이들에 대한 나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살리에리라는 경쟁자의 질투를 받은 불행한 천재 모차르트

한 여인을 영원히 사랑하고 장애를 극복해낸 악성 베토벤


그렇다면, 실제 이들의 삶은 어땠을까?


강헌 선생은 이들의 삶을 역사적 배경과 흐름 속에서 다시 한 번 설명해주고 있다.


+


역시나 역사적 흐름속에서 이들의 삶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시대적 배경과 이들이 태어나기 전에 상황에 대해서부터 이해가 필요하다.


일단 당시 유럽에서 음악가들의 사회적 지위는

굉장히 애매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시기적으로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기 시작했기에

이들은 신분제에 종속될 수 밖에 없었지만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살던 시기는 급격한 격동기였다.


1760년대부터 산업혁명이 본격화되기 시작했고,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은 전후로 계속해서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이전의 바로크 음악 세대였던

바흐와 헨델의 시기까지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고,


이후의 낭만주의 음악 세대였던

멘델스존, 바그너, 비제, 베르디 같은 음악가들이 비교적 근대사회에 살았던 것에 비해서


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슈베르트 까지는

역사적 격동기의 한복판에서 음악 활동을 했고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주로 활동했던 불과 16년의 차이는

숫자로는 얼마 차이 나지 않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결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당시 유럽에서 음악가의 신분은 철저히 중간 계급이였다고 한다.

르네상스 시대에 게스왈드라는 귀족출신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이는 전무후무한 기록일 뿐이며,

하층사회 출신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귀족들은 자녀들에게 음악 교육을 반드시 시켰지만,
이는 교양 수준으로 이어진 것이며, 절대 직업적으로 활동한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천민 출신들이 음악을 했던 고려-조선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특징이며, 
이러한 특징 때문에 우리 역사상 위대한 작곡가라 불릴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반면, 인도에서는 주로 최고 권력층인 브라만 출신들이 음악을 했는데,
이는 문화적 전통성과 우월성으로 이어지면서 영국의 식민지배를 200년이나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양음악보다 더 발달한 문화적 자산을 가지고 있었기에 문화적 전통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유럽의 음악가는 어중간한 위치에 있었기에,
유명해지면 귀족과 겸상을 하면서 상류사회의 삶을 살 수 있고
반면에 뜨지못하면 생계를 걱정해야만 하는 완전 하층 계급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이들에게 음악은 생존이 걸린 문제였기에 치열할 수밖에 없었고,
철저히 경쟁을 통해서, 반드시 성공해야만 했기에 경쟁력이 높아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하기 보다는 귀족들의 인정을 받아야만 했고,
하이든 - 살리에리가 대표적으로 귀족의 인정을 받은 케이스라면,
모차르트 - 슈베르트가 대표적으로 인정을 못받은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슈베르트는 31살까지 결혼도 못하고, 비참하게 살다가 매독걸려서 죽은 것으로 유명하다.)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면,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음악가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전 세대인 바로크 음악을 좀 알아야만 한다.


중세 음악까지는 너무나 단순한 음악의 형태였기에,

음악사에서 별로 안다루고 바로크 시대부터 주로 이야기를 한다.


바로크 시대에 음악가들 중에 대중에게 잘 알려진 사람은 3명 정도이다.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비발디 (1678 ~ 1741)

독일의 요한 세바스챤 바흐 (1685 ~ 1750)

영국의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1685 ~ 1759) / 태어나기는 독일에서 태어났음


이 중에서도 바흐와 헨델은

음악의 아버지와 음악의 어머니라는 별칭을 받을 정도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한다.


하지만, 동갑내기 이 두 작곡가의 삶은 너무나 차이가 난다.



독일 튀링겐 지방의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난 바흐는

죽을 때까지 독일 안에서만 살았고 당대에는 헨델과 같은 명성을 얻지도 못했다.


10명의 형제의 막내로 태어나서 10살이 되기 전에 부모가 다 죽었고,

제대로 된 정규학교를 다닐 수도 없었기에 형 몰래 스스로 음악을 공부하면서 재능을 키웠다.


나름 명문 음악 집안이기에 바흐라는 작곡가만 60명이 넘는데,
이렇다보니 오히려 집안 내에서도 경쟁이 심했고, 큰형은 막내 요한 세바스챤 바흐의 재능을 경계했다고 한다.

하지만, 바이마르 궁전의 음악가 시절에는 성문 문지기와 동급의 대우를 받았고,
쾨텐 궁전에서도 처음 6년은 평화의 시대를 지내지만, 성주가 결혼 한 이후에는 찬밥 취급을 받게 되었고,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 악장 시험에서는 3위가 되지만, 1등과 2등의 기타 요구하는 잡무가 너무 많다고 그만두면서
과도한 업무를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안정된 직장에서 성실하게 꾸준히 수많은 곡들을 작곡해낸다.

하지만, 바흐는 무려 1300여곡을 썼냈지만,
당대 사회의 주류를 이루였던 오페라는 단 한편도 쓰지 못한 체 사회의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누구나 나처럼 열심히 공부하면 나처럼 쓸 수 있다.” 

라는 표현이 말해주듯이 그는 너무나 근면 성실한 개신교 신자였고, 

이러한 그의 삶은 죽은 후 75년 뒤에 그를 화려하게 부활시키게 만드는 단초가 되어준다.



반면, 헨델은 당시 유럽을 휩쓴 슈퍼스타였다.


독일에서 태어나서 독일과 피렌체 등에서 활동하다가

1712년이후에는 런던에 정착해 귀화했으며, 죽을 때까지 영국에서 살면서 인생의 전성기를 보낸다.


그는 70개의 오페라를 만들었고, 그 중 40개 이상을 흥행에서 성공시켰다.

당대에는 오페라를 얼마나 성공시켰는가가 그 음악가를 평가하는 주요 기준이였고

오페라를 2~3편만 성공시켜서 자리를 잡는데 성공하기만 한다면 먹고살 수 있었던 시기였기에,


헨델은 전무후무한 존재였고 성악과 기악까지 모두 섭렵했던 당대 최고의 음악가지만,

이후 역사가들에게서는 오히려 바흐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저평가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래서 헨델이 죽은 것은 1759년이지만,

역사가들은 바로크 음악의 종료를 바흐가 죽고 살리에리가 태어난 1750년으로 여기고 있다.


+



살리에리는 당대 최고의 음악가였지만,

대중에게는 모차르트를 시기한 2인자로만 기억되고 있다.


피터 쉐퍼(Peter Shaffer)가 쓴 <아마데우스>라는 희극 때문인데,

이후 영화로도 만들어지면서 심지어는 살리에리 컴플렉스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하지만, 살리에리(1750-1825)는

시기적으로 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과 함께 활동했던 사람이였고,


이탈리아 출신으로 이미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당시 모든 음악가의 꿈의 직장이라고 불리였던 빈의 궁정악장의 자리를

무려 36년간이 차지하면서 죽기 1년전에야 그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게 된다.


강헌 선생은 살리에리가 너무 저평가되었다고 이야기하면서,

모차르트를 시기했다는 풍문에 대해서도 신뢰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살리에리는 43편의 오페라를 작곡했고,

베토벤, 슈베르트, 리스트라는 제자를 가르쳤으며,

너무나 잘 나갔기에 모차르트를 시기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모차르트가 살리에리의 욕을 항상하고 다녔기에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싫어한다는 풍문은 당시에도 있었다고 한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은

노골적으로 궁정악장 자리를 탐했으나 하급 관료도 되지도 못한 사람들였던 반면에,


살리에리는 귀족들 사이에서도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었기에 

모차르트나 베토벤을 시기할 이유가 별로 없었던 사람이였기 때문이라고 강헌 선생은 설명한다.

하지만, 당대 또다른 최고 명성의 하이든이 모차르트를 극찬했고,
주류에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음악을 찍어내듯이 만들어내는 모차르트에게 전혀 신경쓰이지 않았다면,
그것은 권력의 속성을 너무 모르는 순수한 강헌 선생의 생각이 아닌가 싶다.

권력자는 아무리 권력을 가져도,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나와 다른 성격의 놈, 특히나 자기를 대놓고 욕하는 놈이 신경 안쓰일 수는 없다.

여하튼, 살리에리는 당대에는 최고의 인기를 누렸지만
역사에서는 그냥 시기심 많은 2인자로 사람들에게는 기억되고 있는 안타까운 인물이 되고야 말았다.

반면, 영국에서는 헨델의 뒤를 이어서 하이든이 활동하고 있었다.


하이든(1732 ~ 1809)은 
오스트라이 동쪽 로라우에서 마차바퀴 수리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역시나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낸 하이든은
성당 소년합창대에 들어가 성가대원이 되지만 변성기 이후 쫒겨나게 되고,
이후 10년간 본의 아니게 길거리를 떠돌며 예술적 자유기를 경험하게 된다.

1759년 보헤미아의 칼 폰 모르친 백작의 궁정악장에 취임했지만 그가 파산하면서 실업자가 됐다가,
1761년 헝가리의 에스트라하지 후작 집안의 하인으로 들어가 완전 출세한 이후에도 평생 그 신분을 유지하게 된다.

하이든은 '파파'라는 별칭을 받을 정도로 부지런하고 충실하면서도
사람들과의 관계도 매우 원만했고 그의 음악에서도 그의 낙천적인 성격이 잘 들어난다.

1790년 명예악장이라는 직위를 받으며 현직에서 물러나 자유의 몸이 되었고,
1791년 런던으로 건너가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노년까지 최고의 명예를 누리게 된다.

하이든은 헨델처럼 영국국왕으로부터 귀화를 권고받았지만,
끝까지 오스트리아 국적을 버리지 않았기에 오스트리아 국민들로부터는 큰 사람을 받았다.
(하이든 두개골 도난 사건이 발생할 정도로 그의 명성은 죽은 후에도 계속되었다고 한다)

살리에리와 하이든은 모두 모차르트와 베토벤과
동 시대에 활동하였는데 그들의 관계도 참 기묘하기 그지 없다.

일단 모차르트는 살리에리와 천적이였지만,
하이든과는 나이 차이가 크게 나면서도 서로 존경하는 우정을 나눈 사이였다.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음악을 굉장히 높게 평가했고,
이 둘은 서로서로의 음악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잘 알려졌다.

반면, 베토벤은 살리에리와 하이든을 모두 스승으로 모셨지만,
자신의 스승들과의 사이는 너무나 최악이였다.

베토벤은 공식적으로 스승이 4명이였는데,
첫 번째 스승인 네페를 제외하고는 다들 사이가 나빴다고 한다.

1972년 런던에서 활동하던 하이든이 빈에 잠시 머무르던 시절
베토벤은 하이든을 찾아가 배웠으나 그렇게 만족스럽지는 않았던 것같다.

천성적으로 낙천적이고 느긋한 하이든의 교습법이
불같은 열정으로 불타는 베토벤에게는 성에 안찾던 것같고,

베토벤은 자신의 작품에 스승의 이름을 빼버리고 말았다.
이에, 하이든은 베토벤을 방자한 무어인이라고 욕하면서 베토벤을 맹 비난한다.
(성격좋기로 유명했던 하이든이 외모를 가지고 욕했다는 것을 보면 진짜 화가 많이 났던 것같다.)

베토벤이 이후 살리에리에게도 찾아가서 음악 수업을 배웠는데,
살리에리는 오페라 작가라서 성악음악을 중시했고, 이탈리아 음악의 선율 감각은 최고의 인기를 구사한다.

하지만, 베토벤의 첫 번째 오페라 작품에 대해서
살리에리가 선율적 감각이 부족하다고 씹었고, 이후로 베토벤은 완전히 삐져서 쳐다도 안봤다고 한다.

생각보다 포스팅이 너무 길어져서,
이후의 모차르트와 베토벤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포스팅으로 넘기도록 하겠다.

[Bunker1특강] 강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 Episode 03 - 모차르트의 투정과 베토벤의 투쟁

열린 공동체 사회 Pot cast/[Bunker1] 강헌 강헌, 고전주의, 낭만주의, 멘델스존, 모차르트, 바로크, 바흐, 벙커1, 베노벤, 불멸의 연인, 비발디, 살리에리, 슈베르트, 아마데우스, 클래식, 피터 쉐퍼, 하이든, 헨델

[Bunker1특강] 강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 Episode 02 - 청년문화의 바람이 불어오다

2014.04.14 01:24

강헌 선생은...

참 음악을 쉽고 감질맛나게 설명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시대의 시대상과 맞춰서 설명을 해준다.

지난 강의에서 미국 음악에서 마이너리티였던 Jazz와 락앤롤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이야기했다면,


[Jazz] 강헌의 마이너리티의 예술선언 1부 < 지난 강의 내용 확인하기


이 번 강의에서는 한국의 10대 청년문화가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일단 미국의 상황부터 설명을 하면,

1964년 비틀즈가 등장하고 락앤롤의 열풍이 불때,

다른 한 편에서는 밥 딜런으로 대표되는 모던 포크가 새로운 흐름을 가지고 있었다.



모던 포크는 민중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음악으로

리듬보다는 가사가 중요했고 체제 저항적인 경향을 많이 보였는데,

밥 딜런의 노래의 경우에는 가사가 문학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어쿠스틱한 악기들을 많이 사용했고 

전통 민요를 리메이크 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굉장히 지적인 음악이면서 음악적으로는 너무 단조로웠기에

비틀즈같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해서, 밥 딜런도 한번도 빌보드 1위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반면에, 락앤롤의 경우에는

가사보다는 그냥 리듬을 느끼는게 중요해서

롤링스톤즈의 경우에는 일부러 가사를 못알아듣게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Rock'n'Roll] 강헌의 마이너리티의 예술선언 2부 < 비틀즈와 락앤롤 관련 내용은 지난 강의에서 이미 언급함


하지만, 비틀즈는 이런 밥 딜런을 동경했고,

밥 딜런도 비틀즈의 인기를 부러워했기에


1965년 이후에는 

비틀즈에서 밥 딜런의 흔적을

밥 딜런에서 비틀즈의 흔적을 느낄 수 있게 된다고 한다.


비틀즈는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고,

단발로 데뷔했던 모습을 버리고 점차 장발로 변해가기 시작했고,

밥 딜런은 어쿠스틱 기타를 버리고 일렉기타를 들고 컨서트에 등장하기도 한다.


당시, 장발은 자본주의적인 삶인

9 - 5 (9시 출근해서 5시 퇴근하는) 직장인의 스탠다드를 벗어나는 표현이였다고 한다.

미국 락앤롤은 이후 히피문화와 결합하여 펑키와 메탈등으로 넘어가면서 좀 더 공격적인 성향이 띠게 된다.


암튼 이렇게 비틀즈가 데뷔했던 1964년에 대한민국에서는

FM라디오가 처음 등장했고, 경제개발이 한참 진행되던 시기였다.


락앤롤과 모던 포크가 경쟁하던 미국의 60년대와 달리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트로트의 대명사 이미자가 시장시장의 70%를 점령하고 있었고,

1969부터 본격적인 청년문화가 시작되게 된다.


이 청년문화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포크음악의 통기타 전성시대와 그룹사운드의 등장이다.


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 Ep 2 < 강의 내용 원문 듣기


+


청년문화를 이끌어간 세대는

45년 이후 출생했고, 10대에 이승만을 몰아냈던 4.19세대이다.


4.19는 중고등학생들이 시작한 시위였다. 

일제시대의 교육을 받지 않았던 당시 10대들은

불합리한 현실을 참지 못하고 교실을 박차고 나갔고,

봉건주의 군주였던 이승만을 몰아냈던 경험을 가진 세대였다.


그들이 성장해서 어느새 20대가 되었고,

그들은 이번에는 청년문화를 불러일으키는 장본인이 되는 것이다.


대중적으로 포크음악을 전면에 끌어 올린 것은 

전설적인 듀오, 트윈폴리오(송창식&윤형주)였다.



라디오를 통해 대중적 인기를 얻기 시작한 이들은

감미롭고 싱그러운 목소리에 통기타를 들고 안경을 쓴 대학생 엘리트 이미지로 데뷔한다.


실제 연대 의대생이였고 부잣집 도련님이였던 윤형주와 달리

가난한 집 출신의 송창식은 서울예고에서 성악을 전공한 생계형 가수였지만,

60년대에만 해도 대학생은 동경의 대상이였기에 대학가와 10대를 중심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하지만, 송창식은 배경, 목소리, 외모 등 모든 면에서 

윤형주에게 항상 컴플렉스를 가질 수 밖에 없었고, 결정적으로 취미로 음악을 하던 윤형주가

경희 의대로 본과를 진학하게 되면서 트윈폴리오는 해체를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생계형 가수였던 송창식은 솔로로 데뷔하게 되는데,

윤형주가 다시 돌아와서 솔로로 데뷔하면서 한동안 둘 사이는 매우 나빴다고 한다.


이들의 특징은 앨범의 전곡이 번악곡이였다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저작권의 개념도 별로 없었기에 작곡의 필요성을 못 느끼던 시절이였다.


노래는 그냥 잘부르면 되는 것에 머물던 시기였기에,

혜성과 같이 나타나 단 한장의 앨범을 내고 1969년 12월 해체한 이들에게는 작곡은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강헌 선생은 청년문화의 시작을

1969년 9월 19일 남산드라마센터에서 열린 한 듣보잡 청년의 공연에서 찾는다.


한대수

그는 중학교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갔지만, 아버지가 실종되는 바람에 어렵게 자랐고,

60년대 미국 문화의 영향을 받고 한국에 돌아와 코리안헤럴드 사진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한대수는 400명이 안되는 작은 공연장에서 자작곡을 발표하는데,

1974년 첫 앨범 발표 전에 이미 한대수의 음악은 암암리에 청년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고 한다.


본격적인 자작곡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


반면 한편에서는 그룹사운드의 흐름이 형성되고 있었다.


1960년대의 경제 상황에서는 

사실 개발도상국에서는 록앤롤은 너무나 고급스러운 음악이였다.


악기와 음향 시스템에서 도저히 따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 락밴드가 생길 수 있는 곳은 바로 미8군 근처 술집이였다.


미군 장교들이 가서 맥주먹는 고급 술집에서는

락밴드가 생겨나가 시작했고 1962년 최초의 락밴드 키보이즈가 생겨난다.


초창기 비틀즈의 노래를 번안해서 부르던 이들은

계속해서 맴버구성을 바꿔나가다가 3기였던 1969년 '해변으로 가요'를 대성공시키게 된다.



하지만, '해변으로가요' 역시 일본 노래를 카피한 노래였기에,

키보이즈도 자작곡으로 성공한 그룹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한다.


하지만, 미8군을 주름잡던 기타리스트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한국 락음악의 대부라고 불리는 중졸 출신의 신중현이였다.


1964년 애드훠 라는 그룹으로 데뷔를 했고,

빗속의 연인 + 내 속을 태우는구려(커피한잔)라는 노래를 냈지만,

당시만 해도 아직까지는 이미자의 시대였기에 그냥 나오자마자 망했다고 한다.

(빗속의 연인과 커피한잔은 이후 리메이크되어서 대히트를 하게 된다.)


미8군을 벗어날 수 없었던 신중현은 어쩔 수 없이 월남행을 선택한다.

하지만, 미8군에서 같이 활동했던 후배들에게 준 곡이 대박을 내면서 그는 월남행을 포기한다.


그들이 바로 펄시스터즈였고,

이후 김추자-장현-김정미-바니걸스-임성훈-박인수로 이어지며

연속해서 대히트를 치면서 이른바 신중현사단이 만들어지게 된다.


특이한 한점은 솔로로 데뷔한 이들은

사실상 락음악을 한 것이 아니라 소울 음악을 했다는 점이다.


미8군에서 활동했던 신중현은

흑인음악이였던 소울과 락앤롤을 동시에 경험했었고,

소울 음악을 기반으로 솔로 가수들을 데뷔시켰던 것이다.


1968년 - 1973년

프로듀서로써 신중현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지만,

자신이 참가한 락밴드는 계속해서 실패를 거듭하게 된다.


당시만 해도 락음악을 할 수 있는 인프라도 부족했고,

교육시설이나 음향시설도 없었고 나이트클럽에서 공연만 가능했던 시절이다.


+


암튼,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미자가 점령하던 트로트 전성시대는 점차 막을 내리고,

포크 음악이 새로운 대세로 떠올랐고 패티김 같은 가수가 등장하면서 트렌드를 또 바뀌게 된다.

여기에 한대수, 신중현 등의 영향으로 자작곡이 터져나오던 시점에 역사적인 포크 음악이 등장하게 된다.


그 주인공은 바로

1971년 6월 30일 발매된 

3000장도 팔리지 않은 양희은의 음반 <아침이슬> 이다.


이 노래에 담긴 스토리는 너무나 재미있다.

1971년 10월 21일 발매된 김민기의 앨범에도 실려있는 이 곡은 너무나 느낌이 다르다.



당시 서울대 미대생이였던 김민기는

열심히 알바를 하면서 학교를 다녔던 고학생이였고,

사는게 너무 괴로워서 술먹다가 통금에 걸려 그냥 구석에 짱박혀서 잤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아침에 일어났는데 그곳이 바로 공동묘지였다고 한다.

그가 눈을 떴을 때 이미 태양은 떠오르고 있었고 한낮의 찌는 더위 속에서 그는 다시 일하러 갔다고 한다.


작사한 김민기의 사연을 듣고나면

참으로 고달푼 눈물나는 슬픈 노래이다.

민주항쟁을 상징하는 노래가 아니라, 21세기 88만원 세대를 대표하는 노래인 것이다.


하지만, 이 노래가 

서강대 사학과 1학년생이였던 양희은을 만나면서 완전 새로운 노래가 되어버린다.


여성보컬 특유의 비브라토도 없고,

감성적이면서도 투쟁적인 목소리를 만나면서 민주항쟁의 상징적인 노래가 된다.



하지만, 강헌선생은 원래 사연이 좀 그렇기는 하지만,

 <아침이슬>이 가진 음악적인 상징은 대단하다고 설명한다.


음악적인 아마추어였던 미대생 김민기는

굉장히 한국적인 새로운 시도를 했었다는 것이다.


통기타와 클래식기타만으로 연주한 이 노래는


분명히 C장조임에도 불구하고 

묵가적이고 여성적인 아름다움으로 시작해서,

갑자기 남성조의 선동적인 분위기로 바뀌어버린다.


당시에 유행하던 A-B-A 정형적인 환전문법을 벗어나서
A-B-C로 점점 고조되는 새로운 문법으로 노래가 구성되면서 
아름다운 A테마가 다시 나와 현실로 돌아가지 않고, 새로운 세계로 떠나면서 노래가 끝난다.


다시 현실로 돌아오지 않는 낭만주의적인 노래,

여기에 한문과 외래어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가사

당시 저항 시인이였던 김지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라고 한다.


김민기의 새로운 시도는 뒤늦게 인정을 받기 시작했고,

아름다운 가사라고 상까지 받았지만 시대를 이끌어 나가는 진취적인 노래가 되어버린다.


이 노래는 시위대가 자주부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유신시대를 거쳐서 아무런 사유도 없이 금지곡이 되어버렸고,

오랫동안 금지곡으로 머물다가 1987년 6월항쟁에서 상징적으로 터져나오게 된다.


+


1973년에 들어서는

대학 캠퍼스별 스타(김세환, 이수만, 이장희, 양희은 등)가 등장했고,

얼굴까지 잘생겼던 김세환은 대중 가요계를 완벽하게 점령해버린다.


1974년 <별들의 고향>이 등장하면서 청년문화는 주류가 되어버린다.


1960년대 영화계를 주름잡던 신상옥 감독의 조감독 출신인 이장호 감독은

당시 20대였던 최인호 작가의 원작 소설을 가지고 홍익대 대학생 이장희의 OST로 대히트를 거두게 된다.


<별들의 고향>은 대중문화에 새로운 시대를 확정짓는 신호탄이였고,

이어서 1975년 <바보들의 행진> 역시 송창식의 OST로 대세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여기서 그룹사운드의 대표주자였던 신중현이 가세한다.


이미 수많은 밴드를 말아먹었던 신중현은

진짜 마지막이라면서 처음으로 밴드이름을 한글로 짓는다.


근데 밴드이름이 심상치 않다.

한국민족을 비하해서 부르던 말인 '엽전들'

진짜 마지막이라고 작정이라고 한듯 노래들도 굉장히 실험적이다.


그리고 항상 풀 밴드를 구성하던 신중현은

기타/베이스/드럼의 3인조로 최소 규모로 밴드를 구성했고,

항상 당대 최고의 보컬을 영입해서 기타만 연주하던 자신이 이번에는 직접 보컬을 맏는다.



1974년 발표된 <미인>은

삼천만의 애청곡이 되어버리고,

신중현은 이 앨범으로 한국 락음악의 대부의 칭호를 받게 된다.

그동안 비틀즈를 따라만하던 그가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후 이어지는 강헌 선생의 곡 해석은 진짜 대박이다.


서울대 미대생이였던 김민기가

아마추어적으로 시대에 저항하는 노래를 만들어냈다면,


중학교 중퇴자인 신중현은

프로패셔널하게 일본음악과 미국음악이 아닌 한국적인 음악으로 시대에 저항했다는 것이다.


강헌 선생은 이 곡에서 주안점을 두어야하는 것을 3가지로 정리한다.


1) 리프
- 괭과리 같은 느낌
- 단조 5음계 사용 (트로트와 동일)
- 하지만 전통적 계면조적인 단조5음계

2) 4박자 8비트
- 미국 락밴드와는 다름
- 타악기 중에 금속 세트를 주로 활용
- 강약에서 강조점을 없애버림

3) 간주에 등장하는 기타솔로
- 일렉 기타를 개조해서 가야금 느낌을 살림



+


하지만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신중현은

박정희라는 최고의 적수를 만나면서 전성기를 그대로 마무리하게 된다.


1973년 오일쇼크 이후

박정희 정권을 지탱하던 경제성장이라는 기반이 흔들리면서,

박정희는 긴급조치를 발휘하면서 철군 통치를 시작하게 된다.


1975년 4월 긴급조치 9호가 발표되었고,

박정희는 자신이 작사/작곡한 국민가요들을 전파하기 시작한다.


<잘살아보세>, <나의 조국> 등

일본군가에서 기본 리듬을 따온 이 노래들은

일제시대 사이토 총독이 사용한 국민가요라는 명칭을 그대로 쓰다가

뒤늦게 건전가요라는 이름으로 변경해서 대중들에게 전파된다.


진짜 박정희가 작사/작곡 한 것 맞냐는 논란이 있기는 한데,

강헌 선생은 철저히 일본군가의 느낌이 스며있는 것을 보면 100% 박정희가 만든 노래가 맞다고 이야기한다.


암튼, 이러한 국가의 움직임에 협조하지 않았던 신중현은

완전 활동이 통제되어버리고 1975년 12월에는 대마초 파동으로 잡혀들어가게 된다.


당시 법률상 대마초는 불법이 아니였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일단 구속하고 관련 법률을 만드는 형태로 비협조적인 가수들을 잡아들인 것이다.

(강헌 선생 설명에 의하면 대부분 다음해에 활동제한을 풀어줬는데, 신중현만은 계속 금지였다고 한다.)


암튼, 이를 계기로 락밴드는 다시금 사라지게 되고,

락밴드 출신의 트로트 가수들이 다시 전성기를 맞게 된다. (조용필, 윤수일 등)


하지만, 대학가요제가 생기면서

대학가 락밴드가 대중으로 다시금 나오는 계기가 되는데, 대표주자가 바로 <산울림>이였다.


신중현 이후 처음으로 전곡이 자작곡인 앨범을 냈고,

이후 3개 앨범을 한 번에 쏟아내면서 락밴드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어버린다.

1978년 산울림의 등장 이후 송골매 등의 락밴드가 다시 등장하는 것이다.


+


강헌 선생은 마지막 시간에 쫒기듯

80년대 이후 10대문화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강의를 마친다.


80년대로 넘어와서 경제발전으로 용돈도 생기고,

워크맨의 등장으로 음악도 자유롭게 들을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도 가부장적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순정만화의 전성시대에 맞춰서 감미로운 발라드 전성시대가 된다고 한다.


근데, 가장 큰 특징은 

조용필 - 이문세 - 변진섭으로 이어지는

노래는 잘하는데, 잘생기지 않은 가수가 부르는

비련의 슬픈 사랑이야기가 대세를 이룬다는 것이다.

(가사도 이해하기 힘든 아주 심오하고 어려운 표현들이 넘쳐난다.)


아직까지 대놓고 잘생긴 가수를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사회적인 시각이 너무나 부담스러웠기에 생긴 현상이였다는 것이다.

(섹슈얼리티로 설명하는 부분은 설마~ 하는 생각이 들지만 굉장히 설득력이 있어보인다.)


하지만, 1988년 이후 X세대로 넘어가게 되면서 

그 흐름을 바뀌게 되고 1989년의 <희망사항>이라는 노래는

그 흐름을 대변해주는 대표적인 노래라는 것이다.



운문에서 산문으로 가사가 바뀌었고,

관념적인 표현에서 사실적인 표현으로

TV시대에 맞춰서 비주얼적인 표현들이 등장하면서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노래가 등장하게 된것이다.


1990년대부터는 10대 문화가 드디어 완성되었으며, 이것이 오늘날 K-pop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 본 내용은 강의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한 것으로 

  강헌 선생의 맛갈나는 강연 내용은 반드시 직접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강추!!)


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 Ep 2 < 강의 내용 원문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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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ker1특강] 강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 Episode 01 - Rock'n'Roll

2014.02.19 00:58

1부에서 강헌 선생은

마이너리티에 불과했던 재즈라는 흑인 음악이 

어떻게 세계 대중음악의 출발점이 되었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였다.


강헌의 마이너리티의 예술선언 1부 (Jazz) < 관련 포스트 보기


그러면서 2부에서는
마이너리티에 불과했던 10대가 어떻게
세계 대중음악을 주도하는 주인공이 되었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이 번 포스팅 역시 강의 내용이 너무나 주옥같아서,
강헌 선생님의 강의 내용을 중심으로 미약하나마 가지고 있던 지식을 첨가해서 정리하고자 한다.

다시 정리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진짜 강헌 선생님의 강의 내용은 대박인 듯 ~~


Blues에 Soul이 있고,
Jazz에 Swing이 있고,
Hiphop에 Groove가 있다면,

Rock에는 바로 Spirit이 있다.


왜 Rock'n'Roll Revolution이라는 표현이 나왔는지,
강헌 선생의 강의를 듣게 되면 그 맥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야기는 1부에 이어서 다시 재즈에서부터 시작된다.

+

불과 30년만에 세계를 정복한 재즈는
흑인들이 예술가적 자의식을 가지게되면서 점차 복잡한 음악이 되어버린다.

단순히 즉흥적인 댄스 음악이 아니라 모던 재즈의 흐름이 나타난 것이다.

재즈 음악의 천재들이 등장하면서,
Bebob, Cool Jazz, West Coast Jazz, Hard Bop, Free Jazz등으로 발전해나가지만,
예술의 경지에 오른 재즈에 대해서 대중들은 점차 외면하기 시작한다.

흑인들 사이에서도 엘리트의 음악이 되어버린 Jazz
그리고 흑인영가에 경쾌한 재즈 리듬을 활용했지만 너무나 전도의 목적이 강한 Gospel 

이들은 일반 흑인들이 가볍게 즐기기에는 너무 진지하고 따분했던 것이다.

마침 엠프의 개발로 기타/베이스/드럼으로 단순한 연주가 가능해지자
재즈적인 리듬과 블루스적인 감각과 창법이 어울어진 새로운 형태의 음악이 유행을 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갑자기 많은 돈을 가지고 돌아온 흑인들은
그 돈을 음반을 사는데 쓰기 시작했고 갑자기 흑인 음반 시장은 급성장을 하게 된다.

음반 판매 집계를 담당하던 빌보드는 판매가 급증한 흑인 양아치들의 음악을
하나의 장르로 인정해주면서 리듬앤블루스(Rhythm & Blues)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1940년대 부터 성행하기 시작했던 이 새로운 흑인 음악의 흐름은
Little Richard 같은 스타들을 거치면서 로큰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가게 된다.

+

강헌 선생의 강의를 듣기 전까지만 해도
흑인 음악이였던 리듬앤블루스가 장사가 되니까,
백인들이 상업적 목적으로 빼끼면서 로큰롤로 넘어갔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물론 틀린 설명은 아니며, 재즈에서 스윙으로 넘어간 것과 유사한 패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모르면 왜 리듬앤블루스가 각광을 받게 되었는지에 대해 공감할 수가 없다.

강헌 선생은 로큰롤은 하나의 혁명이였다고 이야기한다.

1955년 영화 <Blackboard Jungle>의 엔딩곡

Bill Haley & His Comets 의 Rock Around The Clock 은 종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음악이 워낙 경쾌하고 좋기도 하지만,

영화 제목에서 부터 느껴지듯이 그 당시 10대의 저항의식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


한국에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영화가 인기를 끈 것처럼

미국에서도 10대들의 첫 번째 저항의 장소는 바로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학교였던 것이다.


20세기초 두 차례의 세계적인 전쟁과 세 차례의 경제적 공항을 거쳐서

풍요로운 골든 에이지가 시작되었고 역사상 유래없는 호황이 이어지게 된다.


이제는 부모의 도움 없이도 열심히 노력해서 일을 하면

영화 속 주인공처럼 교외주택가에 살 수 있는 중산층이라는 새로운 계층도 등장한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풍요를 누리기 시작한 10대들에게는

고리타분한 생각만 강조하고 기존 질서와 경쟁만 강조하는 기성 세대들이 맘에 들지 않는다.


전쟁이 끝난 후 삶이 평화로워져 보였지만, 

사실상 10대들의 삶에서는 성적이라는 전쟁이 일어나 있었고,

상대평가와 계량화된 교육은 양극화라는 새로운 모순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미국 남부지역에서는 이러한 10대들의 독립선언이

백인 중산층들이 싫어하는 흑인들의 음악을 듣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미국 남부 테네시주의 맴피스에서 
썬레코드라는 음반사를 운영하던 샘 필립스는

10대들이 리듬앤블루스를 구매하기 시작하면서,
1950년대 중반부터 백인 음악 음반 매출이 급감하는 것을 경험한다.

하지만 샘 필립스는 흑인 음악이 가진 시장성을 알면서도,
존 하몬드가 했던 것처럼 직접 흑인 아티스트를 발굴하지는 않았다.

대신, 4달러를 내고 흔하디 흔한 오디션을 보러온
흑인 목소리를 내는 키 180의 백인 트럭 운전사를 일약 스타로 만들어버린다.

그가 너무 가난해서 흑인 거주지역 인근에서 자란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어렸을 때부터 흑인교회에 다니며
흑인의 가스펠과 댄스에 익숙해있었던 그는
첫번째 백인 리듬앤블루스 가수로 데뷔하자마자 빌보드 차트를 점령해버렸다.

데뷔 초기 에드 설리번 쇼에 처음 출연한 엘비스는
엉덩이를 너무 흔들어서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편집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

이 때 바스트샷만 나가자는 매니저의 제안으로
궁여지책으로 방송이 되면서, 오히려 그의 독특한 움직임이 화제를 일으키며 대히트를 치게 된다.

데뷔한지 한 달 반만에 
막 시작된 TV시대 최고의 스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는 1956년 빌보드차트 52주 중 무려 34주 동안 1위를 점령해 버린다.


엘비스로 부터 시작된 로큰롤의 열풍은
미국 전역을 휩쓸지만 이에 대한 기성 세대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로큰롤(Rock'n'Roll)이라는 용어 자체가 
원래 남여간의 성교를 의미하는 용어였고 노래의 가사 또한 만만치 않았다.

흑인 음악에서 시작된 것을 제외하더라도 기독교 사회가 당연히 싫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국 최대 시민단체인 PTA(학부모 교사 연합회)가 앞장서서
로큰롤은 사탄의 음악이라 선언하고 모든 로큰롤 음반을 불 태워버리고 언론플레이를 시작한다.
(10대들의 저항에서부터, 보수적인 종교계의 탄압 등 어디에서 많이 본 듯한 모습이다.)

역시 이들의 힘은 대단했던 것 같다.
로큰롤의 저항정신을 도덕적 해이로 연결시키는 데 성공했고,

1956-1957년에 걸쳐서 급격히 성장한 로크롤은
1958-1960년에 걸쳐치면서 급격한 쇠퇴기를 맞이하게 된다.

로큰롤의 열풍을 주도했던 엘비스 프레슬리는 군에 입대했고,
로큰롤의 교본을 만들었다던 '척 베리'는 석연치 않게 매춘 협의로 감옥에 가고,
로큰롤을 실질적으로 탄생시켰다고 불리는 '리틀 리차드'는 갑자기 목사가 된다.

피아노 로큰롤의 개척자라 불린 '제이 리 루이스'는
14살짜리 사촌과 결혼한 것이 문제가 되어 영국 순회 공연이 취소된 후 사회적으로 매장됐고,
(이후 루이스는 컨트리 음악으로 전향해서, 비교적 성공적으로 재기한다.)

당시 방송국 DJ들 사이에 만연했던 금품 수수 관행에 대해 열린
페이올라(Payola) 청문회를 통해서 로큰롤에 호의적이였던 DJ들은 방송국에서 모두 축출된다.
(로큰롤의 아버지라 불리던 앨런 프리드는 이 때 모든 것을 다 잃고 1965년 알코올 중독으로 죽었다.)

심지어 '버디 홀리'와 '리치 발렌스'은 우연히 같은 비행기를 탔다가
비행기 사고로 함께 세상을 떠나버리면서 세간에는 음모설까지 제기되었다.

+

시들해지던 로큰롤 열풍은 이제 정치권으로 넘어간다.
전후 처음으로 선거권을 획득하기 시작한 이들은 JFK라는 새로운 스타를 만난다.

기존 정치권과는 너무나 다른 젊고 잘생긴 대통령
그의 개혁적인 정신과 행동들은 젊은이들을 열광하게 만든다.

하지만, 1963년 그 역시 정체 불명의 기성세대에게 암살을 당하게 된다.
그 빈자리를 채워준 것은 다름 아닌 영국에서 넘어온 비틀즈였다.

미국은 영국에 대한 동경도 존재하지만,
또한 영국에 대한 적대감과 열등감도 가지고 있었다.

전쟁에도 승리하고 재즈로 전 세계 음악을 평정했던 미국의 자존심에
비틀즈의 성공은 사실 반갑지 않았기에 이를 British Invasion이라고 부르게 된다.

이 번에도 사건은 애드 셜리번 쇼에서 터지게 된다.

노동자 출신에 락커족에 가까웠던 비틀즈는
미국에 진출하면서 자신들의 이미지를 모드족으로 연출을 한다.

50년대 후반 미국 시장에서 로큰롤이 어떻게 사라져갔는지를 반면교사 삼았고,
또한, 미국인들이 영국인들에게 무엇을 바라는지를 매니저는 기가막히게 알았던 것이다.

영국의 엘리트 모범생같은 모습으로 등장한 비틀즈는
종전의 히트를 치게 되면서 에드 설리번 쇼에 다시 한 번 등장한다.


미국 기성세대의 공격을 교묘하게 피했던 비틀즈와는 다르게,
롤링스톤즈는 흑인 음악을 전면으로 추구하며 온몸으로 그 공격을 받아낸다.
(사실은 비틀즈가 노동자 출신의 히피들이였던 반면, 롤링스톤즈는 명문대 출신의 엘리트들이였다.)

최고의 성공은 비틀즈가 했지만, 
Spirit의 측면에서는 역시 롤링스톤즈가 최고인듯~~
(이런 면에서 롤링스톤즈를 더 선호하는 음악 전문가들도 많다고 한다.)

1965년 이후부터는
비틀즈 역시 자신들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이미 그들은 넘사벽이 되었기에 기성세대의 공격쯤은 가뿐하게 넘겨버렸다.

암튼 비틀즈는 시들어가던 로큰롤의 열기를
완전히 되살려버렸고 아니 이제는 광풍의 경지에 올려버렸다.

이런 측면에서 비틀즈의 British Invasion은
단순히 영국 음악이 미국 시장을 점령한 것이 아니라,
기성세대에 무릎꿇었던 10대들이 다시 한 번 문화의 중심에 서게 된 사건인 것이다.

이후, 대중문화는 10대를 중심으로 흘러가게 되었고,
이러한 현상은 21세기에 들어서도 크게 변화하지는 않고 있다.

+

하지만, 최근 대한민국에는 재미있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대중 문화의 중심에는 항상 10대가 자리잡고 있었지만,
2010년대 이후 중간세대라 볼 수 있는 30대의 영향력이 급속히 커지고 있다.

물론 세시봉 열풍처럼 기성세대의 열풍도 있었지만,
건축학 개론, 응칠, 응사로 대변되는 30대의 영향력이 만만치 않다.

이들이 문화계에 영향이 커지면서
대형 뮤지컬이나 콘서트, 미술관 같은 시장이 많이 커진 느낌이다.
(사실 어린 애들은 돈이 없어서 접근하기 쉽지 않은 시장)

예전 같으면 결혼해서 애키우고 일하냐고 정신 없었던 세대인데,
결혼도 늦어지고, 애도 적게 낳고, 일을 하더라도 자신을 찾기 시작한 이들...

특히나 10대와 20대가 구매력이 약한 반면, 이들은 경제력도 강하다.
사실 가진 것은 50대 이상이 더 많지만 이들은 자식들에게 쏟아부어서 실제적인 가용 금액은 얼마 안된다.

내가 대학생 시절만 해도 대학생이 모든 문화의 중심이였는데,
지금 대학생은 취업 준비에 정신이 없는 불쌍한 청춘으로 전락해버렸기에
어떻게 보면 돈이 돌 수 있는 유일한 시장이 바로 30대 시장인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문화의 중심자가 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30대를 대변하는 키워드는 무엇일까?

적당히 기성세대에 저항하면서도,
적당히 예전에 대한 추억팔이도 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기존 질서에 저항할 여력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을 뒤집어 놓을 정도의 역동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차 보수화되고 현실에 순응하고 있는
10대와 20대에 비해서 싸워본 경험도 있고 싸울만한 체력이 있는 세대이다.

'30대의 정치학'이라는 책이 나올 정도로 독특하면서도
상당한 영향력과 잠재력을 가진 세대라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정치와 문화라는 것의 상관관계가 참으로 묘하게 연결되는 맥락이 존재한다.

새롭게 문화적 주도권을 가져가고 있는 30대
이들이 과연 어떤 새로운 문화적 흐름을 가져갈지 궁금하다.


열린 공동체 사회 Pot cast/[Bunker1] 강헌 10대, 30대, Bill Haley, Blackboard Jungle, British Invasion, GOSPEL, Little Richard, pta, Rhythm & Blues, Rock Around The Clock, Rock'n'Roll Revolution, 강헌, 골든 에이지, 락 스피릿, 로큰롤, 롤링스톤즈, 리듬앤블루스, 리치 발렌스, 마이너리티 예술 선언, 버디 홀리, 비틀즈, 빌보드, 샘 필립스, 썬레코드, 앨런 프리드, 에드 설리번 쇼, 엘비스 프레슬리, 재즈, 제이 리 루이스, 중산층, 척 베리, 페이올라

[Bunker1특강] 강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 Episode 01 - Jazz

2014.02.18 23:29

나름 음악에 대해서 이해하고 싶다고...

흑인 음악의 역사에 대한 책도 읽어봤지만...

나의 지식은 살아있지 않는 그냥 머리로 이해한 음악이였다.


강헌...

그의 강의를 듣는 순간...

Jazz와 Rock'n'Roll 이라는 악이 나에게 다가오게 되었다.



우선, 책으로만 읽었던 흑인 음악의 역사를 대충 정리하면 아래와 같았다.


노동요 > 흑인 영가 > 블루스 > 랙타임 > 재즈 > 가스펠 > 리듬앤블루스 > 소울 > 모타운 > 펑크 > 디스코 > 힙합 > POP(장르 융합)


당연히 정확히 이런 순으로 발전한 것은 절대 아니며,

그냥 시대의 순서대로 유행한 음악을 정리해 놓은 것 뿐이다.

(특히나, POP같은 경우는 80년대 이후의 온갖 장르들이 융합되면서 대중화된 음악을 통칭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론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던 흑인음악의 흐름에 대해서

강헌 선생의 강의는 뭔가 그 맥락을 이해하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그냥 시대별로 딱딱 끊어서 이해하는 것보다는

왜 그런 음악이 유행하게 되었는지 너무나 명쾌하고 실질적으로 설명해주니까,

마음으로써 그 음악을 이해하고 그 음악적인 흐름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강헌 선생의 강의는 리듬앤블루스에 대한 설명해서

백인들이 본격적으로 대중화시킨 로큰롤로 넘어가기 때문에,

1960년대 이후 등장한 소울이라는 장르(?)부터는 설명해주지 않는다.

(소울이란 단어를 하나의 장르로 설명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60년대 인권운동과 함께한 흑인음악을 일컬어 소울이라 부른다.)


60년대 이후 흑인 음악의 흐름에 대해서도 강헌의 강의가 있는지 좀 찾아봐야겠다.


+


벙커1특강 - 강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 : EP.01 마이너리티의 예술 선언 1 (Jazz)


16세기부터 흑인이 노예로 미국에 끌려오기 시작하면서,

아프리카 아메리칸들의 황야에 외치는 소리(field the holler)는 시작된다.


초창기의 농장 노동요(Plantation Chaint)는 사실상 음악이라고 부를 수 없는 절규였다.


소수의 백인들은 아프리카에서 스페인 노예상에 납치되어 
미시시피주의 대농장에 팔려온 다수의 흑인을 통제하기 위해서 가혹한 탄압을 한다.

서로 대화도 못하게 하였고,
그들은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해 하늘을 향해 소리를 부르짓을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이 농장에서 부른 노래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절망의 소리였던 것이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체계적인 음악을 접하게 된 것은 바로, 교회를 통해서였다고 한다.

블루스(Blues)와 흑인 영가(Negro Spirituals) 중 어느 것이 먼저 시작됐냐는 논란이 좀 있는데,
사실 둘을 들어보면 기본적인 리듬이나 분위기는 너무나 유사하다.
가사의 내용이 하나님이냐, 아니면 세속적인 욕망을 다루냐의 차이정도?

물론 다루는 악기에서는 차이가 확인히 드러난다.
특히나 초기의 블루스(Blues)는 변변찮은 악기 하나 없이 하모니카나 목소리만으로 짜여졌다고 한다.

교회의 찬송가에 흑인 특유의 리듬감을 감미한 흑인 영가는 
개인적이고 세속적이던 블루스와 서로 영향을 주었고, 본격적으로 흑인 음악은 발전해나가기 시작한다.

출발부터 한이 셔려있어서 그런지 블루스의 soul이라 하면,
우울하고 슬픈 느낌이 살짝 숨겨져 있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흑인 영가에서도 대상만 다를뿐 기본적인 느낌은 비슷한 듯하다.

+


재즈(Jazz)의 시작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뒤로 한다.

프랑스령의 뉴올리언즈는
미국 내에서도 앵글로색슨족에 소외된 백인을 비롯한 온갖 인종이 모여들면서
한마디로 인종의 용광로와 같은 지역이였다고 한다.

자유로운 영혼의 프랑스인들이 흑인들과도 많은 관계를 가지게 되었고,

프랑스계 흑인인 크레올이라는 새로운 인종이 탄생하면서 렉타임(Ragtime)이라는 음악이 탄생한다.


백인들에게 악기 연주를 배운 이들은

처음에는 악보를 보고 그대로 연주하는 Classic에서 출발하지만, 점차 자유로운 연주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영화 The sting의 OST "The entertainer"를 만든 Scott Joplin이 대표적인 음악가이다.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으로 군수물자들이 뉴올리언스에서 폐기되면서,

야전에서 활용도가 높고 내구성이 강했던 군악대의 관악기들이 이 동네에 흘러들어오게 된다.


역사적으로는 오래됐지만 소리가 거칠고 정확한 음을 내기 어렵기 때문에 

섬세한 표현이 가능한 현악기에 비해서 오케스트라에서 천시를 받았던 관악기들은

흑인들의 두꺼운 입술과 뛰어난 폐활량을 만나서 새로운 빛을 밝휘하게 된다.


뉴올리언스에 유입된 관악기들은

공공연한 매춘의 장소였던 바에서 호객행위를 위한 악기로 활용된다.


Jazz라는 어원은 섹스, 창녀, 삐끼에서 유래되었다는 다양한 설이 있지만,

뭐가 정확한지는 몰라도 그 맥락을 보면 굉장히 일관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 동네 최고 인기를 누리던  '스토리 빌' 같은 재즈바에서는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항구에서부터 삐기들이 즉흥적인 연주를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유입된 손님이 매춘을 하게 만들기 위해서 술과 음악으로 계속해서 매장에 잡아두었다.


매춘을 위한 술집의 영업 전략이 오늘날의 재즈를 탄생시킨 것이다.


+


19세기까지만 해도 동네 음악이였던 재즈는

뉴올리언스 지역이 재개발되면서 흑인들이 강을 타고 북쪽 도시로 진출하면서 점차 확산된다.


특히 이 때, 시카고 흑인 할렘가로 들어간 루이 암스트롱은

30년만에 재즈를 세계적인 음악으로 만들어버린 장본인이 된다.


루이 암스트롱은 놀라운 태크닉의 트럼펫리스트였지만,
여기에 놀라운 보컬 능력과 뛰어난 유머 감각을 갖추었기에 스타 반열에 오르게 된다.

1926년 "히비 지비, 두비 두비, 지비 지비"의 경우에는
악보가 바닦에 떨어져 그냥 막 연주했는데, 그냥 녹음을 계속 진행해서 그게 대박이 났고,

그의 스캣 창법은 당시 인기를 끌던 다른 가수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루이 암스트롱의 생애를 아주 잘 설명해주는 블로그 글


강헌 선생은 <St Louis Blues> 공연 영상을 통해서 당시 재즈의 특징을 설명해주었다.



교향곡은 현악기가 주도하지만

재즈는 소속된 모든 악기에 평등성을 부여하면서 보컬만 돗보이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루이 암스트롱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20세기 초반은
계속 이어지는 경제적 공항(1907 / 1912 / 1929)과 전쟁으로 시대적인 암흑기였다.

거대한 댄스홀(클럽)들이 도시에 나타났고, 
17-23인조의 빅 밴드가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1930년대 이후 재즈의 흐름은 스윙이라 불린다.

스윙은 듣는 사람이 플로우로 나가서 춤을 추고 싶게 만드는 느낌을 의미하지만,
빅밴드로 넘어가면서 백인들이 재즈 시장을 점령하게 되고 스윙은 하나의 장르와 되어버린다.

흑인이 만들고, 백인이 돈을 버는 미국음악 산업의 구조가 고착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루이 암스트롱의 사례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바로 진보적인 백인들이 흑인 아티스트를 키워냈다는 점이다.

강헌 선생은 '트로이의 목마'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전형적인 엘리트 강남좌파였던 존 하몬드가 뉴욕 사교계에 루이 암스트롱을 등장시킨다.

카운터 베이시, 브루스 스트링스 뿐만 아니라,
유태인 출신의 밥 딜런 역시 존 하몬드의 작품이였다고 하니 진짜 천재 프로듀서였던 것 같다.

여기에 미국 상무부가 문화산업 증흥을 추진하기 시작하면서,
루이 암스트롱은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재즈를 세계에 전파하게 된다.

그러면서 재즈는 오늘날 모든 대중음악의 출발점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것이다.

(이후의 Rock'n'Roll에 대한 이야기는 2부에 대한 다음 포스트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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