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통] 사회를 보는 시선 ⑤ - 사람들은 왜 불평등을 받아들이는가 (조형근 한림대 연구교수)

2014.10.14 21:05


[2014.03.25] 사람들은 왜 불평등을 받아들이는가 - [시사통] 방송듣기


간만에 굉장히 흥미로운 강의였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지금의 의미로 형성되었으며,

헤게모니이론과 현대 사회의 냉소주의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는 강의이다.


마르크스, 그람시, 알튀세르, 지젝이라는 등장인물도 훌륭했지만,

지난 강의가 약간 짜집기적인 느낌이 들고 현실과의 이질성이 좀 느껴졌다면,

이번 강의에서는 대한민국의 정치 현실을 포괄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강의였다.


+


강의는 일단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부터 시작된다.


이데아(Idea)라고 불리던 관념적인 것들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것을 이데올로기(Ideology)라고 불렀고,

이데올로기를 연구하는 사람들을 이데올로그(Ideolog)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분명히 학부시절 비판 커뮤니케이션 시간에

굉장히 어렵다고 생각한 개념같은데, 조형근교수가 설명하면 신기할 정도로 굉장히 쉽게 이해된다.


이데올로기를 연구하는 이데올로그들은 초기 나폴레옹 지지자들였으나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자 나폴레옹에 대한 적극적 비판자가 되면서 나폴레옹은 그들을 부정적으로 조롱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데올로기의 개념을 구체적으로 정착시킨 것은
칼 마르크스의 <독일 이데올로기(1833)>에서 부터라고 한다.

칼 마르크스는 의식은 물질적 세계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인데,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묘사하기는 하지만 현실을 거짓으로 반영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이라고 표현했고,
사물에 권력이나 신성을 부여하면서 사람은 권력이나 신성이 앖어져버리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상품들이 동일한 노동가치를 가지고 있기에 교환이 가능한데(노동가치설),
실제세계에서는 돈이 가장 중요하고 상품이 다음으로 중요하고 노동은 소외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여기에서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왜곡해서 보게 만들고
지배계층이 피지배계층을 지배하는 개념을 형성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마르크스 이후로 이데올로기는 부정적 의미로 고착되어 버렸고,
과학적 사회주의를 통해서 의식화되어 주체로서 투쟁에 나서고 해방을 쟁취해야할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80년대 학번들은
대학에 입학하면 이러한 의식화 교육을 누구나 받았는데,
그들이 현재 50대가 되어서 기득권이 되고 보수화되었다는 점이다.

이데올로기가 뭔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
보수화되어서 사회적 불평등을 그대로 받아드리는 것은 대한민국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

두 번째 등장 인물은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이다.



전통 마르크스 주의자들이 자본주의가 곧 무너질 것이라 기대한 것과 달리
안토니오 그람시는 경쟁적 자본주의가 독점적 자본주의로 변화되면서 안정화 단계에 들어섰다고 보았다.

마르크스가 물질을 강조하며 하부구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면,
그람시는 하부구조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토대로 형성된 상부구조에 주목했다.

물적 토대를 기반으로 형성된 자율성을 인정하고,
상대적으로 형성된 자율성을 강조했기에 마크르스주의를 보완 확장했으며,

지배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고,
사람들이 이데올로기의 진실을 안다고 해서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고 보았다.

지배계급이 단순히 수탈과 강압에 의해서만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라는 것은 강제와 동의라는 두 가지 요소를 포괄하면서 사람들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피지배계층은 지배계층의 불합리성에 동의를 했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지배계급의 강제라는 부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순응하게 되는 것이다.

대공황이라는 위기 속에서도 자본주의가 힘을 발휘하는 것은
지배계급의 도덕적 지적인 헤게모니가 사회의 모든 곳곳에 퍼져서 작용하기 때문인 것이다.

국가의 기능은 자본주의 발달과 함께 정차 성장해나가고 있으며,
이러한 논리로 보면 복지 국가의 접근도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수단일 뿐인 것이다.

국가는 이러한 접근을 통해서 시민사회 영역에도 침투해
사회의 모든 영역의 활동과 의식을 지배하며 헤게모니를 확장해나갈 수 있는 것이다.

다양한 사회 집단과 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표출하고 조직화하는 시민사회 영역은
자체로써 자생적인 힘을 가지며, 공적 영역과 함께 연대하고 협력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어야한다.

사회적 경제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람시가 이야기한 국가의 헤게모니가 시민사회 영역을 침투하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하는 것이다.

+

세번째 등장인물은
프랑스의 루이 알튀세르(Louis Pierre Althusser)이다.



프랑스 공산당의 대표주자이자, 
파리고등사범학교의 석학으로 이름을 날린 알튀세르는 이데올리기의 재생산에 주목한다.

마르크스가 이데올로기 생산에 주목했다면
알튀세르는 어떻게 계급이 재생산되는지에 주목하였다.

이데올로기를 사람들에게
자발적 동의를 받아내는 지도력이라는 기존 견해에 대해,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는 무의식이기 때문에 의식화 모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데올로기에 무의식적으로 포섭되어 있기에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본다.

여기서 그 유명한 호명의 개념이 나오는데,
우리가 이데올로기라고 부르고 반응하는 순간 이미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것이기에,
이데올로기라고 불러서 반응한다는 것은 이미 우리는 순응해야하는 수동적 주체가 된 것이다.

결론은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이데올로기를 벗어나거나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

마지막 네번째 주자는 
최근에 핫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이다.



대중문화 분석과 라캉 분석가로 대중의 호응을 얻으면서,
패션 업체의 협찬을 받기도 한 걸로 더 유명해졌고 한국에 2013년 방문하기도 했다.

지젝은 <냉소적 이성 비판(1983)>을 저술한
독일의 철학자 페테 슬러터다이크(Peter Sloterdijk)에 영향을 받아
사람들은 이데올로기에 속고 있는지 다 알고 있는데도 그냥 그렇게 산다고 주장을 한다.

진실에 대해서 냉소하기 때문에
우리 시대는 냉소적 주체로 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데카르트가 이성적 주체를 설정한 이후 굉장히 반항적인 사고였는데,
타자로부터 배신당할까봐 미리 냉소하는 것이 생존 방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미, 수많은 약속에 속았기 때문에
트라우마의 영향으로 그놈이 그놈이라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 모두는 상품 경제 속에서 살게 되었기 때문에
유일한 진리가 가격이고 시장논리에 순응하면서 그냥 살 수 밖에 없다는 냉소가 
오히려 사람들에게는 덜 불안하고 안정감을 준다는 것이다.

화폐가 종이 쪼가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화폐물신숭배의 논리에 속고 사는 것이 편하며,
진실을 알게 되면 싸울 줄 알았는데 스스로 오늘날 속물이라고 불리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지젝은 이를 통해서 이데올로기는 의식이 아니라 행위라고 보았고,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다 아는데, 그래서 어쩌라고?' 라는 반응과 일맥 상통한다.

+

그렇다면 한국 사회가 안바뀌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놀랍게도, 4명의 설명이 
모두 가능한 것이 바로 대한민국이다.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세대 분열과 미디어의 변화,
민주정권 10년과 보수정권의 재집권, 경제 환경의 급격한 변화 등

너무나 역동적인 대한민국의 현실이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을 만들어냈고,
몰라서 속는 사람도 있지고, 무의식적으로 당하는 사람도 있고, 동의된 사람도 있고, 냉소적인 사람도 있다.

확실한 것은 아직까지 보수적으로 불평등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불안정해 보이는 사회 변혁을 바라는 사람보다는 더 많다는 것이 2012년 선거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사회 변혁을 원하는 사람들이 지지를 못받는 이유는
보수 집권층에 대해서 몰라서, 무의식적으로, 그들에 동의해서 그런 것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들은 대부분 60대 이상의 노년층일 확률이 높다.

50대가 아직도 보수층을 지지하는 결정적 이유는
사회 변혁을 주장하는 사람이 못 믿어워서가 클 것이며 이는 냉소주의와 가장 가까운 듯하다.

결국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새로운 희망과 이를 실철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신뢰이다.

과연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것을 얼마나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아직까지 대한민국에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세력은 별로 없어 보인다.


열린 공동체 사회 Pot cast/[담론통] 조형근 나폴레옹, 냉소적 이성 비판, 냉소주의, 노동가치설, 독일 이데올로기, 루이 알튀세르, 무의식, 불평등, 상부구조, 슬라보에 지젝, 시사통, 안토니오 그람시, 엥겔스, 이데아, 이데올로그, 이데올로기, 조형근, 칼 마르크스, 피테 슬러터다이크, 하부구조, 허위의식, 헤게모니, 호명이론

[Bunker1특강] 강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 Episode 03 - 모차르트의 투정과 베토벤의 투쟁

2014.04.25 14:05

지난 포스팅에 이어서,

내용이 너무 길어서 내용을 나눠서 정리했다.


[Bunker1특강] 강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 Episode 03 - 클래식 속의 안티 클래식


지난 포스팅에서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나오기 전의 배경을 주로 다루었다면,

이번 포스팅에서는 이 두 사람의 실제 인생에 대해서 정리해보고자한다.


다시 말하지만, 역시나 강헌 선생의 강의를 직접 듣는 것이 훨씬 좋을 것이다 (진짜 강추)

강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 EP.03-2 <클래식 속의 안티 클래식 : 모차르트의 투정과 베토벤의 투쟁>

1부 강의 내용이 서론에 가까웠다면

2부 강의 내용은 본격적으로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삶을 다루고 있다.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 ~ 1791)의 본명은 
<볼프강 오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 테오필로스 모차르트> 이다.

모차르트는 테오필루스라는 말을 좋아했는데,
서명을 할 때, ‘아마데’를 사용했고, 비슷한 뜻을 가진 아마데우스를 그냥 미들네임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아마데우스는 '신이 사랑하는’ 뜻을 가졌는데,
모차르트는 빈의 귀족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그나마 사이가 좋았던 귀족도 일찍 죽어버렸다.

로베르트 엘리아스는 모차르트의 삶을 한마디로 정의해버린다.
 
“그는 천재도 아니고, 신동도 아니고, 궁정사회의 시민 음악가였다. 
이것이 그의 본질이고, 비극의 시작이고, 하지만, 그의 위대한 작품의 원동력이다."

살리에리는 궁정사회의 궁정음악가였기에, 아무런 고민이 없었으나,
모차르트는 궁정사회의 시민음악가였기에, 끝없이 괴로운 삶을 살게 되었던 것이다.

모차르트는 잘 알려졌듯이 당대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다.
6살때부터 12살까지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순회연주를 다녔는데,

이 순회연주에서 모차르트는 큰 명예를 얻었으나,
실제로는 별로 돈벌이는 되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나, 6살 때는 상업적으로도 성공할 수 있었지만,
9살 때는 이미 한 번 돌았기에 그다지 돈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너무 어릴 때부터 슈퍼스타가 되어버리면서
정규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고 사회적인 사교력은 급격히 떨어지게 된다.
(마이클 잭슨이 20살까지 제대로된 인터뷰를 하지 못한 것과 동일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근데, 당시 음악가는 귀족의 지원을 받지 않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어찌보면 어렸을 때 모차르트의 이런 성장과정은 그의 인생에 독이 된 것일 수도 있다.

모차르트는 찰스부르크라는 자유로운 도시에서 성장했다.
모차르트 이외에도 카라얀이라는 음악가를 배출한 이 작은 도시는
유럽의 동서남북의 모든 감각이 모여있는 작지만 희안하고 독특한 동네였다.

"게르만주의와 라틴주의가 활홀하게 만나 키스한 곳"

찰스부르크에서 자란 자유로운 영혼이 빈이라는 궁정사회를 선택한 것은 결정적 실수였다.

당시, 독일이나 이탈리아처럼 분권적인 국가에서는
음악가는 이 동네 저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해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최고의 음악 도시였던 빈은
함부르크 왕조라는 중앙집권적인 절대 왕정이 지배하고 있었다.

실제로 모차르트는 프라하에서 더 인기가 좋았는데,
모차르트는 끝까지 빈을 고집했기에 그의 인생은 꼬일 수 밖에 없었다.

만약 그가 음악가가 아니라, 철학가나 작가였다면 
동 시대의 칸트처럼 자신의 재능으로만으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건축과 음악은 귀족의 지원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천재성은 인정받지만 그 어느 귀족도 모차르트를 지원해주지 않았다.

+

하지만, 모차르트가 처음부터 빈에서 실패한 것은 아니다.

뮌헨-만하임-아우구스브루크-파리-로마-피렌체-나폴리-런던를 돌면서
구직활동에 완전히 실패했던 모차르트는 찰스부르크에 돌아와 오르간 부연주자가 되지만,

콜레라도 대주교와 사사껀껀 대립하면서,
결국 뮌헨으로 도망갔다가 빈으로 가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함부르크 왕조의 수도였던 빈은
최고의 도시이지만 매우 변덕스럽고, 속물주의적 동네였다.

모두가 반대했지만, 아버지의 그늘인 찰스부르크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모차르트는
너무나 몽상가였기에 굉장히 자신이 있었고, 실제로 3년간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름을 날렸기에 인지도가 있었고,
천재적 피아노 연주 실력이 있었기에 개인 레슨을 시작해 연주 기회를 늘려나갔다.

당시에는 공개 연주회라는 개념이 없었기에
예약연주회라는 개념을 도입해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마침내 왕실의 의례로 오페라를 제작했으나,
모차르트는 그의 실험정신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신뢰를 잃게 된다.

모차르트의 공연을 본 왕은
"그대의 작품에는 음이 너무 많은 것 같소"라는 반응을 보이는데,

당시, 오페라는 설명을 위주로 이야기를 진행했는데,
모차르트는 모든 내용을 음악으로 처리해버리는 획기적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시대를 앞서가도 너무 앞서갔고,
제작 당시부터 여배우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고 한다.

왕실과 귀족의 신뢰를 잃기 시작했고,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바니>같은 불후의 명작을 통해 귀족을 씹으면서 적을 두었고,
1789년 예약연주회마져 완전히 실패하면서 몰락하게 된다.

미카엘 프루베르트나 프리메이슨 쪽 사람들의 후원과
귀족들의 가장무도회의 배경 음악을 만들어 주면서 생계를 유지해나간다.

가부장(아버지)와 봉건영주(대주교)로 부터의 탈출하고자 했던 모차르트는 
절대 아부하지 못하는 성격이였고, 사실은 끝없이 사람들의 사랑받고자만 했었다.

그의 인생은 자신의 삶에 대한 이념이 부재했기에 투정이 될 수 밖에 없었고,
계몽주의에 대한 인문학적 이해가 없기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빈에서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죽기 3년전에야 깨달았다.

+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 ~ 1827)은
모차르트보다 14년 뒤에 태어났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작곡가로 활동한 것은 모차르트가 죽은 이후였다.

베토벤은 모차르트처럼 천재적인 재능을 갖지는 못했지만,
베토벤을 키운 것은 8할이 수 많은 컴플렉스였다.

하이든이 무어인이라고 욕할 정도로 용모는 형편없었고,
재능이 부족한 어린 시절 모차르트를 흉내내서 공연을 다니기 위해서 나이를 3살이나 속였다.
아버지의 학대로 자랐고, 벨기에계의 독일 귀족이라고 알려졌지만 그의 신분도 사실은 속인 것이였다.

프러시아계 사생아라는 소문도 있었지만, 
후에 조카 양육권을 가지고 재판을 할 때 서민 재판장에 선 것으로 봐서는 귀족이 아님은 확실한 듯하다.

사회 부적응자로 유년시절을 보냈던 베토벤은 
성격도 굉장히 파탄적이였고 분노를 조절하지도 못했으며,
평생 가계부를 썼을 정도로 돈에 대해서 처절한 집착을 보이기도 했다.
(30살이 되면서부터는 활성화된 음악시장으로 본격적인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베토벤은 자신만의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런 작품도 못만들었던 21살의 나이에
가난한 사람을 위한 음악을 하겠다고 선언한다.

베토벤이 태어난 본이라는 곳은 
카톨릭의 영향이 강했던 보수적인 지역이였다.
훗날 보수적이라는 이유만으로 프랑크푸르트를 누르고 서독의 수도가 된 지역이였다.

하지만, 프랑스와 너무 가까워서 계몽주의가 빨리 전파되었고,
베토벤은 진보적인 본의 지식인 층의 영향을 받아서 진보적인 성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기에 베토벤은 항상 상킬로트(프랑스 하급계층 공화주의자)의 상징인 긴바지를 입었다.
다른 음악가들이 하인의 상징인 반바리를 입었던 것과는 매우 대조되는 측면이다.

여기에 베토벤의 아버지의 무능도 큰 영향을 주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그래도 꽤 유명한 음악 교육가였지만,
베토벤의 아버지는 매우 성격도 문제고 능력도 부족했기에 베토벤은 이를 벗어나고 싶어했다.

첫 스승이였던 네페가 일루미나티의 열성 지지자였고,
슈나이더에게도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독일에서의 자유는 관념적 추상적이였고,
베토벤은 평생을 공화주의자로 살았지만, 실천으로 옮긴 것은 전혀 없었다.

베토벤은 정신적 공화주의자만 자본주의를 온몸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루롤드 대공, 발트슈타인 백작같은 계몽귀족들과 교류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해나갔다.

빈에서 35년을 살면서 80번의 이사를 했고,
귀족들과 함께 그들의 가족과 먹고 자면서 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는 성격의 문제 때문에 
모차르트와 마찬가지로 궁중 대악장에 임명되지 못했다.

그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루돌프대공도 추기경이 되었지만
베토벤이 귀족 질서에 맞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에 끝까지 그를 임명하지는 않았다.

베토벤은 끝없이 귀족의 여인들만 사랑했고,
신분상 사회적 인정을 받을 수 없는 끝없는 사랑만 했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은 모두 사회적 인정을 받기를 꿈꾸었던 사람이였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귀족의 후원이 끊어졌을 때 생계가 어려웠지만,
베토벤은 공개 연주회와 출판 인쇄 산업을 통해서 귀족 눈치를 보지 않아도 생계가 가능했다.

모차르트의 꿈은 자기의 목적대로 쓰는 것이였으나 먹고 살아야했으나,
베토벤은 서양 음악사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목적에 의해서 곡을 쓸 수 있었던 사람이였다.

베토벤도 헌정이라는 것을 하기는 하지만,
이미 곡을 만들어놓고 귀족에게 억지로 헌정해서 돈을 뜯어가기도 했다.

+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음악적 공통점은 피아노라는 악기로 빈에 자리를 잡았다는 점이다.

둘 다 피아노 즉흥 연주가 매우 뛰어나고,
부르조아 사회에서 부르조아 악기로 자리잡는데 기여를 했다.

피아노는 이탈리아의 크리스토퍼 포리가
메디치가의 의뢰를 받아 만들었으며, 하프에 비해서 표현을 확대시킨 악기였다.

19세기 산업혁명기에 피아노는 최대의 산업이였으며,
거실에 피아노가 있는 것은 부르조아적인 삶의 상징이 되었다.

1850년대 1년에 5만대씩 생산되면서,
피아니스트가 인기를 얻었고, 최초의 스타는 프란체 리스트였다.

이러한 피아노가 대중화되는 교두보가 되는 것이 바로 베토벤과 모차르트였다.

베토벤은 피아노 소나타를 무려 39곡이나 작곡했지만,
당시에는 오페라와 교향곡이 대세였기에 실제 피아노 솔로 연주가 이루어진 것은 거의 없었다.

바로크 시대에만 해도 그냥 곡이 쭉 직진으로 연주되면서 끝났는데,
소나타 형식이 도입되면서 음악이 서사적인 플롯의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소나타의 형식이 되었다는 기악 음악이 본격화되었다는 것이고,
기악의 표현이 입체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철학적으로는 변증법적 토대에서 만들어졌다.

기악 음악과 소나타 형식은
19세기 후반까지 낭만주의 시대를 지배하는 전형적인 형식이 된다.

하이든-모차르트를 거쳐서 베토벤에 고전주의는 완성되었고,
낭만주의 시대의 서막을 여는 역할을 베토벤은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베토벤은 또한 당대 민요를 수집해서 작품에 녹여냈고,
시민들이 음악을 즐기기 시작한 시대를 만들어낸 장본이였다.

베토벤이 위대한 것은 위대한 시대에 태어났기에 가능한 일이였고,
베토벤이 죽었을 때 장례식에 시민 2만명이 모였고 역대 궁정악장들이 베토벤의 관을 들고 장지까지 갔다고 한다.
(베토벤은 궁정악장이 되고 싶어서 그렇게 난리를 쳤는데, 결국 되지는 못하고 대신 그들이 그의 관을 무덤으로 보내준다.)

베토벤도 모차르트 못지않게 불우한 시대를 지냈으나,
그래도 베토벤은 귀족들과 적당히 코드가 맞았고 상당한 후원을 받았다.
또한, 시기적으로 시미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음악을 할 수는 있었다.

+

하지만 베토벤의 삶에 대해서는 과대 포장된 경향이 좀 있다고 한다.

베토벤은 초기 작품에서부터 귓병을 앓고 있었다.
하지만, 베토벤 제자 체르니의 회고에 따르면 완전히 멀지는 않았을 확률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이 귀먹어리가 되었다는 소문은 베토벤에게 단점보다는 장점으로 작용하였다.

베토벤이 쓴 하일리겐슈터트의 유서나
그의 기존 행동을 보면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정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베토벤을 공화주의자라고 보기에는 뭔가 구린 측면이 많았다고 한다.

보나파르트가 빈을 점령하면 파리로 가려고 했다는 점이나,
에로이카라는 이름을 짖는 과정도 뭔가 이익을 챙기고자 한 측면이 있다.

또한, 1813년 나폴레옹 전쟁으로 경기가 어려워지고 후원도 끊어지자 큰 좌절을 겪었고,
1814년 워털루 전투를 다룬 <월링턴의 승리>, <영광의 순간>를 작곡하면서 큰 돈을 벌게 되고,
베토벤은 전후 협정을 하는 빈회의에 초대를 받아 보수파들과 흥청망청한 삶을 살게 된다.
(흔히 이야기하는 노년에 변절한 예술가들이 부귀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많이 든다.)

하지만, 향후 10년간 로시니의 재기발랄한 오페라가 대세를 이루면서
완전히 무력한 존재가 되어버렸고 베토벤은 다시 내면의 세계를 만나게 된다.

오스트리아는 전형적인 경찰국가가 되어가었고,
베토벤은 온갖 소송에 휩싸이고 성병에도 걸리면서 인생의 내리막길로 가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발표한 두 곡은
그의 노년을 너무나 아름답게 만드는 명곡이였다.

베토벤은 교향곡 9번 "합창"을 프로이센 왕에게,  "작은 미사"를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하며,
같은날 이 두 곡을 초연하는데, 이 두 곡은 베토벤의 작품 중 가장 대표적인 명작으로 남게 된다.

베토벤은 후대에 수많은 평가를 받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베토벤의 곡을 높게 평가한 반면,
헤겔은 베토벤을 개인적 감정의 포출이라고 굉장히 폄하하고 비판하였다.

하지만, 베토벤의 음악이 위대한 점은
시대에서 가장 극적으로 진보적인 이념을 음악을 통해서 들어내려고 했으나,
그 안에는 신념뿐만 아니라 갈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라고 강헌 선생은 설명한다.

합창의 4악장은 평생 품고 있던 내용은,

"서롭고 가난한 사람들도 다같이 즐겨라 "
"고뇌을 넘어서 환희를 모든 사람이여 즐겨라"

강헌 선생은 베토벤에 대한 가장 명확한 평가로 다음을 뽑는다.

"사이언스(기술)를 컨시어스(의식 혹은 양심)로 만들었다"

+

베토벤이 현대 음악의 영원한 챔피언일 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부르주아 시대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라 강헌 선생은 설명한다.

베토벤은 부르주아 시대가 열리는 시기를 이끈 음악가였다.
그리고 베토벤은 부르주아 시대가 역사를 배신하는 것을 보지 않고 죽었다.

그렇기에 베토벤의 음악에는 
부르주아 혁명에 대한 갈등은 있으나 의심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낭만주의 후계자들의 음악에서는
부르주아적 이상에 대해서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 믿음이 흔들림이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완벽하게 부르주아를 수호했던
베토벤의 음악은 부르주아 시대를 대변하는 최고의 음악의 자리를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바흐에 대한 부활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한다.

바흐는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개신교도의 모습을 갖췄다고 한다.
근면 성실했으며, 모든 악보의 말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작곡가였다.
이전에 유명한 카톨릭 신도는 있었지만, 개신교 신도 음악가 중에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렇기에 그는 부르주아적 이상에 가장 정확하게 들어맞는 인간형이였고,
유태인 금융자본가의 자손이였던 멘델스존이 그를 무덤에서 끄집어 낸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대에도 유명하지 못했고 75년간 잊혀져있던 바흐라는 인물은
새로운 부르주아 계급의 대변인으로 추앙되기 시작했고 갑작스렐 바흐의 예찬이 시작된다.

바흐를 살려낸 것은 부르주아의 승리곡이였던 것이다.

모차르트는 신동이 아니였다.
그는 오히려 아버지와 시대가 만든 괴물이였고 음악을 만들어내는 기계였다.

모차르트의 싸움으 어떻게 보면 개인이 자아를 찾고자 하는 싸움이였고,
그의 삶에 있어서는 그냥 편히 쉬고 있는 현실보다는 음악에 몰두해서 작곡을 하고 있는 것이 더 편했던 것이다.

그의 삶이 불행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자신이 그 싸움에서 승리 할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반면에 베토벤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보다 아름다운 것을 위하여 세상에 파괴시키지 못한 규칙은 없다."

계급적 투쟁에서 승리한 부르주아의 자신감이
베토벤의 미학적 자신감에서도 흘러 넘치고 있었다.

불과 몇 년차이가 나지 않지만, 모차르트가 투정으로만 끝냈던 싸움에서
베토벤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 째낀 완벽한 승리자로 남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을 파괴시킬 수 있는 권능이 베토벤과 그의 시대에 등장했던 것이고,
그래서 베토벤은 영원한 승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

참~~ 주옥 같은 강의 내용이다.

클래식에 무뇌한이던 나를
고전주의 음악 100년의 역사를 꽤뚫어보게는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시대가 만든 투정꾼과 투쟁가의 삶
그리고, 그들을 갈라놓았던 천재적 재능과 이념적 기반의 차이...

천재적인 재능으로 수백곡을 작곡한 모차르트보다
많이 흔들리기는 했지만 이념적으로 무장한 베토벤이 왜 더 칭송받는지,

그리고, 승자의 역사가 만들어낸 바흐와 베토벤의 업적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만드는 역사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과 천재성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그 기반에 깔려있는 정신이 중요하고,
그것이 시대를 어떻게 이끌어나갈 수 있느냐가 핵심인 것같다.

(물론, 역사와 시대는 자신의 입맛에 맞게 나의 행동을 전혀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지만...)


열린 공동체 사회 Pot cast/[Bunker1] 강헌 강헌, 고전주의, 공개연주회, 공화주의자, 기악 음악, 나폴레옹, 낭만주의, 네페, 돈 조바니, 로베르트 엘리아스, 로시니, 루돌프 대공, 모차르트, 바흐, 발트슈타인 백작, 벙커1, 베토벤, 부르주아, 살리에리, 상킬로트, 소나타, 아마데우스, 예약연주회, 오스트리아, 찰스부르크, 체르니, 클래식, 투쟁, 프로이센, 피가로의 결혼, 피아노, 하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