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실망을 시키지 않는 강헌 선생의 강의
처음에는 조금 지루하게 흘러갔는데, 역시나 뒤로가면서 몰입도는 최고였다.
(문제는 한참 재미있는 시점에서 녹음 불량으로 강의가 끝났다는 거... T.T)
원래 이 강의의 제목은 '두개의 음모'이다.
대중음악이라는 시장을 만들어낸 <사의 찬미>(1926)와
트로트라는 최초의 장르를 폭발시킨 <목포의 눈물>(1935)가 주인공이였기 때문이다.
[BUNKER1 특강] 강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 EP.04-1 <두 개의 음모 : <사의 찬미>와 <목포의 눈물> 속에 숨은 비밀>
근데, 안타깝게도 녹음 상태가 안좋아서,
<목포의 눈물>에 대한 강의 내용은 업로드가 되지 않았다...T.T
진짜 너무 아쉽다...
<목포의 눈물>에 대한 설명에서는...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사이의 긴장과 갈등 속에서 어떻게 우리 문화가 탄생하고 형성되었는지 설명해준다고 했었는데..
그래서 아쉬움 마음에
나름 자료를 찾아가며, 강의내용을 재구성해봤다.
+
강의의 타이틀은 '두개의 음모'이지만,
이 강의 핵심 내용은 한국 대중가요의 출발점을 찾고자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강의 내용을 끝까지 들을 수 없기에 그냥 개인적인 추측일 뿐이다.)
강의의 주인공은 앞에 언급된 2개의 노래지만,
그 앞에 역사적인 2개의 노래가 추가로 소개된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1985)
<희망가> (1921 or 1922)
강헌 선생은 강의 초반에
민비(명성황후라는 이름으로 알려진)에 대한 비판과 함께,
동학 농민 운동의 <새야 새야 파랑새야>라는 노래가 가진 의미를 설명하는데,
대부분의 내용은 미화된 '민비'에 대한 진실과
'동학농민운동'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깨닫게 하고자 하는 강사의 의도가 깊이 깔려있었고,
굉장히 긴 시간을 할애했지만 핵심 내용은 의외로 간단했다.
(이미 대충 아는 이야기라서 개인적으로는 지루했지만, 처음 듣는 사람은 흥미로웠을 듯~)
<새야 새야 파랑새야>는
누가 만든지도 모르고,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었는데,
실제로 정읍 지역에 있던 오리지널 민요와는 전혀 다른 선율을 가지고 있는 새로운 노래였다.
당시 피지배계급의 민속문화는
구전으로만 전승되었기에 지리적 한계에 붙이치면 전파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리랑>도 지역마다 모두 다른 버전이 존재했고,
<강강수월래> 같은 노래도 전라남도에만 존재하는 지역적인 민요였다.
궁실 수준에서의 종묘제례악은 존재했지만,
서민들 수준에서 대중적인 음악은 존재했다고 보기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3개의 음으로만 이루어진 이 단순한 노래는
동학 농민운동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가게 되었고 기존의 민속음악과는 다른 형태의 노래였던 것이다.
이는 전국적으로 대중적인 노래의 시발점이 되었지만,
근대의 형태의 노래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 강헌 선생의 평가이다.
+
그래서, 근대적 형태의 첫 번째 노래로 볼 수 있는 것은
1921년 혹은 1922년에 녹음되었을 것으로 판단되는 <희망가>이다.
1905년 판소리 등의 전통 음악들이 음반으로 녹음되기는 했지만,
전통 음악이 아니면서 최초로 녹음된 노래이기에 대중 음악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근대의 시작을 알렸다고 하기에는 여러가지로 한계가 존재한다.
일단,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많은 한계가 존재한다.
제목은 <희망가>인데, 내용은 굉장히 절망적이며, 2절은 계몽적인 내용으로 돌아선다.
이는 1920년대 시대상을 굉장히 잘 표현해주고 있는 것으로
당시 많은 민족주의자들은 만주에 가서 독립 투쟁을 꿈꾸었고,
한반도에 남은 사람들은 우리가 빨리 힘을 키워서 일본에게서 최소한 자치권이라도 획득하자고 여겼다.
이른 바 자치주의자라고 불린 이들은
계몽주의적 견해를 가지고 부국강병을 주장했으며, 서구적인 이상을 추구했다.
춘원 이광수의 <무정>이라는 소설의 마지막 대사 '배워야지요"는
당시 자치주의자 지식인들의 사고를 대변해주는 표현이였고, 이들은 결국 식민지의 주구로 전락한다.
(강헌 선생은 소설의 이광수가 있다면, 음악에는 홍난파가 있었다고 설명을 해준다.)
어찌보면, 희망가의 가사 역시 이러한 좌절과 절망,
그리고 서구 사회에 대한 무한한 동경과 계몽주의가 교묘하게 섞여 있는 것이다.
이 노래의 가사는 2.8독립선언을 주도했던 동경 유학생 그룹이 쓴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또한, 형식적인 측면을 살펴보면,
화음을 넣지 않고 똑같은 음으로 부르며 반주도 없는 아카펠라 형태이다.
노래를 부른 두 여성의 이름은 박채선과 이류색으로,
이들의 이름과 발성법을 볼 때, 이들은 기생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식 음약 교육을 받지 못했고, 전통적인 잡가 민요의 발성을 사용하고 있다.
단순히 화음을 넣지 않은 것으로 근대의 노래라고 할 수는 없다.
당시 홍난파가 한국 전통 음악은 화성이 없기에 미개한 음악이라고 <신조선음악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했지만,
이는 철저히 서구 중심의 사고이고, 화성이 꼭 있어야 한다는 것은 없기에 이것을 문제삼기는 어렵다.
근데, 문제는 이 노래에는 오리지널 곡이 있다는 사실이다.
<새하얀 후지산의 기슭>이라는 일본의 엔카에 한국어 가사만 바꾸어 만든 노래인 것이다.
더군다나 <새하얀 후지산의 기슭> 또한, 영국 춤곡을 바탕으로 편곡한 <우리가 집으로 돌아올 때>라는 찬송가를 편곡한 것이다.
결국 이 노래는 일본 것이기는 한데, 서구인들이 만들 것에 우리 가사를 붙인 것으로,
당시 식민지 시대의 문화적 현상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당시에는 대중음악이라고 하기에는 시장 조차 없었다.
당시 기생들의 학교였던 권번에서 1919년부터 일본 엔카를 정규 커리큘럼으로 넣게 되고,
일본인 고객들을 대상으로 하기위해서 이 노래를 녹음해서 전파하게 된 것이다.
대중 음악의 단초가 마련되기는 했지만, 대중들을 위한 대중들에 의한 음악은 못된 것이다.
당시에는 음반 한 장이 쌀 한 섬 가격이였고,
음반을 재생할 수 있는 유성기 한 대는 서울 사대문 안 집 한 채 값이였기 때문에,
음반으로 제작되었다고 대중적으로 전파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였다.
1927년 라디오가 처음 방송을 타게 되었기에, 이 노래는 녹음되었어도 대중들은 들을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
이러한 시대적 배경 하에서,
진정으로 대중음악이라는 시장 자체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사의 찬미>(1926)였다.
1926년 8월 발표된 윤심덕이 부른 <사의 찬미>라는 노래의 원곡을 들어보면,
<희망가>에 비해서 피아노 반주라는 것이 생겼고, 철저히 서양 음악의 어법이 스며들어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루마니아의 작곡가 이바노비치가 만든
관혁악 왈츠 곡 <도나우 강의 잔물결>을 원곡으로 짜집기해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서구의 클래식 선율을 끌고 와서 멜로디 라인을 만들고,
일본 유학에서 서양음악의 벨칸토 창법을 배운 윤심덕이 노래를 부른 것이다.
이 곡은 발표되자마자 어마어마한 히트를 기록했으며,
음반을 듣기위해서 사람들이 유성기를 구입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당시 유성기가 2000대쯤 보급되어있었던 시절인데,
앨범이 3~5만 장 정도 팔린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에 그만큼 유성기가 늘어났을 것으로 보인다.
(유성기 증가량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남아있지 않지만, 앨범만 샀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사의 찬미>에 대한 반응은 신드롬이라고 부를 정도였고,
경성뿐만 아니라 지방의 토호들도 자기 집 마루에 유성기 1대쯤은 놓고 <사의 찬미>를 듣는 것이 유행이였다.
여기에 그해 10월 나운규의 <아리랑>이 개봉하면서 종전의 히트를 치며,
한국에도 영화 시장이라는 것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다.
1926년에 대중문화의 쌍두마차라고 할 수 있는 음악과 영화에서
대중적인 시장이 형성되면서 근대적인 의믜의 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강헌 선생은 <사의 찬미>에는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풀리지 않는 거대한 음모가 숨겨져 있다고 이야기한다.
+
<사의 찬미>는 제목 그대로 죽음에 대한 노래이다.
하지만, 이 노래가 히트를 치게 되는 것에는 윤심덕에 대한 스토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앨범이 발매되기 2주 전인 8월 4일 동아일보 사회 면에는
'현해탄의 정사(情死)'라는 굉장히 자극적인 톱기사가 실리게 된다.
홍난파의 유학 동기인 조선인 소프라노 윤심덕이
조선 연극계의 희곡작가이자 연출자인 와세대 대학 출신 김우진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하며,
시모노세끼와 부산을 오가는 관부연락선에서 함께 바닷물에 뛰어들어 동반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1987년생 동갑이 이들은 당시 29살이였고,
윤심덕은 미혼, 김우진은 아들 둘이 있는 유부남이였다.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던 엘리트 남녀가
식민지 조선에서 해외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덕수환에서 자살을 한 것이다.
당시, 정사(情死)라는 것은
일본 지식인 사회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문화 코드였다.
봉건적인 결혼제도를 벗어나 자유 연애가 시작되었고,
결혼을 할 수 없는 비극적인 연인들이 많이 생겨나면서 동반 자살이라는 것은
수많은 문학 작품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실제로도 많이 발생하기 시작한 새로운 현상이였다.
정사(情死)가 일종의 로맨티시즘의 극치로 포장되던 시기에
조선인 최고 엘리트 남녀가 자살했다는 사실은 일본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게다가, 자살하기 2주 전에 앨범을 녹음했는데,
그 노래의 제목이 자살을 예견하는 듯한 <사의 찬미>였다.
더군다가 작사가는 노래까지 불렀던 사연의 주인공인 윤심덕이였다.
라디오도 없던 시절, 그 노래를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앨범을 구매하는 것이였고,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불렀다는 그 앨범을 듣기 위해서는 고가의 유성기를 구매해야만 했다.
'죽은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것은 노래 자체에 대한 관심도 있었지만,
오히려 노래에 담긴 사연과 죽은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과학적 호기심이 결합되면서
유성기라는 기계와 <사의 찬미>라는 앨범은 폭발적으로 팔려나간 것이다.
+
근데, 이들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우선, 이들이 자살을 했다는 증거가 없었다.
목포의 어마어마한 갑부였던 김우진의 아버지는 김우진의 시신을 찾기 위해서
500원이라는 어마어마한 현상금을 걸었지만 결국 못찾았다.(당시 500원이면 미국 유학도 가능했다.)
그리고 그 배를 탄 사람 중에서는 이 둘을 목격한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몇 년 후 이탈리아에서는 이들을 목격했다는 사람도 등장했다.
(이들의 죽음에 대한 의문은 2011년 MBC 서프라이즈에서도 소개된 적이 있다.)
과연 이들에게는 무슨일이 있었던 것인가?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윤심덕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이해가 필요하다.
윤심덕은 평양에서 태어난 가난한 집의 장녀였다.
아버지는 콩나물 장사를 했고 어머니는 병원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하지만, 잡초같은 생명력으로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서 경기여고에 들어가서
당시 최고였던 경성 사범에 입학했고, 최고의 직업이였던 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원주에 있는 고등학교에 발령을 받았으나,
총독부 관비 유학생 자격 시험에 1등으로 합격해서 장학금을 받고 동경에서 성악을 공부한다.
전형적인 미인은 아니였지만 키가 컸고 늘씬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고,
재주도 많고 요리도 잘하고 꺽달진 평양 여성의 기질도 가지고 있어서 이성들에게 인기도 매우 좋았다.
일본 도쿄 제국극장의 매니저가
한 달에 150원씩 줄테니까 전속 가수를 하자는 제안까지 했다고 한다.
윤심덕은 이를 거절하고 귀국을 하였지만,
아직 한국에서는 서양음악을 이해해줄 수 있는 시장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자유 연애를 표방한 인터뷰를 한 것으로 유명해졌고,
첫 번째 공연은 호기심으로 히트를 쳤지만, 그 다음부터는 공연에 실패하고 다시 선생으로 돌아갔다.
동경 유학까지 갔다왔으나 실질적인 가진 것은 없었고,
오히려 가족들이 모두 서울로 찾아오면서 부양가족만 늘어나게 되어버렸다.
(전형적인 성공한 첫째의 모습이였고, 당연히 가족들을 책임지는 역할을 떠맡게 된 것이다.)
윤심덕은 남동생과 여동생을 모두 유학보냈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용문이라는 한량을 유혹해 600원을 뜯어내서 남동생을 미국 오하이오 대학에 보냈으나,
이용문의 첩이 되었다는 스캔들이 경성에 퍼지면서 하얼빈으로 피신을 갔다가 1년 후에 다시 돌아온다.
돌아온 윤심덕은 당시 기생들도 천시여겼다는 여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하였다.
하지만, 극단 <토월회>의 첫 공연은 실패하였고, 막다른 골목에 쳐했을 때 일본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다.
1926년 일본 오사카의 신생 레코드사에서
26곡의 노래를 녹음하는 조건으로 무려 500원이라는 금액을 주기로 한 것이다.
여동생 윤성덕을 노스웨스턴 대학에 유학을 보내려고 했던 윤심덕은
윤성덕을 피아니스트로 대동하여 오사카로 건너가게 되고 이틀간 녹음을 한 후 동생을 바로 미국으로 보낸다.
동생을 미국으로 떠나보낸 다음 1주일 후,
윤심덕은 한국으로 돌아오는 배에서 김우진과 함께 자살을 했다는 동아일보의 기사가 나왔고,
그런 다음 <사의 찬미>라는 앨범이 발매되면서 종전의 히트를 치게 된 것이다.
+
여기서 강헌 선생은
이들에 대한 타살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일단, 동반 자살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석연치 않은 구석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일단, 윤심덕은 성향 상 사랑때문에 자살을 할 사람이 아니였다.
동경 유학시절부터 수많은 남자들의 눈물을 뺐었고, 공공연하게 자유연애주의자라고 말하고 다녔다.
성공에 대한 욕심도 매우 컸고,
주변 사람들한테는 이탈리아 유학을 가고 싶다는 이야기도 했었다는 것이다.
자살을 암시하는 듯한 이야기가 있었다는 증언도 있지만,
연극이나 예술을 하는 사람이 지나가듯이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수준이다.
여기에 김우진도 거부의 부모의 반대를 무릎쓰고
큰 결단을 한 체 일본으로 건너간지 체 1달도 되지 않은 상황이였기에
갑작스럽게 사랑때문에 자살을 한다는 것은 굉장히 무리가 있다.
연출가를 꿈꿨던 김우진은
일본 유학시절 부모님 몰래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하다가 집에 끌려갔었고,
부모님의 거대한 재산도 모두 포기한 체 홀연단신 다락방에서 하숙을 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김우진 역시 실패로 인한 좌절도 아니고,
갑작스럽게 사랑 때문에 자살하기에는 너무나 석연치 않은 것이다.
그리고 진짜 둘이 사랑을 했을지의 문제도 의심의 여지가 있다.
김우진과 윤심덕은 동경 유학 시절이절 1921년 만난적이 있다.
3.1운동 직후여서 계몽적인 분위기가 팽배했고, 여름방학 때 동경 유학생들이 모여서 순회공연을 다녔다.
이 때 김우진이 총연출을 맡았고,
윤심덕이 배우겸 가수, 홍난파가 바이올린 연주를 담당하게 된다.
당시에도 이미 김우진은 유부남이였고, 오히려 홍난파와 윤심덕은 썸씽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는
어렵게 생계를 유지하던 윤심덕의 소식을 들은 김우진이
윤심덕과 그 가족들을 목포로 초청해서 가족 음악회를 열었던 기록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둘 다 가족들을 대동하고 있던 상황이였기에 둘이 뭔가 일을 벌렸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렇다면, 이들의 사랑이 싹튼 것은
동생을 미국에 보낸 후 한국으로 돌아오는 배타기 까지의 행적이 확인 안되는 1주일밖에 없다.
성공에 대한 열망이 너무나 강했던 두 사람이
갑자기 사랑에 빠져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살을 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다.
+
그렇다면 누구에 의한 타살이라는 것인가?
역시나, 이 사건을 통해서 가장 이득을 본 사람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표면적으로 돈을 번 것은 레코드 회사였지만,
가장 많은 돈을 벌게 된 것은 유성기를 판매한 회사였다.
(당시 레코드 가격이 쌀 한 섬이였다면, 유성기의 가격은 사대문 안의 집 한채 값이였다.)
일단 윤심덕을 일본으로 끌어들인 일동 레코드는 신생 레코드 회사였다.
잘 나가는 레코드사가 모두 동경에 있는 것에 비해서 오사카에 본사를 두고 있었고,
1926년 만들어졌다가, 1928년 바로 사라졌으며 일본 레코드 산업 연감에도 기록이 없는 회사이다.
윤심덕이라는 인물이 유학을 마칠 때만 해도 나름 상품성이 있었겠지만,
이미 그 때가 되서는 나이도 이제는 많았고, 유명하기는 하지만 사회적 평판도 별로 안좋았다.
신생 회사가 상업성이 떨어지는 가수에게 거액을 주면서 녹음을 요청했고,
생기자마자 동전의 히트곡을 출시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근데, 이 회사의 특징은 바로 일본 축음기 회사(일축)의 자회사라는 점이고,
당시, 일본 축음기 회사는 일본 정부의 국영기업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이 사건으로 가장 큰 돈을 벌게 된 것은 유성기를 팔았던 일본 정부였던 것이고,
추가적으로 한국에는 음반시장이라는 어마어마한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어버렸다.
설마~ 정부 차원에서 나서서
사람을 죽이고 돈을 벌 수 있었을까?
당시 시대상을 보면 충분히 가능했다는 것이 강헌 선생의 설명이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일본 정부는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 위해서
조선인들이 모든 우물과 식수에 독을 타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조선인 5000명이 넘는 숫자가 학살당했는데,
일본 경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본 민간 자경 단원들에 의한 학살이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웃으로 함께 살던 사람에게 학살을 당한 것이다.)
집단적인 광기를 발휘한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고,
심지어는 조선인으로 의심되는 일본인들도 상당 수가 희생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 정도의 시대 상황에서,
거대한 수익이 예상되고, 추가적으로 신규 시장이 개척될 수 있다면,
이 정도 이슈를 만들어내는 것에는 양심의 가책 따위는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
강헌 선생이 이렇게 의심하는데는
기획 타살의 정황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 노래가 발매될 때 작사를 윤심덕이 한 것으로 되어있다.
스토리 상 죽음을 예견하고 직접 써야지 감동이 오기 때문에 상업성을 갖추려면 필수조건이다.
근데, 윤심덕이 쓴 글을 찾아보면 너무나 형평없다는 것이다.
다재다능한 윤심덕이였지만 글쓰기는 잼뱅이였는데, <사의 찬미>의 가사는 너무나 아름답다.
근데, 더 의심스러운 것은
일동 레코드의 계약조건에는 <사의 찬미>라는 노래가 없다는 것이다.
계약서에는 26곡이라고 명기되어 있었고,
26곡의 리스트에는 <사의 찬미>는 빠져있는데, 정작 죽은 후 나온 앨범은 <사의 찬미>였다.
피아노연주를 한 동생 윤성덕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그 노래를 녹음한 것은 맞지만 왜 이 노래를 추가로 녹음했는지 이유는 모른다고 한다.
이미 익숙한 멜로디의 노래였기에,
갑작히 즉석에서 사전 준비 없이 추가적으로 녹음했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다른 노래들이 박자를 정확하게 지키면서 불렀지만,
이 노래만큼은 박자를 정확하게 지키지도 않았고, 반주와 노래 사이에 교묘하게 안맞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제대로된 연습도 없이 즉흥적으로 감정에 맞추어서 부르는 성격이 너무 강하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에 대한 강헌 선생의 주장에는 반론의 여지도 있다.
이 정도는 상업성을 위해서 충분히 여론을 이용해 먹을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앨범을 발매하려고 했는데, 윤심덕이 연인과 함께 자살을 했다.
근데, 마침 그 때 연습삼아 녹음한 곡이 하나 있었다.
(물론 노래의 내용이 죽음을 예견했다는 것이 너무 우연스럽기는 하지만...)
그래서, 그냥 그녀가 작사한 것으로 거짓말하고서
연습삼아 녹음한 것을 그냥 정식 앨범으로 발매를 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원래 의도는 아니였는데, 이를 상업적으로 이용했다는 그는 진짜 천재적인 장사꾼이다.)
강헌선생은 집단 광기의 무서움을 이야기했지만,
자본에 대한 탐욕은 집단 광기보다 더 무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암튼, 결과적으로 진실은 미궁에 빠져버렸지만
<현해탄의 정사(情死)>로 출연한 <사의 찬미>는 한국에 대중 음악시장을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사의 찬미>는 서양의 음악에 가사를 붙인 것이기에
진정한 의미의 대중 가요가 처음으로 등장했다고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강헌 선생이 한국 대중가요의 효시로 꼽은 것은
이 강의의 두 번째 주인공인 <목포의 눈물>(1935)였을 것이다.
+
아쉽게도 <목포의 눈물>에 대한 강의 내용은 없다.
그래서, 강헌 선생이 다른 강의에서 언급한 내용을 기반으로 강의 내용을 유추해보았다.
(강헌 선생의 강의를 직접 들은 것은 아니기에 다소 강의 의도와 다를 수도 있다.
<목포의 눈물>(1935)은
문일석(24세)의 노랫말에 손목인(22세)이 곡을 붙이고, 이난영(19세)이 불렀다.
지금도 목포에 가면 유달산 이난영 공원에는 노래비가 있으며,
수많이 리메이크 되기도 했고, 고 김대중 대통령의 애창곡으로도 유명한 노래이다.
1925년 이후 일제시대의 대중음악계는
트로트와 신민요가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고 한다.
신민요는 고유 민요가 일본 엔카의 영향을 받고 변질 된 것인데,
1927년 경성라디오가 개국하고 유성기가 대중화되면서 신민요는 쇠퇴히고 트로트가 대중음악을 장악한다.
<목포의 눈물>이 바로 일본의 엔카를 한국식으로 변화시킨 트로트였다.
당시 8만장의 판이 팔려나갔는데, 이는 요즘으로 치면 1천만장 정도 팔린 것으로 봐야한다고 한다.
트로트에 대해서는 우리 전통 음악이다 일본 음악이다 논란이 많지만,
그 출발은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 맞다는 점은 인정해야한다.
1910년 9월 일본은 초등음악 교과서로 <학부창가집>을 발간한다.
창가는 근대 일본의 노래들이며, 어린 아이들에게 일본의 노래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일본의 공연물들이 들어오게 되면서,
신파극이 한국에 들어오는데 이 신파극에 사용된 노래들이 바로 엔카였다.
(신파극은 오늘날의 뮤지컬처럼 중간 중간에 노래가 들어가는 형태로 구성 되어있다.)
대중적으로 근대 일본의 노래들이
식민시대부터 한국에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엔카는 원래 정치 사회적 의미가 담긴 애국계몽의 노래였다.
엔은 원래 연설하다 강연하라는 뜻의 한자이며,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사용된 운동권적인 노래였다.
일본 고유의 음악이라기 보다는
서구 음악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근대 일본 대중음악이였으나,
군국주의가 강해지면서 정치적 메세지가 사라지고 점차 사회적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사랑노래로 변화된 엔카는 장조에서 단조로 바뀌게 되었고,
이렇게 변화된 형태의 엔카가 한국에 상륙하게 되면서 1930년대 트로트로 정착하게 된다.
단조 3박자와 5음계를 사용한
고복수의 <타향(타향살이)>(1933)가 먼저 등장해 히트를 쳤다.
여기에, 단조 5음계를 사용했고,
전형적인 트로트 박자를 사용한 <목포의 눈물>(1935)이
이난영의 클린톤 음색과 결합되면서 전국민의 사랑을 받는 트로트 전성시대를 열어가게 된다.
당시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작곡가들과 가수들도 등장하기 시작했고,
1910년 이후 일본식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들이 문화의 소비층이 되었다.
또한, 유성기의 확산과 경성라디오의 개국으로 대중가요 시장도 새롭게 형성되고 있었다.
(목포이 눈물도 작사가, 작곡가, 가수 모두 20대 초반의 새로운 세대였다.)
음악사적인 설명은 이렇지만,
트로트와 <목포의 눈물>의 이면에는 또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다.
1930년대에는 트로트라는 말을 안쓰고 유행가라고 불렀다고 한다.
음악적 장르적인 특성도 있었지만 그 노래가 담고 있는 가사의 의미가 매우 컸기 때문이다.
원래 엘리트의 문화는 서민층과 구분하고 대립되는 도구가 되었다.
하지만, 트로트는 서민의 문화였고 그 노래가 바로 내 이야기였기에 공감할 수 있는 노래였다.
고복수의 <타향>은 민족 이동을 끊임없이 겪은 민족에게 큰 호소력을 주었다.
그리고 <목포의 눈물>은 제국주의에 대한 민족주의의 울분과 저항이 담겨져 있는 노래였던 것이다.
+
1930년대 사회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기자들이 많이 포진해있던 조선일보에서,
1934년 민족 고유 정서를 북돋우기 위해서 오케 레코드사와 함께 향토노래 가사를 공모한다.
목포출신의 무명시인 문일석(본명 윤재희)은
24세의 어린 나이에 '목포의 노래'를 습작으로 지어 응모를 하게 되고,
결국 '목포의 사랑'이라는 작품으로 3000여편의 응모작 가운데 1등으로 당선된다.
일본 와세대 다학에서 유학을 할 정도로 명문가의 자제였지만
집안에서 유행가 가사를 응모하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 필명으로 응모한 것이다.
사실 1절 가사를 보면, 그냥 애절한 사랑의 노래로 들린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깊이 숨어드는데
부두의 새악씨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음
어떤 여인에 대한 연상을 시키고 있는데,
사실은 당시 목포라는 지역이 가진 애환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 당시 목포라는 지역은 호남지역의 기름진 쌀과 목화가
일본으로 실려나가는 항구도시였고, 굶주린 민초들의 눈물이 바다를 적셨던 곳이다.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한 포인트는 여기에 있었지만, 정치적인 메세지로 해석하기는 쉽지 않다.)
근데 2절 가사를 보면 민족 저항 내용이 너무나 강하게 담겨 있다.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임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임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이 일본을 겨냥한 것이라 하여,
작사가인 문일석은 일본경찰에 끌려가서 호된 문초를 겪게 된다.
(3백년 전 이순신 장군이 유달산 노적봉 밑에 진을 치고 왜적을 물리쳤다는 것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오케이 레코드사는 이 가사가 문제가 되자,
'삼백년 원앙풍'이 잘못 표기된 것이라고 가사를 바뀌서 검열을 통과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삼백년 원한 품은'으로 다시 바뀌서 불렀고,
'임 자취'는 이순신 장군을, '유단산 바람'은 민족의 정기를 의미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문일석은 일제의 감시와 징용을 피해
함경남도 항흠 산골 공사장에서 숨어살다가 젊은 나이(28세)에 요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목포 출신의 무명 시인 문일석이 지은 가사는
목포 출신의 무명 가수 이난영이 부르게 된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이난영(본명 이옥례)은 어려서부터 떠돌이 생활을 했고,
떠돌이 유랑극단인 <태양극단>의 식모살이와 무명의 막간 가수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의 애절한 삶이 쳥량한 목소리의 콧소리에 녹아나면서 서민적인 정서를 대변해준 것이다.)
1933년 오케이 레코드 사장 이철에 의해서 전속가수로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고,
1935년 <목포의 눈물>이 대히트를 치면 엘레지의 여왕으로 등극하게 되고 이후에도 사연 많은 삶을 이어간다.
(나름 유명한 가수였지만, 그 사연들을 보면 전형적인 시대의 아픔을 간직한 서민의 삶이였다.)
<목포의 눈물>은
겉으로는 근대식 일본음악양식을 가지고 있지만,
속으로는 완전히 민초바닥정서를 가지고 있는 트로트라는 장르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후 1935년에서 1938년 사이에는 트로트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다.
<눈물젖은 두만강>, <번지없는 주막>, <나그네 설움>, <홍도야 울지마라> 등...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1938년 군인 출신 총독이 조선에 오면서 트로트 금지령이 내려온다.
군인들이 성전을 치루는데 무슨 감성적인 노래를 부르고 있냐는 것이다.
국민가요 개창 운동이 펼쳐지고,
일본 군가풍의 노래가 등장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노래가 바로 남인수의 <감격시대>(1939)이다.
민초들의 민족주의적인 감성을 대변해주던 노래가
제국죽의적인 군가에 의해서 억압을 받게 되는 것이다.
(1970년대 유신시절 청년 문화가 박정희의 국민가요에 탄압받던 것과 너무나 유사한 패턴이다.)
[Bunker1특강] 강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 Episode 02 - 청년문화의 바람이 불어오다
하지만, 민초의 노래였던 트로트는 그 질긴 생명력을 발휘하였고,
1960년대 이미자와 나훈아, 남진, 배호 등으로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심지어 역으로 조선출신들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 엔가 가수들로 활동하기도 했다고 한다.
역시 서민 문화는 그 파워가 있다~
트로트가 비롯 일본에서 시작된 음악장르이지만,
아직도 대한민국 국민들의 정서에 뿌리깊게 남아있을 수 있는 이유는
그 트로트가 서민들의 애환을 담았던 민족주의적인 정서에서 출발해기 때문일 것이다.
강헌 선생의 맛갈나는 강의를 직접 들어봤으면 좋겠지만,
녹음이 안됐다기에 나름 자료들을 찾아서 관련 내용을 재구성해보았다.
(다시 말하지만, 강의를 직접들어보지 못했기에, 강헌 선생님 의도와 다소 다를 수도 있음)
문화적 엘리트들이, 그리고 요즘 젊은 세대들이 트로트를 아무리 무시하여도,
트로트가 아직도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서민의 애환을 담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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