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통] 사회를 보는 시선 ⑤ - 사람들은 왜 불평등을 받아들이는가 (조형근 한림대 연구교수)

2014.10.14 21:05


[2014.03.25] 사람들은 왜 불평등을 받아들이는가 - [시사통] 방송듣기


간만에 굉장히 흥미로운 강의였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지금의 의미로 형성되었으며,

헤게모니이론과 현대 사회의 냉소주의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는 강의이다.


마르크스, 그람시, 알튀세르, 지젝이라는 등장인물도 훌륭했지만,

지난 강의가 약간 짜집기적인 느낌이 들고 현실과의 이질성이 좀 느껴졌다면,

이번 강의에서는 대한민국의 정치 현실을 포괄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강의였다.


+


강의는 일단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부터 시작된다.


이데아(Idea)라고 불리던 관념적인 것들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것을 이데올로기(Ideology)라고 불렀고,

이데올로기를 연구하는 사람들을 이데올로그(Ideolog)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분명히 학부시절 비판 커뮤니케이션 시간에

굉장히 어렵다고 생각한 개념같은데, 조형근교수가 설명하면 신기할 정도로 굉장히 쉽게 이해된다.


이데올로기를 연구하는 이데올로그들은 초기 나폴레옹 지지자들였으나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자 나폴레옹에 대한 적극적 비판자가 되면서 나폴레옹은 그들을 부정적으로 조롱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데올로기의 개념을 구체적으로 정착시킨 것은
칼 마르크스의 <독일 이데올로기(1833)>에서 부터라고 한다.

칼 마르크스는 의식은 물질적 세계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인데,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묘사하기는 하지만 현실을 거짓으로 반영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이라고 표현했고,
사물에 권력이나 신성을 부여하면서 사람은 권력이나 신성이 앖어져버리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상품들이 동일한 노동가치를 가지고 있기에 교환이 가능한데(노동가치설),
실제세계에서는 돈이 가장 중요하고 상품이 다음으로 중요하고 노동은 소외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여기에서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왜곡해서 보게 만들고
지배계층이 피지배계층을 지배하는 개념을 형성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마르크스 이후로 이데올로기는 부정적 의미로 고착되어 버렸고,
과학적 사회주의를 통해서 의식화되어 주체로서 투쟁에 나서고 해방을 쟁취해야할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80년대 학번들은
대학에 입학하면 이러한 의식화 교육을 누구나 받았는데,
그들이 현재 50대가 되어서 기득권이 되고 보수화되었다는 점이다.

이데올로기가 뭔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
보수화되어서 사회적 불평등을 그대로 받아드리는 것은 대한민국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

두 번째 등장 인물은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이다.



전통 마르크스 주의자들이 자본주의가 곧 무너질 것이라 기대한 것과 달리
안토니오 그람시는 경쟁적 자본주의가 독점적 자본주의로 변화되면서 안정화 단계에 들어섰다고 보았다.

마르크스가 물질을 강조하며 하부구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면,
그람시는 하부구조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토대로 형성된 상부구조에 주목했다.

물적 토대를 기반으로 형성된 자율성을 인정하고,
상대적으로 형성된 자율성을 강조했기에 마크르스주의를 보완 확장했으며,

지배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고,
사람들이 이데올로기의 진실을 안다고 해서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고 보았다.

지배계급이 단순히 수탈과 강압에 의해서만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라는 것은 강제와 동의라는 두 가지 요소를 포괄하면서 사람들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피지배계층은 지배계층의 불합리성에 동의를 했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지배계급의 강제라는 부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순응하게 되는 것이다.

대공황이라는 위기 속에서도 자본주의가 힘을 발휘하는 것은
지배계급의 도덕적 지적인 헤게모니가 사회의 모든 곳곳에 퍼져서 작용하기 때문인 것이다.

국가의 기능은 자본주의 발달과 함께 정차 성장해나가고 있으며,
이러한 논리로 보면 복지 국가의 접근도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수단일 뿐인 것이다.

국가는 이러한 접근을 통해서 시민사회 영역에도 침투해
사회의 모든 영역의 활동과 의식을 지배하며 헤게모니를 확장해나갈 수 있는 것이다.

다양한 사회 집단과 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표출하고 조직화하는 시민사회 영역은
자체로써 자생적인 힘을 가지며, 공적 영역과 함께 연대하고 협력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어야한다.

사회적 경제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람시가 이야기한 국가의 헤게모니가 시민사회 영역을 침투하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하는 것이다.

+

세번째 등장인물은
프랑스의 루이 알튀세르(Louis Pierre Althusser)이다.



프랑스 공산당의 대표주자이자, 
파리고등사범학교의 석학으로 이름을 날린 알튀세르는 이데올리기의 재생산에 주목한다.

마르크스가 이데올로기 생산에 주목했다면
알튀세르는 어떻게 계급이 재생산되는지에 주목하였다.

이데올로기를 사람들에게
자발적 동의를 받아내는 지도력이라는 기존 견해에 대해,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는 무의식이기 때문에 의식화 모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데올로기에 무의식적으로 포섭되어 있기에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본다.

여기서 그 유명한 호명의 개념이 나오는데,
우리가 이데올로기라고 부르고 반응하는 순간 이미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것이기에,
이데올로기라고 불러서 반응한다는 것은 이미 우리는 순응해야하는 수동적 주체가 된 것이다.

결론은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이데올로기를 벗어나거나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

마지막 네번째 주자는 
최근에 핫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이다.



대중문화 분석과 라캉 분석가로 대중의 호응을 얻으면서,
패션 업체의 협찬을 받기도 한 걸로 더 유명해졌고 한국에 2013년 방문하기도 했다.

지젝은 <냉소적 이성 비판(1983)>을 저술한
독일의 철학자 페테 슬러터다이크(Peter Sloterdijk)에 영향을 받아
사람들은 이데올로기에 속고 있는지 다 알고 있는데도 그냥 그렇게 산다고 주장을 한다.

진실에 대해서 냉소하기 때문에
우리 시대는 냉소적 주체로 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데카르트가 이성적 주체를 설정한 이후 굉장히 반항적인 사고였는데,
타자로부터 배신당할까봐 미리 냉소하는 것이 생존 방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미, 수많은 약속에 속았기 때문에
트라우마의 영향으로 그놈이 그놈이라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 모두는 상품 경제 속에서 살게 되었기 때문에
유일한 진리가 가격이고 시장논리에 순응하면서 그냥 살 수 밖에 없다는 냉소가 
오히려 사람들에게는 덜 불안하고 안정감을 준다는 것이다.

화폐가 종이 쪼가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화폐물신숭배의 논리에 속고 사는 것이 편하며,
진실을 알게 되면 싸울 줄 알았는데 스스로 오늘날 속물이라고 불리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지젝은 이를 통해서 이데올로기는 의식이 아니라 행위라고 보았고,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다 아는데, 그래서 어쩌라고?' 라는 반응과 일맥 상통한다.

+

그렇다면 한국 사회가 안바뀌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놀랍게도, 4명의 설명이 
모두 가능한 것이 바로 대한민국이다.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세대 분열과 미디어의 변화,
민주정권 10년과 보수정권의 재집권, 경제 환경의 급격한 변화 등

너무나 역동적인 대한민국의 현실이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을 만들어냈고,
몰라서 속는 사람도 있지고, 무의식적으로 당하는 사람도 있고, 동의된 사람도 있고, 냉소적인 사람도 있다.

확실한 것은 아직까지 보수적으로 불평등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불안정해 보이는 사회 변혁을 바라는 사람보다는 더 많다는 것이 2012년 선거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사회 변혁을 원하는 사람들이 지지를 못받는 이유는
보수 집권층에 대해서 몰라서, 무의식적으로, 그들에 동의해서 그런 것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들은 대부분 60대 이상의 노년층일 확률이 높다.

50대가 아직도 보수층을 지지하는 결정적 이유는
사회 변혁을 주장하는 사람이 못 믿어워서가 클 것이며 이는 냉소주의와 가장 가까운 듯하다.

결국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새로운 희망과 이를 실철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신뢰이다.

과연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것을 얼마나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아직까지 대한민국에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세력은 별로 없어 보인다.


열린 공동체 사회 Pot cast/[담론통] 조형근 나폴레옹, 냉소적 이성 비판, 냉소주의, 노동가치설, 독일 이데올로기, 루이 알튀세르, 무의식, 불평등, 상부구조, 슬라보에 지젝, 시사통, 안토니오 그람시, 엥겔스, 이데아, 이데올로그, 이데올로기, 조형근, 칼 마르크스, 피테 슬러터다이크, 하부구조, 허위의식, 헤게모니, 호명이론

[시사통] 사회를 보는 시선 ④ - 엘리트의 사회지배는 불변인가 (조형근 한림대 연구교수)

2014.10.14 18:38


[2014.03.18] 엘리트의 사회 지배는 불변인가 - [시사통] 방송듣기


다윈의 진화론은 생명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꾸어버렸다.
하지만 생물학에서 시작된 다윈의 진화론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해석한 사람들이 있다.

'적자생존'이라는 논리로 <사회진화론>을 주장한 허버트 스펜서와
'만물은 서로 돕는다'는 <상부상조론>을 주장한 표트르 크로프트킨이 그 주인공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환경의 변화에 따라 
그에 적합한 생물체가 살아남는다고 설명했으나 그 생존의 방법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영국의 사회학자였던 허버트 스펜서는
생물들이 생존 경쟁을 통해서 더욱더 환경에 적합한 자만 살아남는자고 주장한 반면,

러시아의 지리학자이자 사상가인 표트르 크로프트킨의 경우에는
시베리아 여행을 통해 관찰할 결과 만물은 서로 연대하고 돕는 과정을 통해 살남는다고 보았다.

생명의 진화과정에 대한 전혀 전반대의 설명인 것이다.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우파들의 사상적 기반으로 오랜 기간 활용되었고,
표트르 크로프트킨의 <상부상조론>은 협동조합과 아나키즘의 사상적 뿌리가 되고 있다.

+

하지만, 자연 선택의 원리를 사회학에 적용시켜
적자생존의 원리로 설명한 허버트 스펜서의 주장은 당대의 지배적 사고가 되었고,

유럽을 넘어 아시아까지 넘어와서 
일본은 물론 안중근과 같은 수많은 민족주의 좌파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스펜서는 사회구조의 복합성도 증대하면서 
사회는 단순사회에서 점차 복합사회로 진화되어가는데,

상호 의존성이 높아지고 통합도 증가하면서 
점점 관리와 규제의 기능이 커지게 되며 엘리트가 이를 담당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이탈리아출신의 
경제학자이면서도 사회학자인 블브레도 파레토와도 상통한다.

파레토는 엘리트를 사자형과 여우형으로 구분하며,
인간에는 격차가 존재하기 때문에 두 엘리트 유형이 순환 지배할 수 밖에 없다고 보았다.

하지만, 폐쇄된 사회에서는
실제 능력있는 사람과 현재 엘리트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으며,
사회 격차가 커져서 피지배 엘리트가 지배 엘리트가 될 수 없을 때 불만이 켜저 폭력적 변혁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스펜서와 파레토는 사람의 능력의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고,
능력이 뛰어난 엘리트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해야한다는 점에서는 우파적인 주장같지만,

그 역할이 사회적으로 규정되었다는 구조기능주의적 견해와 비교한다면,
기회의 불평등에 대해서는 오히려 반대하고 능력에 따른 역할을 주장했다는 점에서는 진보적인 사고였다.

+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을 건드린 사람이 바로 로베르트 미헬스이다.

독일 사회민주당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미헬스는
사회민주당에서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당사회학(1911)>라는 책을 쓴다.

1900년대 유럽 사회주의의 간판격이였던 사민당이
1차 세계대전에 동의하는 등 왜 개량주의, 수정주의적 노선을 갔는지 그 원인을 자세히 분석했는데,

당시 외부에는 당의 창설자인 페르디난트 라샬의 이념적 후유증으로 알려져있었으나,
미헬스는 막스베버의 제자답게 조직적 차원에서 관료제가 어떻게 변질되는지를 분석해서 설명해주었다.

'과두제의 철칙(Iron law of Oligarchy)'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이 연구는 관료제라는 조직에서 과두제가 나타나고, 
과두제에서 보수적인 신엘리트를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과정을 사민당의 성공과 격변이라는 과정을 통해 설명한다.

특이한 점은 미헬스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서 굉장히 이중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조직의 규모가 커져서 관료제가 되면 과두제가 나타나고 
소수의 엘리트가 지배하게 될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하면서도 과두제가 무너질 수 있다는 희망을 놓치 않았다.

민주주의 통치는 거짓말이지만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기에 과두제는 무너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아버지가 숨겨놨다고 이야기했던 보물을 찾는 것처럼 허황된 것이지만,
그 허황된 꿈을 찾기 위해서 땅을 뒤엎어버리는 과정에서 땅은 비옥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투쟁은 배반당하고 결국 새로운 과두제만 나타나지만,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사회는 계속해서 발전해나갈 수 있다는 새로운 희망을 동시에 제시한다.

이후의 미헬스의 행보는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사회주의 경력 때문에 수임용에 탈락해서 이탈리아로 넘어가게 되었으며,
이탈리아 국적을 획득(1914)하고 파쇼당에 입당(1923)한 후 무솔리니의 지지를 받으며 우파로 돌아서게 된다.

미헬스는 대중에게 지도자를 추정하고자 하는 복종 심리가 있고,
대중은 전통지향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는 했지만 민주주의 희망을 놓치 않았었다.

결국 미헬스가 우파로 돌아서게 된 것은
냉혹한 사회 현실로 인한 대중에 대한 실망이 그를 냉소주의에 빠지게 만든 것은 아닐까?

+

사회진화론의 논리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크로프트킨의 주장처럼 환경에 적합한 자가 남는다는 개념을 경쟁을 통핸 남는 것처럼 과대해석했다는 비난을 받는다.

진화론 자체가 변화의 방향성을 이야기한 것은 아닌데,
스펜서는 사회가 성장한다는 목적론적 관점을 투영해버린 것이다.

다윈이 이야기한 진화라는 것은 
목적과 방향도 없고 환경의 변화에 따라서 대응한다는 것이며, 이는 상황이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상황이론도 
조직 내부에서의 자생적 움직임을 무시했다는 한계를 가지면서
외부 환경의 변화와 내부적인 자생력의 조화로 자기조직화를 이룬다는 새로운 개념으로 발전하게 된다.

세 사람의 견해를 정리해보면 
엘리트가 사회를 지배할 수 밖에 없다는 논리는 다음과 같다.

1) 스펜서 - 사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능력있는 엘리트가 필요하다
2) 파레토 - 인간에게는 능력의 격차가 있기 때문에 능력있는 사람이 지배적 엘리트가 되야한다.
3) 미헬스 - 조직이 커지면 엘리트는 출현하게 되고, 대중은 지도자에 대한 복종 심리가 있다.

결국 엘리트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고,
사회와 구조의 특성상 엘리트라는 존재는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엘리트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근데, 근본적으로 엘리트가 사회를 지배하는 것이 맞다는 논리에 어떠한 지배라는 구체적인 방식이 빠진 느낌이다.

분명히 리더와 지배자는 다르다.
근데, 이들의 논리에서는 이 것에 대한 명확한 구분이 부족하며,
엘리트가 지배자가 아닌 리더가 될 수도 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간과한 측면이 있어보인다.

이는 이들이 생존했던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이라는 시대적 환경 상
오늘날의 리더십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지배자와 피지배자만 존재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을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불평등의 문제를 강하게 인식했던 파레토나
현대적인 네트워크나 홀리그래피적 조직 구조를 경험해본 적이 없는 미헬스에게
오늘날의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의 모습을 상상해달라는 것은 너무나 무리이기 때문이다.

고전을 공부한 것에 대해서는 아주 만족스러운 강의였지만,
오늘날 조직학자들이 엘리트를 보는 견해에 대한 설명이 추가됐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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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통] 사회를 보는 시선 ③ - 좌파가 바라보는 불평등 (조형근 한림대 연구교수)

2014.10.05 23:36

[2014.03.11] 좌파가 바라보는 불평등 - [시사통] 방송듣기


우파가 불평등을 어쩔 수 없는 사회현상으로 봤다면,

좌파는 불평등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그 근원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장 자크 루소, 칼 마르크스, 막스 베버, 피에르 부르디외이다.



장 자크 루소는 그의 명저 <인간 불평등 기원론(1754)>에서

인간은 자연상태에서는 평등했는데 사회 상태로 들어오면서 갈등이 생겼다고 보았다.


거주지에 정착해 가족을 만들면서 사유재산이라는 것이 생겼고,

이를 지키기 위해서 국가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본격적으로 불평등은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를 해체하고 사유재산을 폐지해서

인민들이 평등하게 살수 있게 만들어야한다고 루소는 주장하게 된다.


이러한 견해를 그대로 이어받은 사람이 바로 칼 마르크스이다.


마르크스 역시 원시 공산주의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은 평등했다고 주장하며,

생산력이 올라가 잉영생산물이 발생하기 시작하면서 계급 투쟁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1848)>에서

인류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였고 계급적 불평등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고 주장하면서,

생산수단의 소유에서 시작되는 경제적 불평등이 모든 불평등의 근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마르크스의 견해에 대해서

막스 베버는 경제적 불평등도 중요한 원인이지만 

사회적 명예와 지위, 정치적 권력에 의한 불평등도 존재하기에 다양한 관점에서 봐야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굉장히 설득력이 있어보이지만,

막스 베버의 주특기에 걸맞게 명확한 결론을 제시하지 않으면서 그의 주장은 화두만 던지고 마무리를 한다.


이러한 마르크스와 베버의 견해를 통합시키는 것이 바로 부르디에이다.


부르디에는 경제적 자본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경제적 자본을 재생산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자본만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계급 재생산을 위해서는 정치적 자본, 경제적 자본뿐만 아니라

문화적 자본과 사회적 자본이 추가적으로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사회적 자본이라함은 흔히 이야기하는 인맥을 의미하며,

문화적 자본이라고 함은 끼리끼리의 문화를 통해서 계급적 차이를 극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예가 대중이 축구와 권투, 대중 공연을 즐길 때,

상위 계층들은 몸을 직접적으로 붙이치지 않는 테니스와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흔히 이야기하는 상류사회의 귀족문화를 유지해나가는 것을 의미하며,

고가의 미술품을 수집하고, 최고급 명품과 레스토랑을 이용하는 양태가 대표적인 것이다.


경제적 자본뿐만 아니라 문화적 자본과 사회적 자본이 뒤따라와야지

그들만의 리그가 만들어지고 계급적인 차이는 점차적으로 커지게 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일제시대를 통한 문화적 단절과 근대화 과정에서의 계층 이동이 심했기에,

부르디에가 연구했던 프랑스만큼 문화적 차이가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를 흉내내려는 움직임은 존재하고 있다.


+


흥미로운 점은 루소나 마르크스, 베버, 부르디에 모두

불평등의 기원에 대해서는 사유재산이라는 부분에 동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유재산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한 불평등은 계속될 수 밖에 없는데,

과연 이 사유재산이라는 것을 없애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마르크스는 없애고 싶어했고 없애길 주장했지만 

사실상 인간의 욕망이 존재하는 한 이를 실현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고 자아를 찾기 원하는 인간에게

사유재산은 남과 나를 구별짓는 매우 중요한 원천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과도하게 드러나는 것이 계층이고 고착화되는 것이 불평등이지만,

남과 나를 구별지음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욕망이 있는 한 사유재산은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과도해지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계급화되는 것을 막고,

한 번 형성된 계층이 고착화되어 이동이 불가능해지는 불평등을 방지하는 수 밖에 없어 보인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남과 다르게 구별지어지길 원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눈에 보이는 신분은 사라지고 평등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도 기득권 세력들은 자신들을 사회의 대중과 구별짓고 싶어하는 욕망이 나타나고 있다.


조형근 교수를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계급 정치은 약화되었지만,

계급 역관계만 바뀌어서 아직도 계급 투쟁은 지속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름 아래 

글로벌 자본가 계급은 의도적으로 새로운 방식의 계급투쟁을 시작하면서

세계화의 추세에 맞춰 시장을 개방하고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라고 이야기한다.


이는 노동자 계층의 단결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자영업자와 중간 계급을 몰락시켜서 임금 노동자에 합류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20대 80의 사회에서 80의 불만을 줄이기 위해서는

엔터테인먼트를 강화해야 한다는 티티테인먼트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하고 있다.


좌파에서 이제 계급이라는 개념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할 때,

우파에서는 새로운 계급 관계를 형성하고 이를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


분명 과거 사회와 비교하면 삶에 있어서 많이 평등해졌고,

특권층만의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도 상당부분 개방되어지고 있는 추세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오히려 경제적 자본에 있어서는 부의 집중현상이 강화되고,

불황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그 부작용은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오히려 역사가 되돌가는 듯한 양상을 보이며,

경제적 불평등에 다시 집중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모든 불평등의 근본적인 요인이라고 불리는

경제적 불평등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가장 근본을 건드리는 것이기에

어떻게 보면 사회와 많이 평등화되면서 오히려 가장 근원의 부분까지 찾아오게 된 것일 수도 있다.


과연 이 모든 불평등의 기반이 된다는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21세기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결해나갈 것인가?


자칫하다가는 사회 계층구조의 완전한 파멸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기득권 세력들은 이러한 위기에서 한 번 크게 양보하면서 기득권을 유지하는 전략을 얄밉게 잘 사용해왔다.


복지 정책이 그렇고, 근로조건 개선이 대표적인 방법들이다.

과연 이번에는 이러한 위기를 어떠한 방식으로 극복해낼까? 그들의 대응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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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통] 사회를 보는 시선 ② - 우파 불평등론은 파산했지만... (조형근 한림대 연구교수)

2014.10.05 22:14

[2014.03.04] 우파 불평등론은 파산했지만 - [시사통] 방송듣기


불평등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끝이 없다.


좌파에서는 불평등을 사회악으로 간주하지만,

우파에서는 불평등을 필요악으로 간주한다.


물론 우파의 불평등론은 이제 더 이상 힘을 받지 못하지만,

조형근 교수는 우파 불평등론의 핵심을 구조기능주의에서 찾아보았다.


+


구조기능주의는

전설적인 사회학자 탤컷 파슨스(Talcott Parsons)에 의해서 

주장된 것으로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1970년대 이후로 비판에 직면하게 되면서 현대에 들어와서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이론이다.



하지만, 그의 구조기능주의는

킹슬리 데이비스, 윌버트 무어, 니콜라스 루만 등에 영감을 주었고,

현대 조직 이론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상적 근원으로 인정받고 있다. (물론 비판적으로...)


영국에서 최초로 이주해온 전통적인 교수&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파슨스는

아이비 리그가 아닌 리버럴 아트 스쿨 중에서도 유명한 애머스트 대학교 생물학과 입학한다.

(그의 배경만 봐도 얼마나 전통적인 우파일지 상상이 간다.)


대학교 3학년 때 사회과학으로 전과하게 되면서 사회과학자의 길을 걷게 되지만,

그는 생물학적 유기체론을 기반으로 사회를 유기체와 같이 각자 필수적인 역할이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상호의존적인 존재이기에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면서도 모두가 필요한 존재이지만 중요도는 각기 다르다고 보았다.


파슨스는 왜 사람들이 직업, 기능적인 수평적인 분화뿐만 아니라 

계층적인 수직적 위계질서를 받아들이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뒤르켐의 문제의식을 수용한다.


공화주의 좌파였던 뒤르켐은 혁명시기의 프랑스가

아노미 상태에 빠지면서 갈등이 증폭되면서 오히려 상호의존성이 증가되고,

이로 인해서 분화와 통합이 반복되면서 각자 지위에 맞는 역할을 잘 수행하도록 하는 과정에서 불평등이 용인되었다고 보았다.


파슨스가 보기에 사회의 유기적인 연대를 위해서 불평등은 필요악이였던 것이다.


불평등의 필요성을 주장한 또 다른 견해를 주장한 것은

바로 파슨스의 제자였던 킹슬리 데이비스와 윌버트 무어이다.


이들은 불평등이 사회의 기능적 존속을 위해서

중요한 위치에 적합한 사람을 충원하기 위해서 발달하게 되며,

사람을 차등화시키면서 제도화된 불평등이 나타나기 시작하지만 이 것을 불가피한 현상으로 보았다.


사회적 기능이 작동할 때 어떤 기능들은 더 중요한 기능을 하기 때문에,

뛰어난 능력과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그 일을 수행해야하고, 그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줘야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역할일수록 많은 보상을 해줘야 능력있는 사람들이 모이게 되고,

중요하지 않은 일에는 매우 낮은 보상을 해줘야 사람들은 노력하고 경쟁하게 된다는 것이다.


+


강력했던 이들의 주장이 무너지게 된 이유는 바로

구조적으로 순환논리에 빠져있기 때문이라고 조형근 교수는 설명한다.


'어떤 기능이 다른 기능보다 우월하고 열등한지를 무엇을 기준으로 평가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구조 기능주의는 제대로된 답변을 제시하지 못한다.


청소부보다 의사가 뛰어나다고 말한다면 과연 기준은 무엇인가?

높은 보상을 받으니까 중요한 것인가? 아니면 중요한 역할이기에 높은 보상을 주는가?


청소부가 없다면?

처음에는 별문제 없지만, 장기간 방치되면 사회적 큰 혼란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청소부도 사회에 중요한 역할인 것 아닌가?

그럼 청소부도 높은 보상을 주어야하는 것은 아닌가?


구조기능주의는 이론적으로 치명적 오류가 있어서 폐기되지만,

현실에서는 아직도 막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내가 하류층에 있는 것은 내가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불평등에 대해서 묻지도 않고 그냥 받아들이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


조형근 교수의 강의해서 인상깊었던 것은

어떻게 해서 사람들이 불평등이라는 요소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만든지를 다루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실은 부정확한 사고에 의한 것이지만,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경향이 많이 나타난다.


우파의 불평등론은 이미 논리적 오류를 드러냈지만,

사람들에게는 불평등한 현실을 수용하는 자연스런 인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원래 사회란 그런 것이니까...'


원래 사회는 불평등한 것이라는 생각은 

논리보다는 오히려 믿음의 영향에 가까운 것이지만, 현실에서는 아직도 강력하다.


사회에 만연한 이 지배적 논리를 벗어나서

불평등한 세상에 대한 문제의 근원을 고민하는 좌파의 사상들을 살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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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역설(Development and Social change) - Philip McMichael (2012)

2014.06.12 18:02
거대한 역설
국내도서
저자 : 필립 맥마이클(Philip McMichael) / 조효제역
출판 : 교양인 2013.04.05
상세보기


이 책은 1996년 초판이 발행되었지만,

국내에는 2012년 수정된 제5판을 조효제 교수가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저자인 미국 코넬대 교수인 필립 맥마이클은

국제 개발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이라는데, 사실 내 전공분야가 아니라서 어느 수준인지는 잘 모르겠고~


암튼, 이 책을 보면 그 내공은 진짜 장난 아니라는 것이 느껴진다.



1940년대 개발의 시대부터 2010년대 혼란의 시기까지...

개발과 발전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어떤 일들 있었는지 쭉~~ 정리해주고 있다.

방대한 분량과 역사적 통찰이 돗보이는 명작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특히 제 1세계의 관점에서만 다루어지던 개발이라는 이슈를

제 3세계의 시각으로도 분석함으로써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을 간과했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번역자인 조효제 교수는 이 책을 가지고 수업을 할 때마다,

성공회대 ‘아시아 시민 사회 지도자 과정(MAINS)’ 프로그램의 개발도상국에서 유학 온 외국 학생들이

“우리들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들이 이 속에 다 들어 있다”라고 반응했다고 이야기한다.

이 책은 경제성장과 자원추출이라는

산업화의 관점에서 이루어진 국제 개발이라는 담론에 대해서

비판적 시각으로 분석을 하며, 그 대안을 찾아가는 다양한 활동들에 대해서 잘 설명해주고 있다.


국제 개발에 대해서 관심이 있거나 전공자들이라면

반드시 한 번쯤 읽어봐야하는 필독서일뿐만 아니라,


현재 사회의 현상들과 문제들에 대해서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전 지구적 관점에서 그 흐름을 잡아볼 수 있는 매우 유용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


이 책은 개발의 기원부터 

3가지 주요 패러다임을 중심으로 시대별 그 특징들을 정리해주고 있다.


(그림 출처: 코이카 뉴스레터 2013년 10월호 )



이 책의 핵심주장은 개발이라는 것 자체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국제 정세와 국내 상황에 의한 인위적인 노력읠 결과이며, 정치적으로 기획된 프로젝트라는 것이다.


개발 프로젝트 시대의 국가 주도의 개발은

지구화 프로젝트 시기를 거치면서 시장 중심으로 그 추가 넘어갔고,

지구화의 큰 흐름 속에서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하면서 그 대안으로 지속 가능성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지속 가능성 프로젝트는 사실상 현재 진행 중인 상태로,

어떠한 흐름으로 전개될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하는 상황이며,

지속 가능성 프로젝트에서는 그 동안 지배적이였던 개발 담론 자체에 대해서 새롭게 논의가 되고 있다.


과연 누구를 위한 개발인가?

왜 개발할수록 불평등해지는가?

모두를 위한 착한 개발은 불가능한 것인가?


이러한 개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서부터, 실무적인 문제들까지...

아직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는 못한 체 수많은 대안들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이 솔직한 대답일 것이다.


개발이라는 것 자체가 좋은 변화를 만들어내자는 것이지만,

가장 큰 문제는 과연 '좋은 변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사람들의 시각이 모두 다르다는 점에 있다.


불평등을 줄이는 것이 최선인가?

아니면 낙수효과라 불리는 성장이 최선의 방법인가?

스스로 결정하지도 못하는데 그냥 퍼부어주는 것이 과연 도움이 되는 것인가?


가장 안타까운 것은 개발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나름 사명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한 사람도 많이 존재하는데 그 결과가 오히려 역설로 드러난 것이 많다는 것이다.


식민시대의 방식으로 제 3세계를 개발한 것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한 것도 있지만, 진짜 선한 마음에 한 경우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그들에게 더 큰 피해만 주었던 사례도 존재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


최근 들어 국제개발에 대한 청년들의 관심이 부쩍늘고 있다.


성공회대 조효제 교수는

1970~80년대 학생운동에 투신하던 그런 모습들이

최근에는 국제개발 이슈에 뛰어드는 듯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한다.


굉장한 사명감을 가지고, 가시밭길이지만 그래도 걸어보겠다는...


내 주위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존재하며,

개인적으로도 국제개발 NGO 창설에 한 발 담구고 그 과정에 참여해봤기에...


현재 국제개발 NGO활동이 가지는 한계점과

주변에서 국제개발 NGO를 바라보는 시각의 문제점들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과연 지금 진행되는 국제개발의 접근이 현지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가?

오히려 자신들의 자기 만족을 위한 활동들이 전개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진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아니 개발이라는 것이 과연 그들에게 도움이 되기는 하는 것인가?


이런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은 활동들은 굉장히 위험한 접근이다.


월드뱅크, IMF, 유엔등의 국제기구들의 활동이 과연 정상적인 것인가?

새마을 운동을 수출하겠다는 KOICA의 견해는 어떻게 판단해야하는 것인가?


너무나 복합적인 요소들이 실타래처럼 뒤엉킨 체 해결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무작정 동정심에 기반해서 제3세계를 돕고자 하는 움직임이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뜨거운 심장도 필요하지만 차가운 머리도 필요하다.


+


이 책은 Open Project S의 필독서로 포함시키기로 했다.

국제 개발에 관심이 없더라도 개발이라는 테마 자체에 대해서 고민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난 이 책을 통해서 국제 개발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사회에 대해서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왜 박정희라는 인물이 나오게 되었고, 그가 성공할 수 밖에 없었는지...

그의 개발 정책은 개발프로젝트라는 전세계적 흐름에서 보면 최고의 엘리트였고 모범생이였다.


하지만, 그런 박정희도 지구화 프로젝트 시기에는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인물이였고 오히려 새로운 골치꺼리로 등극했을 듯하다.


그리고 왜 김영삼, 김대중과 노무현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물론 국내적인 이슈도 있었지만, 전세계적 흐름에서보면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였다.


단지 국내 상황과 개인 캐릭터로만 가지고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현상을

이 책을 통해서 좀 더 다면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남미를 중심으로 시도되는 새로운 흐름들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경제 열풍에도 큰 시사점을 주고 있다.


마치 북유럽식 사민주의나 복지국가를 건설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과연 그게 맞는지 되물어보게 만들어준다.


그들 역시 해결책을 못찾고 해메고 있는데 그 모델을 그대로 가져온다고?


앞으로 과연 어떻게 될까?

지구화와 지역화라는 두 키워드는 공존이 가능한 것인가?


참으로 생각할 것은 많고, 그 앞은 알 수 없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가치있고 재미있는 것은 아닐까? ^^


암튼~~ 너무나 좋은 책을 소개해주신 조효제 교수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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