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t cast/[Bunker1] 강신주

강신주의 다상담 02 - '고독' 편

열린 공동체 사회 2013. 12. 11. 17:44


강신주 박사는 고독을 

강한 자의식의 상태라 이야기한다.


나에게 집중하고, 계속해서 긴장하고, 

나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에 몰입하지 못하는...


고독이라는 상태는 불안정한 상태이기,

이 상황을 벗어나려고 하게 되고, 이럴 경우 2가지 선택을 하게 된다.


고독을 벗고 나오느냐 

아니면 더 깊은 고독으로 들어가느냐...


고독을 즐기는 방법도 불안정 상태를 탈출할 수 있다.

더 깊은 고독으로 들어가는 것은 일종의 방어기제이며,

스스로를 고독에 갇두면서 보호받을 수 있지만 세상과는 점차적으로 멀어지게 만든다.


평생 혼자 살 자신이 있으면, 고독을 즐겨도 된다.

하지만, 고독을 즐기는 것도 잠시뿐 언제가는 돌아오기 마련이다.


모든 자기 의식은 타인에 의해서 매게되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쁜 것인가?

무엇이 좋은 것인가?


내가 좋은 것이, 내가 이쁜 것이 정답이지만,

이런 주관적인 감정에서 조차 다른 사람과 교감을 할 때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잠시동안은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할 수 없어지고, 결국은 사람을 찾게 된다.


+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고독하지 않은 존재를 보면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다.


어린 아이들은 고독이 없다.

하지만 어른이 될수록 점차적으로 고독을 느낀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에는 꽃잎을 봐도 몰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몰입을 하게 되면,

세계에 대한 관심이 없어지고,

세계가 나를 밀어낼 때 고독은 없어진다.


멀리서 여자친구가 걸어오는데, 나머지는 모두 배경일 뿐 여자친구만 보인다.

반대로, 여자친구와 있는데, 자꾸 시계를 보고 스마트폰만 만지게 되면 몰입이 끝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사랑이라는 감정과 고독이라는 감정은

몰입할 대상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로 구분되어질 수 있다.


+


몰입이라는 감정은 어떤 것일까?


부모님이 막~~ 야단칠 때~~

그 내용에 집중하고 있으면 맘이 어렵다.

하지만, 딴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별로 마음이 어렵지 않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극장에서 영화가 더 재미있는 것은 몰입하기 좋은 환경 때문이다.


무언가에 몰입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순간적으로 놓아버릴 수 있다는 것이고,

모든 억압에서 자유로와지면서 다른 모든 세계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진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냥 나와는 구분된 풍경으로만 보이면 고독을 느끼지만,

만지고 싶고, 관심이 가는 대상이 있다면 고독은 사라지게 된다.


결론적으로 고독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어떻게하면 무언가에 몰일 할 수 있을까 고민해보면 된다.


강신주 박사는 이를 모든 금기된 것을 벗어나는 것으로 설명한다.


스피노자의 평행론을 이야기하면서

기독교의 금욕 생활은 정신과 고통이 반비례한다고 보지만,


스피노자는 몸이 건강해야 정신도 건강하기에, 

정신이 건강하려면 금욕생활을 하면 안된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업악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무언가에 몰입해볼 때 고민이 해결된다는 것이다.


강신주 박사의 이야기는 '사랑'편과 크게 다르지 않다.

(http://socialplanner.tistory.com/entry/죄와-벌-김수영-1963)


'앞뒤 제지말고 스스로 감정에 솔직하고 지금 이순간을 즐기라.'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서,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시선이 두려워서

솔직하지 못한 것이 스스로의 불행을 만들고 있다고...


쓸데없이 남을 배려한다고

스스로를 옥죄이지 말고 당당하게 감정을 표현해라~

(단, 남에게 피해나 상처를 주지 않는 선에서...)


다소 추상적인 결론이지만,

그 본래의 의미에 대해서는 상당히 공감하는 바이다.


+


그렇다면, 과연 실천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몰입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어려가지가 있을 수 있다.

운동, 취미활동, 술, 마약 등 모든 것이 고독을 줄여줄 수 있는 수단이 되지만,

모두 일시적인 관점이며, 근본적으로는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것들이 효과가 크다.


그래서, 사랑을 하거나 종교, 특정한 신념을 가지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을 못해서 종교를 도피처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교회에 수 많은 여성분들이 사랑에 실패해 종교에 더 몰입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순수한 신앙적인 판단에서 그러는 것은 뭐라할 것은 아니지만,

사랑의 아픔을 피하기 위해서 신앙에 매달리는 분들을 보면 한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많이든다.


상처를 신앙으로 승화시켜서 극복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게 과도하게 흐를 경우 신앙이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종 보인다.

(여기에 상처는 사랑 이외에 수 많은 다양한 상처가 포함된다.)


사랑과 신앙이라는 부분...

둘 다 균형을 맞춰줄 필요는 분명히 있어 보인다.


+


나에게 현재 몰입할 대상이 존재한다.

그렇게 때문에 나는 고독하지 않을 수 있는 것 같다.


대학원에 입학해 공부를 하기 시작한 이후로 

혼자 있는 시간이 부쩍 늘어났지만, 오히려 회사를 다닐 때보다 고독함을 덜 느낀다.


이유는 사랑도 신앙도 아닌 신념이라는 부분이 생겼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는 목표가 너무나 명확하고, 아직은 수풀을 헤메고 있기는 하지만,


이 숲을 헤쳐나왔을 때 

세상을 향해 무엇인가를 던질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을 하지 않지만,

종교에 대한 열정도 예전만 하지 않지만,

갈급함이나 답답함을 느끼지 않는 평안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다시 사랑하고 싶은 욕심은 많이 있지만,

신념이라는 부분이 아직은 상대적으로 굉장히 크기에

신념을 같이 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무리해서 사랑에 목메고 싶지는 않다.


어느 새 남들이 말하는

3포세대(연애, 결혼, 출산)에 자연스레 합류해버렸지만,

남들이 날 3포세대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이런 남들 시선에는 자유로운 듯하다.


다만, 이 신념이라는 몰입의 힘빨이 떨어지기 전에,

다시 고독을 느끼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사랑이 다시 시작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