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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그들이 사는 세상 - 연길과 간도, 조선족과 한민족

열린 공동체 사회 2017. 8. 21. 01:51


중국 동북지역에서 두 번째 만난 사람들은


안중근이나 윤동주처럼 100년 후까지 명성을 남긴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100여년 전 그 땅을 살았고 지금도 그 땅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였다.



'간도'라고도 불렸던 지역은 역사적/정치적으로도 특수한 지역이다.

지금의 엔벤 조선족 자치주 지역에 해당한다고 보기도 하지만 이 또한 명확하지 않다.


간도는 원래 조선의 땅인데, 일제가 맘대로 넘겨줬기에 다시 찾아야한다는 주장도 일각에 존재한다.

또한, 연길에 사는 조선족을 남북통일과 중국 교류의 교두보로 활용해야한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이미 연길 지역은 중국의 영토이며, 그들은 중국 국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북한과의 접경지대인 연길, 용정, 도문, 화룡, 훈춘에는 인구의 50%이상은 아직도 조선족이다.


1952년 옌벤 자치구(현재는 자치주) 설립된 이후로도

그들은 언어와 의복, 음식 등 자신들의 문화를 꾸준히 지켜왔기에 한민족이라는 표현이 어울리기도 한다.


과연 궁금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짧은 여행으로 그들의 삶을 알 수는 없었지만,

어설프게나마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살펴보고, 현재 그들의 삶에 대해서도 들어볼 수 있었다.


+


간도 이슈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은 전문가들이 설왕설래를 하고 있기에,

섣불리 딱부러지게 말하기 어렵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여진족과 만주족의 기반이 된 지역이며,

우리의 입장에서는 고구려와 발해의 기반이 된 지역이기에 쉽게 포기하기 어려운 지역이다.


역사적 자료마다 기록이 제각각이고 해석도 너무나 다양해서,

어떤 사람은 만주까지 간도로 보는 반면, 함경도를 간도라고 표기한 지도도 존재한다.


과연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본다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요즘이야 국경이라는 것이 명확하게 구분되며 지도에 영토를 명확하게 표기한다.


하지만, 수백년 전에는 국경이라는 개념도 애매모호했고, 정확한 지도를 그린다는 것도 불가능했다.


대충 산기슭이나 강줄기가 있다면 이를 중심으로 경계를 나누었고,

길 한번 잘못들었다가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는 일은 허다했을 것이다.


간도라는 명칭에도  알 수 있듯이 명확한 지역이나 도시를 명칭했다기보다는

청나라와 조선 사이의 경계가 되는 지역을 그냥 간도라고 불렀을 것으로 보여진다.


(간도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열심히 정리해주신 자료)

http://blog.naver.com/cms1530/10068932122


국경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가 중국 대륙을 지배하기 위해서 대규모 이주를 하면서 시작된다.


만주족이 비워 무주공산이 된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한족의 이주를 장려했더니,

너무 많은 한족이 몰려들어 만주족의 전통이 훼손을 당하자 버드나무 울타리를 쳐서 이주를 막게 된다.


그러자 이번에는 반대편에 있던 조선인들이 야금야금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병자호란(1636) 이후에는 전쟁으로 끌려갔던 수십만명의 조선인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게 된다.


중국에서는 이 때 이주한 사람이 약 50만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며,

조선족의 이주 역사를 여기서부터 설명하지만 사실상 현재의 조선족과는 연결고리가 약한 편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오가기 시작하면서부터 경계는 흐릿해지기 시작했고,

출신이 다른 이주민끼리 분쟁이 자주 발생하게 되면서 청나라와 조선은 경계를 설정하게 된다.


1712년(숙종 38년/강희 51년) 청나라 사신 목극등이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면서

애매모호했던 국경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나 이 비문은 후에 논란을 증폭시키는 출발점이 된다.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이 되는 분수령에 돌을 새겼는데

여기에서 2가지 오류가 영토 분쟁의 씨앗을 만들게 된다.


첫 번째는 과연 토문강이 무슨 강을 지칭하는가의 문제이며,

두 번째는 경계비가 세워진 위치는 두만강의 수원이 사실상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한말 고종은 토문강이 송화강 지류라는 주장을 할 수 있었고,

이미 수많은 조선인들이 두만강 북쪽지역에 대규모로 거주하고 있었기에 무리한 주장도 아니였다.


특히 압록강 접경지역으로 분류되는 서간도 지역보다

두만강 접경지역인 북간도 지역에 대한 논란이 더욱 큰 것에는 지리적인 특성도 작용했다.


압록강은 배를 타고 건너가야 하지만,

두만강은 수심이 낮아 걸어서도 충분히 강을 건널 수 있다.


(두만강 도문 접견지역에서 바라본 북한 지역 - 생각보다 너무나 가깝다)


이미 조선시대부터 수많은 사람들은 두만강을 건너 청나라 사람들과 교류를 해왔고,

1880년대 청나라에서 봉금령을 해지하면서 조선인들이 본격적으로 대규모 이주를 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의 조선족의 기원이라고 볼 수 있는 초창기 생계형 이주자들이다.


다수의 조선인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중국인들이 이주자들이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청나라와 조선의 분쟁은 다시 시작됐고, 고종은 본격적으로 간도의 소유권을 주장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분쟁은 어이없게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제가

남만주철도 부설권과 푸순 탄광 채굴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를 넘겨주는 협약(1905)을 체결하면서 종료된다.


광복이후 다시 한번 소련의 지지를 등에 업은 북한은 간도의 소유권을 다시 한 번 주장하였으나,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이 간도의 중국 소유를 인정(1962)하게 된다.


+


사실 영토보다 더 관심이 갔던 것은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다.



워낙 오랫동안 방치되어왔던 비옥한 땅이기에,

청나라의 봉금령과 조선의 월강죄에게 불구하고 조선인들은 간도지역에서 도둑농사를 해왔다.


1869년 한반도 북부에 대규모 기근이 발생하자 함경도 일대 주민들은 목숨을 걸고 간도로 향했고,

1885년 봉금령이 해제되고 월강죄가 사라지면서 부터는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된다.


1899년 함경도 회령 종성 등에 거주하던 문병규, 남도천, 김하규, 김약연은

자신들의 식솔 141명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간도로 넘어와 명동촌을 개척한 것도 이런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학전이라는 명목의 땅을 따로 내어놓고 '학전'에서 나오는 수입을 교육기금으로 활용했다.

이들은 유교적 전통에 기반해 마을을 만들고 학교를 세웠으며 자신들의 문화를 이어갔다.


그리고 1906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에는 독립운동가들이 이 지역에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자연스럽게 신학문과 기독교가 이 지역에 전파되었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양성된다.


청산리 대첩, 봉오동 전투가 모두 이 지역에서 일어났으며,

문익환, 김재준, 강원용 등 진보적 기독교인들이 모두 이 지역을 거쳐갔다.


1930년대까지 이 지역에서 의병 및 항일 독립 운동이 활발할 수 있었던 원동력도

중국 영토와 기독교의 비호, 그리고 신학문으로 교육받은 인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1930년대 초 만주사변 이후에는 일제가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서

조선인들을 반강제적으로 동원해 농지를 개간하고 중국 동북지역을 군량미 생산 기지화하게 된다.


당시 조선인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이래저래해서 대략 216만 명의 조선족이 만주와 간도 지역에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래서 광복직후 약 80만명이, 중국 국공내전 기간에 약 30만명이 국내로 다시 귀국하게 되는데,

이들은 주로 일제에 의해서 반강제적으로 이주한 남한 지역 출신이였다고 한다.


결국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직후엔 1950년에는 111만 명의 조선족이 중국에 남게되고,

이 중 절반 이상이 옌벤 조선족 자치주 지역에 거주하게 된다. 


한중수교(1992)년 무렵에만 해도

조선족의 인구는 192만명에 달했으며 그 중 97%가 동북지역에 거주했으나,


지금 동북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죽은 50만명 정도 밖에 되지 않으며,

한국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80만명, 대도시에 거주하는 조선족이 50만명,

 제 3국 거주자가 약 20만명에 달할 정도로 조선족 마을의 공동화 현상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특히 2000년대 이후에는 학생 수가 급감하면서 마을 단위 학교들이 폐교되고 있고,

민족교육도 점차 쇠퇴하면서 점차적으로 민족적인 정체성도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고 한다.


실질적으로 조선족들은 한민족이 아닌 중국의 조선족이 되어가고 있으며,

특히 젊은 세대일 수록 도시로 떠나고 있고 역으로 한족들은 더욱더 유입되고 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시대적 현상일 수도 있지만,

이들이 남북화해와 대중관계의 주역으로 활용해야한다고 말로만 주장하면서

이들에 대해서 어떠한 조처도 없이 방관해 대한민국의 태도를 생각하면 뭔가 아쉬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들 중에 상당수는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이며 민족의 아픔을 감당한 사람들인데,

대한민국에서는 외교적/산업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자원으로만 접근해온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봤을 때 윤동주 생가에 표기된

'중국조선족애국시인'이라는 명칭이 조선족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표현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떻게 윤동주를 중국인이라고 표기할 수 있지?' 하면서 분노하는 한국인들이 많이 있지만,

조선족은 이미 물리적으로 중국인으로 분류되고 있으며 심리적으로도 한국보다 중국이 더 친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현실인 것이다.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대중교포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엄연히 중국인이다.

한국어를 사용하고 한국식 문화를 유지하고 있지만 어느새 그들은 중국인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또한 이들은 대부분 남한보다는 북한과 더 친밀하게 지내고 있다.


물리적으로 북한과 가까운 것과 남한 출신들이 해방 후 상당 수 국내로 귀국한 것도 중요한 이유지만,

조선족을 대하는 남한사람들의 태도 역시 중요하게 작용하는 듯하다.


조선족이 북한을 방문하기 위한 비자는 48시간이면 나오지만,

남한을 방문하기 위한 비자는 보증금 3000만원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한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의 기업들 역시 많은 조선족들과 컨택을 하지만,

문화적 차이와 인식의 차이가 너무 커서 단순 통역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모든 측면에서 조선족이 중요한 것은 맞지만,

뭔가 제대로된 관계 설정이나 상호간의 이해는 전혀 없이 기술적으로만 접근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시간이 조금만 흐른다면 사실 상 조선족은

그냥 중국의 다른 소수민족에 비해서 우리와 문화가 상당히 비슷한 존재 이상은 아닐 것 같다.


북한과 남한이라는 정치적 대립 상황 속에서 조선족은

그 어느쪽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중국 정부의 지원으로 생존해나고 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우리가 인터넷으로 키배를 뜨고 있는 세상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 어디에도 간도는 없었고, 우리민족이라는 연대는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우리가 너무 현실을 모른 체 우리들만의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제는 거의 이민 4세대로 넘어가고 있는 조선족들과

과연 우리는 어떻게 결합하고 연대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


단순히 우리 민족이니까 잘해보자는 접근은

너무 나이브 한 것을 넘어서 파렴치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고 알려고 노력했는가?


그들이 사는 세상에 대해서 그동안 우리는

관심도 없었고 그들에 대해서 아는 것도 별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