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ianity

평신도들의 대화 (불교, 천주교, 개신교) - 새길교회 (2014)

열린 공동체 사회 2014. 3. 3. 06:15


3대 종단의 성직자 간의 만남도 보기 힘든데...

평신도들의 만남이라는 부분이 너무나 신선했다.


과연 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

이들의 이야기에 과연 누가 귀를 기울인다는 말인가?


근데, 어느새 나도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종교 = 성직자' 라는 공식은 어떻게 보면 오늘날 종교들의 문제점의 출발점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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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명의 내공은 장난이 아니였다.

난다긴다하는 성직자들조차 따라오기 힘들정도의 내공을 가진 분들이지만,

이들은 엄연히 성직자가 아니기에 이들의 목소리는 one of them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이들이 이야기한 부분들은 반드시 모든 종교인들이 기억해야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3대 종단의 문제인식이 유사한 것을 넘어서 너무나 똑같다는 사실이다.


조성택 교수의 문제제기는 너무나 신선했다.


종교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의 포교율이 얼마인지만 생각한다.

하지만,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절반은 아예 종교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왜 그런 현상이 발생했는지에 대한 고민은 전혀 하지 않고 있는 것같다.


또한, 조성택 교수가 지적한 불교계의 가장 큰 문제점들은 너무나 충격적이다.


그동안 불교계는 개신교와 천주교가 가진 많은 장점들을 배워왔다.

교육이나 봉사 등 사회에서 필요한 곳에서 섬기는 것이나, 다양한 시스템을 배웠다.

그런데 그런 과정에서 기독교가 가지는 나쁜 점도 상당부분 그대로 배꼈고,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라는 것이다.


원래 불교에는 제가자와 출교자의 구분만 있으며,

다같은 수행자이지만 어디에서 수행하느냐의 차이만 존재했다.

하지만, 스님들이 성직자라는 새로운 계급을 가지게 되면서 그들이 전부인 것처럼 변질되었다.

열린 진리관이 점차적으로 기독교의 배타주의를 그대로 닮아가는 형상도 나타나고 있다.


크리스챤으로써는 아주 뼈아픈 지적이다.

기독교가 가진 단점을 아주 정확하게 지적하면서도 동질화된 불교의 현실을 알 수 있었다.


반면에, 개신교의 각종 분란으로

상대적으로 고평가 되고 있는 천주교의 고백 역시 너무나 신선했다.


최근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넘어오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귀찮게 안한다.' 그리고 '교구 중심이라서 익명성이 매우 강하다.'

시국미사나 정치적 메세지를 전달하는 굉장히 적극적인 모습도 인상을 준 것 같다.


하지만, 천주교 역시 배타적인 태도, 불투명한 재정, 교회 중심주의라는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워낙 권위적인 데다가, 내부적으로 관리를 잘하고 있어서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제2 바티칸 공회 이후 천주교는 굉장히 많은 개혁을 해왔고,

프란체스코 교황의 비권위적, 가난한 사람의 편에 서는 모습은 굉장히 깊은 인상을 주고 있다.


하지만, 사실은 너무나 당연히 해야되는 모습이였고,

그동안 그렇지 못한 것들이 너무나 부끄러운 모습이다.


천주교에서 평신도의 존재감은 거의 없다고 봐야한다.

그동안 천주교의 이미지는 김수환 추기경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로마시대의 계급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평신도는 사명도 없고 매우 수동적인 존재일뿐이다.

평신도가 나서서 무엇을 하려고 하면, 오히려 평신도들이 너희가 뭔데 나서냐면서 방해를 하고 있다.


+


개신교도인 나에게 

3대종단의 문제제기가 너무나 똑같다는 사실은 참으로 신선하게 다가왔다.


분명 자신의 종교의 문제들에 이야기하고 있는데,

하나같이 다른 교회의 평신도들이 와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실천적 개선방안도 너무나 유사했다.

적극적인 포교보다는 내부적인 개선이 선행되야 한다는 것이다.

제도 안에 갇힌 성직자들보다 오히려 평신도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상대 종교에 대해서 좀 더 포괄적으로 배울 것은 서로 배우는 자세도 지적했다.


불교가 가진 관용의 마인드

천주교 가진 영성 수련의 방식

개신교가 가진 실천적이고 적극적인 자세


종교가 가지는 삶의 지혜를 서로 배우고,

종교간에 대화를 넘어서는 협력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3명의 평신도들의 이야기들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론이였지만, 현실을 생각하면 아주 혁명적인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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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진짜 개신교의 개혁에도 평신도가 답인가?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현재의 상황을 보면 그것도 답이 되기는 어렵다.


무엇인가 제대로 사역을 하고 싶다면,

당연히 신학교에 가서 목회자가 되야만 했다.


평신도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중요한 역할은 항상 목회자가 했고,

목회자가 아무리 능력이 없어도 중요한 역할은 평신도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목회자 중심의 교회가 된 문제가 고착화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측면으로 현상을 바라볼 필요도 있다.


역할에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에,

권한의 문제도 있지만 목회자에게 책임을 부여하는 측면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최근 신천지의 공격때문에

교회 내에서 목회자가 아닌 사람은 더욱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평신도 중에 누가 신천지인지 모르기에 평신도의 입지는 더욱더 좁아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신뢰가 무너진 현실을 고려한다면

평신도에 의한 개혁도 사실상 어려운 것이 현재 교회의 이슈이다.


사회에서 지탄받고, 내부에서는 신천지가 창궐하고...

어떻게 보면 오늘날 교회는 사면초가의 위기에 빠져있다고 할 수 있다.


+


그렇다면 진짜 답은 없는 것인가?


신천지 현상은 사실은 그동안 왜곡된 개신교 성장의 거울이다.

신천지를 비롯한 이단의 교리나 방식들은 왜곡된 개신교의 모든 부분들을 차용했다.


최고의 극단적인 부분들만 응집해서 광신도를 만드는 그들의 방식을 보면,

개신교가 잘못된 방식으로 사람들을 호도해왔던 뼈아픈 과거를 반성하게 만든다.


극단은 극단과 통하는 법이며,

생활 속의 종교가 아닌, 삶의 전부가 되어버린 종교

그 가장 극한의 왜곡된 모습들이 오늘날 이단이 보여주는 행태들이다.


오늘날 교회는 이단을 보면서 단순히 욕할 것이 아니라,

이단이 보여주고 있는 교회의 추악한 이면들을 깨달아야만 한다.


천주교가 제2 바티칸 공회를 통해서 살아난 것처럼

개신교 역시 기존의 왜곡들을 인정하고 털고 나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천주교처럼 중앙집권화되지 않았기에 굉장히 힘든 일이지만,

대대적으로 교리과 방향성을 정리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자멸할 수 밖에 없다.


더 깊고 구체적인 부분은 교리적인 이슈들이기에 

나같은 평신도가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목회자들이 스스로 깨고 나오지 않으면,

평신도들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교회는 점차 쇠락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평신도들이 나서서 목회자들에게 목소리를 점차적으로 내야만 한다.

목회자와 평신도가 모두 함께 깨어나오지 않으면 교회의 미래는 없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처럼 살기 원하는 나같은 평범한 평신도가

매일 교회에서 살다싶이하면서 삶의 피난처로 교회를 가는 것이 아닌,

생활 속에서 예수님을 편안하게 만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교회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