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ianity

왜 박근혜 정부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지 못하는 것인가?

열린 공동체 사회 2014. 5. 18. 12:21


성경에는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주었던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크리스챤이 아니라도

지나가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만한 유명한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이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래~ 어려운 이웃을 돕고 살아야지~' 라는 미담으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 이야기를

왜 전하게 됐는지, 그리고 이 이야기를 통해서 전하고자한 말씀이 뭔지를 정확히 볼 필요가 있다.


누가복음 10장 25절~37절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이 이야기는 예수님을 시험해보고자 한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였다.


예수님이 생존해서 활동할 당시

예수님을 주로 공격한 사람들은 당대 지식인들이였다.


그들이 전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하는 예수님을 질투하기도 했고,

자신들이 듣기 싫은 소리를 하고 다니는 예수님을 미워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질문을 한 이유는 어찌보면,

'그 입 다물라~ 그냥 좀 가만히 있으라'라는 감정의 표현이였을지도 모른다.


+


율법학자는 예수를 시험해보고자 질문을 던진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5절)


다분히 의도가 숨겨진 질문이다.

난해한 질문을 통해서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할 경우 망신을 주고 싶었고,

맘에 들지 않는 답변이 나올 경우에는 꼬투리를 잡아서 문제를 삼고자 했을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우문 현답으로 대응하신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6절)


공을 다시 율법학자에게 넘기신 것이다. 

율법학자는 자신의 지위가 있고 사람들이 보고 있기에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네가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7절)


율법학자는 이미 자신의 정답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과 다른 대답이 나오면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오히려 예수님의 역질문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정답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나 쿨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28절)


율법학자는 열받았을 것이다.

예수님을 시험해보고 망신주고 싶었는데 어이없이 끝나버렸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알면서 '왜 그렇게 살지 않느냐'는 이야기로 들렸을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있었고, 이대로 물러서면 자신의 체면이 말이 아니였다.


이에 나도 아는데 그렇게 살기 어렵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율법학자는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29절)


이 질문에 답변을 해주는 것이 바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일화인 것이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서 길가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는데

제사장이 이를 보고 피하고, 레위인도 이를 보고 피하고, 사마리아인만 그들 보고 도와준다.


당시의 이스라엘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제사장은 사회의 최고 지도자 계급을 의미하며,

레위인은 사회의 지식인 층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은 이민족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으로 이야기하면 동남아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 정도로 보면 될 듯하다.


그 사마리아인은 그에게 응급처치를 해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서 주막으로 데려가 돌봐주고 주막 주인에게 추가로 도와주도록 경비를 지급한다.


예수님은 다시 질문을 던진다.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6절)


이에 율법학자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답을 하고,

다시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이야기를 하면 대화는 마무리를 짖게 된다.


+


이 이야기는

2000년 전 이스라엘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이지만,

2014년 대한민국 사회에 많은 메세지를 전달해주고 있다.


과연 우리는 율법학자처럼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데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닌가?


세월호 사건이 터지자,

우리는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묻는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과연 우리가 그것을 몰라서 질문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데, 그것을 실천할 용기가 없는 것인가?


율법학자의 두 번째 질문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그는 자신의 삶을 합리화하고 싶어서,

이웃이 도대체 누구냐고 예수님한테 질문을 한다.


그 안에는 나도 이웃을 사랑하고 싶은데, 

'도대체 이웃이 누구인지도 모르겠어서 어쩔 수 없다'는 메세지가 숨겨져 있다.


그는 자신을 합리화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바른 말을 하는 예수님을 어떻게든 깎아 내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입으로 내 뱉기는 했지만,

'어떻게 하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사랑해줘야만 하는 이웃의 범위를 굉장히 좁히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만의 세상에서 살고 싶어하는 전형적인 특권의식에 빠진 사람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알고 있으면서도 몸소 실천하지 않는, 

자신의 태도를 어떻게든 합리화하고 싶었던 것이다.


세월호 사건을 통해서 터져나오는 목소리들에 대해서

자꾸 피하려고만 하고 책임 지지않으려고 하는 것은 이런 율법학자의 자세와 같은 것은 아닌가?


+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전달해주고 있다.


우선은 이웃의 범위를 축소하려는 율법학자와는 다르게,

예수님은 이웃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주신다.


사람들이 무시하는 이방인이지만 

오히려 자비를 베풀줄 알았던 사마리아인이 바로 이웃이라는 것이다.


물리적인 공간이나, 혈연적인 관계만 생각하는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에서 이웃을 보면 그 누구도 이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이웃이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였으며,

누군가를 이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다.


우리에게 이웃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사랑할 마음이 없기에 사랑할 대상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해서 먼저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볿 수 있게 해준다.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발견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에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율법학자처럼 
어떻게하면 사랑하지 않아도 욕먹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될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이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예수님은 진정한 이웃의 자세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준다.


당시 사마리아인은 지금의 외국인 노동자들처럼 부유한 삶을 살 수 있는 환경이되지 못했다.

가진 것이 많아서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으로 최선을 다해서 도와준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주막 주인을 통해서 추가적으로 보살펴주도록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


이는 싸구려 동정이나 생색내기가 아니다.

그는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는 것이다.


그는 주막 주인에게 다시 주막으로 돌아올 것을 약속한다.

단지 잠시 그를 도와준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이웃의 자세인 것이다.


+


과연 우리는 세월호의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게 이웃이 되고 있는 것인가?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그냥 못 본 척하고 내 일 아니라고 넘어가는 것은 아닌가?


내가 그들의 이웃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내가 그들을 사랑할 마음을 갖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닌가?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웃어주는 것이 바로 이웃의 기본 자세이다.


그들에게 사랑할 마음을 갖으면 우리는 그들의 이웃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유가족들의 목소리에

얼마나 귀를 기울여주고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는가?


사회정의, 관련자 처벌, 시스템 개선, 피해자 보상

모두 필요하고 중요한 화두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이 먼저가 되야한다.


세월호 사건이 나의 분풀이 대상으로 전락해서는 안된다.

아무리 열받고 화가나는 사건이여도, 유가족의 목소리를 우선 들어줘야 한다.


그들이 왜 진도에서 20km행진을 벌여서 청와대까지 걸어서 가고자 했고,

그들이 왜 영정사진을 들고 KBS와 청와대를 방문했었는지 들어줘야 한다.


이들이 원하는 정확한 진상규명을 통해서,

세월호 사건을 통해서 과연 우리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정확히 찾아낼 수 있도록 함께 목소리를 내줘야 한다.


현재 유가족이 원하는 것은

싸구려 동정이나 지나가는 위로, 물질적 보상이 아니다.


그들은 왜 자신의 가족들이 죽을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명확히 밝히고 이런 슬픔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어보겠다는 것이다.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심정일텐데 

무서울 정도로 너무나 합리적이고 침착한 주장이다.


아이들을 가슴에 영원히 품은 체,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침착하게 현실을 대면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들에게 오히려 너무 고마울 뿐이다.


[전문]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에 관한 가족 대책위 성명 전문


+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주지 못한 것처럼

세월호에 탑승한 희생자들을 구조하는 것에는 실패했다.


강도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쳐버린 것은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의 개인적인 윤리에 대한 문제였지만,


사고 신고를 받고도 제대로된 대처를 하지 못한 것은

이 일화에 등장하지 조차 않는 정부 지도자들의 무능력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제대로 자신의 소명을 다하지 못했기에,

진정성을 가지고 진상을 명확하게 규명해야하며,

이를 기반으로 관련자 처벌, 시스템 개선, 피해자 보상을 해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어찌보면, 정부의 올바른 태도를

착한 사마리인의 이야기에서 찾는 것은 너무 큰 기대일지도 모른다.


지금 논의되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이야기이고,

당연히 정부로써는 해야하는 의무사항이 안지켜지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에게 이웃이 되어달라는 것은

그런 기본적인 것은 당연히 지켜야하고, 진정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면 그것을 넘어선 자세를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그 피해자의 가족들에게 반드시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 사건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충격을 받은 모든 국민의 이웃이 되야한다.


이 사건을 통해서 피해를 입고 상처를 받은 것은

유가족들뿐만 아니라,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모두 지켜 본 국민들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그들에게 이웃이 되어주지 못한다면,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의 이웃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잃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이웃이 되고 싶다면,

착한 사마리아인이 했던 것처럼 고통을 당한 사람들을 최선을 다해서 지속적으로 돌봐줘야 할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이제 그만,

처음 질문을 던졌던 율법학자와 같은 태도를 버려야만 한다.


먼저 빠져나갈 궁리만 계속해서 할 것이 아니라, 

진실을 밝히고 정확한 내용들을 국민들에게 알려줘야 한다.


그리고, 무엇이 잘못됐는지 명확히 알았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아는 것을 바로 실천에 옮겨야 한다.


그것만이 정부가 살아남는 길이다.

유가족이 요구한 명확한 진상규명마져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참아주던 국민들마져 그들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기본적이고 당연한 것을 한 이후에는

사마리인이 했던 것처럼 피해자들을 끝까지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줘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피해자들의 이웃이 되어주지 못한다면,

이 일로 충격을 받고 정부에게 실망한 대한민국 국민들의 이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진정한 이웃이 되어주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대한민국 국민들은 대한민국 정부가 우리의 이웃이 되어줄 수 있다고 다시 한 번 정부를 믿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