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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12년 (12years a Slave) - Steve Mcqueen

열린 공동체 사회 2014. 3. 11. 15:46


참... 담담한 영화다.

너무나 과장이 없기에 오히려, 

134분이라는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더 몰입할 수 밖에 없었다.


원작소설에서는 더 극적인 여러 차례의 탈출 시도들이 나온다는데,

스티브 맥퀸 감독은 솔로몬의 탈출시도를 굉장히 절제해서 표현하고 있다.

(심지어 첫 번째 탈출 시도는 탈출 시도라고 보기도 애매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렇기 때문에 더 현실적이고,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


원작 소설이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시작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면, 

새로운 영화는 약 170여년이 지난 현재에 과연 어떤 메세지를 던지고 있는가...


+



영화의 초반 몇 분동안 전개되는 솔로몬의 원래의 삶은 좀 당황스러웠다.

사전 지식이 없었기에, 북부에서 흑인들이 자유인으로 살았다는 사실 조차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렇게까지 자유롭게 살고 있었다니...

남북전쟁을 단순히 정치적 싸움으로만 보았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였다.


짧고 임펙트가 강한 이전의 자유로운 삶에 대한 회상은

딱 한 번, 농장에 팔려가기 직전에만 표현되며 다시는 나오지 않는다.


감독은 억지로 회상을 통해서 관객들의 감정을 쥐어짜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를 점차 잊어가는 솔로몬이 아닌 플랫의 의식을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가족을 그리워할 정신도 없이 납치되어 남부에 도착한 솔로몬,

처음으로 여유를 가지고 가족의 모습을 떠올려보지만, 현실에서는 그의 이름이 플랫으로 바뀌어있었다.


이제 그는 '플랫'이라고 불리는 흑인 노예일 뿐이다.


+


납치된 이 후,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솔로몬에게

현실은 자꾸 정체성을 버려야만 살아남는다고 이야기한다.


노예상이나 백인들의 입에서 뿐만 아니라,

같이 납치된 흑인들과 같이 일하는 노예들의 입을 통해서 그것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게 맞다는 것을 그의 눈 앞에 펼쳐지는 현실은 계속해서 보여준다.


하지만, 현실에는 희망이 존재했다.

그리고, 조금만 노력하면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아서 곧 기회가 생길 것만 같았다.


그에게 다시 바이올린이 주어졌고, 주인은 그를 인격적으로 대해주었다.

바이올린은 솔로몬에게는 이전의 삶과 이어주는 도구이자,

그리고 자신의 바이올린에 아이들의 이름을 세겨둠으로써 과거를 잊는 통로였다.

(아마도 바이올린을 켤 때마다 자신의 가족들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첫 번째 주인 포드는 첫 만남에서부터 인간적인 면모를 들어낸다.

하지만, 노예상과의 거래에서부터는 그는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는 능력 부족이 나타난다.


그는, 마음은 흑인 노예들을 도와주고 싶었지만,

돈이 없기에 흑인 가족들이 생이별을 하게 만드는 당사자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플랫이 노예가 아닌 것도 알고 그의 능력도 인정해주지만,

결국 현실에서는 그를 악명 높은 백인 대지주에게 팔아버리게 된다.


포드의 농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역시

감독관과 싸운 플랫이 목을 매단 체 장기간 방치되는 부분이다.


감독은 굉장히 긴 롱테이크로 이 부분을 처리했는데...

플랫은 숨이 넘어갈 듯이 목이 매달려 있지만 다른 노예들은 아무일 없듯이 행동한다.


감독은 플랫의 얼굴을 강하게 클로즈업 했지만,

그 뒤로는 아무일 없다는 듯 뛰어노는 흑인 아이들의 모습이 연출된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너무나 당연한 현실...

어찌보면 다시 솔로몬이 될 수 있다는 환상이 완벽히 무너지는 장면이다.


처음 납치된 후에 노예가 된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는

채찍으로 맞는 장면도 상당히 긴 롱테이크로 찍었는데 유사한 느낌을 전달하려는 감독의 의도가 확연히 드러난다.


+



그리고 난 후 새롭게 만난 두 번째 주인은 면화농장의 엡스

미국 흑인 노예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이 등장하는 장소가 바로 면화 농장이다.


미국 남부 지역의 주요 수입원이였고,

가장 노동 집약적이기에 노예가 반드시 필요했던 곳이기에,

노동을 하면서 울부짓었던 흑인 영가의 출발점으로도 유명한 장소이다.


이 곳에서의 현실은 더욱더 최악으로 내려간다.

오히려 이곳에서는 플랫보다는 '팻시'라는 어린 여자 노예가 등장한다.


강도 높은 노동을 견뎌낼뿐만 아니라, 

원하지 않아도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춰야하고

심지어는 성적 노리개가 되는 것도 괴로울텐데,

백인 여주인의 질투도 온 몸으로 받아내야만 한다.


심지어, 백인 주인의 첩으로 자리를 잡은 여성은

정체성을 버리고 오히려 새로운 삶을 즐기면 자신처럼 편히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해준다.


적보다 더 무서운 것은 적과 동화된 동지라고...

백인들의 강압적 언어보다 현실을 더 곤고히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런 메세지들일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도 플랫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백인 주인이 이전 주인의 이름을 묻자,

플랫은 순간, Freeman(자유인)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여주인의 심부름을 가는 길에 일탈을 꿈꾸지만,

도망가다 잡혀서 사형에 처하는 흑인들의 모습을 직면하고 다시 돌아오게 된다.

자유에 대한 그의 의지가 꺽기는 상황이다.


사탕 수수 농장에서의 조금이나마 경험한 자유는

탈출에 대한 절박함을 느끼게 만들지만, 현실은 다시 그를 외면하고 만다.


결국 그는 바이올린을 부셔버린다.

모든 것을 포기했고 이제는 그냥 노예 플랫의 삶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 정점은 바로 '팻시'를 채찍으로 때리는 장면이다.

그에게 남은 것은 절망뿐이였고, 희망의 그림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



캐나다인 베스의 등장은 새로운 기회였다.

하지만, 이미 노예화된 플랫은 선뜻 나설 염두를 내지 못한다.

이미 절망을 경험한 그에게 기회가 와도 더 이상 이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기회가 왔고,

결국 베스는 믿기지 않게 플랫에게 최고의 선물이 되어준다.

(브래드 피트는 최고의 착한 역할을 자신이 가져간다. 제작자의 힘이 이렇게 나타나는가? ^^)


플랫은 다시 솔로몬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그가 떠나는 순간 그의 눈 앞에 있던 것은 가장 고통을 당하고 있는 '팻시'였다.


자유인으로 살았던 경험도 있고,

글도 읽을 줄 알고, 바이올린도 켤줄 아는 솔로몬과 다르게,


시키는대로 일하고, 당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팻시는

결국 죽는 날까지 노예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자막으로 솔로몬이 한 모든 재판에서

솔로몬이 패소하고 노예상과 노예 주인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준다.


'제길~ 뭐 이딴 결말이 다 있어~~'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이게 현실이고 이게 아직도 행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결국 플랫은 불행한 현재를 벗어나게 된,

과거를 되찾은 몇 안되는 특별한 노예의 모습인 것이다.


+


영화에서 또 하나 빼먹을 수 없는 부분은,

음악과 종교라는 부분이다.


한스 짐머라는 거장이 OST를 담당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어두운 표정으로 밝은 댄스곡을 연주하는 대조된 모습과

동료의 죽음을 떠나보내면서 다함께 부르는 '요단강 건너'라는 찬양이다.


노동을 할 때마다 그들은 광야의 외치는 소리처럼 노래했지만,

정작 제대로된 노래를 부르는 순간은 바로 인상적인 장례식 장면이였다.



노래부르는 동안 어떠한 회상 장면도 등장하지 않고,

다시 한 번 롱테이크로 플랫의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잡아준다.


처음에는 침묵을 지켜던 플랫도

동료들과 동화되서 노래를 부르기는 하지만,

그들이 부르는 '요단강 건너의 모습'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흑인 음악에서 말하는 Soul이 무엇인지~~

너무나 확실히 마음에 와닿는 그런 장면이였다.


이 부분에서 종교라는 부분이 다시 만나게 되는데,

백인 주인들은 흑인 노예들을 데리고 함께 예배를 드린다.


포드도 그렇고, 엡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특히나 엡스는 하나님 말씀을 진짜 자기 입맛대로 해석해서 설명한다.

그들에게 종교는 또 하나의 폭력이며 자기 정당화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


한 장면 한 장면이 너무 인상적이여서,

의도하지 않게 주요 줄거리를 모두 이야기해버렸다.


그만큼 이 영화는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장면 하나 하나가 과도하지도 않으면서도 굉장한 몰입을 이끌어낸다.


괜히 오스카와 아카데미, 골든 글러버를 휩쓸고 다닌 영화가 아닌 것이다.

그만큼 전달하는 메시지도 명확하면서도 너무나 많다.


사람이 어떻게 노예화될 수 있는지,

그리고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노예화할 수 있는지,

악에 동조한 사람과 절대 악, 그리고 이를 돕는 사람의 다양한 모습들


흑인 감독 최초의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은

이러한 수많은 메세지들을 너무나 담담하게 표현했기에,

수많은 견제에도 불구하고 성취해낼 수 있었던 결과인 것이다.



언론들은 흑인감독이 최초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것에 주목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한다.

이러한 모습이 170여년이 지난 현재,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어 왔고, 아직도 자행되고 있다.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에서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