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ianity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 - 양희송 (2014)

열린 공동체 사회 2015. 1. 21. 10:11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청어람 양희송 대표는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이라는 책에서, 

나와 같은 가나안 성도의 규모가 어림잡아 100만명 정도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내 주변에도 신앙은 유지하지만,

교회는 나가기 싫다는 일명 '가나안 성도'(거꾸로 읽으면 안나가)가 꽤 많다.


그들은 흔히 이야기하는 sunday christian도 아니다.

대형교회에서 대학부를 함께하면서 나에게 많은 영감을 준 믿음의 선배들였다.


어설픈 교역자보다도 훨씬 더 많이 공부했고, 열정도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교회들의 행태를 보면서 결국은 교회를 떠났다.


나름 자신의 방식대로 신앙생활은 이어가고 있고,

다시 교회라는 공간에 모여서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고 싶어하기도 하지만,

기존에 있는 기성교회에 모일 의지는 별로 없어보인다.


단체로 특정 교회에 모이는 방법도 있기는 하지만,

마땅히 그럴만한 교회를 찾기도 어렵고 우루루 몰려가면 그것도 기존 신도들이 싫어할 것이다.


이미 대한민국 교회에서는 특정 교회가 입소문이 나면,

청년들이 우루루 볼려가는 현상이 몇 년째 이어지고 있다.


특히 상징적이였던 많은 대형교회들에 문제가 생기면서,

삼일교회나 사랑의교회 청년들이 다른 교회로 몰려가는 현상이 나타났다.


하지만, 이들이 개척교회로 빠져가가기는 쉽지 않다.

대형교회가 가지는 인프라의 장점에 너무나 익숙하기에 인근 다른 대형교회나

어느 정도 기반을 갖춘 새롭게 떠오르는 교회로 몰려가는 현상이 몇 년째 계속되고 있다.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현상이지만,

대놓고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는 껄끄러워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희송 대표의 책은

나와 같은 가나안 모드에 들어간 성도들에게 큰 자극을 줄 수 밖에 없다.


양희송 대표는 나름 열심히 가나안 성도를 이해하려고 했고, 

이들을 통해서 기존 교회들이 자성을 하고 새롭게 거듭나는 계기가 마련될 바랬다. 


사실 이 책의 분석의 깊이는 그다지 높지는 않으며, 

교리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굉장히 깊이있게 다루지는 않고있다. 

어찌보면 화두를 던지는 수준에서 최대한 가나안 성도를 변호해주고 있다. 


그 덕에 나같은 아직 교회에 몸은 담고 있는 

심정적 가나안 성도들은 심적인 위안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며, 

이미 교회를 떠난 가나안 성도들은 스스로의 선택에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는 가나안 성도를 길 위로 나온 것으로 표현했다. 

교회를 공간적인 개념으로 생각하는 경향에 대한 경종을 날리는 의미도 있었다. 

이는 어찌보면 공간에 집착하는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과연 여기서 끝인가?

난 개인적으로 양희송 대표가 일부러 화두 정도만 던진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다양한 각도에서 가나안 성도 현상을 분석해보려고 노력했고,

이를 교리적인 해석을 통해서 이들의 입장을 대변해주고 시사점을 제시하였다. 


어찌보면 일단 쨉을 날린 듯한 느낌인데, 

벌써부터 보수적인 성도들 사이에서는 부정적인 반응이 나오고 있다. 

아마 이러한 반응을 예상하고 이 정도 수준에서 일단 수위조절을 한 느낌이 강하다. 


개인적으로는 양희송 대표의 언급 정도가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에서는 가장 적당한 수위가 아닌가 싶다. 

더 이상 논란을 확산하기에는 아직은 이 사회가 받아들이기에 부담스러울 것이다. 


그러면서도 아쉬운 것은 가나안 성도 현상의 해결책을

오히려 가나안 성도 스스로에게 공을 넘기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기존 교회들의 반성과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빼놓지는 않았다. 


하지만, 논리의 방점은 가나안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대안적인 모임들을 만들어 새로운 형태의 에클레시아를 만들어나가길 요구한다.


못할 이유야 없지만,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모임부터 만들고 보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특히나, 교회 내의 각종 논란과 교파간의 갈등 등으로 교회가 분열되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움직임은 자칫 더 큰 혼란만 야기할 수 있다.


무작정 모임만 만들어봤다가 실패하는 경험은

무작정 창업해 실패하는 경험만큼이나 큰 상처가 될 수도 있다.


과연 ‘가나안 성도’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까?


양희송 대표의 표현처럼 ‘가나안 성도’가 당당하려면 

오히려 교회 안의 신앙인들보다도 더 깨어서 하나님의 음성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끝임없이 하나님과 일대일로써 교감을 이루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그냥 교회에 남아서 기본적으로 시키는 것이라도 잘 지킬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일 뿐이니까. 


이미 가나안의 길에 올라선 나의 이 여정이 과연 어떻게 될지, 

과연 기존 성도들의 인식에 경종을 울리며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지, 

아니면 찻잔 속의 태풍처럼 일시적인 신앙적 권태기에 불과할지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영역이 아닌가 싶다.